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그림자/이순희-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 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 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고요한 품을 더듬어 찾듯이
그 응달에 다 풀어내고 싶어졌다
-산꼭대기에 올라/김형영-
산꼭대기에 올라
소나무 밑에 누워 본다.
얽히고설킨 가지와
가지마다 푸른 솔잎 사이로
바람과 구름 따라
근심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진다.
하늘을 향해 몇백 년을 자란
늙은 소나무 밑에 누워 있으면
내가 가장 가벼워지는 시간,
어디든 춤추며 날아갈 것 같다.
좋은 날 좋은 시 택해서
막걸리 한두 말 퍼다
뿌리 깊이 부어드려야겠다.
-겨울산/정현종-
겨울 산을 내려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희끗희끗 눈 덮인 산,
계곡들은 차고 맑은데
거기 네 모습이 어른거려
자꾸 발을 멈춘다.
―너는 아프냐
돌아보면 차가운 계곡
차가운 계곡뿐인데
네 모습이 거기 어른거려
내 뒤에서 자꾸 잡아당겨
돌아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너는 아프구나
어느 날 네가
북한산 계곡에서 잃어버린 시계,
시간을 청산(靑山)에 묻었으니
마음은 문득 푸른 하늘이었는데,
우리의 몸은 또 무겁고
네 병상(病床)의 시간이 나를 따라다닌다.
―너는 아프구나
(여기까지 쓰고 미완(未完)으로 놔두기로 함)
-새벽 산 정상에/금기웅-
새벽 산 정상에
오래산 큰 나무가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다
나는 그가 양 어깨에 접어두었던 긴 날개를 꺼내
저 곤궁한 지상으로 날아 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울음을 참고 이곳을 지켜왔으리라 생각했다
마치 보호수처럼
처음과 마지막이 똑같이 완전해지기 위해,
서로 꼬리와 머리를 물고 휘감아
얼어붙은 이 먹먹한 세상에 뿌리내리기 위해,
또 온몸 기운을 마지막까지 짜내어
길어진 팔들을 뻗어
이제 막 온기 올라오는 황토의 중심에 닿기 위해
그가 웅크리고 앉아 운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리라
오 큰 나무여
휘청거리는 결심을
지탱해줄 것 같은 그대여
추운 아침 햇살 속에 눈 크게 뜨고
우뚝 서 있는 그대여
내 마음 통째로 너에게 기댄다
이제 막 온기 올라오는 우주의 중심에 닿기 위해
-겨울 산에서/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대나무 숲이 큰 그늘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골자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 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 년 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겨울산/강해림-
바위와 바위 사이, 풋내나는 날개마다 노오란 풀씨 듬뿍 묻히고 봄은 득음(得音)을 위하여 침묵하는 물소리마다 우리들 가
슴 마른 풀잎마다 불을 지르고, 정말 저 산등성이 너머 와! 소릴 지르며 함성처럼 몰려오고 있는 것일까요
첩첩산중 불려간 몇천년 전 바람소리 듣는 늙은 소나무는 해가 동에서 서으로 식은 꼬리를 부끄러이 감추었다간 다시 서서
히 타오르듯, 길 잃고 헤매이던 숲속의 친구들마다 어김없이 돌아와 다 함께 타오를 그 날의 기인 봄날을 예감하지만
발 아래 꽁꽁 얼어붙은, 어둠의 적멸 속에서 무수한 열망과 푸른 빛들 엉킨 소리의 불꽃을 안으로 안으로만 뜨겁게 묻으며
돌아앉아 이듬해 봄날, 마침내 죽음도 해탈도 한 줌 산비알 붉은 햇살 아래 불러내는 저 산마음 닿을 때까지 얼마나 오래 바
람부는 산행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겨울산을 오르며/김주안-
눈이 내린 산길을 오른다
아직도 붉은 언어로 남아 있는 팥배나무
벼랑에 서서 가을을 채우던 다람쥐들
엄숙하던 삶들이 때때로
눈속에 갇혀있다
제대로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없는 산
오르다 힘들면 바위에 마음을 널어놓고
내가 걸어 온 길의 끝을 생각하며
흰눈을 누더기로 걸친 겨울나무의 삶과
숲을 따라 발자국을 남긴 새들을 궁금해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
겨울 숲을 따라 간 것은 아닐까
저 산모퉁이 돌면
보이지 않는 시간 찾아 갈 수 있을까
바람이 가는 길 물을 수 있을까
오를 수록 깊어지는 산길
질퍽거리는 발자국소리
너에게로 가는 길은 아직도 숨이 차다
-겨울산을 바라보며/이승복-
저 먼 산능선 설한풍에
설병이 보초를 서는
설산에 산짐승이
수렁잠을 잔다
곤히 떨어져 꿈을 꾸는지
바람 장군의 외침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전설이 눈속에 헤엄치고
정상 마리에서 입김 내품어
태곳적 모습을 내보이는 산
흔들림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삶의 지표를 실천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서는 대지여
설목(雪木)이 일렬종대로
대열이뤄 용사처럼 서있다
바위군상들과 어깨를 맞대
박차고 나갈 듯한 자세다
만상의 생성법칙이 뭤이냐
버팀목으로 자리 지키며
자기몫을 다하는 것 아닌가
청천 하늘에 걸린 반달
조각배에 두둥실 떠올라
세속을 내려다보는 신산
어둠내리고 소리 잦아들 때
'잠시 머물다 가는 이세상
조금은 더 참아 봐야지'
손사래치며 돌아 눕는다.
*설병(雪兵)- 눈을 뒤집어 쓴 소나무를 상징
*마리- (옛) 머리
*입김 내품어- 산정상에 있는 눈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
-겨울산/권경업-
그대에게 가는 길은 발 시립니다
지워버린 오솔길
다가오지마라는 숫눈을 밟아
걷고 걷다보면, 또 눈은 내리고
언젠가는 산벚꽃 하얀 꽃눈도 내리고
그때는 시린 발을 잊을 겁니다
-겨울산/홍은택-
푸른 허공에 바람 길이 보인다 그 길 따라 수만의 말들이 갈기를 날리며 무리
지어 달려간다 말들이 허공에 남긴 발자국들은 아직 낮은 곳으로 내리지 못한
검은 나뭇잎으로 펄럭이고 사라져 간 길 끝자락을 부여잡은 채 골짜기들이 마지
막 숨을 몰아 쉰다 다시 이명(耳鳴)처럼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 눈을 뜨면 나뭇잎
하나 꼭 쥔 손을 슬며시 풀어놓는 마른 가지 끝에서 새 한 마리 실 끊긴 연처럼
막 허공을 날아오르는 겨울 산, 해가 기운다
-겨울산에서의 충고/김영재-
영혼의 무게를 알려거든
겨울산으로 가라.
그곳에서 결빙의 황홀을 맞이하려면
길을 버리고 계곡 숲으로 들라.
가는 곳마다
길이 막히고
완강한 차거움이 햇빛을 받아
번쩍,
눈을 찌를 것이다.
어젯밤의 실한 꿈도
'부질없어라'
등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하늘 떠난 바람이
작고 힘없이 굳어버린
몸을 할퀼 것이다
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볼 것이다.
지상의 일들은 그대와 무관하다.
그렇다고,
하늘을 탐하지 말라.
젖어 있는 바다도
그대와는 무관하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천천히, 서늘하게
저무는 날을 맞이하라.
결빙의 절정을 안으로 녹여
다시 얼음으로 빛날 때까지
끊긴 절벽 아래서
길을 버려라.
길을 잊으라
-겨울산/가영심-
존재를 이끄는 생각의 줄기를 따라
오솔길을 걸어올라 가면
산정 위 거기
홀로 계신 그 분을 바라봅니다
그 분의 은빛 어깨너머로
빛살은 눈부시고
눈부신 황홀함에
잠시 눈을 감아봅니다
빈 마음으로 나를 놓아두고
시간도 놓아둡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이
모두 산아래 있지만
품어주시는 인자하신 그 분의 사랑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겨울산을 우러러 바라보면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계신
언제나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습니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