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소감】
‘하숙집’에 관한 잊지 못할 추억
- 최원현 수필 「하숙집」을 읽고 -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대전수필문학회 카페 『초대 수필』방에 올라온 최원현 수필가의 수필 「하숙집」을 읽었다. 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인 이득주 수필가가 올린 초대 수필이다.
최원현 수필가와는 오랜 세월 작품으로 교감하면서 지내왔다. 하지만 평소 ‘잘 안다’라는 남다른 인연만으로는 작품에 대한 소감을 감히 말하긴 어렵다.
특정 작품이 유난히 가슴에 스며들어 소감 한마디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무언가가 내면으로부터 솟구쳐야 한다. ‘감명 깊은 작품’이어야 독후기(讀後記)가 절로 써진다는 말이다.
최원현 수필가는 1990년대 초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KBS 방송국의 문학프로그램을 통해 인연을 맺은 작가들이 ‘문학동인’을 결성했고, 당시 동인 회장이었던 양상민 수필가의 사무실에서 최원현 수필가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최원현 수필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핸썸한 외모에다가 남달리 따뜻한 눈빛이 호감을 주었다. 수필작품에서 느꼈던 다정다감하고 반듯한 삶의 정서가 작가의 얼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후 30여 년 문단 활동을 하면서 최원현 수필가의 수많은 작품을 각종 지면을 통해 읽었다. 수필집도 받았다.
오늘 소감을 말하고자 하는 「하숙집」은 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 (2015년 여름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나는 이 수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옛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숙집’이라고 하면 맨 먼저 내 고향 충남 청양 시골집에 인근 초등학교 선생님이 ‘숙식’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하숙’이란 말은 시골 사람들의 입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현대식(?) 용어보다는 시골 농가이므로 세끼 식사와 잠자리 제공 정도의 인식이었다.
김기평 선생님.
부모님으로부터 그 선생님의 함자를 하도 많이 들어 내 귀에도 익숙하다.
※ 김기평 교수(1921~2020년 / 100수를 누리심. 충남 청양 정산 출신, 1940년~1961년 초등, 중등교사 역임, 1962년~1986년 공주교육대학교 국어과 교수. 주요 저서 : 『사서삼경 주해서(四書三經 註解書)』 완간 2012년)
나태주 시인이 지난 해 대전일보 칼럼 「마당을 쓸었습니다」(2020.8.21.)에서 밝힌 옛 은사 김기평 선생님이 바로 나의 시골집에서 숙식을 했다.
김기평 선생님은 자신의 첫 부임지였던 청양 『장평초등학교(옛 적곡국민학교) 60년史』(1995) - ‘은사님 회고담’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때에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신 윤길원 부모님에게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윤길원’은 나의 장형이고, 부모님은 생시에 김기평 선생님이 우리 집에서 숙식했던 사실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 김기평 선생님의 첫 부임지인 충남 청양 적곡국민학교 교사 시절, 나의 집에서<하숙 생활(숙식)>을 언급한 회고담(충남 청양 《적곡국민학교 60년史》 회고담)
▲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은사였던 김기평 선생님의 훌륭한 인품을 언급한 대전일보 칼럼
부모님이 김기평 선생님을 누구보다 잊지 못할 ‘인연’으로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니었다. 힘든 보릿고개 시절, 내 집에서 숙식하는 선생님에게 변변한 반찬도 없이 식사 제공하면서 끼니 때마다 얼마나 죄송스러웠으면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실까 생각했다.
최원현 수필가의 수필 「하숙집」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장모님이 학교 선생님 하숙을 치면서 ‘반찬 걱정’하는 장면이다.
『내가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시골에 내려가니 장모님께서 하숙을 치신다 했다. 웬 하숙이냐 했더니 마을 건너에 중학교가 생겼는데 학교 선생님 중 몇이 찾아와 부탁을 했다 한다. 환갑 나이에 어떻게 손님식사를 매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거절을 했지만 드시는 식사와 반찬대로 해달라고 간청을 하니 거절을 더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처음에 선생님 둘을 받게 되었고 하나 더 늘어 셋의 식사를 해 주게 되었단다. 점심까지도 먹어야 하는데 집까지 먹으러 오는 게 번거롭고 불편할 테니 학교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더니 학교에서 일하는 아이를 보내 가지러 오고 그릇은 퇴근 때 가져오곤 한단다. 그래도 부부만의 식사로 가벼울 수 있던 식탁인데 매끼 반찬 걱정을 해야 했고 늘 같은 반찬만 상에 올릴 수도 없으니 꽤 신경이 씌었을 법하다.』
김기평 선생님은 인품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비록 끼니 반찬은 변변치 않았지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정을 나누었다. 나의 부모님은 당시 하숙생이었던 김기평 선생님의 훌륭한 행실과 인품을 이렇게 회고하셨다.
“김기평 선생님은 한 식구나 다름없었지. 먹는 것, 잠자는 것, 모두 서먹서먹한 남남이 아니라 한솥밥 먹는 핏줄보다 더 친숙하게 지냈지. 퇴근하면 팔 걷어 붙이고 풍구질이며, 곡식 널어놓은 멍석 거두기까지 내 일처럼 도와준 한 식구와 같은 선생님이었지.”
두번 째 떠오르는 추억.
나 역시 과거 학창시절에 하숙 생활을 했다. 최원현 수필가의 「하숙집」에 등장하는 어느 당차고 넉살 좋은 학생처럼 마음에 드는 여대생 딸에 반해 하숙하게 된 집은 아니었지만, 나는 당시 하숙집 아주머니로부터 남달리 사랑을 듬뿍 받았다.
밥상의 반찬도 언제나 정갈하고 푸짐했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영양가 있는 밥상이어서 주말에 집에 가면 어머니가 “우리 아들 훌쩍 컸네. 얼굴빛도 좋아졌고.”라고 말씀하셨다.
궁핍했던 옛 시절, 어른들은 자식한테 ‘살쪘다’라는 말은 삼갔다. ‘얼굴빛이 좋아졌다’라는 말씀은 곧 ‘건강(영양) 상태가 좋아 보인다’는 뜻이었다.
당시 하숙집 바깥어른은 양조장에서 근무했는데, 명절 때는 으레 차례상에 올리라고 하숙생인 내게도 동동주 선물을 잘 포장하여 주기도 했다.
그런데 융숭한 밥상에 부모님과 같은 따뜻한 사랑을 듬뿍 받고서 하숙비를 제때 드릴 수 없어서 죄송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돈 대신 ‘쌀 나올 때 몇 말’, ‘보리 나올 때 몇 말’ 하는 식으로 하숙비를 곡식으로 셈하던 시대였다.
무거운 책가방에다가 쌀자루까지 어깨에 메고 어떻게 먼길 버스를 타고 가냐고 투정했더니, 어머니가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장터거리에 나가 돈으로 바꾸어다 주시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 나의 어머니
최원현 수필가는 이처럼 「하숙집」이란 수필을 통해 내 어머니의 고생스러웠던 모습과 가슴 아린 옛 추억까지 소환하고 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지만 글로 다 적어낼 수가 없다. ■
2021.12.1.
윤승원 소감 記
【초대수필】
하숙집 최원현 (※사진출처 : 최원현 수필집 『내 향기 내기』 저자소개)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문우가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 오랜만에 들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사가 유난히 가슴을 파고든다.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하숙을 하다가 먼저 가신 이들처럼 소리 없이 가야 하는 게 인생일 것이다. 나도 몰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헌데 그 속에서 손을 흔들고 스쳐가는 한 모습이 있다. 그의 고향은 전남 순창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하숙을 했다. 학교 옆이었다. 아니다. 처음엔 분명히 자취를 한다고 했고 자취집을 구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하숙집을 정했다고 했다. 조금 엉뚱한 구석도 있지만 그의 집 생활은 비교적 넉넉했기에 하숙비 걱정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3년의 전력을 내세우며 부득부득 자취를 하겠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하숙으로 바꾼 걸까. 하숙집은 자취집을 정했던 바로 옆집이라고 했다. 자취집에서 반찬거리를 사러 나가는데 한 아가씨가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더란다. 순간 내 성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가 들어간 집을 바라보니 ‘하숙생 구함’이란 글이 붙어있더란다.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뒤쫓아 들어가 하숙을 하겠다고 했더니 여학생만 받는다고 하더란다. 허나 그가 어찌나 집요하게 간청하고 설득하여 물고 늘어졌는지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그날부터 바로 하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한 번 본 그 아가씨에 빠져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나도 녀석의 하숙집엘 몇 번 갔었는데 괄괄한 성격의 그가 어찌나 그 집에선 고분고분한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바로 그 집 딸인 S여대생 때문이었다. 나도 그 여학생과 몇 번 마주쳤지만 말을 건네거나 해보진 못했었다. 하지만 녀석은 넉살 좋게 하숙집 주인에게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싹싹하게 해댔고, 늘 늦게 들어오는 주인아저씨 대신 남자 손이 필요할 일들을 곧잘 해주어 식구처럼 지내는 것 같았다. 그 집엔 꽤 큰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그 시고 달콤하던 맛은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다. 마당가엔 펌프도 있어서 여름이면 녀석은 그곳에서 등목도 한다고 했다. 하숙집이란 내 가족이 아니면서도 내 가족처럼 마음과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할 때도 있지만 대개 일상의 먹는 반찬에 손님용 반찬 한 가지 정도 더 마련하고 식구들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리는 것이 일반적 행태였다. 물론 대대적으로 하는 그런 직업적 하숙과는 다른 경우다. 한 집에서 매일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니 가족이 아닌가. 그것이 1년, 2년, 3년으로 이어지면 가족보다 더 정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직접 하숙할 기회는 가져보지 못했지만 친구의 하숙집을 통해 그 맛을 조금은 맛보면서 한껏 부러운 마음을 갖기도 했었다. 녀석은 그 집 딸과 상당히 관계가 진척되어 결혼을 하게 되지 않을까도 상상을 했었지만 인연은 거기까지만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군 입대로 막이 내린 녀석의 하숙 생활3년여는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시골에 내려가니 장모님께서 하숙을 치신다 했다. 웬 하숙이냐 했더니 마을 건너에 중학교가 생겼는데 학교 선생님 중 몇이 찾아와 부탁을 했다 한다. 환갑 나이에 어떻게 손님식사를 매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거절을 했지만 드시는 식사와 반찬대로 해달라고 간청을 하니 거절을 더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처음에 선생님 둘을 받게 되었고 하나 더 늘어 셋의 식사를 해 주게 되었단다. 점심까지도 먹어야 하는데 집까지 먹으러 오는 게 번거롭고 불편할 테니 학교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더니 학교에서 일하는 아이를 보내 가지러 오고 그릇은 퇴근 때 가져오곤 한단다. 그래도 부부만의 식사로 가벼울 수 있던 식탁인데 매끼 반찬 걱정을 해야 했고 늘 같은 반찬만 상에 올릴 수도 없으니 꽤 신경이 씌었을 법하다. 한데 매월 꼬박꼬박 정해진 날에 들어오는 하숙비에, 두 노인만 사는 집에 젊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 좋기도 했었나 보다. 장모님께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몇 년간이 참 즐거웠다고 하셨다. 거기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후에도 가족과 함께 찾아오거나 명절 때 인사를 오곤 했다 한다. 장모님이 참 잘 해주셨던 것 같고 그들은 그들대로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많이 외로웠을 텐데 장모님 덕에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던가 보다. 그렇고 보면 하숙집이란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의 구성체요,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조직이 가정이라면 하숙집도 그만 할 것 같다. 친구의 하숙집에서 보고 느끼던 따뜻함과 스스럼없음, 어쩌다 처가에 갔을 때 한 상에 둘러 식사하던 하숙생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요즘 가족끼리도 한 달에 한 번 함께 식사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그러니 아무리 피붙이라도 정이 자랄 수 있겠는가. 그저 가족이라는 의무감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상에 밥을 먹어야 정이 나고, 한 방에 잠을 자야 흉허물이 이해된다고 했던 옛 어른들 말씀이 결코 그르지 않으리라.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아주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하숙집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일 수 있지만 가장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우리만의 공유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 가사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인생 자체가 잠시 머물고 가는 하숙집이고 우리 모두가 하숙생이다. 내 품안에 있던 자식도 어느 순간 제 날개가 생겼다고 그 날개 힘만큼씩 날아가 버린다. 손주 녀석들은 아직 날개가 없으니 저러지 곧 할애비 찾아오는 것도 핑계 앞세워 미루고 미루리라. 문우가 보내준 노래를 틀어놓고 듣노라니 내 집이라고 살고 있는 이 집도 하숙집이고 북적대는 아들네 식구도 얼마 후면 저들 길로 떠날 하숙생이 빤하니,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이란 노래 가사가 꼭 맞는 것 같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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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숙집 글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추억을 연결해 쓰신 점 참으로 돋보입니다. 나도 10여 년 간의 학창 시절에 하숙을 2~3개월 한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공감대를 넓히게 되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하숙을 친다고 하는 말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 아시면 일러 주시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존경하는 정 박사님께서 공감해 주시고 따뜻한 댓글로 격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최원현 수필가의 「하숙집」은 세월이 흘러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수필입니다.
‘하숙집’이라고 하면 학창시절에 객지에서 하숙해 본 사람들은 많은 추억이 떠오를 것입니다.
※ <하숙을 친다>라는 말의 어원을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친다>라는 말은 본딧말 <치다[동사]>의 활용어입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어원>에 의하면,
<주로 영업을 목적으로 남을 머물러 묵게 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예문’을 들면 <학교 주변에는 하숙을 치는 집이 많다.>라고 쓰이지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치다」의 여러 갈래 쓰임새 뜻풀이가 나옵니다.
졸고 소감에 대한 정 박사님의 깊은 관심과 따뜻한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하숙에 관한 재미있는 글을 읽어서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나도 하숙생활을 경험하였고 주인과의 관계나 주인의 딸과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딸이 있는 집에 하숙을 하긴 하였지만 그 딸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할 수 있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처녀들에게 편지를 보낸 일은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여교사에게는 수개월 동안에
수십통의 편지를 보냈더니 연말에 이르러 절반정도를 큰 봉투에 넣어서 반송하더군요.
내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직설적인 표현은 전혀 없었고
조금은 실성한 사람처럼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아서 조금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나는 뒤늦게 백조와 같은 처녀를 만나긴 하였지만 엉뚱하게도 병역문제가 대두하는 바람에 다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20대의 아름다운 청춘에 멋진 연애도 못해보고 30대에 들어서 결혼하고나니
나의 청춘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Hesse는 "schoen ist die Jugend!"라고 하였지만 말입니다. .........
존경하는 지 박사님께서도 ‘하숙 생활’ 추억이 있으시군요.
<딸이 있는 하숙집>은 하숙생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잘 이루어져야 행운이지요.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그보다는 초등학교 여교사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 그리고 반송돼 온 편지도 재미있습니다.
뒤늦게 백조 같은 처녀를 만났으나 병역문제로 포기한 사연은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一代記나 자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대목 같기도 합니다.
‘청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된다면 좋겠지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괴테까지 소환한 지 박사님의 옛 추억이 애틋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1-FIrdG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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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백조"라는 노래나 시나 수필이나 소설이 있을 듯도 한데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여 궁금할 뿐입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 백조를 언제나 잊지 못할 것 같거든요.
내가 그 백조를 포기하고 만 것은 백조를 너무나 사랑한 까닭이었지요.
세상사람들은 Platonic Love나 짝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벌써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나간 옛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백조를 그리워하고
포기한 것을 뉘우치기도 한답니다. ...........................
세상에는 백조도 많을 것이니 백조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백조 같은 여인, 잊을 수 없는 여인,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도 그리운
백조 같은 여인에 대한 플라토닉 러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지 박사님 마음속 애틋한 사연이
한 편의 명화를 보는 듯합니다.
저도 대학 재학 때 보문동에서 하숙을 몇 개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하숙에서 평생 머리에 남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 꽁치가 매일 밥상에 올라 왔는데, 별로 좋아하지 아니 하여 내보내면 아침 그 꽁치가 저녁상에 다시 올라오기에, 약간 젖가락으로 그 등을 떼어 먹으면 다음 밥상에 꽁치를 뒤집어 다시 올라온 그 악몽(?)이 지속되어 10여 년 전까지도 꽁치를 먹지 아니 했습니다. 최근에 등푸른 생선에 그 악몽을 벗어나 있으면 먹는 편이되었습니다. 서울 하숙의 풍속은 대학 초기에는 그래도 서울 중류 가정에서 하숙을 치는 것인데 비하여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순수 하숙을 업으로 하는 가정이 여러 면에서 떨어졌다고 봅니다. 시골에서의 그 낭만을 느낄 수 없지 아니 했던 같습니다. 졸업 후 적십자병원 근처에사 하숙 하다가 도저히 아니 되어 복덕방에 하숙집을 구하려 갔더니, 거의 그 수준의 하숙집인데가 다음 달에 가면 또 그 집이어서, 자취를 한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수필을 잘 읽어씁니다. 감사합니다.
박 교수님 하숙 생활의 애환이 한 편의 수필입니다.
등 푸른 생선, 꽁치 밥상에 대한 남모르는 그 악몽 같은 추억은
그 한 토막 에피소드만으로도 한 편의 수필입니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남모른 사연의 하숙집 풍경,
그 추억을 더듬으면서 또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 댓글에도 '장원 상'이 있다면
박 교수님 오늘 댓글에 '장원 꽃다발'을 안겨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6년제 중등교육을 받을 무렵에는 (중학교) 2학년 시절에 결혼하여 자녀까지 둔 친구가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는 120명 가운데 5-6명이 결혼하고 졸업후에는 2~3년 내에 거의 모두가
결혼하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早婚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친구는 하숙집에서 어찌나 잘 돌보아주는지 과분하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졸업과 동시에 주인집 딸과 결혼하여 새 가정을 꾸몄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초등학교 후배중에는 서울의 名門대학 名門학과에 입학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었는데 그 사람도 하숙집에서 너무나 과분한 대우를 받았는가하면 하숙집 딸과 결혼하였으나
이상하게도 高試(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연이어 실패하고 달리 취업도 제대로 못하여
식생활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하숙집의 덕을 본 것이 아니라 해를 본 것처럼 평가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의 前後에 있었던 일이고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서 있었던 일이니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지나간 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하숙과 하숙생의 숨은 이야기를 들추어 내면 재미있는 소설의 소재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