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타고 동남아 가기’
2009년 이 동네(?)에 들어온 이후 이런저런 세일링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품게 된 현실적인 목표였다.
솔직히 말해,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일주’는 현실적이지 않다. 돈, 시간, 정력이라는 객관적인 조건 이외에도 ‘지루함’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도 문제다. (내가 느끼기에 요트 세일링의 7할은 지루함이다. 그럼, 나머지 3할은…? ‘고생스러움’과 ‘즐거움’이다. 그 비율은 요티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지 않나 싶다)
세일링의 즐거움은 극대화하고 고생스러움과 지루함은 최소화할 수 있는 곳… 바로 동남아시아가 아닐까?!
2016.3.22. 일본 오키나와 나하항(기노완 마리나)을 출발해서 일본 최서단의 섬 이시가키, 필리핀 산 페르난도를 거쳐 필리핀 푸에르토 갈레라(프에르토 갈레라 요트클럽)에 2016.4.1. 도착했다.
총 항해거리는 약 1,100마일, 항해일수는 8일이 소요되었다. 평균 6.5노트 정도로 달렸다.
잘 알려진 대로 북동계절풍이 쉬지 않고 불어왔고(10~30노트) 파도는 바람의 세기에 비례해 1~3미터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이번 세일링을 최종적으로 평가(?)해 보면… 지루함 30, 고생스러움 60, 즐거움 10 이라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스코어가 나온다. 아쉽다.
일기예보를 잘 활용하지 못한 항해계획과 ‘한배’를 탄 사람들 간의 불협화음이 초래한 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제 1 구간 : 일본 오키나와 나하 (‘기노완 마리나’) -> 일본 이시가키 (‘이시가키 피셔리나’)
2016.3.22. 17:00 ~ 2016.3.24. 06:00 (37시간), 250 마일
면세경유 400리터를 보조탱크에 채우고 기노완 마리나를 떠난다. 뒷바람(북동풍)이 15노트 정도 불어오는 잔잔한 바다 위를 달려 나간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3시간씩 야간 당직을 서기로 했다. (21:00~24:00, 00:00~03:00, 03:00~06:00) 세 사람이니 한번씩만 당직을 서면 된다. 만만하다.
일기예보(참고 사이트 : www.windyty.com)가 신통할 정도로 잘 맞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점점 세졌다. 15… 20... 25… 30 노트. Hallberg-Rassy 43피트는 기대보다 훌륭했다. 30노트 정도의 바람은 살짝 축범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묵직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안정적이다. 그러나, 뒷바람, 뒷파도라 롤링이 심하다. 배 멀 미 !!! 오랜만의 뱃멀미다. 고기밥 까지는 주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속이 미식거려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도착 예정시간 6시간 전, 바람이 거세진다. 이런 일기예보는 안 맞으면 좋으련만… 정말 귀신같다. 사실, 출발시간과 관련하여 의견충돌이 있었다. 35노트/3미터의 바다를 피하기 위해 10시간 정도 일찍 출발하자는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35노트 정도의 바람은 별거 아니라는 것이 선장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려했던 것은 단순한 35노트라는 바람의 세기가 아니었다. 일기예보 사이트의 시각화 된 예보로 확인할 수 있는 바람과 파도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강풍 시작 전 바람의 방향이 360도 돌고, 파도 또한 방향이 변화하며 파장이 짧아짐)
돌풍이 40노트까지 올라가고 뒤죽박죽 몰아치는 파도는 체감 높이 6~7미터를 족히 넘나들었다. 콕핏으로 물벼락이 여러 번 몰려들었다. 옆 파도를 맞고 45도이상 쓰러진 배는 토레일을 적시는 기분나쁜 물거품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찔한 순간의 계속이다. 문득 어둠 속에 울부짖는 바다를 바라보니, 거대한 믹서기를 돌려놓은 것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이고 있다. (나중에 이시가키에 도착해보니 이미 풍랑경보가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순간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그럼에도 배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역시 배는 튼튼해야 한다.
배는 험한 바다를 꿋꿋이 헤쳐 나갔지만 사람들은 모두 넉 다운 직전이다. 선수의 V-berth에 누워 있노라면 배도 겉보기 만큼 괜찮지만은 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방향에서 몰아치는 파도에 맞서 배는 피칭, 롤링, 요잉의 움직임으로… 헐이 비틀리는 고통으로 버티는 것이 느껴졌다. 끼이익 끼익, 헐과 인테리어의 구조물들이 분리되는 듯한 소리… 그리고 벌크헤드가 새로운 자리를 잡는 듯한 굉음들… 내 배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깨지지 않기만을 바랬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온 몸의 뼈가 하나하나 분리되었다가 다시 맞춰지는 느낌의 시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해뜨기 한 시간쯤 전 이시가키 항에 접근했다. 항구를 지키는 넓은 방파제의 입구로 간신히 진입했다. (홍등과 녹등, 황색등 까지… 어둠 속에서 처음 가보는 항구의 여러 겹의 방파제와 위험지역을 구분해 내는 것이 어려웠다. 전자해도의 도움으로 간신히 진입. 처음 가보는 항구라면 가능하면 밝을 때 들어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해도에는 없는 구조물이 앞길을 떡 막고 있다. ‘이건 뭐지?’ 급하게 배를 돌려 해 뜨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앵커를 내렸다. 조금 기다리니 어슴프레 여명이 밝아온다. 구조물을 피해 항구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다. 여전히 강풍은 불어제끼고… 수심은 점점 낮아지고… 불안한 나의 시선에 요트의 마스트가 보였다. 이시가키 피셔리나(어선+레져보트 복합계류시설)에 도착했다.
항해 주의사항으로, 오키나와 본섬과 이시가키 섬 사이에 있는 미야코지마 섬을 지날 때 섬 근처로 너무 붙으면 안 된다는 거다. 얕은 산호초 지역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육안에만 의존하면 위험하므로 전자해도를 잘 보고 항해해야 함.
기노완 마리나 : 계류비 약 25,000원/일 (43피트 기준), 일본의 평균적인 마리나 요금(보통 4~5만원 정도)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전기/물 포함한 가격 (단, 전기 소켓의 모양이 한국과 다름. 마리나 사무소에 문의) 외국적 배는 마리나 내 주유소에서 면세 경유 구입가능 - 64엔(약 700원)/리터, 세관의 서류처리(마리나에서 대행해 줌)가 필요하므로 하루 정도 여유를 갖고 신청할 것.
출항 전 신고 : 마리나 사무소에 출항신고 (다른 일본 내 항구로 가는 경우, 최종 출국의 경우는 세관, 이민국에 출항/출국신고 필요함)
제 2 구간 : 일본 이시가키 (‘이시가키 피셔리나’) -> 필리핀 산 페르난도 (항구 내 앵커링)
2016.3.26. 17:00 ~ 2016.3.30. 09:00 (88시간), 560 마일
이번 항해의 성패(?)를 좌우할 구간이다. 거리도 꽤 길고, 대만과 필리핀 북단 사이의 해협은 험하기로 이름난 지역이다. 2억원 짜리 여행자보험의 보험료가 아깝긴 하지만 굳이 그 보험금을 타고 싶지는 않다. 막말로 조수기(water maker)빼고는 모든 게 다 있는 배다. 여차하면 EPERB는 자동으로 조난신호를 보낼 것이다. 여의치 않으면 빵빵 잘 터지는 위성전화로 구조요청을 하면 된다. 바닷물로 그리 차갑지 않고(섭씨 20도 이상) 반짝이는 6인용 라이프레프트가 갑판 위에 모셔져 있다. 내가 잃을 거라곤 옷 몇 벌, 책 몇 권 그리고 노트북 정도다. 마음이 가볍다.
앞선 구간에서 일기예보를 무시한(아니, 바다를 만만히 본) 대가를 톡톡히 치루었다. 이틀이나 지났지만 바람은 여전히 쌩쌩 불고 있다. (항구 안에서도 25노트를 넘나들었다) 슬픈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보다. 일기예보를 잘 활용한다면 이번 강풍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뒷 자락에 올라타 적당한 뒷바람으로 편안한 항해가 가능해 보였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출항했다. ‘기다리는 것도 항해’라는 격언이 무색한 결정이었다. 12시간만 기다리면 되는데…
이시가키 섬 주변의 산호초지역 때문에 섬을 빙 돌아 내려가야 했다. 섬을 벗어나기도 전에 어두워졌다. 뱃멀미가 심한 크루 한 분 덕분에 야간당직을 4시간 2교대로 변경했다. (22:00 ~ 02:00, 02:00 ~ 06:00) 다들 어느정도의 뱃멀미 기운이 있어 먹는 것이 시원치 않은 상태라 기본 체력이 달리는 상황, 야간 2교대 당직은 쉽지 않았다. 네 번의 야간항해를 견뎌야 하는 구간, 피곤이 쌓였다. 큰 바다인데다 지나가는 배도 별로 없다. 그리고 AIS와 레이다의 경보기능이 있고 마스트에는 레이다 리플렉터가 달려있다. 그러나 우연히 일어난 어느 새벽에 당직자가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황당한 기분이었다. 내 배가 부서지는 건 아니더라도 큰 배와 충돌하면 다 같이 죽는 거 아닌가… 이런 젠장할! 졸더라도 콕핏에서 졸아야지…
강풍이 채 지나가지 않은 바다에서 3일을 시달렸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25~30노트의 바람과 그리 높지는 않지만(2~3미터?) 파장이 짧고 거친 파도가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필리핀 북단을 살짝 지나 내려오자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 졌다. 불과 한시간 전의 바람과 파도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마지막 하루는 아주 편안한 연안항해가 되었다. 드디어 우리가 상상하는 열대지방의 세일링을 경험하게 되었다.
편안한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이른 아침 필리핀 산 페르난도 항에 입항(?)했다. 명색이 C.I.Q가 가능한 필리핀 북부의 유일한 Open Port 임에도 산 페르난도의 항만 시설은 초라했다. 변변한 방파제도 없고 배를 댈 수 있는 안벽 시설도 부실했다. 항구 앞의 적당한 위치에 앵커링 하고, C.I.Q를 위해 상륙했다. 검역을 해야 하는 의사가 아직 안 왔다며 시간을 끌더니 200달러를 달라고 한다. 100달러로 깎아 네고(?)를 완료하자 의사도 없이 검역증, 입국도장 등을 꽝꽝 찍어준다. 어이 없다. 소문에 의하면 수빅 등 다른 항구에 비하면 이곳이 저렴한 편이란다. 아무튼, 드디어 일본을 출발해 필리핀에 요트를 타고 입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큰 바다를 항해할 때 AIS와 레이다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AIS를 선택할 것 같다. 가격도 저렴하고 전력소모도 훨씬 적은데다 큰 바다에서 만나는 웬만한 크기의 배에는 갖추어져 있는 AIS가 충돌방지를 위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시가키 항 피셔리나 : 계류비 약 6,000원/일. 전기/물은 별도로 계산. 주유차를 불러 주유가능, 면세요청은 세관에 직접 확인해야 함.
출항 전 신고 : 세관, 이민국에 출항/출국신고 필요. 이시가키 항구 가까운 곳에 세관,이민국,해상보안청이 모여있는 합동사무소가 있어 신고하러 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제 3 구간 : 필리핀 산 페르난도 (항구 내 앵커링) -> 필리핀 푸에르토 갈레라 (‘푸에르토 갈레라요트클럽’, 무어링 부이)
2016.3.30. 17:00 ~ 2016.4.1. 10:00 (41시간), 250 마일
앞선 구간에 비하면 별책부록 같은 구간이다. 옆바람을 맞으며 편안하게 항해했다. 때로는 바람이 너무 약해 엔진을 이용했다. 야간에 연안에서 조업하는 작은 어선들만 주의하면 항해의 어려움이 없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서해안에서 처럼 그물을 길게 늘어놓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산 페르난도 항 : 잠깐 앵커링을 하더라도 배를 완전히 비울 시에는 현지인을 고용해서 배를 지켜야 함.
푸에르토 갈레라 요트클럽 : 무어링비 약 6,000원/일. 전기/물 사용 불가(식수는 식수배달 보트를 별도로 수배해야 함)
문득, 일본/필리핀 항해를 마치고 앞으로의 세일링을 상상해 봤다. 목표를 이룬 이후의 허무함이 몰려올 수도 있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설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세일링의 즐거움은 대부분 사람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한다면 당일치기 입파도 세일링이 동남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 없다.
입파도 만세! 마리아/미리내/본보이 크루 만세!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만만세!
첫댓글 천혜의 천연항구로써 옛날 해적들의 소굴이라던 푸에르토 갈레라 사진을보니 예전 수없이 다녀왔던 다이빙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한배를 탄다" 는건 수많은 사연들이 함축되어 있는거 같습니다. 기가 막히게 서로 뽕짝이 잘맞기도하고 아주 이상한 군상들의 집합이 되기도 합지요.
그래서 배를 함께 타봐야 그사람 속을 알수있다는 말도 있구요...
엄선장님 항해기 부럽게 잘봤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회장님!
이번에 2회 다이빙을 했는데요.. 유명 사이트에 비하면 좀 아쉽더군요.. 그 사이에 사이트가 회손된 것인지 아쉽습니다. ^^;
다음에 같은 코스를 항해한다면, 훨씬 재미있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면교사 같은 항해였습니다..
생생한 항해기 너무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선장님.
지루함 30 : 고생 60 : 즐거움 10 이라는 현실적인 점수가 와닿네요. ㅎㅎ
(즐거움 비율이 더 높아질) 다음 항해기 기대합니다! ^^
저도 다음 기회를 기다립니다. ^^
그나마 지루한 기간에 책 두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ㅋㅋ
훨~씬 재미있게 즐겁게 항해할 자신이 있어요!!
잘읽었습니다! 대양항해는 고통과 즐거움이 어우러지는 우리 삶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소중한 경험을 하였으니 새로운 도전을 위해 열정을 태우시기 기대합니다^^
한 번 경험하고 이야기 하기는 좀 조심스럽지만... 이 코스는 잘 준비된 30피트급 요트로도 충분히 즐겁게 항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성용(쎄라비) 25 피트로는 잘 준비해서 어떻게 안될까요...ㅎㅎㅎ
@박효준(루돌팡이) 적절하게 준비하고 날씨에 순응하는 항해를 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국 - 동남아 코스가 케이프혼은 아니니까요.. ^^
기다리고 있엇어요^^/ 어떻게 지내나.. 해서. 고생했네요.. 좋은 일도 있었겠지만.. 수고하셨어요.
그래도 생동감있는 항해기
ㅋㅋ 재미있게 봤어요 동영상도~~~
수고하셨어요^^//
반갑습니다. 이치카와님..
언제나 댓글로 반갑게 맞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음에 뵈어요~~
역시 엄선장님은 글을 생생하게 잘 쓰셔~
만쉐이~
조만간 다시 함 가시죠~~ ..^^
꼭 다시 같이 가요!!!
이번 항해기는 정말 항해 관련 정보측면만 썼어요...
진짜(?)이야기는 10배나 더 많지만... 그건 만나서 이야기 해요 ㅋㅋ
오.. 여기서도 뵙네요. ^^ 글 정말 잘쓰시는군요. 메일 잘 받았습니다. 이틀 걸려서요... ㅎㅎ
저도 지난 항해기 이제 고쳐쓰기 마무리 중입니다. 여기에도 올리려고 보니 엄성용 선생님 글이 있네요.
ㅎㅎ 제가 보기에도 다소 당혹스러운 순간들이 종종 있었으나... 저도 애매한 내용(?)은 없이 항해 중심으로 작성 중입니다.
반갑습니다. ^^
이번 구간의 항해기도 궁금하지만.. 오월부터 떠나신다는 귀국 항해가 무척 궁금합니다.
미리 재미있는 항해기 기다립니다... ㅋㅋ
장거리 항해는 맘이 잘맞는 분과 항해하면 힘들어도그 길이 소풍길같고, 맞지않으면 그 시간이 정말 힘이들죠..글 잘읽었슴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 다음에는 소풍길이 될 수 있도록 저도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