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오늘이 없이는 과거와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집니다. 현재의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고, 현재의 시간은 다음의 시간, 즉 미래의 시간을 가고 있는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현재의 시간이 없으면 나의 과거는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과거가 어디에 있고 미래가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적 현재와 현실이 아주 중요한 삶의 정점입니다. 그런 의미 오늘 제목은 아주 중요한 제목입니다. 오늘의 제목: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이렇게 권면합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과 함께, 즉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일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왜 바울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했을까요?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사 구원의 날에 나를 도우사 구원하여 주심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선포합니다. ‘내가 은혜의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 49:8]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은혜의 때’는 ‘은혜를 베풀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베풀 때, 구원의 날은 지금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입니다. 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이 말씀 때문입니다.
[눅 17:20-35]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구원의 날이 지금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의 증거는 바로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있다는 것 지금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지금 내 안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에 심판의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내 안에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 구원받은 은혜의 사람이라면 아무 시간과 장소에 관계 없이 심판의 날에 구원함을 받습니다.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32) 롯의 처를 기억하라(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지막의 날에 둘 중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게 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됨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이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구원의 은혜 안에 있지 않다면, 나도 모르게 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구원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때, 바로 지금이요, 구원의 날도 바로 지금이라고 합니다.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사람들, 바로 오늘의 나, 지금에 나의 믿음이 중요한 것 오늘의 삶, 현재의 삶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바로 이런 점에서 세상의 생명을, 육신의 생명을 가진 사람과 다릅니다.
[벧전 1:3-9](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생명은 영혼에 대한 구원입니다. 영혼에 대한 구원의 소망이 산 소망이지요. 산 소망은 죽지 않는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소망은 길어야 백 년입니다. 백 년 후에는 내 육신이 죽음으로 소망도 죽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원히 산다면 나의 소망도 영원히 살아있는 지금이 됩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현실에 살아 있는 육신의 생명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은 육신과 영의 대치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현재의 믿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울은 자신에 사역의 삶에 대하여 정확하고 자신 있게 증언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역자들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지원하는 지원자들이 뚝 떨어진 것에 대하여 기독교 언론들이 걱정할 정도입니다. 그 숫자가 줄어 경쟁력이 약화 되었다고 합니다. 즉, 세상으로 볼 때, 인기 없는 업종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의사들이 파업을 강행하는 이유는 자신의 직위 상실 때문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사명 없는 사역, 그동안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인기 없는 교회 사역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역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언론들 왜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숫자로 믿음의 능력을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명한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많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시작은 거창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무엇을 비유로 말씀하셨나요. 네 받습니다. 씨앗 중에서도 아주 작은 씨앗 겨자씨입니다.
[마 13:31-32]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처럼 우리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요? 네, 아주 쉽고 간단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 1:12-1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이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 10:9-10]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의 역사는 아주 쉽고 간단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세상과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믿음의 삶은 무엇입니까? 바로 바울 전하는 이 말씀의 삶입니다.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렐루야! 아멘!
이 삶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는 남을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요,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 지금 나의 현실에서 이루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불행으로부터 해방(解放)된, 은혜의 구원에 삶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보라 지금, 오늘이 나의 구원에 날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