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2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유엔 안보리 ‘기후변화 우려’ 첫 성명 “해수면 상승으로 일부 영토 상실”…안보차원 문제로 대응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처음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를 담은 성명을 냈다. 유엔의 실세 기구인 안보리가 기후변화를 세계 안보 차원의 문제로 보고 대응하려는 것에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20일 격론 끝에 “해수면 상승으로 군소 도서국들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이 영토를 상실하는 게 안보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안보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 문제 보고서에 기후변화 관련 내용을 담을 것도 요청했다. 안보리 성명은 간단한 의견 표명 수준이지만, 세계 안보와 평화 유지를 임무로 내건 강력한 기구가 기후변화를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날 안보리 회의에는 해수면 상승으로 나라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한 남태평양 섬나라 나우루의 마커스 스티븐 대통령이 참석해 “온난화는 핵확산이나 테러와 같은 위협이며,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만약 우리 같은 도서국들이 오염을 일으켜 현재의 오염물질 대량 방출국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어떻겠느냐”며 강대국들의 책임 있는 태도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안보리 성명 발표는 불발 직전까지 갔었다. 상임이사국 러시아와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유엔총회나 유엔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다뤄지는 문제를 굳이 안보리로 가져올 필요가 없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판킨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애초 기후 문제의 정치화에 반대한다며 성명 발표에 반대했다. 그러나 안보리 의장국인 독일이 표현 강도를 낮추는 타협안을 제시해 밤늦게 성명이 나올 수 있었다. 2007년에도 영국이 비슷한 시도를 이끌었지만 러시아 등이 반대해 무산된 바 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한겨레 20110721 21:05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88511.html
2007 - 맥도날드 한국진출 1호점 문 닫는다 세계 1위의 햄버거 체인인 맥도날드의 국내 진출 1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맥도날드 압구정점이 문을 닫는다. 맥도날드는 2002년 매장 수가 350개로 늘어나는 등 국내 외식문화의 개척자로 승승장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 2, 3년 새 조류인플루엔자와 광우병 파동으로 고전하다 참살이(웰빙) 열풍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매장 수도 300개 수준으로 줄었다.
- 이종범 선수 (공중전화카드)
2001 - 이종범 3억5천만원에 기아 타이거즈와 계약 돌아온 '바람의 아들'' 이종범(31)이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3억5천만원에 기아 타이거즈와 계약했다. <연합> /김학석 cjh@kyeongin.com /경인일보 2001.07.21 00:00
1996 -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 20세기 마지막 지구축제 96하계 올림픽대회가 1996년 7월 20일 오전 9시30분 미국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16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인종 종교 국경을 초월한 온 인류가 한자리에 모인 제26회 하계올림픽대회 개막식은 '지상최대의 쇼'로서 올림픽 최대 하이라이트 '영웅들을 부른다'는 주제로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한국 선수단은 알파벳순에 따라 케냐에 이어 오전 11시10분쯤 남자배구의 기수인 최천식을 앞세우고 96번째로 입장했다.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유도 양궁 배드민턴 레슬링 등에 금 7개 은 15개 동 5개를 획득해 우크라이나(금 9개)에 이어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1996년 8월 5일 주경기장서 폐막식을 끝으로 올림픽 창설 1백년 째에 거행된 애틀랜타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조선
- 'Anxious City' - 'Le Rendezvous d'Ephese' - 'Common Man' - 'Night Train' - 'Woman with Garland of Leaves in Hair' - 'Nude'
1994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폴 델보(Delvaux, Paul) 사망 델보 [Delvaux, Paul, 1897.9.23~1994.7.20] 벨기에의 화가. 리에주 안타이트 출생. 특이한 초현실주의의 화가로 지목된다. 처음에는 건축을 지망하였으나 화가로 전환하였다. 1920∼1924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초기의 M.블라맹크를 닮은 포브적(fauve 的:野獸派的)인 풍경·인물은 벨기에의 표현파 화가 안소르와 페르메크의 영향을 받았다. 얼마 뒤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의 화가 G.키리코에게 자극을 받아 독자적인 꿈과 향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1935년 이후 초현실주의전(展)에 출품하였다. 그의 꿈은 반복을 노리는 것으로 명쾌한 원근법(遠近法) 속에 반복해서 나형(裸形)과 건물이 부상한다. 배경에는 그리스 신전이 자주 쓰이지만, 이것도 순결 그대로의 나부(裸婦)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증표이다. 그리하여 고전적인 스타일을 활용하여 달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풍경 속을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는 나부를 주제로 그린다. 대표작에 《불안한 거리》(1941) 《메아리》(1943) 등이 있다. /naver
1985 - 남아공 보타 대통령, 비상사태 선언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거의 전쟁 상태나 다름없었다. 백인 소수정부는 비합법인 아프리카인민족회의(ANC)에 의한 산발적인 게릴라 습격과 학생단체, 노동조합, 지역조직 연합체인 통일민주전선(UDF)의 봉기에 직면해 있었다. UDF는 돌과 화염병만으로 무장한 남아공 군인들과 싸워 나갔다. 보타 대통령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21일 0시부터 비상사태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흑인 데모대를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월말까지 약 천여명 이상을 체포했다. 이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지자 각국에서 시민운동이 일어나 남아공을 제재하라고 자국 정부에 강력 요구했다. 첫 조치로 뉴욕에 있는 체이스 맨해튼은행이 남아공의 채무연기를 중지한다고 발표하자 다른 은행들도 동참했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남아공 기업가들이 ANC 간부와 협상을 벌여 한정적인 개혁을 이끌어 냈지만 남아공에서의 인종차별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1978 -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준공식
[고리원전 1호기 연혁] 1971.03.19 한국전력-웨스팅하우스(WH) 고리원전 1호기 건설계약 체결 1971.11.00 고리원전 1호기 착공 1977.06.19 고리원전 1호기 초임계(원자로 점화, 핵분열 시작) 1978.04.29 고리원전 1호기 상업가동 시작 1978.07.20 고리원전 1호기 준공(식)
1976 - 美 무인우주선 바이킹1호 화성 연착 성공 미국 NASA의 무인우주선 바이킹1호가 1976년 7월 20일 11개월간의 비행 끝에 화성 크리세 플래니티아(황금의 땅)에 연착륙하는데 성공, 지구의 사막 지형과 놀랍도록 유사한 바위투성이의 화성표면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화성의 신비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착륙 25초 후부터 화성표면 사진촬영에 들어갔고 19분 만에 지구로 첫신호를 보냈다. 우주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화성탐사를 진행해왔던 미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 사진촬영, 토양분석, 기상관측, 그리고 최대의 관심사인 `화성에는 지금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과거에 존재했었는가`의 조사를 목적으로 약 1년 전 2대의 무인탐사기를 쏘아올렸다. 착륙후 주변풍경 관찰과 기상관측, 그리고 대기와 토양 분석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생명활동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화성표면이 바위투성이의 검붉은 사막으로 구성되어있고, 토양 분석 결과 희박하게나마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생명체의 4대 요소인 질소 산소 수소 탄소가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약 1개월 후 다시 발사된 `바이킹2호`가 지진계 고장으로 지진관측의 임무를 다 하지 못한 `바이킹1호`를 대신함으로써 화성이 지구보다 내부의 활동이 적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 바이킹계획의 성공으로 지구에 보내진 방대한 사진과 데이터가 화성의 지도작성과 지질학, 기상학 등의 연구에 크게 공헌하게 됐다. /조선
1973 - 미국의 영화배우 브루스 리(李小龍, Bruce Lee) 사망 리(이소룡) [李小龍, Bruce Lee, 1940.11.27~1973.7.20] 브루스 리(이소룡) 사망 불세출의 쿵푸 스타 브루스 리(32)가 애인인 여배우 베티 팅 베이의 맨션에서 쓰러져 홍콩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73년 7월 20일 사망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영화계 흑막에 의한 암살`, `뇌수종ㆍ가슴통증 때문에 마셨던 진통제에 의한 알레르기 반응` `애인 베티 팅 베이와 성관계 중 돌연사` 등 여러 설이 있다.
1969 - 아폴로 11호 달 착륙 [어제의 오늘]1969년. 인류, 달에 첫발을 내딛다 ㆍ美 자존심 회복한 아폴로 11호 40년 전인 1969년 7월20일, 인간이 처음으로 달을 밟았다. 7월16일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 이글호가 ‘고요의 바다’에 착륙한 것이다. 3명의 우주인 중 아폴로 11호 선장인 닐 암스트롱이 먼저 달에 내려섰다. 암스트롱이 첫발을 내딛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19 18:0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91802055&code=100100&s_code=ap005
1969 - 온두라스-엘살바도르 휴전 [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온두라스-엘살바도르 휴전 월드컵이 끝났다. 서울시청 앞을 메웠던 수십만 명의 인파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963 - 한국의 권투 선수 문성길(文成吉) 출생 문성길 [文成吉, 1963.7.20~ ] 문성길(文成吉, 1963년 7월 20일 - )은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전 프로 복싱 선수이다. 1986년 11월 미국 리노에서 열린 제4회 세계복싱선수권대회 밴텀급에서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이후 대한민국 복서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19년 만인 2005년 중국 미안양 제13회 세계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딴 이옥성이었다. 별명은 `돌주먹'이었다. 아마추어 권투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 허영모와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은퇴 후 공군사관학교 지도자를 역임했다.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에 그의 이름을 딴 `문성길 복싱클럽'(관장 조영섭)을 운영중이며, 1998년부터 철판볶음밥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2007년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WBHF) 후보에 한국 출신 복서로는 처음으로 장정구와 함께 올랐지만, 장정구는 18표, 문성길은 2표를 획득하는 데 그쳐 탈락했다. 생애 전남 영암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육상 특기생으로 뒤늦게 들어간 목포 덕인고에서 복싱을 만났다. 입문 만 3년 만인 1982년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병역 특례보충역 자격 획득(1982년 11월 아시안게임)후 5년간 해당분야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의무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8개월 전 프로로 전향했다는 이유로 현역으로 입대했다. 군제대 후 WBC플라이급과 WBA밴텀급 2체급 세계챔피언을 지냈으며, 1남 1녀를 두었다. 트리비아 /위키백과
1948 - 국회, 초대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 선출 국회 제 33차 본회의에서 이승만의원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 날 역사적인 첫 대통령 선거의 후보에는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이승만, 무소속의 김구와 안재홍 등 3명이 출마했다.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재적의원 198명 중 197명이 투표한 결과, 이승만이 180표를 획득해 13표를 얻은 김구, 2표를 얻은 안재홍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시영이 133표를 획득해 62표를 얻는데 그친 김구를 제치고 초대 부통령에 선출됐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9 19:21:36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47 - 멕시코의 음악가 카를로스 산타나(Santana, Carlos) 출생 산타나 [Santana, Carlos (Augusto Alves), 1947.7.20~ ] 카를로스 산타나 (Carlos Augusto Alves Santana 1947년 7월 20일 ~ ) 는 멕시코의 음악가이자 라틴 록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그의 산타나 블루스 밴드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살라, 록, 블루스, 재즈가 융합된 그의 음악은, 고음에 클린 기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팀발레나 콩가같은 라틴 악기들을 이용한다. 카를로스 산타나는 이와 같은 형태의 음악을 계속해서 해 나갔으며, 1990년대 말부터, 다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의 음반은 전 세계에 걸쳐 총 8000만 장 넘게 팔려 나갔다. /위키백과
1945 -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Valéry, Paul) 사망 발레리 [Valéry, Paul, 1871.10.30~1945.7.20] 프랑스의 시인이며 비평가,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가 1945년 7월 20일 74세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국장을 거쳐 고향 해변의 묘지에 안장됐다.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태어난 발레리는 그의 대표적 평론집 '바리에테'에서 전생애에 걸친 그의 다양한 관심을 쏟아냈다. 1919년 이래 20여년간에 발표된 주요 논문, 연설, 강연, 수상 등을 다섯 권, 1천여 페이지에 수록한 이 책은 '다양성'이라는 뜻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철학 미학 정치평론 시론 교육론 회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담고 있다. 탁월하고 명쾌한 지혜와 비평정신이 돋보이며 프랑스 산문 문학의 한 정점을 이룬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2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 뒤 수많은 문학ㆍ학술 단체의 대표를 지냈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발레리는 평론가나 사상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어려서 법학자의 꿈을 간직했던 발레리가 첫 시를 쓴 것은 1888년이다. 주로 상징주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는 북유럽인과는 다른 지중해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하여 명쾌하고 지적이며 정서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시 '젊은 파르크'는 19세기 프랑스에 개화한 상징시의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레리는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도구로 시를 상정했다. 그에게 시란 자기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도구였고 그 과정을 엄격하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이 시였다. 발레리는 1888년∼1891년에 걸쳐 많은 시를 썼고, 그 중 몇편은 상징파를 표방하는 잡지에 발표해 호평을 받았지만, 예술적 좌절감과 짝사랑에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1892년에는 감정에 몰두하기를 거부하고 갖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처분해버렸다. 1894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몇시간 동안 과학적 방법론과 의식 및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묵상에 잠겼으며, 자신의 단상과 잠언들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유명한 '노트'로 출판됐다. /조선
1944 - 독일의 장군 루트비히 베크(Beck, Ludwig) 자살 베크 [Beck, Ludwig, 1880.6.29~1944.7.20] 독일의 장군. 1935~38년에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그는 라인 지역에 대한 히틀러의 점령(1936)을 반대했으며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1944년 장군들의 쿠데타 계획의 핵심인물이었다(→ 7월암살음모사건). 베크는 제1차 세계대전중 참모본부에서 일했으며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속히 승진해 1935년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결정에 항의하면서 히틀러의 팽창정책에 대한 군의 반대를 조직화하는 데에 실패한 후 1938년 참모총장을 사임했다. 그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공모자들의 지도자로 알려졌고 히틀러가 실각한 후 독일 대통령감으로 예상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실패하자 시중들던 하사관에게 자신의 숨을 거두게 하도록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을 부탁하고 자살했다. /브리태니커
- Ludwig Beck and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1944년 7월 20일 독일 육군 중령 클라우스 필리프 셴크 그라폰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국 진영으로부터 보다 유리한 평화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히틀러가 군 수뇌부와 회동하고 있던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스샨체 야전사령부 회의실에 폭탄을 넣은 서류가방을 놓고 나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오후 12시 42분 폭발을 목격하고 히틀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최고사령부를 장악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지만,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게슈타포가 공모자를 찾아나섰다. 즉시 총살된 주모자를 제외한 약 180~200여 명의 공모자가 교수형 또는 총살형을 당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브리태니커
[책갈피 속의 오늘]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독일군이 무너져내리던 1944년 7월 20일, 독일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야전사령부 ‘늑대의 소굴’. 히틀러가 군 수뇌부와 회동하기 위해 나타나기 직전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폭탄을 ‘심어 놓고’ 사라졌다. 시한폭탄이 든 가방은 히틀러의 바로 옆자리 테이블 밑에 놓인다. 그러나 신의 가호(?)였을까. 장교 한 명이 무심코 가방을 밀치고 말았으니. 폭탄은 정확히 오후 12시42분 폭발했으나 ‘사정권’에서 떨어져 있던 히틀러는 살아남았다. 그는 오른팔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암살 기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날 예정대로 무솔리니를 만났다. 귀족 출신으로 생래적으로 히틀러를 혐오했던 슈타우펜베르크. 그는 바로 체포돼 사살된다. 게슈타포는 200명을 처형했다. 주모자 8명은 피아노줄에 목이 감긴 채 정육점 갈고리에 매달려졌다. 그 고통스러운 죽음은 카메라에 담겨 히틀러에게 보내진다. 암살 계획을 알고도 침묵했던 로멜에게는 명예로운(?) 음독자살이 권유됐다. 그는 그 제의를 따랐고, 생전의 모든 명예를 그대로 간직한 채 땅에 묻혔다. 1941년 북아프리카의 전선에서 본부의 퇴각 명령에도 진격을 고집해 승승장구했던 ‘사막의 여우’ 로멜.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띄웠다. 그의 존재는 ‘국가적 환각제’나 다름없었다. ‘로멜의 신화’는 연합군에 큰 짐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유감이지만 상대에게도 뛰어난 장군이 있다”고 토로했다. 1943년 그는 히틀러의 직접 지시를 무시하고 퇴각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는 주화파(主和派)로 돌아섰다. 히틀러에게 여러 차례 강화협상을 제의했으나 묵살되자 독자적인 ‘종전(終戰)계획’을 추진했다. “군사적으로 실패한 전쟁은 정치력으로 변제해야 한다!” 실패한 암살 기도는 독일에 ‘마지막 기회’를 앗아갔으니. 그는 충실한 나치는 아니었으나 반(反)나치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장래를 걱정했고 나치의 비인도성을 혐오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히틀러를 경외했다. 스스로 ‘모순(矛盾)’을 살았다. 그는 결국 나치와의 관계를 ‘명예로운 불신임’으로 끝맺는다. “로멜에게 인생은 담담한 산문이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7-19 18:46: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719/8085170/1
- '天池', 水墨天然彩, 1991, 121x91cm (공중전화 카드)
- 한국 5000원 (지폐) 이종상 작 '율곡 이이 초상'
1938 - 한국의 동양화가 이종상(李鍾祥) 출생 이종상 [李鍾祥, 1938.7.20~] 동양화가. 호는 일랑(一浪).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196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하였고 1963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전임강사·교수로 재직하였고 1974∼1983년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75년 제1회 개인전을 가졌다. 근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FIAC에 참가,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4원법(遠法)>과 <칠보(七寶) 벽화기법>을 창안해서, 과거 진경산수에서 보이던 꼼꼼한 사실적 묘사의 모든 곁가지를 과감히 절단해버린 <원형상(源形象)> 연작을 발표했다. 그의 4원법이란 단순히 사물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의 눈·상상력의 눈을 통해 간결한 색채·구조에 풍부한 역동성(力動性)을 담는 기법이다. 작품으로 동판 위에 칠보로 그린 동유화(銅釉畵)인 《원형상, 89-Ⅳ》 등 원형상 연작이 있다. /야후 백과
- Italy, 2000 Lire (Banknote)
1937 - 이탈리아의 무선전신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사망 마르코니 [Marconi, Guglielmo, 1874.4.25~1937.7.20] 이탈리아의 무선통신발명가·기업가. 볼로냐 출생.
- 'Video Sculpture, Beuys/Bois'
1932 -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白南準) 출생 백남준 [白南準, 1932.7.20~2006.1.29] [어제의 오늘]1932년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출생 ㆍ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 실천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전후 실존주의 철학에 몰두했던 그는 특히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비디오 아트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예술 장르가 탄생했다. 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연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활용한 이후 그에겐 TV가 곧 캔버스가 됐다. 그는 TV 캔버스에 선보일 영상을 “다빈치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다채롭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록처럼 격렬하게,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비디오 신디사이저’라는 기계를 고안하기도 했다.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19 21:25:4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192125495&code=100100&s_code=ap005
"원래 예술이란 본능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 백남준
1927 - 루마니아의 왕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 사망 페르디난드 1세 [Ferdinand I, 1865.8.24~1927.7.20] 페르디난드 1세(루마니아어:Ferdinand I, 1865년8월 24일 ~ 1927년7월 20일, 재위 1914년~1927년)는 루마니아 왕국의 두 번째 군주였다. 남부 독일의 지크마링겐에서 태어났는데, 삼촌인 카롤 1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황태자가 되었다. 독일계 국왕이었지만 그는 루마니아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측에 참전시켰다. 승전으로 그는 트란실바니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의지력이 약했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루마니아의 가장 중요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전(前) 국왕인 카롤 1세와는 달리 루마니아와 그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위키백과
1926 - 러시아 혁명가, 체카 창설자 제르진스키(Dzerzhinsky, Feliks) 사망 제르진스키 [Dzerzhinsky, Feliks Edmundovich, 1877.9.11∼1926.7.20] 펠릭스 예드문도비치 제르진스키 (폴란드어:Feliks Dzierżyński , 러시아어: Феликс Эдмундович Дзержинский, 1877년 9월 11일 - 1926년 7월 20일) 은 러시아의 혁명가, 정치가이다. 그는 폴란드 태생이며, 소련의 공안, 정보기관인 체카의 설립자이다. 체카는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적색 테러를 자행하였고, 이후에도 소련의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초기 이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