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2024년 노동절 담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권위 있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모든 종류의 착취에서 인간을 막아 주는 것이 안식일의 역할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58항 참조).
사회에는 다양한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법의 근본 목적은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수호하고,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하며, ‘공동선’을 실현하고 증진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 목적은 반드시 추구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국가 공동체는 “특히 노동자들과 같은 약자, 여성과 어린이들의 권리를 맨 먼저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야 할 의무를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어머니요 스승」, 20항)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누구도 인종, 국가, 성별, 출신, 문화, 계급, 성별, 종교 등의 이유로 법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니만큼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44항).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노동자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노동자 사이의 차별, 그리고 그 차별의 근거가 되는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먼저,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주요 선진국에는 노동자 수를 기준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행 노동 관련법에는 절대 숫자 ‘5’가 존재합니다. 곧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당 해고를 당하여도 구제 신청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최대 노동 시간 한도인 주 52시간을 넘겨 일을 하여도 법적 제재가 없을 뿐 아니라, 연장·휴일·야간 가산 수당 그리고 연차 휴가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2021년에 제정되고 최근 50명 미만 사업장에 확대 적용된 「중대 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 재해 처벌법)의 대상에서도 이들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약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약 370만 명의 노동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여성 노동자가 190만 명, 비정규직 노동자가 223만 명, 55세 이상의 노동자가 117만 명, 그리고 최저 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102만 명으로, 인간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연합뉴스, 2022년 5월 11일 참조).
국적에 따른 차별도 존재합니다. “취업과 직업은 원주민과 이주민에게 모두 한결같이 부당한 차별 없이 허용되어야”(「가톨릭 교회 교리서」, 2433항)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는 보편적 인권을 거스르는 이른바 ‘강제 노동’으로 의심될 수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 곧 이주 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어도 사용자의 동의 없이는 근로 계약을 자유롭게 해지할 수 없는 규정이 그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계약 해지와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강제 출국을 당할 위험이 있어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하여야만 합니다. 실제로 일부 사용자는 이러한 상황을 이주 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악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용자와 이주 노동자 사이의 고용 관계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업장 변경의 조건마저 ‘권역별’로 제한한 까닭에 이주 노동자는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과 같은 인간 기본권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법적 제도적 논의와 그 적용에서도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저 임금’에 관한 논의와 결정 과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거론하고 싶습니다. 최저 임금은 단순히 시급이나 월급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최저 임금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정책 예산뿐 아니라, 실업 급여와 산재 보상 급여, 출산 육아 급여와 기초 연금 그리고 수많은 사회 보장 제도의 책정 기준인 까닭에 사회적 약자에게 실질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 결정 과정이 과연 인간 존엄성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또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 남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입니다(「노동하는 인간」, 11항 참조). 만약 노동자와 그 가족의 품위 있는 삶의 증진 그리고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소수의 이해관계와 행정적 편의성을 우선하여 결정된다면,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법은 공동선과 평화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객관적 기준입니다. 그러나 법은 그 제정과 집행 과정에서 권력에 의하여 사유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법의 제정과 적용이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욕망에 지배를 받을 때, 법은 더 이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망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의의 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를 경험하여 왔고 또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불의의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그들과 끊임없이 연대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불의한 법 제정과 집행을 개선하고자 노동자와 함께 노력하여야 합니다.
노동절을 맞이하여 정당한 권리 요구와 증진을 위하여 힘쓰는 모든 노동자와 연대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또한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가르쳐 주듯이,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과 약자의 권리 보호 그리고 공동선 실현을 위하여 헌신하며 법을 제정하거나 집행하는 모든 이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노동자 예수님, 그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노동자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24년 5월 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 주교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42147?gb=K1200 ]
<할례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1-6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들과 원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축일5월 1일 성 예레미야 (Jeremiah)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650-588년경BC
같은 이름 : 예레미아, 예레미아스, 제레미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예레미야 (Jeremiah)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아멘!
감사합니다. 야고보님.
감사합니다. 촌로 율리아노 형제님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감사하는 하루엽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사벳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