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Ⅰ. 익재 이제현과 이재 공민왕의 작품은 한국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1392년 7월 12일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은 퇴위하고 대고려국의 문을 닫는다. 그리고 5일 후인 7월 17일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이성계(李成桂)는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고려가 망하고 닷새 후에 조선이 건국된 것이다. 조선의 백성과 문화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의 백성과 문화가 조선의 백성과 문화로 넘어온 것이다.
불교국가 고려의 말기에 이르러 유학자들이 양산된 후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유학을 국가의 국시(國是, 이념과 정책의 기틀)로 삼았다. 그러나 고려로부터 내려온 불교는 세조 때까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것은 당시 문화예술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회화사에서 조선초기의 회화사는 고려회화사의 연속선 위에 있다.
조선전기 회화사를 연구하려면 고려중기부터의 회화사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불교 미술과 조선 유학자(儒學者)와 문인(文人)이 선호하던 소재의 그림, 즉 유학풍(儒學風)의 그림이 공존했다. 그러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그려진 유학풍의 그림은 현전하는 것이 매우 드물어 논하기가 어렵다.
다만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작품으로 전하는 『기마도강도』 (수렵도, 견본채색, 28.8×43.9cm)라든가 이재(怡齋)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작품으로 전하는 『고려공민왕 엽기도(高麗恭愍王 獵騎圖)』,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의 작품으로 전하는 『산수화』 등등이 현전하고 있어, 고려말 회화를 가늠해보게 하기는 하나, 우리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작품들을 탐색하지도 않고 대체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회화사, 특히 현동자 안견의 미술을 논하기에 앞서 이들의 작품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언제부터 서화에 관지(款識)를 하였나?
고서화의 작가를 규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의 관지(款識)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관지란 낙관(落款)을 의미한다. 작가가 자신의 호나 이름을 쓰거나 자신의 도장을 찍는 행위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남송때부터 작품에 작가의 이름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작품에 도장을 찍는 것은 이름을 쓰는 것보다 좀 늦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는 일부 고려불화에 작가가 기명한 예가 발견된다. 물론 그림에 붙은 조성기(造成記)는 엄밀히 말한다면 관지라 할 수는 없다. 관지는 작가의 자필 기명인 데 비하여 조성기는 그림을 만든 내력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전하는 고서화에 작가의 인장(印章)이 찍힌 것은 익재 이제현의 『기마도강도』(수렵도)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보인다. 익재 이제현에 이어 순은 신덕린의 작품으로 전하는 『산수화』에도 순은의 관지가 있다. 이후 조선초기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작가의 관지가, 『설천도』에는 안견의 인흔이 보인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에 작품에 관지를 하는 것이 정착하였고 조선초부터 보편화된 것 같다.
2. 고려에 들어온 송금원의 서화
문화예술은 시간과 공간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과거의 고려미술이 조선미술에 영향을 주며, 인접한 이웃나라 송·원·금의 미술이 고려미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 우선 고려 미술 및 문화가 인접한 이웃나라 송·원·금과 교류한 부분을 간략히 살펴보자.
10세기까지 : 삼국시대 삼국의 불교 전래는 승려와 불서와 불상이 동시에 전래한 것으로 본다. 불상이란 불교 조각상과 불화를 의미한다. 즉 불교미술의 전래이다. 불서의 대대적인 유입은 송 태조에 의해서 간행한 송판본 대장경이 991년에 고려에 전래한 것이다. 이러한 대장경의 전래와 함께 불교 미술품, 불상이나 회화도 전래하였을 것이다.
11세기 : 그러던 중 993년(성종12)부터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1011년에는 현종이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거란군이 송악에서 물러나지 않으므로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로 서원한 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려의 초조 대장경판을 조성한 것은, 거란족이 침입하자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국민정신을 통합하여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발원(發願)에 의한 것이다.
이 고려 초조대장경의 판각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의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에 현종 재위(1009∼1031) 기간인 1011년에서 1029년경까지 북송의 관판 대장경과 같은 분량(『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수록분인 1,076종 5,048권)의 판각은 모두 마쳤다고 한 것을 보아 고려 현종의 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고려 초조대장경은 중국 송판 대장경을 참고하여 더 우수하게 만들어졌는데, 송판 대장경에는 산수화 양식의 변상도가 수록된 것이 있어 고려 산수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는데 상당한 자극을 준다. 송판 대장경 유입 이외에도 11세기 후반에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하여 수많은 불서가 고려로 유입된다.
12세기 : 지난 제62회 연재 ‘『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에서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1182년에 하정사행(賀正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를 수행하여 금에 갔다가 1183년에 귀국하였고, 당시 이인로는 금의 수도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북경)에서 11세기 북송(北宋)의 화가 송적(宋迪)이 그린 『소상팔경도』를 보고 시를 지은 바 있음을 언급하였고, 『행화구욕도』는 당시의 하정사행 일행이 고려로 유입한 금대 화가의 작품으로 주장하였다. 12세기에는 남송과 금 모두와 교류하였다.
13세기 : 또한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는 1274년(원종15) 5월에 원나라에 있던 고려의 세자(후의 충렬왕)와 혼인하였는데, 이 세자가 즉위하면서 함께 고려로 들어온다.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 황실에서 소장 중인 막대한 서화를 고려로 가져왔다”라고 언급하였다.
14세기 : 그리고 익재 이제현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던 고려 말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충숙왕(忠肅王, 1294~1339) 1년인 1314년(충숙왕1)에 백이정의 문하에 들어가 정주학을 공부하였다. 그해 원나라에 가 있던 상왕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른 이제현을 부르자, 연경(燕京, 현 북경)에 건너갔다.
이제현은 연경에 오래 머물면서 시서화에 뛰어난 원(元) 나라의 문인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 염복(閻復), 요수(姚邃),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당시의 서화를 수집했다. 익재 이제현은 조맹부의 송설체를 고려에 유입하여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이후 14세기 후반의 고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은 그림에 뛰어나 황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1365)의 어진과 영모(翎毛) 등을 그린 바도 있다.
3. 고려말 익재 이제현의 작품을 주목한다
- 익재 이제현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한국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충선왕의 만권당에 있던 익재 이제현은 고려말 회화사에서 주목받아야 할 화가이다. 그는 1314년에 연경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6)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의 강호(江湖)를 유람한 일이 있었다.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를 불러 이제현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당시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화의 크기는 가로 93㎝ × 세로 177.3㎝로서 의자에 앉은 모습을 견본채색하여 그렸다.(이 작품은 1962년 12월 20일자로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조선시대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 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 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익재 이제현의 관지가 있는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익재의 작품으로는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덕수 1216))』 또는 『수렵도(狩獵圖)』라 불리는 세로 28.8cm, 가로 43.9cm의 그림이다. 이 작품은 가운데가 접혀 있어 화첩에서 떼어낸 그림으로 판단되는데, 접힌 부분을 가로 폭을 재어보면 오른쪽과 왼쪽의 크기가 달라 왼쪽이 약간(약 1cm 정도) 잘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눈 내린 산하를 배경으로 호복(胡服) 차림의 말을 탄 다섯 사람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견본채색의 그림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 ′익재(益齋)′라 쓰고 그 밑에 ′이제현인(李齊賢印)′이라는 도장을 찍고 있는데 그 관지 부분의 갈라진 부위를 보면 후에 낙관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대각선의 구도와 배치는 중국 남송(南宋)의 화원(畵院)에서 활약했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영향(마하파 화풍)을 받아 세련되었으나, 필치가 매우 세밀하고 채색은 배경을 제외한 인물·말·산 등 대상에만 선명하게 입혔다. 인물과 경치의 묘사는 당시의 불교 회화에 비해 다소 딱딱하고 미숙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의 화풍에서 공민왕 대의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공민왕(恭愍王)의 작품으로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채색 기법과 닮은 점이 있다. 그리고 소재와 묘사법 등에서 원나라 유관도(劉貫道,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의 『출렵도(出獵圖)』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이 『기마도강도』는 고려 말에 이미 마하풍(馬夏風)의 작품이 고려의 화가들에[ 의하여 그려졌다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해 준다는 의의를 지닌다. 익재 이제현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는 후낙이 아니며 소장인도 아니다. 이 작품은 작가명이 전하는 가장 확실한 고려말의 그림이다.
익재 이재현의 자필 관지. [사진 제공 – 이양재]
『기마도강도』, 견본채색, 28.8×43.9cm. 가운데가 접혀 있어 화첩에서 떼어낸 그림으로 판단되는데, 오른쪽과 왼쪽의 크기가 달라 왼쪽이 약간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익재 이제현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열조현후도(列朝賢后圖)』(2점, 덕수 1937)와 『이제현필 현후실적도(李齊賢筆 賢后實跡圖)』(4점, 덕수 1870)가 있다. 이 두 화첩은 모두 견본채색(絹本彩色)의 그림으로 하나의 화첩 ‘현후도’를 분첩한 것이다. 『열조현후도』의 한 점은 크기가 29.1×28.2cm이고, 다른 한 점은 28.5×28.2cm이고, 『이제현필 현후실적도』는 28.5×28.2cm이다. 즉 그림의 크기가 같다. 그림에 표현된 의습의 문양이라든가 실내 장식에 등장하는 문양도 공통점이 있고, 색상의 사용이라든가 묘사력도 동일하다.
『열조현후도(列朝賢后圖)』 두 번째 그림, 견본채색, 28.5×2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 1937).
[사진 제공 – 이양재]
『열조현후도(列朝賢后圖)』 첫 번째 그림, 견본채색, 28.5×2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4점, 덕수 1870).
[사진 제공 – 이양재]
『열조현후도』 화첩은 두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의 어질고 현숙하기로 이름난 왕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그림은 송나라 태조(太祖, 재위 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 주고 있는 장면이고, 두 번째 그림은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 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열조현후도』나 『이제현필 현후실적도』는 모두 여인의 표현에서 조선시대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점이 다소 있다.
이들 작품의 그림 옆에는 그림의 이야기를 알려주는 글이 적혀 있으며, 『열조현후도』의 두 번째 그림의 글과 『이제현필 현후실적도』의 그림 세 점에는 ‘이제현인(李齊賢印)’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이 낙관으로 인하여 일제 식민지 시기의 이왕가(李王家) 덕수궁미술관 고서화 수집 담당자들은 이 그림들을 이제현이 그린 작품으로 판단하고 입수하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체류하며 교유하였던 원나라의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작품들과 매우 유사하다. 즉 이제현 시대의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굳이 이 작품을 이제현의 전칭작품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우리 회화사를 살리려 한다면 이제현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논하는 편이 실사구시에 입각한 연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열조현후도』와 『이제현필 현후실적도』 등 일련의 ‘현후도’를 익재 이제현의 작품으로 판단하면, 이 화첩은 우리 민족의 회화사상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화첩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 때 권부(權溥, 1262~1346)와 그의 아들 권준(權準, 1280~1352)이 유명한 효행 고사들을 묶은 책 『효행록(孝行錄)』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부의 『효행록』은 조선조에 들어와 출판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속수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등 여러 행실도 그림의 효시(嚆矢)가 되므로 익재 이제현의 이 작품들에 대한 재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원래 『효행록』은 권준이 중국의 이름난 효자 24명의 전기를 모아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으로 그렸으며 익재 이제현의 찬(贊)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 권부가 다시 효자 38명의 전기를 더 엮었던 것인데, 이 『효행록』의 첫 원본에 익재 이제현의 찬이 들어갔다는 것은 『효행록』은 익재 이제현의 ‘현후도’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열조현후도』와 『이제현필 현후실적도』 등 일련의 ‘현후도’를 이제현의 작품으로 공인하는 것은 우리 민족 회화사를 풍요롭게 한다.
4. 고려말 공민왕의 작품을 주목한다
- 공민왕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한국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이 몇 점 현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본관 2094)이라고 불리는 『고려공민왕 엽기도(高麗恭愍王 獵騎圖)』가 있고,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는 견본채색의 『화조도(筆者未詳花鳥圖)』(덕수 1971, 45.8×78.2cm)와 견본채색의 『전 공민왕 필 춘경도(傳恭敏王筆春耕圖)』(동원 3316, 25.2×51cm)[주1]가 소장되어 있다.
한편 간송미술관에는 공민왕의 영모화 작품으로 전하는 『양도(洋圖)』가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 시절에 찍은 『공민왕 필 한창려선생상』의 유리 원판(건판 24504)이나 『전 공민왕 필 회화(속칭 阿房宮圖)』의 유리 원판(건판 16877, 1930년)도 있는데, 이들 두 작품은 지금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두 작품 중에 『공민왕 필 한창려선생상』은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4)의 『한국미술사』 (1929)(p.130)에서는 공민왕이 그린 『관리도(官吏圖)』로 설명되어 도판 263번으로 수록하고 있다.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견본채색, 25.0×22.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관 2097-9).
[사진 제공 – 이양재]
『천산대렵도』는 호복(胡服)의 복장에 변발(辮髮)을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앞에서 논한 이제현의 『기마도강도』와 그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즉 원대(元代) 화풍의 영향이 배어 있는 그림이다. 비단에 그린 세밀한 채색화로서 사냥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식의 호복을 입은 인물이 사냥하는 수렵도는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호렵도의 보편적인 화본(畫本)이 된다.
그런데 조선중기의 문인화가이자 평론가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기록에 의하면, 이 공민왕의 수렵도는 본래 조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손자이자[주2] 서화와 금석(金石)에 일가를 이루었던 왕실 출신의 화가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 1637~1693)[주3]의 소장품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1693년에 사망하자 애호가들이 나누어 가졌다는 설이 있다.
그 가운데 세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림이 조각나서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힘차게 달리는 기마 인물의 모습이 섬세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묘사되었다. 인물들의 옷과 말 장식들에 가해진 채색도 훌륭하다.
우리나라에서의 수렵도는 본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미술에서 종종 묘사되던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전통과 몽골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자락인 음산(陰山)에서의 사냥 모습을 표현하였다는 뜻에서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라고도 지칭된다. 한편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도 「수렵도」 잔편 소폭 1점이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칭하는 것이 전해지고 있으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는 그 묘사한 필력 수준이 다르다.
공민왕은 초상화에도 뛰어나 자화상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초상을 그렸으며 신하 7명의 초상도 그린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기탁된 파주염씨 문중 소장의 『염제신의 초상화』는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견본채색으로 작품의 크기는 53.7×42.1cm이다.
염제신(廉悌臣, 1304~1382)은 어릴 적부터 원나라에서 살아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는데, 고려로 돌아와 여러 왕의 신임을 받으며 문하시중(門下侍中, 정일품)에 올랐고 공민왕과 인연이 깊었으므로, 이 초상화를 공민왕이 그려서 하사한 작품이라는 주장은 인정하여야 한다.
이 염제신의 초상화는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오른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안면은 회색빛을 띠며, 눈썹과 모발, 수염은 흑·백의 가는 선을 이용하여 묘사하였다. 눈시울은 붉은색으로 명암을 넣었고, 눈꺼풀은 가는 먹선으로 처리한 후 속눈썹을 일일이 그렸다. 옷은 연보라색 바탕에 보라색 선으로 덩굴무늬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 초상화인 안향의 초상화나 이제현의 초상화에서와 같은 형태의 구도와 화풍이 나타나며, 특히 옷에 그려진 덩굴무늬는 이 작품에서 처음 보이는 것으로 섬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고려시대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염제신의 초상화』, 공민왕, 53.7×42.1cm, 파주염씨광주문중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경기도 장단 화장사에는 『고려 공민왕의 어진』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 어진은 전란 중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나, 1916년도에 당시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찍은 흑백 유리 원판이 보관되어 있다. 이 어진에 보이는 바닥에 깔린 장판 무늬로 볼 때, 이 작품은 고려 때 그려진 자화상이 아니라 16~17세기에 다시 그려진 어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려 공민왕의 어진』, 경기도 장단 화장사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외에도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는 견본채색의 『화조도(筆者未詳花鳥圖)』(덕수 1971)는 전형적인 송원대의 화조도 형식을 하고 있고, 또한 『전 공민왕 필 회화(속칭 아방궁도)』의 유리 원판(건판 16877)에서 보이는 건축물의 모습은 남송대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등장하는 예(例)의 전형적인 건축물 그림이다. 이 두 작품은 현전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고려말의 전형적인 화풍의 그림이므로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온 것 같다.
『공민왕 필 한창려선생상』, 유리 원판(건판 24504). [사진 제공 – 이양재]
『화조도』, 전 공민왕, 견본채색, 45.8×7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5. 맺음말 ; 한국회화사학계 일각에 대하여
우리나라 회화사학계의 모든 병폐는 단 하나에서 시작한다. 아마추어 같은 몇 사람이 제멋대로 우리 고서화를 폄훼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려 애를 쓰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사대적(事大的) 잣대로서 우리 미술을 평가하는 중화 중심의 해외의 회화사학자들 관점과 상통하기도 한다. 그들은 대개가 해외에서 우리 회화사를 연구한 회화사학자이다. 그들은 우리 회화사상의 명작을 중화 미술의 변방 미술로 또는 아류 미술로 보며, 중화 미술에 나타나는 위작 현상을 그대로 우리 미술에 투영하여 평가하려 한다. 이를 그대로 추종하는 일부 회화사학자들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민족 자학(自虐)의 회화사를 하는 것으로 비친다.
그들은 현동자 안견 이전의 모든 작품을, 심지어 조선초기의 작품 대부분을 애써 부정적으로 평하고 있으며, 심지어 조선후기의 진경산수나 실경산수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경우까지 있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회화사를 보아야 한다. 그것을 터득한 이후에 인접 국가의 회화사를 보아야 하며, 또한 인접 국가의 회화를 이해한 이후에 세계 회화사를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같고 다름이 드러난다.
이제 당분간은 본 ‘신 잡동산이’ 연재에서 간간이‥‥‥, 최소 한 달에 두 번은 조선전기(朝鮮前期) 회화사에 대한 글을 연재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현동자 안견과 그의 회화 세계를 재조명해 나갈 것이다.(2024.05.22.)
『전 공민왕 필 회화(속칭 阿房宮圖)』의 유리 원판(건판 16877, 1930년), 남송 장택단의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예(例)의 전형적인 건축물 그림. [사진 제공 – 이양재]
6. 추기(追記)
독자분들은 필자가 인터넷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의 아래 글을 아래 순서대로 필독하길 바란다. 특히 ②번과 ③번 글은 반드시 필독할 것을 권한다.
④ 30년 전 안견론쟁을 회상하며, 2024.05,13. 제63회 연재분.
② 고려회화의 다양성 연구의 단초를 우선 고려불화에서 찾아야, 2024.04.15. 제59회 연재분.
③ 『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 2024.05.06. 제62회 연재분.
① 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 2024.02.05. 제49회 연재분.
또한 통일뉴스에 오피니언 기고를 한 아래의 글도 필독하기를 바란다.
⑤ 『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 2024.02.07.
주
[주1] 『전 공민왕 필 춘경도(傳恭敏王筆春耕圖)』는 고려말의 풍속도로서 왼쪽에는 근대화가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 화백의 배관이 붙어 있다.
[주2] 낭선군 이우는 선조의 열두 번째 아들 인흥군 이영(仁興君 李瑛, 1604~1651)의 장남이다.
[주3] 낭선군 이우는 1661년 역대 임금의 필적을 모아 『열성어필(列聖御筆)』을 간행한 것을 시작으로 어진(御眞)과 왕실 족보 편찬 등 종친 신분으로서 굵직한 왕실 행사를 주관하였다. 서예와 금석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60여 편이 넘는 신도비문·묘갈명·현판 등을 썼고 1661년 『관란정석각첩(觀瀾亭石刻帖)』, 1664년 『동국명필(東國名筆)』, 1668년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서예가들의 필적(筆跡)이 전해지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고려~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해동명화첩(海東名畵帖)』을 만들어 숙종에게 진상하기도 하였다.
낭선군은 선조계(宣祖系) 종친들과 허목(許穆)·송시열(宋時烈) 등 유학자, 조속(趙涑)·이수장(李壽長) 등 서화가, 고승(高僧)들과 자신이 소장한 서책, 인장, 서화 작품을 열람하며 예술적으로 교류하였다. 서론(書論)의 한 종류인 『임지설림(臨池說林)』을 비롯하여 친족들의 일대기, 와유록(臥遊錄), 연행록을 저술하였다. 작품으로는 왕희지체를 잘 구사한 『준치첩(蹲鴟帖)』(1678), 『임집자성교서(臨集字聖敎序)』 등 서첩이 있고 전국 사찰에 비문이 여러 점 남아 있다. (출처 : 집필자 황정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즉, 낭선군은 글씨로 이름 높았고,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화 수장가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