내가 읽은 책,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지난 2017년 5월 20일 토요일의 일이다.
우리 중학교 동기동창 친구들이 인터넷사이트에서 어울리는 우리들 Daum카페 ‘문중 13회’에 남성원 친구가 글 한 편을 게시했다.
‘진화의 세계’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을 연작으로 쓰는 글 중의 한 편이었는데, 이날은 ‘곤충계의 벌새’로 불린다는 박각시나방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화에 대한 선구자인 찰스 다윈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은 그 대목이다.
작은 우연이 인류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수립하게 된 것도 전혀 우연의 산물이었다. 다윈은 비글호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의 권고를 받아들여 5년간의 세계일주 항해에 동행했다. 피츠로이는 다만 젊은 지식인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윈을 비롯한 각계 전문가들을 초대했을 뿐이었다. 1831년 12월 27일 다윈이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그는 창조론을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중간에 계획이 변경되어 배가 갈라파고스제도에 기착하지만 않았더라도 다윈은 평생 창조론을 신봉하는 평범한 학자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다윈을 갈라파고스제도의 여러 섬으로 끌고 다녔고, 그는 같은 종의 생명체라도 환경에 따라 섬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진화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윈이 비글호를 타는 우연과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상굿도 창조론에 속아 무지의 세계를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글과 매우 닮은 대목이 실린 책 한 권을 어젯밤에 읽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고 한 것이다.
내가 어젯밤에 읽은 책은 출판사 ‘21세기 북스’에서 펴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205쪽짜리 비교적 얇은 책이었다.
이 책 50쪽에 그 대목이 있었다.
곧 이랬다.
진화론은 많은 에피소드를 거치며 탄생했다. 다윈의 아버지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신학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윈은 1831년 남미 지형 탐사에 나서는 비글호에 올랐고, 이 여행을 통해 진화론의 증거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런데 다윈이 이 운명적인 항해에 동참하게 된 이유가 재밌다. 생물학자로 정중히 초빙된 것이 아니고, 비글호 선장의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제안 때문이었다. 이 ‘모양 빠지는’ 제안을 다윈이 거절했다면, 진화론의 창시자는 그의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알프레드 윌리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서 교수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읽었겠다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윈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내 머리에 담았고, 일찌감치 그 글을 게시해준 남성원 친구에 대한 고마움을 내 가슴에 담았다.
내가 ‘행복의 기원’이라는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제 저녁을 함께 한 고등학교 후배가 그 책을 선물해줬기 때문이다.
공기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한 조직의 리더인 그 친구는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고 또 책 선물하기도 좋아해서, 지난해 이맘때에도 나와 어울려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내게 책 두 권을 선물해줬었다.
알랭 드 보통이 쓴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과 홍자성이 쓴 ‘성경에 비추어 본 채근담에 담긴 삶의 지혜’라는 책이었는데, 담겨 있는 내용들이 너무나 알찬 것들로, 나 혼자만 보고 책장에 꽂아놓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것 같아서. 주위 두루 읽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다 읽은 후 내가 9년째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 독서클럽 ‘Book Tour’ 회원에게 선물해줬었다.
어제 저녁에 선물 받은 이 책도 그랬다.
받는 순간에, ‘행복의 기원’이라는 그 제목부터 내 눈에 확 띄어 들어왔다.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 실체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겠다싶었다.
그리고 곧 이런 마음이 일었다.
‘나는 늘 행복을 말하지. 근데 이 친구도 행복을 말하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종인가 봐.’
그랬는데, 이 책 속에 바로 ‘종은 기원’이라는 책을 쓴 찰스 다윈의 이야기가 그렇게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책을 선물 받은 그 밤으로 곧장 책을 펴들었고, 그 밤이 지나 새벽에도 펴들었고, 그리고 이른 아침에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으로 출근해서 또 펴들어 오전 9시가 지나는 시각에 책의 끝장을 넘겨 덮었다.
맨 처음 곧장 책을 펴들게 된 것은, 책 표지에 덧붙인 글귀 때문이었다.
스스로 묻고 답을 하는 내용의 글귀였는데, 곧 이랬다.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그 답이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아서 책장을 넘겨가게 된 것이었다.
목차가 이랬다.
서문 / chapter 1. 행복은 생각인가 / chapter 2. 인간은 100% 동물이다 / chapter 3.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 chapter 4.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 chapter 5. 결국은 사람이다 / chapter 6.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 chapter 7. ‘사람쟁이’ 성격 / chapter 8. 한국인의 행복 / chapter 9.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 참고문헌
웬만한 책들은 그 목차만으로도 그 책에 담겨 있는 내용들과 저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러지를 않았다.
알 듯 모를 듯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책장을 넘겨갈 수밖에 없었다.
서문의 초입에서 저자의 행복론에 대한 방향이 짚이고 있었다.
다음은 그 대목이다.
최근 행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많은 책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행복에 대한 희망을 가슴으로 호소하는 책들은 많지만, 냉정한 분석에 바탕을 둔 ‘차가운’책은 많지 않다. 흥미롭지만 사실이 아닌 일도 널리 보도된다. 일례로 방글라데시가 매우 행복한 국가라는 언론 보도는 학계의 결론과 다르다. 이 책은 흥미나 과장된 희망보다 행복의 적나라한, 사실적인 측면에 더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쓰게 되었다.
행복을 따뜻한 가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 분석에 의해 냉정하게 접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공감되는 선언이었다.
그 어떤 통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나도 방글라데시 그 나라를 행복한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나라에 가서 살 생각이 없다.
내 솔직한 고백으로, 행복이란 것이 그저 마음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한편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감상적인 행복에서 벗어나 실전적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행복의 실체에 대해 ‘chapter 3.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에서 대체적인 결론을 내고 있었다.
58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행복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단언했다. 행복을 뭔가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모든 인생사가 향하는 최종 종착지로 ᅟᅩᆸ았다. 이 철학적 관점이 빚어낸 행복의 모습이 2천 년간 큰 흔들림 없이 유지돼왔고, 이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행복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그랬기에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걸어놓고 내 삶의 길을 걸어왔다.
‘행복은 마음으로 짓는다고 합니다. 작은 마음으로 짓는 작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저자는 바로 그런 고전적 행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다음은 같은 58쪽에서 밝힌 그 대목이다.
그러나 이 오랜 관점과 진화론은 정면 대립된다. 앞서 보았듯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다. 밀러에 의하면, 신체적 특성뿐 아니라 고차원의 정신적인 특성도 이 ‘생존 도구’의 역할을 한다.
곧 행복론도 진화를 위한 생존 도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반기였다.
그리고 59쪽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엇갈린다. 약간 당혹감을 보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선생, 반면 다윈 선생은 슬쩍 미소를 머금는 것 같다. “훗, 이제야 뭔가 감을 잡는군.”
나도 이즈음에서 대충 감을 잡았다.
이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Daum사이트에서 관련 자료를 챙겨봤다.
미디어 서평 4건이 있어, 그 중에 잘 정리됐다싶은 한 편을 뽑아봤다.
다음의 책에서 찾아낸 이 책에 대한 기사다.
2014년 7월 3일자 파이낸셜뉴스에 실린 것으로, 최진숙 기자가 쓴 ‘행복은 정말 마음억기에 달렸을까’라는 제목의 기사 그 전문이다.
유사 이래 행복이라는 말만큼 사람들이 사랑해온 단어가 있을까마는, 요즘처럼 행복이란 단어가 각광받는 시대도 드물지 않았나 싶다. 온갖 광고 문구부터 무수한 언론매체, 실시간 SNS에 이르기까지, 행복이란 말을 한 번이라도 듣지 않고 하루 24시간을 넘기는 게 더 어려운 날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복을 과용 수준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지만, 정작 행복 자체에 대한 정의가 심도 있게 다루어지거나 고찰이 이루어진 적은 드물다. 그렇기에 행복에 대한 정의가 극과 극인 두 책의 출간이 흥미롭다. '느리게, 더 느리게'(다연 펴냄)와 '행복의 기원'(21세기북스)이다.
'느리게, 더 느리게'에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 곁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며 자신의 본성과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문제점은 모두가 행복을 꿈꾸지만 정작 행복을 찾지 않는 데에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인생을 허비한다. 절대 지나간 실수를 돌이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책과 후회로 시간을 보낸다.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는 절대 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하한다. 행복강박증 수준으로 현대인 모두가 행복을 목표하지만, 정작 행복을 위해 외부 환경을 바꿀 노력만 하지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느리게, 더 느리게'의 저자가 말하는 행복의 비결은 대단히 획기적이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행복을 외부의 환경에서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긍정의 마인드로 감사와 여유를 찾는 것이다. 너무나도 우리가 잘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우리 대부분이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던 방법들이기에 '느리게, 더 느리게'의 행복론은 더욱 절실하고 따끔하게 마음속 깊이 스며들게 한다.
반면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은 '느리게, 더 느리게'의 행복론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행복은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을까? 생각을 바꾸면 인생이 과연 행복해질까? '행복의 기원' 저자는 행복에 대하여 어떠한 로맨틱한 신비주의도, 어떠한 관념적인 철학도 남겨놓지 않고 모두 벗겨낸다. 그 끝에 남은 답은 몹시도 간결하고 건조하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도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
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 이성을 만나 데이트를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야만 먹기 위한 생산 활동을 하고, 유전자를 남기며 생존을 영위할 수 있다. 만일 어떤 남자가 나무의 나이테를 셀 때 행복을 느낀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뜨면 밥도 안 먹고 나가서 나무테만 세고 있을 것이고, 성인기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즉 현대인이 이성과 데이트를 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로맨틱한 애정 이면에 숨겨져 있는 종족번식, 즉 생존을 위한 필수 기제인 셈이다.
또 행복은 뇌에서 발생하는 생물학적 현상으로서, 행복을 느끼는 개인차의 약 50%는 유전적 영향이라는 연구결과에 대해 논한다. 예를 들어 전혀 다른 환경에 떨어져 전혀 다르게 자랐다 하더라도 쌍둥이의 행복 수치는 매우 흡사하다. 결국 행복을 느낄 사람은 타고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행한 사람에게 좀 더 긍정적으로 행복을 느껴봐라"라는 말은 당뇨병 유전력이 있는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 요즘 행복이란 단어는 사람의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칭하는 것을 넘어, 사람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할 목표이자 절대가치가 됐다. 이렇게 행복을 추구하고 권하는 사회 속에서 더더욱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문한다. "나는 지금 행복한 걸까?" "난 행복하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자신과 행복을 묶어 '나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행복' 그 자체의 정의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달라이 라마식의 행복이 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 탐색이야말로 불행의 중요 원인일 뿐이라는 에릭 호퍼의 말이 와 닿을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행복을 찾기 이전에, 자신에게 있어 행복이 어떠한 의미인지 정의를 찾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느리게, 더 느리게'와 '행복의 기원'은 행복에 대한 깊은 사유로 떠나는 훌륭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 봤다.
다음은 그 중 핵심 몇 대목이다.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먼 옛날 어떤 남자가 고기나 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무의 나이테를 셀 때만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치자. 눈만 뜨면 밥도 안 먹고 나가서 나무를 자른다. 그는 성인기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살아남는다 해도 ‘나이테 동호회’에서 어느 정신 빠진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유전자를 남길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자들의 후손이 아니다. 호모사피엔스 중 일부만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짝짓기에 힘쓴 자들이다. 무엇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자아성취? 아니다. 고기를 씹을 때, 이성과 살이 닿을 때, 한마디로 느낌이 완전 ‘굿’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이 된 자들은 이 강렬한 기분을 느끼고 또 느끼기 위해 일평생 사냥과 이성 찾기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게 된다. -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중에서(68~69쪽)
미국 다트머트 대학의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뇌과학자로 꼽힌다. 최근 그는 자신의 책에서 큰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 그는 인간이 ‘뼛속까지 사회적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남을 설득하고, 속이고, 속마음을 이해하고…. 뇌의 최우선적 과제는 사람 간의 이런 복잡 미묘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옥스포드 대학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 교수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오랜 진화 과정 중 어떤 큰 변화가 호모사피엔스의 뇌 발달에 기여했을까? 진화 과정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과 유골의 크기 변화를 비교해보면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는 함께 생활하던 집단의 크기가 팽창할 때와 맞물려 있다. 약 10여 명의 소규모 집단에서 생활하던 인간이 정글을 나와 초원 생활을 하며 집단의 크기는 약 150명 정도로 커졌다. 낯선 이들과의 교류가 증가했고, 이들이 마음속에 숨긴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게 됐다. 이처럼 인간의 뇌를 성장시킨 기폭제는 타인의 존재였다는 것이 최근 널리 각광받는 던바 교수의 ‘사회적 뇌 가설’의 핵심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스럽게 만드는 뇌. 한마디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 뇌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 ‘결국은 사람이다’ 중에서(85~86쪽)
나는 대학에서 행복에 대한 강의를 15년째 하고 있다. 매학기 학생들에게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줄 사건을 적어보라 한다. 독보적인 1위는 복권 당첨이다. 대학생뿐 아니라 많은 일반인도 복권 당첨과 행복을 동일시하지만, 실제로 복권에 당첨된 경우를 보면 이것이 답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계속 반응을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어쨌든 이 ‘적응’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좌절과 시련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지만, 기쁨도 시간에 의해 퇴색된다. 이런 빠른 적응 과정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일들만이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최근? 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년 전 나는 대학생들의 행복감을 2년 동안 추적해보았다. 대학생들이 일상에서 겪는 좋은 일들(새로 생긴 남자친구, 대학원 입학 등)과 나쁜 일들(결별, F학점 등)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약 3개월이었다. 다시 말해, 작년에 벌어진 이런저런 사건들은 그들이 4월 1일에 느끼는 행복감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중에서(108~110쪽)
2001년 가을의 한 장면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보스턴에서 이륙한 아메리칸 항공사 여객기가 맨해튼의 무역센터 북타워로 돌진했다. 17분 뒤 또 다른 여객기가 남타워를 덮쳤다. 첫 테러기가 북타워에 충돌하며 생긴 여진이 남타워를 강타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이 아비규환의 혼란 중 안내 방송이 나왔다. 사고 지점은 그들이 있던 남타워가 아닌 북타워이니, 안심하고 사무실로 되돌아가라는 메시지였다. 당신이 만약 그 비상계단에 서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그날 비상계단에 서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런 갈등에 빠졌다. 그냥 올라갈 것인가, 끝까지 내려갈 것인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부는 정말 사무실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건물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뛰쳐나오기가 무섭게 두 번째 테러 여객기가 남타워를 덮쳤다. 62분 만에 건물은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순간의 결정이 생사를 갈랐다. 누가 살고 누가 죽었나? 명함에 무엇이 적혀 있고, 나이가 몇 살이고, 얼마나 고상한 취미를 가졌는지, 그날 그들의 생사를 좌우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그들의 평소 ‘성격’이었다. 매사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김 과장은 “별일 아니야!” 소리치며 사무실로 올라갔을 것이다. 밥값 낼 때 항상 손을 바르르 떨던 최 과장은 일등으로 건물을 탈출했을 것이다. 이 17분짜리 드라마에서 평소 낙관적인 사람들은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소심하고 찌질하다는 소리를 듣던 이들은 생존했을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 ‘사람쟁이 성격’ 중에서(129~130쪽)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도 아니고, 그 역할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식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생각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항상 좌우한다고 착각한다.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보다 중요한 원인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술사의 현란한 기우제 춤 때문에 비가 온다고 믿었다. 춤은 눈에 띄지만, 비의 원인은 아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를 행복이라고 하자. 이 비가 언제, 왜 내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습도나 풍향 같은 자연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술사의 춤이나 기우제 음식 같은 가시적인 것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 대 동물적 본능. 무엇이 진짜 모습일까? 인간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다. 역으로 본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얼마나 움직이는지는 과소평가하며 산다. - ‘행복은 생각인가’ 중에서(27~28쪽)
우리 조상의 남녀 비율은 1 대 1이 아니라 1 대 2로 여자 비율이 높다. 인간의 경우, 그나마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덕분에 남녀 간 불균형이 최근 줄어든 것이다. 다른 포유류들의 경우, 이 비율이 3(수컷) 대 7(암컷) 정도까지도 기운다. 거의 모든 암컷은 자식을 갖지만, 소수의 수컷만이 유전자를 남겼다는 말이다. 이 성비 불균형 때문에 남녀의 기질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엄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지향적 전략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수컷의 경우는 다르다. 어차피 최고가 못되면 짝짓기에서 낙오된다. 매사에 ‘모 아니면 도’ 같은 극단적인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작은 것에도 승부욕이 불탄다. 주먹 반만 한 골프공을 김 부장보다 5m 더 날리려고, 연습장에 출근하며 쇠막대를 5천 번 흔드는 게 남자다. 승부욕 있는 수컷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 ‘인간은 100% 동물이다’ 중에서(34~35쪽)
재미있는 남자. 전 세계 여자들이 꼽는 남자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가 위트다. 그러나 유머러스한 남편이 생존에 무슨 직접적인 도움이 되겠는가? 정신없이 웃느라 굶주린 사자가 나타나도 모를 텐데. 위트 자체가 생존 필수품은 아니다. 그러나 위트는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의 ‘수준’을 나타낸다. 피카소를 예로 들어보자. 약 5만여 점의 다양한 미술 작품을 남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단지 예술가의 작품만을 아는 걸로는 부족하다. 그가 언제, 왜, 어떤 이유로 그 작품을 남겼는지 이해해야 한다.” 좋소, 피카소 선생.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그림을 남겼소? 그의 개인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는 한결같은 꾸준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붓을 한참 내려놓고 있다가 갑자기 예술적 창의력이 폭발하곤 했다. 이 광적인 시기는 그의 삶에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 시점들과 일치한다. 창의성과 로맨스의 궁합. 피카소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 연구에서는 남학생들에게 만화 한 장면을 보여주고, 그 밑에 최대한 재미있는 캡션을 붙이도록 했다. 동기유발을 위해 한 쪽에는 재미있을수록 더 큰 상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돈 조건). 다른 쪽에는 그냥 멋진 여인과 해변을 걷는 상상만을 하게 했다(연애 조건). 각 조건에서 참가자들이 쓴 캡션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힌 뒤, 그것이 얼마나 재치 있는지 채점하도록 했다. 돈을 통해 동기유발을 시킨 쪽보다 연애 조건에서 나온 생각들이 더 재미있었다. 심리학자들이 이 현상에 붙인 이름은 매우 적절하다. ‘피카소 효과Picasso Effect.’ 여성들이여, 남자가 왜 그렇게 애써 썰렁한 농담을 하는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길. -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중에서(57~59쪽)
어젯밤에 이 책을 선물해준 친구가 밤늦어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봤다.
운전기사가 있는 차를 일찌감치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기는 간편복 차림으로 십리길 집으로 걸어서 가는 그 뒷모습이었다.
축축하게 땀에 젖어가는 그 등짝이 보였다.
그 등짝에 얹혀 함께 젖어가는 행복도 보였다.
어두운 그 골목길에서 멀어지는 그 친구의 등짝을 향해, 내 이렇게 작게 속삭였다.
‘참 고맙네. 우리 언제 또 만나세. 그때도 좋은 책 한 권 갖고 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