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28~39
나는 오늘 우리 교회 주보에 이런 제목의 글을 썼다.
“목사님은 나쁜 사람이다.”
성도들은 과연 목사님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물론 대부분의 성도들이 목사님은 좋은 사람이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까?
“성도님! 이번 주에 저랑 차 한 잔 나누실까요?”
“성도님! 이번 주에 저랑 같이 식사하며 교제할까요?
흔쾌하게 “좋아요!” 할까? 아니면 떨떠름하게 마지못해서 “그럴까요.” 할까?
성도들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나는 성도들이 어떻게 대답하게 될지 잘 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목사님이 하는 일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성도들이 목사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목사님을 좋아하면 그 사람을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된다.
그 사람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마음속에 잘 새겨질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증거는 오늘 이 자리에 예배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많이 있다.
지난 주일에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나의 두 손주들이 각각 십일조를 70만원씩 했다.
지금 유치원을 다니고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들이다.
저들이 무슨 돈을 번다고 십일조를 그렇게 많이 드리나?
저들은 목사인 할아버지를 너무나 좋아한다.
나도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그 길을 따랐다.
그 결과 그들은 그렇게 놀라운 십일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오늘도 여러 성도들이 이전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십일조를 드렸다.
목사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순종했던 결과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목사님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목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다.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그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은 다 같은 목사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증거 하는 복음과 이 시대 목사님들이 증거 하는 복음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오늘 그 복음의 차이를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말씀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바울 사도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설교의 말씀을 살펴보면 참으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우선 바울 사도는 27절과 28절 말씀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행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13: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였다는 사실을 말한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부터는 예수님의 다른 면을 강조한다.
29절 말씀부터 39절 말씀까지 길고 긴 말씀에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이다.
27절과 28절 이렇게 두 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29절부터 39절까지 열 한 절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하여 설교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부활절에 설교를 하거나 극히 조금 설교를 한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 바울 사도의 설교는 달랐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조금 말하고 부활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 이렇게 부활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부활이 강조된다.
[행13: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행13: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다시 살렸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한다.
[행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들이었다.
갈릴리출신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랐다.
예수님께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함께 그들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여러 날 보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 날,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보여 주셨다.
여러 날 여러 번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또 나타나서 그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 참 이상하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들은 다 믿는데 왜 제자들은 그렇게 믿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인데 그들에게는 왜 그리 어려웠을까?
거기에는 이 시대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숨겨 있다.
또 한 가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날 여러 번 나타나셨다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제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십자에서 죽으시고 이 땅에 40일 동안 머물렀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사항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증을 주시는 것이었다.
부활의 확증이야 말로 제자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느냐? 못 되느냐?를 좌우하는 것이었고, 또한 부활의 확증이 없으면 이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도 부활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여러 날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을 확증시켜 주신 것이다.
그렇게 부활을 확증한 주님의 제자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전한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제자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그들이 무엇을 증거 하는 증인이었다는 말인가?
당연하게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부활의 증인들이이었다.
제자들도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대 사람들도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들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초대 교회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와 바나바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행13: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바울사도와 바나바를 가리킨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구약 성경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의 어떤 약속을 전파했을까?
그 약속은 당연하게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바울 사도는 33절 말씀에서 37절 말씀까지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한다.
그 증거의 내용은 이렇다.
[행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인데 그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을 예수님을 강조하여 복음을 전한다.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또 이렇게 강조한다.
[행13: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바울 사도의 메시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그 부활의 내용을 썩음을 당하지 않을 예수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또 이렇게 강조한다.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행13: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여기 이 말씀에서는 다윗과 예수님을 비교한다.
유대인들은 모두 다 그들의 조상인 다윗을 존경했다.
그런데 그 다윗은 죽어 무덤에 묻혀 썩음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사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존경하는 위대한 왕이었고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최고 강한 나라였고 크게 번성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도 죽어서 무덤에 묻혀서 썩음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다윗보다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울 사도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썩음을 당하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과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도 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당연하게 부활하셔야 되지 않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연하게 부활하셔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이렇게 알고 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예수님은 육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냥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셨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제자들과 동행했다.
그 시대 사람들이나 또한 제자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 보아야 한다.
그 시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사셨던 그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 보아야 하는가?
어떻게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육체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오늘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늙어서 죽으면 천수를 다하고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수를 다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33살의 젊은 나이에 죽으셨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사셨고,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사람으로 무덤에 묻히셨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당연하게 썩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나도 그 길을 갈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 길을 갈 것이다.
세상에서 성인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공자도 그 길을 갔고, 소크라테스도 그 길을 갔고, 석가모니도 그 길을 갔다.
그런데 오직 유일하게 그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길을 가지 않은 유일한 사람.
바로 그 사람.
썩음을 당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
이 세상에 살았고, 죽었고, 무덤에 묻혔고, 그런데 썩음을 당하지 않은 유일한 분.
바로 그 사람은 예수님뿐이다.
오직 예수님뿐이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신 주 예수님이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썩음을 당하지 않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썩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바울은 죄 사함에 대해서 설교 한다.
그런데 그 죄 사함에 대해서 설교 하면서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이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가?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아마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바울 사도의 강조점을 살펴보면 이렇다.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나 죄인은 저주를 받고 지옥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이 의인이 되는 것이 이 사람 힘입어 의롭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을 힘입어 의롭게 되는 것인가?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들이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그 생각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람을 힘입어 우리들이 의인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왜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이 사람을 힘입어 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범한다.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은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볼 때 참 한심하게 보인다.
하나님도 그렇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바로 정죄의식이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결과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이 내 죄를 사했다고 하는 사실을 듣는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영적인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영적인 분이라고 믿는다.
영적인 세계에 있는 그 분이 영적으로 내 죄를 사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세계는 미지의 세계다.
명확하지 않는 세계다.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다.
그래서 죄 사함도 선명해지지 않고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선명해지지 않는다.
그저 영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의미일 뿐이다.
현실세계와는 동 떨어진...
그런데 사람이신 예수님이 내 죄를 사했고 사람이신 예수님이 나를 의롭게 했다는 것은 영적인 세계가 아니다.
사실적인 세계요, 육체적인 세계요, 우리들이 매일 날마다 순간순간 경험하는 세계다.
사람이신 예수님이 이 역사 속에 오셨고, 사람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람이신 예수님이 썩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나셨고, 사람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분이 내 죄를 사했고, 그 예수님이 나를 의롭게 했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죄 용서요, 차원이 다른 의다.
나는 과연 종교적으로 죄 용서 받은 사람인가? 사실적으로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인가?
나는 과연 종교적으로 의인이 된 사람인가? 사실적으로 의인이 된 사람인가?
이 사실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실적으로 누리는 진리중의 진리인 것이다.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축복을 누린다.
사실적으로 죄 용서를 받은 그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사실이 사실적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 사람은 100%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된다.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사실적으로 죄 용서를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좋아 하는 마음,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넘쳐 난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를 완전히 사실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람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게 된다.
하나님이 좋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좋은 것이다.
이 사람은 의인에게 오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씀이 달콤해 진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니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수준이 된다.
이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실적으로 죄 사함과 의인이 된 사람은 또 하나의 놀라운 결과가 온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목사님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사람은 반드시 목사님을 좋아 할 수밖에 없다.
목사님과 가까이 하고 싶어 한다.
늘 신사복을 입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이 아니라 그 강단에서 내려 온 우리의 삶에 밀착되어진 목사님을 가까이 하고자 한다.
그렇게 가까이 하면 어떻게 될까?
실제 생활에 밀착되어진 신앙생활을 보고 배우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신앙생활이 나의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을 가리켜 제자훈련이라고 한다.
그 사람의 수준은 점점 더 목사님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
영적인 수준이, 정신적인 수준이, 육체적인 건강의 수준이, 경제적인 수준이, 사역의 수준이, 인간관계의 수준이...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 성공의 길이요,
이것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길이다.
이 사람을 힘입어...
나는 그 사람 예수님을 만났다.
성경 책 속에서 튀어나와 역사 속에 오신 사람이신 그 예수님을 만났다.
사람이신 그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분과 인격적으로 동행해 왔다.
이 사람을 힘입어...
나는 죄 사함을 사실적으로 받았고,
이 사람을 힘입어...
나는 사실적으로 의인이 되었다.
나는 그 사람, 그 예수님을 통해서 여기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날마다 순간순간 내가 누리고 있는 내 인생의 축복이다.
나는 이 가슴 벅찬 축복의 삶의 증인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사람이신 예수님때문에
제자교회를 통해
목사님을 만나 인생과 운명을 바뀐
행복+영광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