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에 용인 샘물 호스피스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는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아버지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족들이 다 모이라는 전화였다. 나는 급히 택시를 탔다. 가서 보니 아버지는 거즈를 입에 대고 가뿐 호흡을 연신 내쉬고 계셨다.
간호사님은 우리가 도착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형이 이야기하니까 시간을 조금 연장시키는 주사를 놓으셨다.이윽고 여동생들도 도착했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의 얼굴을 뚜렷이 보셨다. 그리고 얼마 후 의식이 거의 없으셨다.
이윽고 오후 4시 50분경 아버지의 호흡이 점점 적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거친 호흡을 내쉬고 소천하셨다. 인생을 흔히 들숨에서 날숨까지라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숨을 들이마시며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숨을 내쉬면서 죽는다.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며 아버지가 천국으로 편안히 가시도록 했다.
나도 모르게 두 뺨에서 하염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의 아버지는 정말 마음이 좋으시고 여리신 분이다. 그러나 세상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모진 풍파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인생을 새옹지마, 부침, ups and downs, 고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직물 사업을 하셨는데 남의 말에 너무 현혹이 잘 되셔서 수없는 실패를 거듭하셨다. 사업이 완전히 망하신 후 혈혈단신으로 성남으로 올라오셔서 기저귀, 손수건을 직접 만드셔서 이 집 저 집 팔러 다니셨다.
성남에서는 작은아버지께서 안경점을 하시며 기반을 잡고 계셨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댁의 방 한칸을 얻으셨다.그러나 세상은 호락 호락하지 않다. 아버지가 유아용품을 열심히 설명하고 계시면 듣고 있던 사람들은 "당신 입만 아프니 다른 데로 가보세요." 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점심때가 되면 언제나 식당에 가셔서 식사를 하셨다. 식사를 제때에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삶의 원칙이셨다.
그때 옆 테이블에 대학생들이 깍두기에 소주를 먹는 것을 보시고 안주를 시켜 주곤 하셨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당시 유아용품으로 유명한 여러 회사와 거래를 하게 되셨다. 형과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남에 올라왔다. 그때 어머니는 여동생 둘 그리고 할머니와 시골에 사셨다.
아버지는 자취를 하시며 우리 형제들에게 도시락도 싸주시고 하신 분이셨다. 그렇게 자상하시다가도 술만 드시면 전혀 다른 분이 되셨다. 아버지의 지나친 음주는 간암의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병명은 알콜성 간경화이다.어머니는 형과 내가 대학에 다니자 여동생 둘과 성남으로 올라오셨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도 성남에 올라오셨다. 우리 할머니는 38세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안 해 본일 없이 5남매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유아용품쪽으로 성공을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4학년때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거의 장학금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때 과수석을 해서 아버지에게는 양복, 어머니에게는 한복을 해드렸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한학기 다니고 군대에 갔다.
내가 군대에 느낀 것은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나이 어린 상급자 밑에 있다는 정신적인 문제였다. 나는 상병을 달고 휴가를 나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가족 사진을 하나 찍자고 했다. 나는 다시 군에 복귀했고 며칠 후 집에 전화를 하니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어머니는 사진이 아주 잘 나왔다고 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는 나의 전화를 받으시고 며칠 후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우리 어머니는 중증 고혈압 환자셨는데 건겅 검진을 받으신 후 잠깐 혈압약을 안 드신게 화근이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날 나는 계시몽을 꾸었다. 내가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나는 꿈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대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전화였다. 의사가 준비하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정신 없이 청원 휴가증을 받아서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는 이미 차디찬 시신이 되어 계셨다.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신 지 며칠만에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의 연세는 불과 55세이셨다. 어머니는 한 명도 결혼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저 번 휴가때 어머니께서 나를 부대 앞까지 배웅해 주셨다.
장례식을 끝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데 형이 나를 부대까지 배웅해 주었다. 부대 앞에서 형은 하염 없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부대에 복귀하자 마자 훈련을 뛰었다. 낮에는 바쁘게 훈련하다가 밤만 되면 어머니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나는 제대 후 어머니를 잊기 위해서 바쁘게 살기로 마음 먹었다. 학원에서 강의하며 대학원 공부를 병행했다. 나는 일주일에 50시간을 강의하며 2002년 8월에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 제목은 <샐린저와 벨로우의 작품과 도연명의 작품 비교 연구>이다. 아버지는 가난하셔서 정규 과정을 별로 받지 못하셨다. 초등학교 몇 년 다니신 것이 학력의 전부이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으셨고 서당에서 공부를 하셨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소양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년 후 새 어머니와 분가해서 사셨다. 아버지는 그때 몇억을 가지고 계셨는데 다단계 사업에 빠져서 전재산을 날리셨다. 그때부터 형과 나는 아버지께 매달 몇십만원씩 용돈을 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가 드리는 용돈으로 새 어머니께 용돈 주고 전기세, 수도세 내주고 먹을 것은 아버지가 직접 사서 새어머니께 드렸다.
아버지는 다단계 사업에 실패하기 전에 새 어머니 명의로 집을 전세로 얻어주었다. 새 어머니는 전세로 얻은 돈에 매달 받는 용돈을 더해서 빌라 하나를 샀다. 아버지는 하숙생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단계 사업을 하면서 나에게 인감 하나를 떼어 달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인감을 떼어 드렸는데 그것이 과점 주주가 되어 나에게도 엄청난 세금이 날라오고 나의 집은 압류당했고 교통 카드를 찍으면 신용 불량자 번호가 떴다. 우리는 조세 심판원에 이의 신청해서 결국 승소했다. 우리가 승소한 데는 형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형은 아버지가 다단계 회사를 폐업한 이후의 문제였다는 여러 자료를 제출했고 그것이 승소의 이유가 되었다.
내가 박사 학위를 받은 그 다음 해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혈압이 올라가서 심전도 찍고 검사하는데 이상이 없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공황 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압류 사건 이후의 갑작스러운 공포감이 원인이 되었다. 내가 형과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린 것은 14년이 넘었다. 작년 10월 아버지가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정형 외과에서 MRI를 찍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아마 암세포가 전이된 것 같다고 해서 서울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간암 4기였다.
아버지는 말기암 환자가 되셨다.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말기암인 것을 알고 아버지를 쫓아 내셨다.아버지는 색전술(암세포가 전이 되지 못하게 하는 수술)을 받으셨고 분당 서울대 병원에 있으시면서 대세를 받으셨고 세례명은 요셉으로 정해지셨다. 아버지는 형 집에 계셨다. 나는 시간이 남으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드렸다. 아버지는 2013년 1월 14일에 용인에 있는 샘물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셨다.
형이 일주일에 5일은 간병을 하고 나와 여동생이 일주일에 하루씩 간병했다. 형이 우리 4남매 중에서 고생을 제일 많이 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음식을 떠드리면 잘 드셨는데 점점 음식을 못 드셨다. 점점 암 세포가 온몸에 퍼졌다. 나는 2013년 설날 전날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의 기력은 많이 쇠하셨다. 밥은 못 드시고 물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버지께 커피 한잔을 타 드렸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께 봉양한 이승에서의 최후의 만찬이었다.아버지는 커피를 드신 후 계속 주무셨다. 그날 오후 여동생이 아버지께 갔는데 잠깐 깨어나셨고 막내 여동생이 아버지가 안좋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 시댁에서 급히 올라왔다.
막내 동생이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드렸는데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여동생이 간병하고 있는데 여동생에게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기가 사준 새 옷을 입고 자기 옆에 앉아계신다고 하셨다고 한다. 함께 가고 싶은데 자기가 뼈밖에 남지 않아서 같이 못 떠난다고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고 했다.
결국 용인 샘물 호스피스 병원에 가신지 한달 후인 2013년 2월 14일에 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 솔 벨로우의 작품 <허조그>에 "인간의 마음은 양서류와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인간에게는 양면적인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매월 1일 아침에 나에게 "용돈 부쳤냐?"라고 전화가 왔다. 나는 "내가 채무자냐?"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나도 한번씩 아버지에게 잘 해드리다가도 아버지가 너무 미운 적도 있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마음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화장터에서 아버지를 화장하고 수골함으로 갔다. 정말 뼈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화장장에서 아버지의 뼈를 분골해서 삽으로 퍼서 분골함에 넣어 주셨다. 인생은 정말 한 점, 한 줌이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아버지는 78세로 현세에서의 삶을 마감하셨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파주 보광사로 모시고 온 지금 나의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본다. 어느덧 내 나이도 45세! 돌이켜 보면 정말 인생은 덧없다. 이제는 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감정보다는 아버지와의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셨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음식 솜씨는 혼자 자취하신 경험의 결과로 아주 수준급이셨다. 아무리 의식이 없으셔도 아버지가 계신다는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도 안계신다고 생각하니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양쪽 뺨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이런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천국에서 신선처럼 사실 분이 지상 세계에 내려오셔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버지는 파주 보광사에 어머니의 유골함 옆 영가에서 영원한 수면을 취하셨다. 영가에서 아버지가 젊은 시절 어머니와 찍은 사진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슬펐다.이제 하늘 나라에 가신 아버지 요셉님 편히 잠드소서.
지금도 아버지가 용인 샘물 호스피스 병원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여기가 지상 천국이다." 모든 간호사 선생님, 자원 봉사자님들이 가시는 길을 편히 가시도록 즐겁게 봉사하시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길을 걸으면 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오실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아니한다.
첫댓글 자식은 아무리 해도 부모의 깊은 뚯을 모른다 하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때 최선을 다하신 교수님도 잘 하셨고
억지로라도 효도를 받으신 아버님도 보람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힘내세요!!
저희 학우들 몇이서 교수님이 가족애가 넘치는 분이라고 이야기 한적이 있었지요.
그 성품이 아버님을 닮으셨군요. 부모님을 공경 하고자 하나 옆에 계시지 않으니 마음이 슬플 뿐이네요.
교수님이 정이 많으신건 부모님을 닮으신것 같네요. 힘든 시간들 잘 이겨 내시고 열정적으로
우리들의 등대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