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㉕ 휴 린턴 선교사와 미 정통 장로교회 선교사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으로
고신총회세계선교회(KPM·이사장 안진출 목사) OPC(정통장로교회)·PCA(미국장로교회) 선교기념관 개관식이 10월 27일 대전 KPM선교센터 예배당에서 열렸다. OPC·PCA 선교기념관은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 건설을 위해 생애를 바쳐 헌신한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다음세대에 교육의 장을 세우고자 기존 PCA 선교사 건물 한 채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것. 특별히 이날 진행된 기념세미나는 휴 린턴 선교사의 장남 인다윗(데이비드 린턴) 선교사를 초청 OPC 선교사의 삶과 신앙을 직접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인다윗 선교사는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다. 1884년 최초의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기독교인이 100명 정도밖에 없었지만 이후 100년이 지나 1985년 한국 정부 인구조사에서 6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개신교 기독교인이라고 발표했다. 아마도 선교 역사상 교회의 가장 빠른 성장일 것이다.”라며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주로 장로교인으로 이 자리에 휴 린턴 목사와 정통 선교사들이 함께 사역했다.”고 밝혔다. 앞서 휴 린턴 선교사의 삶을 본보 선교사열전 21에 소개하였지만 그의 아들 인다윗 선교사가 전하는 정통선교사의 삶을 위주로 다시 정리했다. 왜 어린 나이에 멀리 바다를 건너와 그 사랑을 전하고 다녔는지….
휴 린턴 선교사의 장남 인다윗(데이비드 린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전념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장로교 선교공동체와 그가 자신의 생각과 일에 관여한 선교 전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의 아버지와 그가 속한 선교 전통의 선교사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전념했으며, 그들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휴 린턴 선교사와 미국남장로교 파송을 받은 정통선교사들은 신의 부름을 따라 미지의 땅 한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고 그들의 사고방식이 개혁적이었다.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의 가르침이 진실하며,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 위해 헌신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휴 린턴 선교사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제자들을 만들기 위해 불려왔다고 믿었고 따라서 이 땅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진지하게 순종했다.
사람의 대한 연민은 주님의 명령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라는 말씀 따라서 정통선교사들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 욕구를 다루는 기독교 클리닉과 기독교 병원을 설립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병원들의 업무에서 이웃 사랑은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기독교병원을 설립하는 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의 일부였다.
“아버지와 그가 몸담았던 전통 선교사들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졌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했습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녀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누군가 자신을 보러 오는 것에 대해 심지어 불편한 시간에 오더라도 한 번도 분개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로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을 위해 그의 길을 가로질러 보내셨기에 최선으로 그들을 도우며 섬김을 다했다고 말했다. 남장로교회가 전도를 맡은 한국의 지역은 5개 선교지(군산, 전주, 광주, 목포, 순천)로 구분되었다.
휴 린턴이 순천에 선교사로 순천지역뿐만 아니라 광항지역, 구래지역, 여수지역, 고흥반도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결국 자활교회가 됐다. 휴 린턴 선교사는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라 불릴 정도로 호남지방 도서지역을 두루 다녔다. 이곳에서 제자를 삼아 교회를 세우고 영혼들을 깨웠다.
자기를 부인하고 찾아 온 한국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27). 휴 린턴 선교사와 정통선교사들은 출세가 보장된 미국에서 삶을 버리고 스스로 어려운 삶을 찾아 한국에 입국한 것이다.
“아버지와 그가 몸담았던 전통 선교사들은 한국의 생활여건이 좋지 않고 자녀들에게 특히 영향을 미치는 질병이 많음을 알고도 선교사로서 살기 위해 미국에서 좋은 삶을 살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잘했고 선교사가 되는 대신 미국에서 살기로 선택했다면 아마 미국에서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기 위해 그것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많은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목사였고, 교회 농장주였고, 선생님이었고 건축가와 정비사였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윌리엄 린턴 선교사를 도와 현재 한남대학교인 대전기독교대학교의 원래 건물들 중 일부를 지으셨습니다. 윌슨 나환자병원을 위한 새로운 병원을 짓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남장로회 선교단으로부터 광주기독병원 건립에 관여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
“아버지가 몸담았던 선교사들의 선교 열매는 그들이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일하신 분일 것입니다. 내가 밤에 잠자리에 든 후에 그는 종종 그의 사무실에서 일했고 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가 그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일을 바꾸는 것이 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가 단지 자신을 위해서 휴가를 낸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일마다 휴 린턴 선교사는 해안선을 따라 섬들을 돌아보며 마을들을 방문하며 교회개척에 분주했다. 실제로 그는 전쟁 지도를 구해 교회가 없는 지역을 표시하며 교회개척에 나섰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는 말씀 따라서 휴 린턴 선교사와 정통선교사들은 사역했다고.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의 도로 상황은 매우 나빴고 아버지는 교회 일을 위해 나쁜 길로 엄청난 양의 운전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특정 섬에 가셨다가 악천 우를 만나 예정대로 귀가하지 못하고 한번은 아버지가 허리에 문제가 있어서 쉬어야 했을 때 그것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에 아버지는 하나님이 성경을 더 공부하도록 제공한 상황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성경이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었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한국에서 전력으로 사역했으며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는 그 말씀을 붙잡아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사랑으로 평생을 섬겼다고 전했다.
선교 열매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칭찬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주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했다.
OPC l PCA 선교기념관
휴 린턴 선교사 일대기와 가족관계도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