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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5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태국 전직 경찰 어린이집 총기난사, 38명 사망.
2022년 인도 북부에서 하객 태운 차량 추락해 25명 집단사망
인도 북부에서 결혼식 하객을 태운 버스가 도로를 벗어나 협곡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최소 25명이 사망했다.
AFP통신 보도에 따르면 하객 운반 버스는 우타라칸드 주의 경사가 급한 산악 고속도로를 따라 위태롭게 이동하다가 가장자리에서 경사를 이기지 못해 최소 500m 이상 급강하했다. 버스에는 45명이 탑승해 있었다.
2017년 일본계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63세)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태풍 차바 제주와 남부지역 강타
제18호 태풍 '차바'가 제주와 남부 지방을 강타해 사망 4명, 실종 5명 등 9명의 인명피해와 이재민 257명 주택 508채 농경기 7747ha, 차량 980대 침수를 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부산에서는 영도구 공사장의 크레인이 넘어져 1명이 숨졌고, 수영구 주택에서 1명이 사망했다. 울산에서는 울주군 현대아파트 주차장에서 급류에 휩쓸려 1명이 숨졌고 부산 가덕도 방파제에서 추락해 1명이 사망했다.
울주군에서 구조에 나선 소방공무원 1명과 제주에서 정박한 어선을 이동하던 1명이 실종됐다. 경주에서는 차량 전도로 1명, 논 물꼬를 확인하다 급류에 휩쓸려 1명이 각각 실종됐으며, 경남 밀양에서는 잠수교로 진입한 차량이 떠내려가면서 1명이 실종 상태다.
울산과 전남, 경북, 경남, 제주 등지의 88가구 257명이 학교와 경로당, 주민센터, 마을회관 등으로 대피했다.
시설 피해는 주택 14채(제주)가 반파됐으며, 508채가 물에 잠겼다. 주택 침수는 울산이 464채로 가장 많았다. 공장은 울산 현대자동차 등 22개 동이 침수 피해를 봤으며 상가 150동이 불어난 물에 잠겼다. 농작물 침수는 7천747㏊로 제주가 5천203㏊로 피해가 가장 컸으며 전남 1천333㏊, 경북 673㏊, 경남 533㏊, 광주 5㏊ 등이다.
차량 침수는 제주 한천교의 80대와 울산 울주군 언양읍 현대아파트 등의 900여대 등 1천대에 육박했다.
어선 피해도 정박한 어선 2척이 전복됐고 어선 2척이 침몰됐다.
2015년 여성영화의 거장 벨기에 감독 상탈 애커만(65세) 사망
2012년 분당선 왕십리 - 선릉구간 개통
2011년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사망
미국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2011년 10월5일 사망했다
그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1을 시작으로 아이폰, 아이패드 등 세계 IT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에서 2007년 선보인 아이폰은 쉬운 인터베이스와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전 세계 휴대폰 사용자들을 매료시켰다
이후 출시된 대부분의 스마트폰은 아이폰을 근간으로 했다
2011년 전라선 복선 전철화 및 KTX 운행노선 개통
2011년 메콩강 학살,
미얀마와 태국 국경의 메콩강 유역에서 수백만 개의 암페타민(amphetamine) 알약을 실은 두 척의 중국 화물선이 공격을 받았고, 2척의 배에 타고 있던 13명의 선원이 전원 살해되어 강에 버려졌다. 중국과 태국 당국의 오랜 추적 끝에 2012년 4월 말에 나우 캄(Naw Kham)을 체포하고 5월에 중국으로 인도하였다. 2012년 11월 6일 나우 캄과 3명의 부하들의 사형이 선고되었고 2013년 3월 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5년 로버트 김, 9년 8개월만에 미국 법원으로부터 형집행 종료 판결
2001년 미국 ‘탄저균 테러’ 공포 확산
원인을 알 수 없는 탄저테러로 21세기초 미국이 혼돈과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 플로리다州 ‘아메리칸 미디어社’ 직원 수명(數名)이 탄저병(炭疽病)에 감염되고, 그 중 한 명이 2001년 10월 5일 사망하면서 탄저테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탄저테러가 뉴욕과 워싱턴으로 북상하며 주요 방송사와 입법-행정-사법부 등 3부로까지 확산되자 미국인들의 공포는 집단 패닉현상으로까지 발전했다.
NBC, ABC, CBS 등 방송사에 주로 배달됐던 탄저균이 미 의회 의사당 내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실과 백악관·대법원의 우편물처리소에서까지 발견되기 시작하자 미 정부는 초비상 상태에 빠졌고, 1814년 영국군이 미 의사당을 불태웠을 때 이후 처음으로 의사당 기능이 몇일간 정지됐다.
탄저병은 지난 100년동안 감염 환자가 모두 18명에 불과할 정도로 미국에서는 희귀한 질병으로 환자가 사망한 것도 1976년 이후 25년 만의 일이다. 탄저 공포는 미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흰색 가루만 발견되면 항공기 이·착륙이 중단되거나 회항하는 등 탄저균 공포 신드롬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2000년 유고 시민혁명으로 밀로셰비치 대통령 축출. 코스투니차 대통령 집권
선거 패배를 부인하고 집권연장을 획책하던 유고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 정권이 2000년 10월 5일 집권 13년 만에 30만 군중의 함성에 맥없이 붕괴됐다. 대선패배 인정과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30만 시위대가 이날 밤 의사당과 국영방송국 등 국가기관들을 점령한 데 이어 야당연합 대통령 후보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가 정권인수를 선언했다.
코스투니차는 7일 베오그라드 컨벤션센터에서 취임식을 갖고 유고연방 대통령직에 올랐다. 지난 9월 24일 대선에서 밀로셰비치가 야권 후보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의 승리를 인정치 않자 유고 국민과 야권은 총파업, 불복종, 항의시위로 압박해 들어갔다. 1989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유고사태는 밀로셰비치 13년 독재에 지칠대로 지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정실주의와 조직적 부패는 의료보장 등 각종 사회안전망을 붕괴시켰고, 50%까지 치솟은 실업률은 국민의 생계기반을 흔들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입장에서도 밀로셰비치 정권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떨어져 나갔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1992년 보스니아내전과 1999년 코소보사태를 거치면서 유고는 계속 위축돼갔다. 한편 행방이 묘연했던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은 6일 TV에 등장, 대선패배를 인정했다.
1998년 영생교도 7명 강원도 양양에서 집단자살
서울 중랑구 묵동 영생교회 목사 우종진씨 가족 3명과 이 교회신도 4명이 1998년 10월 5일 강원도 양양 남대천 하구 인근 12인승 승합차 안에서 집단으로 불에 타 숨졌다.
경찰은 이들이 강원지역을 떠돌며 폐쇄된 사이비성 종교생활을 하다 극단적 염세주의에 빠져 집단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영생교회 목사인 우종진은 1987년 개척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해 왔으며 한때 신도수가 100여명에 이르렀으나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하면서 신도들이 이탈, 함께 숨진 6명만 남게 되었다
1996년 이화여대 사범대 초대학장 김애마씨 별세
이화여대 초대 사범대학장을 역임하고 한국 최초로 사립 사범교육을 실시한 교육계의 원로 김애마씨(93)가 1996년 10월 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한국 사범교육을 이론적으로 확립하고 실천적으로 추진해 온 교육계의 원로이다.
1926년 이화학당 유치사범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봉직하면서 1951년 사립대학 최초로 사범대를 설립, 초대학장을 지냈다. 그는 특히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 국내에서 처음으로 유치원과 국민학교 교사를 4년제 대학에서 양성토록 했으며, 사범대 내에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의 자연과학 계열의 학과들을 신설하고 장애자교육을 위한 특수교육과를 설립하기도 했다.
자율학습과 교복 없는 남녀공학을 제창했던 김씨는 1951년 어린이 교육을 위한 지원 기관으로 한국 어린이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YWCA회장, 대한여학사협회회장, 매향여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거쳤다.
김씨는 이같은 공로로 서울시 교육위원회 교육공로자상(1960), 대한교육연합회 교육-특수 공로상, 미 내셔널교육대학 교육공로상(1961), 대한민국 문화훈장(1963), 동아일보 제정 제8회 인촌상(1994) 등을 수상했다.
1995년 노벨문학상에 아일랜드 시인 셰무스 히니 선정
아일랜드의 시인 셰무스 히니(56)가 1995년 10월 5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한림원 측은 "셰무스 히니의 작품들은 서정성 짙은 아름다움과 깊이 있는 윤리성을 바탕으로 일상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적들과 현재에 잇닿아 있는 과거를 시로 형상화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셰무스 히니는 윌리엄 예이츠(1923년), 사무엘 베케트(1969년) 이후 세번째로 노벨문학상을 타게된 아일랜드 작가다. 헝클어진 머리와 섬세한 매너를 가진 그는 언론이나 출판계의 과대선전을 혐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도 비평가로부터 격찬을 받는 몇 안 되는 작가이며, 더블린의 길을 걷다가 사인을 원하는 팬들에게 붙잡혀 종종 서너시간씩을 보내는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셰무스 히니는 1939년 북아일랜드 모스본에서 가톨릭 신자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이츠 이후 최고의 아일랜드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공교롭게도 예이츠가 사망하던 해에 태어났다. 그는 `어느자연주의자의 죽음`이라는 그의 시집부터 자연과의 강한 교감, 땅ㆍ어둠ㆍ침묵에 대한 애착 등 켈트 문학 전통을 드러냈다.
1991년 로널드 코우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1년 인도네시아 공군소속 허큘리스 수송기 추락 사망 120명
1989년 망명중인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노벨 평화상 수상
1988년 16년 만에 국정감사 재개
1986년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우승 부상 그리스 투구 KOC에 기증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폐막(1위 중공, 2위 한국, 3위 일본)
1986년 9월 20일에 개막한 서울아시안게임이 10월 5일 폐막됐다. 서울아시아드 심벌마크가 그려진 대형풍선이 6개의 조명을 받으며 승천하자 8만 관중은 빨강ㆍ초록ㆍ하양의 손전등을 일제히 켜들고 작별인사를했다.
27개국이 출전, 중국이 금메달 94개로 종합1위, 한국이 금메달 93개로 2위 일본이 금메달 58개로 3위를 각각 차지했다. 서울아시안게임은 역대 대회사상 최대규모인 4,839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했으며 경기종목은 태권도를 포함해 25개 종목이고 세계신기록 11개, 세계타이기록 2개, 아시아신기록 90개, 아시아타이기록 8개, 대회신기록 224개, 대회타이기록 32개를 각각 수립, 1982년 인도대회때보다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1985년 태풍 브랜디 호 강타 사망 22명 실종 51명
1984년 재일교포 1천여명, 지문날인집회 거부
1983년 레흐 바웬사, 노벨평화상 수상
공산 폴란드 최초의 자유노조인 ‘연대’의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레흐 바웬사가 1983년 10월 5일 폴란드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80년 8월 14일 1만6000여명의 노조원이 파업 중인 폴란드 그단스크의 레닌조선소 담을 넘어 자유를 부르짖었던 한 사내가 있었다. 바로 10년 전 이 공장에서 해고된 전기공 레흐 바웬사였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비록 초등학교와 직업학교 교육만 받은 그였지만, 1967년 레닌 조선소 전기공 시절, 거리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폴란드의 참된 자유노조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결국 바웬사는 1980년 파업을 주도하면서 동구공산권에서 최초로, 지금은 불법화된 자유노조를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후 바웬사는 1990년 마조비에츠키와 대결해 압도적인 표차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개혁의 부작용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난이 가중되는 등 국민의 불만과 시위가 확산되자 의회를 해산하고 1993년 9월 총선거를 실시, 신정부를 출범시켰으나 1995년 대통령선거에서 전 공산당원 A.크바스니에프스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83년 국내최초 가스발전소 평택화전 3~4 호기 준공
1982년 5차 세계언론인회의 개막
1982년 볼리비아 대통령에 수아소 선출
1979년 최초의 가스발전소 평택화전 3,4호기 준공(발전용량 70만㎾)
1978년 공비 강습복귀사건
화천지역 부대 병사 4명이 전역 및 휴가신고 차 연대본부로 가던중 공비의 기습사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신고로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철책을 뚫고 북상 도주.
1972년 미국 산업 디자이너 헨리 드라이푸스 사망
1971년 경비사령부 장병 30여명 고려대 난입, 학생 5명 연행
1970년 퀘벡 해방전선 납치 사건
퀘벡 해방전선(FLQ, Front de libération du Québec)이 몬트리올에서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를 납치하였다. (이후 10일 퀘벡 부총리인 피에르 라포르테도 납치하였다) 퀘벡의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 총리는 사태에 대해서 기자에게 ‘Just watch me’라는 말을 하였고 16일 계엄령을 내렸다. 17일 피에르 라포르테는 살해되면서 FLQ에 대한 퀘벡 시민들의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FLQ는 제임스 크로스의 목숨을 대가로 협상을 벌이다가 12월 4일 쿠바로 망명을 대가로 5명이 망명하면서 끝났다.
1969년 골프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킨 미국의 프로 골프선수 월터 헤이건 사망
1968년 자연보호헌장 선포
1965년 파월 군수지원사령부 파병(십자성부대)
1962년 한국-에콰도르 국교 수립
1962년 이언 플레밍 원작 첫 007 영화 ‘살인번호’ 개봉
‘007시리즈’의 산파는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1908~1964)이다. 그는 로이터통신 기자와 주식 브로커 등의 일을 하다가 1939년 7월 영국의 해군정보국 장교가 되어 2개월 뒤에 터진 2차대전에서 탁월한 첩보능력을 발휘했다.
플레밍은 2차대전이 끝나자 첩보원 생활을 그만두고 주식 브로커생활을 했으나 적성에 맞이 않아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첫 007 소설 ‘카지노 로얄’을 1953년 4월 출판했다. ‘죽느냐 사느냐’(1954), ‘문 레이커’(1955) 등을 잇따라 선보였으나 판매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55), ‘위기일발’(1957) 등이 나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제임스 본드 붐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의 애독서에 ‘위기일발’이 포함되었다는 미국의 ‘라이프’지 기사가 나간 뒤에는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2년 10월 5일 첫 007 영화 ‘살인번호(Dr. No)’가 영국에서 개봉된 것에 고무되어 후속작을 계속 쏟아냈다. 결국 4편의 시리즈를 더 쓰고 1964년 8월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플레밍이 쓴 007 시리즈는 ‘옥토퍼시’(1966)를 마지막으로 총 14편이었다.
첫 007 영화 ‘살인번호’는 자메이카 근해 외딴 섬에 비밀기지를 구축해 미국의 인공위성과 미사일의 진로를 방해하려는 중국계 박사 닥터 노의 음모를 본드가 차단한다는 내용이다.
숀 코너리는 ‘살인번호’의 순조로운 흥행과 뒤이어 개봉된 ‘위기일발’(1963), ‘골드핑거’(1964), ‘썬더볼 작전’(1965) 등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1955년 미국, 인공위성 제작 발표
1952년 조오련 출생
대한민국의 수영선수 조오련 선수가 태어났다.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고, 1968년 해남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72년 서울 양정고등학교(55회)를 졸업했다. 1970년 방곡 아시안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에서 금메달, 자유형 200미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접영 200미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1950년 동구 5개 공산국, 한국문제 공동결의안 유엔에 제출
1949년 여객선 평해호 침몰, 71명 사망
1949년의 추석 전날이었던 10월 5일, 2백여 명의 귀향객을 가득 싣고 인천항에서 강화도 사기리로 향하던 개인 소유인 발동기선(일명 똑딱선) 평해호가 운항 도중 물치도에서 100m 떨어진 지점에서 전복되었다. 평해호는 17톤급으로 법정정원이 50명이었으나, 명절을 앞두고 이를 초과한 2백여 명이 승선하였다. 12시 12분에 인천항을 출발한 평해호가 운행 40분 후 작약도 부근에서 전복되어 승객 다수가 바다에 떨어졌고, 이에 놀란 승객들의 혼란으로 다시 뒤집혔다. 이를 뒤따르던 동양기선 소속의 갑제환호가 96명의 승객을 구하였다. 11월 3일 인천지검에서는 승객 중 생존자가 86명, 사망자는 71명이었다고 발표하였다
1949년 제헌헌법에 의해 최초 국정감사 실시
1948년 아시가바트 지진,
투르크메니스탄 아시가바트(Ashgabat)에서 발생한 지진은 당시 보도를 통해서는 1만명이 사상자가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1988년 새롭게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1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피해가 컸던 지진은 1556년 1월 23일, 중국 산시성에서 일어난 신시 대지진으로 당시 83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규모 8.0). 다음으로는 1976년 7월 27일에 중국 당산 지진으로 사망자 25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지진 규모 7.5). 지진의 규모로는 1960년 5월 22일에 칠레의 발디비아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규모 9.4-9.6이었다고 한다.
1947년 코민포름 결성 발표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 9개국 공산당 대표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1947년 10월 5일 비밀회의를 열어 미국에 대항하는 코민포름을 결성했다. 회의에는 소련공산당중앙위 서기 말렌코프, 폴란드 부수상 고물카와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 대표가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소련대표가 국제정세에 관한 보고 후 트루먼 독트린, 마샬플랜 등의 미국 정책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을 강조했다. 본부는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두었는데, 1948년 유고슬라비아가 제명된 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옮겨졌다.
코민포름은 1947, 1948, 1949년 회의를 개최한 외에 기관지 `영구평화를 위하여,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를 통하여 각국의 정세와 당의 활동방침에 대한 보도, 논평을 했다. 점차 소련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산주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일면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1956년 4월 17일 그와 같은 활동방법과 조직형태는 공산주의운동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해체됐다.
1945년 미군정장관 고문에 한국인 11명 임명(위원장 김성수)
1943년 부관연락선 곤륜호 미국잠수함에 의해 격침. 544명 사망
1934년 원작 ‘품행제로’의 감독, 장 비고 사망
불운의 천재 영화감독 장 비고가 지병인 폐결핵을 앓다 1934년 10월 05일 짧은 생을 마감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살아생전 제작한 4편의 영화만으로 큰 대중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비고는12살 되던 해에 무정부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옥중에서 사망하자 친척집과 기숙학교를 전전하면서 불행하고 병약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로인해 그는 자연스럽게 무정부주의ㆍ반권위주의를 체득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비고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게 될 폐결핵 감염 사실을 알게 된다. 건강이 악화되자 따뜻한 지방인 니스에 정착하게 되는데, 비고는 그곳에서 사회풍자적 다큐멘터리 ‘니스에서’(1929)와 ‘타리스’(1931) 두 단편 기록영화를 처음으로 감독한 후, 자신의 기숙학교 체험을 바탕으로 한 ‘품행제로’(1933)를 제작하게 된다. 비고는 이 작품을 통해 성장기 아이들을 다룬 영화가 가지게 마련인 근본 전제를 180도로 뒤집었다. 그는 어른들의 관점이 아닌 아이들의 관점에서 그들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세계상을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검열관에게 ‘반프랑스적’ 영화로 낙인찍혀 개봉된 지 얼마 안 되어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1945년까지 프랑스내 상영이 금지되었다. 또한 그의 마지막 명작이 된 ‘아탈란트호(號)’(1934)는 프랑스 부르주아의 본질에 혹독한 질타를 가함으로써 대중의 비판을 두려워한 제작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삭제되어야 했다.
1925년 경성운동장 준공
1922년 경성부립도서관(현 남산도서관) 개관
1922년 한국보이스카웃 운동의 모체인 소년척후단 조직
1920년 일본군, 북간도 한국인 2,285명 학살
1919년 인촌 김성수,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1915년 불가리아, 러시아에 선전포고
1911년 이탈리아군 트리폴리 점령
1910년 포르투갈 공화제 선언. 국왕 마누엘2세 영국에 망명
1908년 불가리아 독립선언. 루마니아 병합
1904년 황실제도 정리국 설치
1898년 포르투갈 식민지영토에 관한 영국-독일 비밀조약
1864년 프랑스 카메라 기술자 루이 뤼미에르 출생
1864년 인도 캘커타 태풍 강타 7만 명 사망
1789년 파리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시위하고, 베르사유 행진을 벌임
1713년 백과전서학파의 디드로 출생
1592년 진주대첩
1592년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은 승승장구하면서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가 평양성까지 점령했지만 이순신의 수군에 패해 바닷길을 통한 병력수송과 물자보급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육지를 통해 전라도를 장악할 목적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진주성의 조선군은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깊이 파는 등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고 성 밖에서는 의병 부대가 지원했다
마침내 1592년 10월 초 하세가와 나가오카 등이 이끄는 3만여 명의 일본군은 진주성을 총 공격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수천 명의 조선군은 백성들과 힘을 합쳐 성을 방어 했다
결국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 났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고 전라도는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82년 태양력의 그레고리오력 사용
13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인구조사 실시(고려 충선왕 5년)
1101년 대각국사 의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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