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응척(高應陟)
[문과]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15/36)
[인물요약]
UCI | G002+AKS-KHF_13ACE0C751CC99B1531X0 |
자(字) | 숙명(叔明) |
호(號) | 취병(翠屛) |
생년 | 신묘(辛卯) 1531년 (중종 26) |
졸년 | 을사(乙巳)(주1)【補】 1605년 (선조 38) |
향년 | 75세 |
합격연령 | 31세 |
본인본관 | 안동(安東) |
거주지 | 미상(未詳) |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36명 [甲3‧乙7‧丙26] |
전력 | 유학(幼學) |
관직 |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고몽담(高夢聃)
[조부(祖父)]
성명 : 고식업(高識業)
[증조부(曾祖父)]
성명 : 고석동(高碩仝)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세형(鄭世亨)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남극문(南克文)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고한운(高翰雲)[文]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七(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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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집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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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네이버 지식백과] 고응척 [高應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
訒齋先生文集卷之十二 / 行錄
杜谷先生高公言行錄 a067_397c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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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應陟。字叔明。其先安東人。中葉。移居本府西面。有諱仁祐。仕麗朝。官至監務。是生諱汝謹。不仕。是生諱碩仝。中武科官至萬戶。公之高祖也。萬戶移居海平文良洞。生諱識。業詩書不仕。娶成均司藝金克柔之孫女。生諱夢聃。娶尙州求道谷敎授鄭世亨之女。生六男。皆就學。公第四也。嘉靖辛卯。生于文良洞。天資英秀。意趣不凡。見字輒記。父母貧而多子。艱於養育。又以商山。素稱詩a067_397d書之藪。求道谷。有金后溪範,柳進士霽。皆一時知名士。欲令觀善而就益。遂於辛丑歲。挈諸子寓贅家。壬寅。公年十二。造金后溪門。請受中庸。后溪曰。中庸微妙之書。非汝蒙學所能讀。公涕泣而還。開卷默誦。作道字賦七十餘句。仲氏應擎。袖考柳上舍霽。柳見而奇之曰。此兒必爲文章。勸讀大規模文。蓋柳之所謂大規模。卽古今雄文大家。而公不肯讀。仲氏常誦韓文。亦以勸公。公曰。自有聖賢書。何必學韓。枉費工夫。年十七。娶室花山。稍有資賴。公持斧上後山。斫木負來。一家驚怪。婦翁責之曰。士子而執賤役。不亦羞於隣里乎。胡不使奴僕代之。公a067_398a哂之曰。非他所知。有何羞乎。手構一間屋。塗閉門戶。只存兩壁穴。一以答親賓。一以通飮食。堅坐逾年。讀一部大學。族隣具酒食以請。則答曰。以我爲飮食人耶。有朋來訪。則相見于壁穴曰。旣見面矣。各修所業可也。一洞以爲狂郞。十九。中司馬監試。讀魯論。至陋巷章註曰。其字玩味。自有深意。必欲尋得之。閱盡七卷。坐到鷄鳴。滿盞燈膏已竭矣。後讀晦庵之論曰。道理在天地間。至纖至悉。直窮到底十分透徹。無有窒礙。胷中泰然。與萬物爲一。豈有不樂。恍然始悟。遂作與萬物爲一賦。又作其字賦。其專精玩索。類如是。尙牧申潛。見而重之。勸令就a067_398b學書堂。繼以書糧紙筆。乃成一册子。手書大學章句。參以或問。合爲一部。晝讀夜思。自是學問日博。文章日盛。神游肯綮。觸處無礙。四方傳誦其所製。公以爲枝葉也。盡焚古今抄集及所製詩賦。停赴擧三年。沈潛乎四書五經。旁通乎性理大全。溫古熟讀。不知手舞而足蹈。天下事物。古今諸書。皆以大學評論。至以莊騷韓柳蘇黃李杜諸家。雖驚天動地而外馳。於庸學。略不經眼。仲氏力勸赴擧。嘉靖辛酉。登第。公猶以爲此非丈夫事業也。兩部庸學。講究不輟。格致誠正之言。道器費隱之妙。不絕於口。辨析毫釐。座客或空談。卽開卷講說曰。除却閑a067_398c說話。士農工商。各有所業。不學則治農可也。見後生少年。必曰。不齋糧而好游山者。終必餒焉。庸學糧也。百家游山也。熟讀二書。知行體用。瞭然於胷中。則天下古今之變。百家諸子之說。悉皆權衡於心上。如飽食而游山。無眩迷窘步之歎矣。壬戌。赴咸興敎授。公以北方不尙文學。請於監司。建文會堂於州治北。手書大學章句或問。自爲跋文。壽梓廣布。身親勸課。仍作文會堂記以揭焉。李靑蓮後白。後爲監司。見記及跋。歎曰。此眞眞儒也。始有薦用之意。癸亥冬。以校書著作還鄕。居陶圃洞。自號翠屛。始讀周易。庚午。爲親乞縣。拜懷德縣監。到官上a067_398d封事。大略言殿下與君子不和。君子與君子不和。上優答之。時東西黨議始行。公憂之曰。鷄鶴易分。鴻雁難辨。宋朝川朔之爭。甚於牛李之黨。自非在我之權度精切不差。則纔有偏倚。傾覆立至。陳瓘載舟之喩。正謂此也。遂及於疏中。而又作銓人寶鑑一部。將欲上達而不果。又上書監司。朝夕供具。去傍案。禁屠牛禁革鞋。官婢皆着藁鞋。竟以迂闊罷。講學方,中庸體用解等書。作於此。皆失於兵火。辛未。丁外艱。居廬于梬嶺。萬曆癸酉。服闋。自陶圃還杜谷宗家。又以杜谷爲號。宗家曾爲宗孫高漢壽所賣。祠堂亦毀棄。祠堂前舊有柿木。枯死已a067_399a久。至是收復宗家而居焉。枯柿復孼。作說以記之。甲戌。除河陽縣監。前官造朱紅屋轎。未及粧飾而罷歸。公代赴。以災傷繼罷。公先發。子弟治行隨發。裝其轎。奉內行而還。公峻責之。卽令鉅其屋蓋。又鉅雕足。乙亥。除江原都事。登途。以親病不赴。丙子。拜司䆃寺僉正。轉成均直講。作西征錄,道字說。丁丑。以李後白薦。拜承文校檢。旋除臨陂縣令。治如故操。未久。以衙門如市。被劾於臺評。李公曰。曾跋大學之高某。豈有如此之理。必爲貧寒親故之周急。而受此汚辱之名也。擬公二十四望。靑蓮其眞知公者也。戊寅。拜咸陽郡守。不赴。次歸去來辭。己a067_399b卯。丁憂居廬。壬午。除禮安縣監。乙酉。除尙州提督。己丑。拜慶尙都事。不赴。庚寅。公知有邊患。上書監司金晬。請設六藝諸生以習射御。建講武堂于列邑。以講武事。不省。辛卯。除安東提督。壬辰遭倭變。上疏行在。陳修攘之大道處變之達權。路梗不達。甲午。作顏子書。乙未。拜豐基郡守。不赴。丙申。廷議授公以師儒之任。拜成均司成。不赴。癸卯。作神鑑集費隱發揮。乙巳。除慶州提督。八月二十八日。終于正寢。享年七十有五。家無一物。無以殮葬。遠近士類爭致賻。是年十一月。葬于梬嶺先塋側子坐午向之原。公娶花山南克文之女。生三a067_399c子二女。男長曰沖雲。次曰翰雲。早有文藝。中癸酉司馬。登乙酉文科壯元。次曰得雲。早死。女長適士人金宗孝。次適李德駿。皆無後。沖雲生二子。皆夭。生四女。長適朴友賢。次適文可晦。次適朴以淳。次適李英馥。側室生四子。祥雲,縉雲,代生,復生。公心虛而理明。志遠而見大。其爲學不由師傳。自得於心。不徒誦讀而必要默會。不徒知之而必要好而樂之。凡平生所得。爲圖爲說。或詩或賦。歌曲之類。不可勝記。凡遇士人。未暇寒暄。輒講大學。雖庸人武夫。童子小吏。以爲無不可敎。必令習講一二章。人莫不笑其迂闊。而公則以爲切實也。性理諸書之a067_399d外。未嘗從事詞翰。而才高意豪。落筆成章。不事雕琢。不求聲律。而意致通達。馳騖汪洋。雖世之老於文詞者。亦無以尙之。至於執事之時。對食之頃。令人握管。口授如流。亦不點竄。或諫於公曰。敎人必因其才。且待憤悱而發之。今公不擇其人。不觀其意。輒敎大小學中庸等書。非徒厭聞。鮮能知味。恐非敎誨之道也。況立言著書。必皆苦心搆思。一言一字。不敢容易。故出爲世重。公獨不然。信口輒詠。有懷卽寫。間之以俚言戲語。略不經意。以此不能見重於世而傳示於後。公宜少加究索。毋爲自輕。公笑曰。辭取達意。文止明理而已。必要繡梓耶。且a067_400a小學大學中庸語孟。人之日用所爲。切於水火。人而不知。則不可一日存。童子進見。聖人與語。崖山舟中。亦講大學。豈可以蒙昧而不敎。豈可以亂離而廢講乎。且如隱僻不正之書。未嘗一掛於眼。訾毀迫切之辭。未嘗一出於口。常曰。好善疾惡。天理之公。而善善宜長。惡惡宜短。又曰。晉唐詩體風雲月露之文。仙佛道家枯木死灰之流。皆無補於實用。有害於吾道。必酷排而力詆之。晩喜讀易。自戊辰至終身。未嘗輟誦。天地萬物之理。陰陽鬼神之妙。硏精覃思。窮探蘊奧。纔見一物。輒窮一理。形諸圖畫。寓諸諷詠。游心太古。有懷唐虞。一毫世慮。曾不a067_400b芥滯。常慕康節氣象。詩賦歌曲。無不寓興。嘗吟一詩曰。茫茫天地幾鴻濛。造化爲工萬物銅。隴蜀世情謾不止。楚凡人事自無窮。尋思往古眞蝴蝶。默弄 來今亦螮蝀。安樂一生誰會得。洛陽樓閣起層空。夷然自處於繩墨之外。不以笑侮而少沮。世或譏其太簡。而公居之不移。循性而行。不修邊幅。前後居官。淡如寒僧。弊袍穿屨。對人不恥。側室黃氏。生長富貴。服飾頗麗。公盡撤錦衣。藏於大板中。蓋而釘之。使不復開。子翰雲守扶安。値母夫人生辰。來設壽宴。請邑宰坐定。公見煖酒用新峯爐。不悅曰。彼峯爐亦自扶安耶。對曰然。公責之曰。吾家舊有峯a067_400c爐。汝又益之何也。三峯三足之器。遠路完致。其苦不少。而汝忍爲之。以此居官。非我意也。卽令去之。府使崔公慶長歎曰。此居官敎子者。皆可爲法。前後喪祭。以群兄弟貧乏。不用輪享俗例。而公皆獨辦。一衣有二件。則解其一。分與兄弟。米布之自外至者。不入私室。卽令別藏。分散有差。方其三京瓦解。至尊民食。公在花山。憂時慷慨。旣封疏不達。有感於幽懷賦。逐句註解。明其復讐之義。時賊屯邊海。蓬蒿滿野。公請設力田科鐵九科。分兵農一衆志。發揮紀效新書。累次陳疏。請督武學。雖不能有成。其憂國之念。未嘗須臾忘也。寇退。還于故園。矮a067_400d屋數間。薄田數畝。所侍婢妾。親自耘鋤。朝饘暮粥。樂以忘憂。所見旣大。洞觀於原始反終之理。嘗曰。鬼神死生之理不難見。人皆由之而不知。故異端輪回之說。得以惑人。卽口吟曰。道本於天不遠人。休言刹刹與塵塵。鷄鳴犬吠皆天理。魚躍鳶飛亦鬼神。夏葛冬裘寧飾僞。飢餐渴飮總由眞。欲知晝夜爲生死。月似張弓又似輪。取存順歿寧之意。名其墓山齋舍曰順寧庵。乙巳七月。在月城。預知乘化而作詩。卽治任還家。未幾遘疾。子弟進藥。却之曰。吾享康節之樂。又享康節之年。有何憾乎。再進再却。整襟悠然而逝。嗚呼。大樸散矣。淳風喪矣。公獨a067_401a處澆漓之極。惡文巧而回太質。宜其齟齬而不相入也。其在天者。亦或可必。而壽嗇期頤。門絕雲仍。天之報施於公者。又何在也。好學明理。早見大意。非公之稟賦異於人乎。安貧樂道。得正以終。非公之所得富於人乎。自樂於此而不願乎彼。公之於上下。有何怨尤乎。余自髫年。受公提誨。耳濡目染。蓋有年矣。追記言行見聞於平日者。什忘八九。又拾遺篇散失於兵火者。只若干篇。身在堂下。不敢僭議。以俟夫後之平衡者輕重焉。時天啓丙寅冬。門人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節度使巡察使崔晛。謹識。
[주-D001] 弄 :
弄從竹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
고응척[ 高應陟 ]
원본글 출처저자대표관직이명원전서지
고응척의 언행록(言行錄) |
최현(崔晛) |
사성(司成) |
자 : 숙명(淑明) 호 : 취병(翠屛), 두곡(杜谷) |
국조인물고 권9 유학(儒學) |
공의 휘(諱)는 응척(應陟)이고, 자(字)는 숙명(淑明)이니, 그의 선대는 안동인(安東人)이다. 중엽에 본부(本府)의 서면(西面)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휘 인우(仁祐)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감무(監務)에 이르렀으며, 휘 여근(汝謹)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이 분이 휘 석동(碩同)을 낳았는데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만호(萬戶)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만호공이 해평(海平) 문량동(文良洞)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휘 식(識)을 낳았는데 시서(詩書)를 업(業)으로 삼으면서 벼슬하지 않고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극유(金克柔)의 손녀(孫女)에게 장가들어 휘 몽담(夢聃)을 낳았는데, 그가 상주(尙州) 구도곡(求道谷)의 교수(敎授) 정세형(鄭世亨)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男)을 낳았으며, 모두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으니, 공의 서열은 넷째이다.
가정(嘉靖)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년)에 문량동에서 태어나매,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뛰어나며 의취(意趣)가 평범하지 않아 글자를 보면 쉽게 기억하였다. 부모는 가난한 데다 자식이 많아 양육이 어려웠고, 또 상산가(商山家)는 시서(詩書)의 연수(淵藪)로 일컬어졌는데, 구도곡에는 후계(後溪) 김범(金範)과 진사(進士) 유제(柳霽)가 있었으니 모두 한 때의 명망이 알려진 선비였다. 그래서 선행을 보고 유익한 데로 나아가게 하려고 마침내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년) 여러 자제를 데리고 처가[贅家]가 있는 곳으로 가서 우거하였으며, 이듬해인 임인년(壬寅年)에 공의 나이 12세였는데, 김 후계의 문하에 나아가 ≪중용(中庸)≫을 배우려 하자, 후계가 말하기를, “≪중용≫은 은미하고 오묘한 글이라 어린아이가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였는데, 공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 책을 펴고 가만히 암송하며 도자부(道字賦) 70여 귀(句)를 지었다. 중형[仲氏]인 고응경(高應擎)이 소매에 넣어 진사 유제에게 고찰하게 하였더니, 유 진사가 보고 기특히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틀림없이 문장(文章)이 될 터이니, 규모가 큰 글을 읽도록 권면하라.”하였다. 대체로 유 진사가 말한 ‘규모가 큰 글’이란 바로 옛날 대가(大家)의 웅문(雄文)인데, 공이 즐겨 읽지 않았다. 그의 중형이 항상 한유(韓愈)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 공에게 권면하자, 공이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글이 있는데 하필이면 한유의 글을 읽으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야 합니까?”하였다. 나이 17세에 화산(花山)에서 장가를 들어 조금 의뢰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공이 도끼를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베어 짊어지고 왔으므로 온 집안이 놀랍고 괴이쩍게 여겨 장인[婦翁]이 나무라기를, “선비로서 천한 일을 하는 것이 또한 이웃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어찌하여 종으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하도록 하지 않는가?”하자, 공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남들이 아는 바가 아닌데,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하고는 손수 한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게문은 닫아서 발라 버리고 단지 두 벽에다 구멍 한 개씩만 두었으니, 하나는 친척과 손님들에게 대답하는 곳이고, 하나는 음식을 주고받는 통로였다. 그곳에서 작심하고 앉아 해를 넘기면서 한 부(部)의 ≪대학(大學)≫을 읽었는데, 친족이나 이웃에서 술과 음식을 갖추고 초청하면 대답하기를, “나를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으로 여기는가?”하였으며, 친구가 찾아오면 벽의 구멍을 통해서 서로 보면서 말하기를, “얼굴을 보았으니, 제각기 해야 할 공부를 하는 것이 가하다.”하였으므로, 온 동리에서 미치광이 신랑으로 여겼다. 나이 19세에 사마 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으며, ≪논어(論語)≫를 읽다가 누항장(陋巷章)의 주(註)에 이르러 말하기를, “그 글자를 완상하고 음미함에 저절로 깊은 뜻이 있어 반드시 찾아서 얻어 내려한다.”하고, 일곱 권(卷)을 모두 열람하면서 앉은 채로 닭이 우는 시각까지 이르렀는데, 가득하던 등잔의 기름도 이미 다하였다. 뒤에 회암(晦菴, 주자(朱子))이 논한 것을 읽고서 말하기를, “도리(道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지극히 섬세하고 극도로 갖추어져 있으니, 곧장 연구하면 십분 통철하여 막힘이 없고 가슴속이 동요없이 침착하여 모든 사물과 하나가 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하면서, 어슴푸레 비로소 깨달음이 있어 마침내 ‘여만물위일부(與萬物爲一賦)’를 지었으며, 또 ‘그 글자에 대한 부[其字賦]’를 지었는데, 그 전일하고 정밀하게 완미하고 탐색한 부류가 이와 같다. 상주 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이 보고서 중하게 여겨 서실(書室)에서 학문을 성취하도록 권면하고 책과 식량, 종이와 붓을 잇대어 주었더니 바로 한 책자를 완성하였는데, 손수 ≪대학≫ 장구(章句)를 쓰고 혹문(或問)을 참고하여 합해서 한 부(部)를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낮에는 읽고 밤이면 생각하였는데 이로부터 학문이 날로 넓어지고 문장은 날마다 융성해졌으며, 정신이 요긴한 곳에 노닐어 닿는 곳마다 구애됨이 없었으므로, 사방에서 그가 지은 것을 전하며 외웠지만 공은 지엽적인 일로 여겼다. 그리고는 고금(古今)의 초록(抄錄)하여 모은 글과 자신이 지은 시부(詩賦)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과거 응시를 정지한 채 3년 동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마음을 가라앉혀 연구하고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정신을 기울여 옛 것을 생각하며 익숙하도록 읽어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었으며, 천하의 사물과 고금의 모든 글을 모두 ≪대학≫을 가지고 평론(評論)하게 되었다. 심지어 장주(莊周)ㆍ굴원(屈原)ㆍ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 등 여러 대가(大家)가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들썩이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중용≫과 ≪대학≫에 제외되고 배치된다고 하여 조금도 보지 않았다.
그의 중형이 과거에 응시하도록 극력 권하여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이를 대장부의 사업이 아니라고 여겨 ≪중용≫과 ≪대학≫을 강론하고 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며 마음을 바로잡는 말과 도기(道器, 이기(理氣))의 광대하고 은미(隱微)한 묘리를 입에서 끊지 않고 호리(毫釐)를 분석하였다. 좌객(座客)이 간혹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하면 즉시 책을 펴고 강설(講說)하기를, “한가한 이야기는 그만하시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각기 직업이 있으니, 배우지 않으려면 농사를 짓는 것이 가하오.”하였으며, 후생(後生)의 소년을 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식량을 싸가지 않고 산에서 놀기를 좋아하면 끝내는 기필코 주리게 되니, ≪중용≫과 ≪대학≫은 식량 격이고 백가(百家)는 산에서 노니는 격이다. 이 두 책을 익숙하도록 읽어 지식과 행동 그리고 본체와 작용이 가슴 속에 환하게 되면, 천하 고금의 변화와 백가 제자(百家諸子)의 학설을 모두 마음 속에 저울질하여 마치 배부르게 먹고 산에 노니는 것과 같아서 현기증이 나거나 걸음걸이가 군색해지는 한탄은 없게 될 것이다.”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에 함흥 교수(咸興敎授)로 부임하였는데, 공이 “북방(北方)에는 문학(文學)을 숭상하지 않는다.”고 하여 감사에게 청해서 문회당(文會堂)을 고을의 치소(治所) 북쪽에다 건립한 다음, 손수 쓴 ≪대학장구혹문(大學章句或問)≫에다 스스로 발문(跋文)을 지어 인간(印刊)하여 널리 배포하고 몸소 일과를 권면하였으며, 인하여 문회당 기문(記文)을 지어 게시(揭示)하였다.
청련(淸蓮) 이후백(李後白)이 감사가 되어 기문과 발문을 보고 감탄하기를, “이 분이야말로 참된 선비이다.”하면서, 비로소 추천하여 기용하도록 해야겠다는 뜻을 두었다. 이듬해인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 겨울에 교서관 저작(校書官著作)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도포동(陶圃洞)에 살면서 스스로 호(號)를 취병(翠屛)이라 하고, 비로소 ≪주역(周易)≫을 읽었다. 그러다가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에 걸현1)(乞縣)하여 회덕 현감(懷德縣監)에 임명되었으며, 임지에 도착하여 밀봉한 글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殿下)는 군자(君子)를 알아주지 아니하고 군자는 군자와 화목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당시 동서(東西)의 당의(黨議)가 처음으로 행하여지자, 공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닭과 학은 구분이 쉽지만 큰 기러기[鴻]와 작은 기러기[鴈]는 분별하기 어려우니, 송(宋)나라 때 천당(川黨)과 삭당(朔黨)의 다툼은 당(唐)나라 때 우승유(牛僧孺)의 당과 이덕유(李德裕)의 당보다 심하였는데, 스스로 나에게 있는 권도(權道)를 정밀하고 절실히 하여 어긋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조금의 치우침만 있어도 뒤집힘이 금방 이르게 되나니, 진관(陳瓘)의 배를 타는 비유2)는 바로 이를 이르는 것이다.”하였었는데, 마침내 상소 가운데 언급하였다. 그리고 또 ≪전인보감(銓人寶鑑)≫ 한 부(部)를 지어 장차 올리려고 하다가 결행하지 못하였다. 또 감사에게 편지를 올려 조석(朝夕) 제공에 방안(傍案)을 모두 없애고, 소[牛] 잡는 것을 금지하며, 가죽신 신는 것을 금지하고 관비(官婢)는 모두 짚신을 신도록 하였으나, 마침내 사정에 어둡고 실정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그리고 ≪강학방(講學方)≫과 ≪중용체용해(中庸體用解)≫ 등의 책을 이곳에서 지었으나 모두 난리 통에 잃어버렸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영령(梬嶺)에서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상복(喪服)을 벗고 도포동에서 두곡(杜谷)의 종가(宗家)로 돌아와 또 호(號)를 두곡(杜谷)이라고 하였다. 종가는 일찍이 종손(宗孫) 고한수(高漢壽)가 팔아 넘겼으며, 사당(祠堂) 또한 허물어졌는데, 사당 앞에 그 전에 감나무가 있었으나 말라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종가를 수복하여 거처하였더니 말라죽었던 감나무에 다시 움이 텄으므로 설(說)을 지어 기록하였다. 이듬해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전 현감이 주홍색 옥교(屋轎)를 만들어 미처 장식을 하지 못하고 파면되어 돌아가고, 공이 대신 부임하였다가 재상(災傷)으로 잇달아 파면되었는데, 공이 먼저 출발하였고 자제가 내행(內行)을 정돈하여 뒤따라 출발하면서 그 옥교를 꾸며 내행을 받들고 돌아오자, 공이 엄하게 꾸짖으며 즉시 그 가마의 지붕을 제거하게 하고 또 조각한 교자의 발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년)에 강원 도사(江原都事)에 임명되어 길을 나서다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부임하지 못하였으며,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사도시 첨정(司
寺僉正)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서정록(西征錄)≫과 ‘도자설(道字說)’을 지었다.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이후백(李後白)의 추천으로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에 임명되고, 조금 있다가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 임명되었는데, 다스리기를 옛날의 지조대로 하였더니 오래가지 않아 아문(衙門)이 저자같이 되었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자,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일찍이 ≪대학(大學)≫의 발문을 지은 고 아무개가 어찌 이와 같을 리가 있겠는가? 반드시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의 위급함을 구해 주려다 이런 지저분한 이름을 얻게 되었구려.”하였으니, 공을 스물 네 차례나 추천한 청련(靑蓮, 이후백의 호)이야말로 공을 정말로 잘 아는 분이다. 이듬해 무인년(戊寅年, 1578년 선조 11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차운(次韻)하였으며,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임명되고,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상주 제독(尙州提督)에 임명되었으며,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공이 변경의 근심이 있을 줄 알고 감사(監司) 김수(金睟)에게 상서(上書)하여 제생(諸生)들에게 육예(六藝)를 베풀어 활 쏘고 말 타는 일을 익히며, 여러 고을에 강무당(講武堂)을 건립하여 무예를 강습하도록 청하였으나 각성하지 못하였다. 안동 제독(安東提督)에 임명되었는데,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변(倭變)을 만나 행재소(行在所)에 상소하여 물리칠 것을 수행할 대도(大道)와 변고에 대처하는 달권(達權)을 상소하였지만 길이 막혀 전달되지 않았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안자서(顔子書)≫를 지었으며, 이듬해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조정의 논의가 공을 사유(師儒)의 직임에 임명하여야 한다고 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신감집(神鑑集)≫과 ≪비은발휘(費隱發揮)≫를 지었고,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경주 제독(慶州提督)에 임명되었다가 8월 28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이 75세였다. 집안에 한 가지 물품도 없어 염습하고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원근의 사류(士類)가 다투어 부의(賻儀)를 보내어 이해 11월에 영령(梬嶺)의 선영(先塋) 곁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산록에 장사지냈다. 공이 화산(花山) 남극문(南克文)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으니, 장남은 고충운(高冲雲)이고, 차남은 고한운(高翰雲)으로 일찍이 문예(文藝)가 있어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의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하고,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다음은 고득운(高得雲)으로 일찍 죽었다. 장녀는 사인(士人) 김종효(金宗孝)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이덕준(李德駿)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었다. 고충운이 2자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4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박우현(朴友賢)에게, 다음은 문가회(文可晦)에게, 다음은 박이순(朴以淳)에게, 다음은 이영복(李英馥)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공의 측실(側室)에게서 4자를 낳았으니, 고상운(高祥雲)ㆍ고진운(高縉雲)ㆍ고대생(高代生)ㆍ고복생(高復生)이다.
공은 마음이 허허롭고 이지(理智)가 분명하며 뜻은 멀고 크게 보았는데, 그가 학문을 하면서 스승을 거치지 않고 자득(自得)하였으며 외우거나 읽을 뿐만이 아니고 반드시 묵묵히 이해하기를 구하였고, 알 뿐만이 아니고 반드시 좋아하고 즐거워하기를 구하였다. 무릇 평생 동안 얻은 바 그림[圖]과 설(說), 그리고 시(詩)ㆍ부(賦)며 가곡(歌曲)의 부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무릇 사인(士人)을 만나면 안부를 물을 겨를도 없이 번번이 ≪대학≫을 강론하였는데, 비록 용인(庸人)ㆍ무부(武夫)ㆍ동자(童子)ㆍ소리(小吏)라 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반드시 한두 장(章)을 강습하도록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사정에 어둡고 실정에 맞지 않음을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공은 절실하다고 여겼었다.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가지 서책 이외에 일찍이 문장[詞翰]에 종사(從事)하지 않았으며, 재주는 뛰어나고 마음은 호탕하여 붓을 들어 쓰면 문장이 이루어지는데, 다듬기를 일삼지 아니하고 성률(聲律)을 구하지 않아도 의미와 취향이 통달하고 여유 있게 치달으니, 비록 세상에서 문장에 노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더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일을 잡고 있는 때나 음식을 마주하고 있을 적이라도 다른 사람을 시켜 붓을 잡게 하고는 입으로 불러 주기를 거침없이 하였으며, 또한 자구(字句)를 수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간(諫)하기를, “사람을 가르침에 반드시 그 재주를 따라야 하며 또 분발하기를 기다렸다가 행하여야 하는데, 지금 공은 적합한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뜻과 취지를 관찰하지 않고서 ≪대학≫ㆍ≪소학≫ㆍ≪중용≫ 등의 책을 가르치므로, 듣기를 싫어할 뿐만이 아니고 의미를 잘 아는 이도 드무니, 아마도 가르치는 도리가 아닌 듯 싶습니다. 더구나 이론을 세워 이야기하는 것과 책을 저술하는 것은 반드시 모두 마음을 썩이며 힘을 다하여 구상하므로 말 한마디와 글자 하나도 감히 용이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나오면 세상에서 중하게 여기는데, 공은 유독 그렇지 아니 하여 입에서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번번이 읊고 회포가 있으면 곧장 쓰며, 가끔 속된 말이나 장난기 섞인 말을 하여 조금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세상에서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후세에 전하여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은 조금 더 연구하고 사색하여 스스로 경솔하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辭)는 뜻의 전달을 취하고, 문(文)은 이치를 밝히는 데 그칠 뿐인데, 기필코 수재(繡梓, 문서를 판목에 새겨 간행함)하기를 바라야 하는가? 그리고 또 ≪소학≫ㆍ≪대학≫ㆍ≪중용≫ㆍ≪맹자≫에 있는 말은 사람의 일상 생활에 해야 할 일로서 물과 불보다 절실하니, 사람이 알지 못하면 하루도 존재할 수 없다. 동자(童子)가 나아가서 뵈오면 성인(聖人)도 함께 말을 해야 하며, 애산(崖山)의 배 안에서도 ≪대학≫을 강론하였는데3), 어찌 어리석다고 하여 가르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난리가 났다고 하여 강론을 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 또 생소하고 괴벽하거나 올바르지 않은 책에는 일찍이 한 번도 눈을 머물지 않았으며, 헐뜯거나 박절한 말은 한 차례도 입에서 내뱉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함은 자연 이치의 공변된 것이다. 그래서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는 것은 오래 가야 마땅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는 것은 짧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바람ㆍ구름과 달ㆍ이슬을 읊은 글의 육당 시체(六唐詩體)나, 말라죽은 나무와 불이 꺼진 재 같은 부류인 선불(仙佛)ㆍ도가(道家)는 모두 실질적으로 쓰이는 데 보탬이 없고 유교[吾道]에 해로움만 있으니, 기필코 가혹하게 배척하고 극력 나무라야 한다.”하였다. 만년에는 ≪주역≫ 읽기를 즐겨하여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부터 세상을 마칠 때까지 외우는 것을 그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천지 만물의 이치와 음양 귀신의 오묘함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며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캐고 탐색하면서, 한 가지의 사물을 보기만 하면 번번이 한 가지의 이치를 연구하여 도화(圖畵)로 나타나기도 하고 풍영(諷詠)에 부치기도 하면서 마음은 태고(太古)에 노닐고 요순(堯舜)을 그리워하며 털끝만큼도 세상에 대한 염려에 얽매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기상(氣象)을 사모하여 시부(詩賦)와 가곡(歌曲)에 흥취를 부치지 않음이 없었는데, 일찍이 시 한 편을 읊기를,
“아득한 천지에 자연의 원리가 얼마인가 (茫茫天地幾鴻濛)?
조화는 공이 되고 만물은 돈이 되어 (造化爲功萬物銅),
탐욕이 가득한 세상의 인심 넘쳐서 그치지 못하고 (隴蜀世情漫不止)
평범함을 매질하는 사람의 일 저절로 끝이 없도다 (楚凡人事自無窮).
지난 자취 곰곰이 생각하매 한 바탕 꿈만 같고 (尋思往古眞蝴蝶)
오늘에 닥친 일 가만히 따져보면 역시 도에 지나쳐 (默算來今亦螮蝀).
안락한 일생을 누가 모두 얻을 것인가 (安樂一生誰會得)?
낙양의 누각은 층층이 공중에 솟았네 (洛陽樓閣起層空).”
하였는데, 편안하게 승묵(繩墨) 밖에 스스로 처신하면서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가지고 조금도 저지당하지 않았으며, 간혹 그의 지나친 대범함을 비난하여도 공은 그대로 대처하면서 바꾸지 않고 본성을 따라 행동하며 외모를 다듬지 않았고, 전후의 벼슬살이에서도 담담하기가 가난한 중과 같아 해진 도포와 뚫어진 신을 신고도 남을 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측실(側室)인 황씨(黃氏)가 부귀한 집안에서 생장하여 옷의 장식이 매우 화려하므로 공이 비단 옷을 모두 거두어다 큰 함 속에다 갈무리하고 뚜껑을 덮은 뒤 못질을 하여 다시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들 고한운(高翰雲)이 부안(扶安)의 수령이 되어 모부인(母夫人)의 생일을 당하여 와서 수연(壽宴)을 베풀면서 읍재(邑宰)를 초청하여 좌정(坐定)하였는데, 공이 술을 데우는 데 사용하는 새 봉로(峰爐)를 보고 좋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저 봉로도 부안에서 가져온 것이냐?”하매,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공이 책망하기를, “우리 집에 그전부터 봉로가 있는데, 네가 또 보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봉우리가 세 개이고 발이 세 개 달린 기구를 먼 곳에서 온전하게 가져오려면 그 괴로움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네가 차마 그런 일을 하니, 이런 식으로 벼슬살이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즉시 없애도록 하라.”하였는데, 부사(府使) 최경장(崔慶長) 공이 감탄하기를, “이는 벼슬살이를 하거나 자식을 교육하는 자가 모두 본받아야 할 일이다.”하였다. 그리고 전후의 상사(喪事)와 제사에 여러 형제들이 가난하다는 것으로 돌아가며 제사지내는 세속의 사례를 활용하지 아니하고 공이 모두 혼자서 판비(辦備)하였으며, 같은 옷이 두 벌 있으면 한 벌은 풀어서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고, 쌀이나 베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사사로이 방에 들이지 아니하고 즉시 별도로 간직하게 하였다가 차등이 있게 나누어 주었다.
바야흐로 삼경4)(三京)이 와해(瓦解)되고 지존(至尊)이 서민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 때를 당하여 공이 화산(花山)에 있으면서 시대를 걱정하고 강개(慷慨)하여 이미 소(疏)를 봉하여 올렸으나 진달되지 않았고, ‘유회부5)(幽懷賦)’에 느낀 바가 있어 구절마다 주석과 해설을 붙여 그 원수를 갚으려는 의리를 밝혔다. 당시 왜적이 변방의 해안에 둔취하여 있었는데 쑥대는 들판에 가득하므로, 공이 역전과(力田科)와 철환과(鐵丸科)를 설치하여 군대와 농사를 나누어 여러 사람의 뜻을 하나가 되도록 청원하고,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발휘하도록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며, 무학(武學)을 독려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성취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은 일찍이 잠깐 동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는 옛날의 전원으로 돌아와 두어 칸의 초가에다 몇 이랑의 척박한 전지로 시중드는 비첩(婢妾)과 친히 호미로 김을 매며, 아침에는 된 죽을 먹고 저녁에는 묽은 죽을 먹으면서도 즐거워 하며 근심을 잊었다. 보는 바가 이미 크므로 처음의 근본으로 마침내 되돌아가는 이치를 환하게 관찰하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귀신과 죽고 사는 이치는 알기가 어렵지 않으나, 사람들이 모두 경험하면서도 모르기 때문에 이단의 윤회(輪回)의 설이 사람을 미혹되게 한다.”하면서 즉시 읊기를,
“도는 하늘에 근본하며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니 (道本於天不遠人)
시시와 각각을 말하지 마오 (休言刹刹與塵塵).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건 모두 자연의 이치이며 (鷄鳴犬吠皆天理)
물고기가 뛰고 소리개가 나는 것 역시 귀신이로다 (魚躍鳶飛亦鬼神).
여름에 칡옷 겨울의 갓옷이 어찌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랴 (夏葛冬裘寧飾僞)
굶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이 다 진실에서 말미암았네 (飢餐渴飮總由眞).
밤과 낮이 삶과 죽음이 됨을 알려고 한다면 (欲知晝夜爲生死)
달은 편 활 같기도 하다가 또 수레바퀴 같기도 하다네 (月似張弓又似輪).”
하였으며, 또 ‘살아있을 때는 순리대로 죽을 때는 편안하게’라는 뜻을 취하여 묘산 재사(墓山齋舍)의 이름을 순령암(順寧菴)이라고 이름 지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 7월 경주에 있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시를 짓고서 곧장 행장을 꾸려 집으로 돌아왔으며 얼마 안 되어 병이 들었는데, 자제(子弟)가 약(藥)을 올리자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가 소 강절(邵康節)의 즐거움을 누렸었고, 또한 소 강절의 수를 누렸는데,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하면서 두 차례 올렸으나 두 차례 물리치고 옷깃을 여민 채 유연(悠然)히 세상을 떠났다. 아! 질박한 대도(大道)가 흩어졌고 순수한 기풍이 상실되었도다. 공이 홀로 인정의 경박함이 극치에 이르른 시대에 처하면서 겉만 꾸미는 것을 미워하고 아주 실질적인 데로 돌리려 하였으니, 맞지 않고 어긋나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 하늘에 달려 있는 것 또한 더러는 기필할 수 있는데, 수(壽)는 백세에 부족하고 가문에는 자손이 끊겼으니, 하늘이 공에게 갚아 준 것이 또한 어디에 있는가?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를 밝혀 일찍이 대의(大義)를 보였으니, 공의 타고난 천성이 남보다 특이함이 아니겠으며,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천도(天道)를 즐기며 올바름을 터득하여 일생을 마쳤으니, 공이 얻은 바가 다른 사람보다 풍부함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스스로 즐기면서 저기에서 원하지 않았으니, 공이 상하에 대하여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내가 어렸을 적부터 공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 귀에 젖고 눈으로 익힌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평소에 보거나 들은 언행(言行)을 추기(追記)한 것이 열에 여덟 아홉 가지는 잊어 버렸으며, 또 병화(兵火)에 흩어지고 잃어버린 유편(遺篇)을 수습한 것이 단지 약간편(若干篇) 뿐인데, 내 자신이 당하(堂下)에 있으므로 감히 참람되게 논의하지 못하여 뒷날의 바르게 평론하는 자가 경중을 다루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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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 고응척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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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출처
제공처 정보
[네이버 지식백과] 고응척 [高應陟]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註; 12世龜齡-13世游-14仁規-15世世亨
낙봉서원[ 洛峯書院 ]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에 있는 서원. 1647년(인조 25)에 김숙자, 김취성, 박운, 김취문, 고응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7년(정조 11)에 '낙봉'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다.
유형시대성격건립시기·연도규모(면적)소재지소유자관리자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적 |
조선/조선 후기 |
서원, 교육시설 |
1647년(인조 25) |
743.7㎡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 474 |
낙봉서원 |
낙봉서원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1989년 05월 29일 |
목차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조선후기 김숙자 등 5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문화재자료.
내용
1647년(인조 2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숙자(金叔滋)·김취성(金就成)·박운(朴雲)·김취문(金就文)·고응척(高應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7년(정조 11)에 ‘낙봉(洛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1년 지방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은 3칸의 상덕묘(尙德廟)·신문(神門)·4칸의 집의당(集義堂)·양정문(養正門)·세심재(洗心齋)·정교당(正教堂) 등으로 되어 있다. 사우(祠宇)인 상덕사에는 김숙자·김취성·박운·김취문·고응섭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집의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거경재와 명성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향사(享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위패가 봉안된 선조들의 문집 판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각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재산으로는 논 3,000여 평, 임야 3정보 등이 있다.
참고문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첫댓글 명종(明宗)때 문과에도 높은 등수로 합격하고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에 위패도 모시고 대단한 분입니다. 고응경의 동생이 되는군요.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 남겨봅니다
우리 동래정씨 정세형(鄭世亨)의 외손자가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시고 현감으로 재임하였으나 여러번 사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낙봉서원에 김숙자 김취성 박운 김취문 같은 대학자와 함께 봉안되었다는 기사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