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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28. 예수비전교회 주일낮예배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라 유백선 목사
요한일서 4: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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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비전교회 카페에는 삶의 행복과 깊은 감동을 주는 메시지가 더 많이 있습니다. 카페에 들어오셔서 함께 나누시고 예수님의 비전으로 복을 받고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시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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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일상에서 사랑인 척 사기 행각을 벌이는 범죄가 번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로맨스(사랑) 스캠(사기)’ 범죄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매개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주로 소셜미디어(SNS)에서 이성에게 접근해서 호감을 얻습니다. 그 후에 돈을 뜯어내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시적인 사랑의 감정보다 애착적인 사랑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깊이 연결되어 하나가 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사랑을 나누면서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29년 동안 시와 산문을 써왔던 이병률(57세) 시인이 사랑의 정체를 치열하게 탐구했습니다. 그 흔적들을 모아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란 시집을 냈습니다. 이 시집에 나온 글들에는 서술어가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 그 서술어를 독자가 읽고 알아서 자기의 처지를 채우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확실히 있어요.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예요. 사랑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왜 동시에 그것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는 걸까요? 물론 뭐라고 딱 말할 순 없는 것이지만 사랑은 ‘괄호’라고 생각해요. 아무나 채울 수 있고, 거기에 모든 걸 다 넣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다고 답이 되는 건 아니죠. 오리무중인 사랑, 그것도 저에게 ‘너무나’ 사랑인 것이죠. 신(神)을 돕는 자, 저는 그렇게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신(神)이 일을 좀 안 하시네.’ 생각하는 날 있잖아요. 그래서 어떨 땐 돈도 써야 하고, 꽃도 키워야 하고.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하거나 또 누군가에게 울음을 줘야 하는 날도 있는 거죠. 사람들이 점점 어려운 걸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그러다 만약 아무도 한국의 시를 읽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는 나의 여행 산문을 통해서라도 시(詩)를 계속 알릴 거예요.”
여러분! 나의 사랑을 느끼고 더 많이 베푸는 삶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면 행복의 홀씨가 자라납니다. 사랑의 홀씨가 날아가서 세상이 사랑의 꽃밭이 되어서 환해질 것입니다. 사랑으로 편견 없이 함께 사는 사회에 행복이 있습니다. 나눔이 있는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을 것이다. 그중에 제일이 사랑이다.”(고전 13:13) 사랑이 왜 믿음보다 탁월합니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유용성이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왜 소망보다 탁월합니까? 소망이 사랑의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시 39:7) 그래서 하나님께 그의 소망을 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시 146:5) 하지만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잠 13:12)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져도 사랑이 없으면 소망을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딤전 4:10) 그래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골 3:14) 사랑이 모든 것을 참아내게 하고, 사랑이 있어야 참고 기다리고, 모든 것을 믿게 합니다. 사랑이 믿어주는 것이요, 사랑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견디게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3:7)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유 1:21)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고전 16:14)
오늘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사랑 안에서 살기 원하십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왜 온전한 사랑 안에 살기 원하십니까? 세상의 사랑이 일시적이고, 사랑을 해도 공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사랑도 신뢰가 깨지면 사랑도 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유한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계산적이고, 거래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온전해야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온전해야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온전하면 자기희생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올바로 알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여기서 “시인하다(호모로케세/‘ομολογεση/homologese)”는 말은 “동의하다, 계약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 감사하다, 약속하다, 자유롭게 말하다, 찬양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였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성자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6-11)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사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면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그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골 1:19-20)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행 2:21)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믿습니다.(행 15:11)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인정하고, 고백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아는 방법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까? 지금 내 안에 하나님께서 계십니까? ‘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없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을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롬 8:14-16)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셔야 ‘예수님께서 나의 주시다.’ 라고 고백합니다.(고전 1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예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갈 4:6)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 있게 살아야 합니다.
국제예수전도단(Youth With A Mission)의 창립자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m)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13살 때에 마을에 부흥집회 중에 강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부모님께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기뻐하시면서 새 신발을 사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런 마음을 전하셨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살아가라.’ 어느 선교사의 집에 머무르며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내가 세계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지도가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대륙이 눈에 보였는데 파도가 대륙들의 해변에 밀려들었습니다. 그 파도들이 청년들이었습니다. 내 나이 또래와 어린 사람들이 지구상의 모든 대륙들을 완전히 뒤덮였습니다. 그들이 길거리와 술집 앞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집에서 집으로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 장면들이 처음 나타났던 것 같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국제 킹스키즈, 열방대학, 국제예수전도단을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구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주 교제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드릴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기독교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영적, 정신적, 사회적, 육체적으로 충족되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전력을 다해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옥스퍼드 출신의 과학자요,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박사가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광채 앞에서 죽음과 어둠의 세력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에서 자유를 얻는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요 3:15-16)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여기서 “안다(에그노카멘/εγνωκαμεν/)”는 말은 “허락하다, 알게 되다, 느끼다, 인식하다, 확신하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체험적으로 알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왜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나의 사랑이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왜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해야 그 사랑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해해야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을 삶으로 가르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지해야 사랑의 인식에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배우였다가 선행의 천사로 변화되었던 오드리 헵번이 말했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사랑할 차례입니다. 날씬한 몸매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신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관심과 사랑을 베풀면 보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믿음이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온전해져야 사랑이 굳건하게 유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믿음이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그 사랑을 믿음으로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αγαπας με/agapas me)”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로 세/φιλω σε/philo se)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시몬 베드로가 말한 “사랑”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이요, 아무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고, 거저 주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시몬 베드로가 말한 ’사랑‘은 “친절하게 대하는 사랑, 친구가 되는 사랑, 감정이나 느낌이 있는 애착”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온전한 사랑을 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어야 사랑이 온전해집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여기서 “온전하다(테텔레이오타이/τετελειωται/teteleiotai)”는 말은 “완전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마치다, 이룩하다, 완벽하게 갖추다, 의도한 목표를 끝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져야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어야 사랑을 온전히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어야 그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확증입니다.(롬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엡 2:4-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면 소망이 부끄럽지 않습니다.(롬 5:5)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음이 온전해지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영생을 취합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합니다.(딤전 6:11-12)
여러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의 후회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이 온전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형벌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있으면 영생의 확신이 부족한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자기 속에 죄로 인한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난처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아담이 말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렸느냐? 내게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아담이 하와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먹었습니다.”(창 3:12) 이처럼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자신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필이 나에게 원인제공을 했다고 변명했습니다.
반면에 온전한 사랑을 알고, 믿음이 견고해야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온전한 사랑을 알고, 믿음이 있어야 상대방을 배려하고 허물을 덮어줍니다. 온전한 사랑을 알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9절)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살면서 사랑이 성숙해지기 원합니다.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맺고, 그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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