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물리적·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 주거기본법이 말하는 ‘주거권’의 정의다. 헌법 조항의 ‘국민 권리’로서 주거권 개념도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재산을 증식하는 수단으로 집을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주거권 담론보다는 부동산 투기 문화와 이를 통한 재산 증식을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주류다. 집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오르는 집값을 간신히 감당하거나, 그러지 못해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보편적 주거권’에 기반해 청년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적 주거 공동체를 꿈꾸는 단체가 있다. 2014년 설립된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하 ‘민쿱’)은 달팽이집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16곳, 그중 서울에는 14곳에 셰어하우스 형태의 비영리 사회주택을 공급했다. 그 가운데 ‘꼼마집’은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집으로, ‘2호집’에서 함께 살던 이들이 연희동 집 완공을 기다리며 이주한 달팽이집이다. 2호집에서 1년여, 그리고 이곳에서 8개월째 사는 기자는 꼼마집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팬데믹에 따른 ‘집콕’의 시기, 사회적 안전망이 되어준 하우스메이트들을 조금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주거 문제와 각자가 경험한 집, 그리고 꿈꾸는 집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10월 7일 복음과상황 회의실에서 진행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송현정(이하 '현정'): 달팽이집에서 6년째 살고 있습니다. ‘민쿱’ 조합원 400여 명 가운데 입주자는 250명 이상인데 그중 최장기 거주자입니다.(웃음) 입주해서 살다가 기회가 되어서 민쿱에서 일하고 있어요.
김가원(이하 '가원') : 달팽이집에서 2년 반째 살고 있어요. 어린 시절에 이사를 진짜 많이 다녔는데, 이력서를 쓸 때도 꼭 이 이야기를 했어요. 외국에서만 안 살아봤지 도시, 농촌, 섬 다 살아봤다고요.(웃음)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이기도 해요.
정이든(이하 '이든'): 재밌는 게 ‘달팽이 사람들’은 만나서 서로 자기소개할 때 다른 건 잘 얘기 안 해요. ‘어디 있는 달팽이집 몇 호에 사는 누구다’ 하지. 달팽이집에 산 지 2년 반 정도 되었습니다.
처음 달팽이집에서 살기로 한 계기가 있었나요?
현정: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1년 동안 아일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알게 된 사람들 다섯 명이 집을 빌려서 살았어요. 홍콩인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죠. 국적도 다 달랐어요. 외국인에게 집을 안 빌려주는 낯선 환경에서 같이 의지해서 살았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즐겁게 살았던 시기예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공부를 더 하려고 서울에 왔어요. 서울도 제게는 아일랜드 못지않은 타국 같은 곳이었죠. 집값이나 동네를 잘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가격도 고려했지만 가장 먼저는 같이 살 수 있는 주택을 찾아보고 싶었어요. 학교 합격 발표가 나기 전이었고 직업도 없으니 어느 지역에서 살게 될지 모르니까 계약기간이 짧은 곳을 원하기도 했고요. 셰어하우스는 보증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어요. 지금은 청년 보증금 대출이 예전보다 수월하지만 2014년도 당시엔 직업이 없으면 대출이 어려웠거든요. 그때만 해도 서울에 셰어하우스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는데, 검색하면서 민쿱을 알게 됐어요. 또래 청년들이 청년주거권 보장 활동을 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들어오게 되었죠.
이든: 경제적 부분이 제일 컸어요. 그다음으로는 처음 만나서 족발을 먹을 때처럼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았고요. 함께 살기로 했다기보다는 함께 살면서 느낀 점이 많아요. 기숙사에서 학교 친구들이랑 살기도 했지만 엄밀하게 비교되진 않죠.
가원: 저도 금전적 이유가 제일 컸어요. 졸업한 학교 근처에서 취업 준비를 하고 싶었는데 해당 지역에 마침 공실이 있는 달팽이집이 있었어요. 돈은 없지만 사람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에 선택지가 좁았죠. 그런데 연희동 이주를 위해서 중간 거처 꼼마집으로 이사 온 건 함께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랑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고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어요. 20대 여성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뉴스들을 접하기도 했고요. 혼자 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희 집 구조가 떠오르더라고요. 복도식이라면 같이 살아도 단절감을 느낄 수 있는데 거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잖아요. 거주 구조와 형태가 관계를 형성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정: 고향에 내려갔다가 서울에 올라왔는데 가족 중에 확진자와 만난 사람이 있었어요. 다행히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저는 한동안 재택근무를 하면서 거실에 나가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었죠. 이런 시기를 겪으면서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디에서 안정감을 느꼈냐면 집에서 나눈 인사들이었어요. 대화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그 짧은 인사에서 완전히 고립된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죠.
가원: 이전 2호집에서 하우스메이트였던 언니는 근처 다른 집으로 혼자 이사를 했거든요. 안전망이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라고 하더라고요. 근처에 사는 거랑 같이 사는 거랑 진짜 다르다면서요. 저는 본가인 대구에 코로나가 퍼지면서 오랫동안 내려가지 못했는데, 그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단지 하우스메이트가 아니라 식구라고 느꼈어요. 특별히 뭔가를 같이 하지 않고 거실에서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험이었어요. 물리적으로 이동이 제약되다 보니까 집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크게 느낀 거예요. 이전만큼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면 그러진 않았을 텐데 서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본가인 대구에 코로나가 퍼지면서 오랫동안 내려가지 못했는데, 그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단지 하우스메이트가 아니라 식구라고 느꼈어요. 특별히 뭔가를 같이 하지 않고 거실에서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험이었어요. 물리적으로 이동이 제약되다 보니까 집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크게 느낀 거예요." (김가원 씨) ⓒ복음과상황 정민호
모여 있어서 안 좋은 점은 없었나요?
이든: 전 한편으로는 더 불안했어요. 전공 특성상 학교에 자주 가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식구라고 부르긴 하지만 서로 각자 경제활동을 하고 연결된 네트워크들이 있는데 피해를 줄까 봐 걱정했어요. 내가 확진되었는데 집에서 같이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람한테 옮기면 그게 너무 미안한 일이 되니까요.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때는 다같이 거실에서 마스크도 안 벗고 반상회에서도 1미터씩 떨어져 앉아서 같이 식사도 하지 않았잖아요.
문득 어린 시절 살던 집에 대한 각자의 기억들이 궁금해지네요.
현정: 저는 스무 살 때 처음 독립을 했는데 그전까지는 태어난 집에서 줄곧 살았어요. 가족 소유의 단독주택이었는데 조부모님을 포함한 삼대 가족이 함께였고요. 작은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웃들을 평생 보면서 가깝게 지냈죠. 옆집마다 대문은 늘 열려있어서 동네 친구 집을 내 집 드나들 듯 오가는 분위기였어요.
가원: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 모두 살아봤어요. 그런데 집을 떠올려 보라고 했을 때 내부만 기억나는 게 아니라 집 밖에서 내가 뭘 했는지가 생각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초등학교 때 살던 섬마을이에요. 현관문에서 바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집이었는데 자주 등대로 산책을 했어요. 마을 자체가 집 같았죠. 빌라에서 살았을 때도 빌라라서 더 안 좋았다는 것보다는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배웠던 경험이나 삭막한 회색 단지 안에서도 친구들이랑 놀았던 일들이 떠올라요.
이든: 저도 어렸을 때 낮은 빌라에서 살았는데 위, 아래, 맞은편 층에 또래들이 있어서 제 안에 가상의 삼각형이 있었어요. 뒷산에 가면 무궁화랑 개나리가 피는 작은 동산이 있었는데 다섯 살 때쯤 그곳에서 놀던 기억이 나고요. 그 후에는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서 공무원에게 제공되는 전세 임대아파트에서 살았어요. 복도식 구조였는데 내다보면 동네가 다 보였어요. 동생은 학교 가다가 오락실에 자주 갔는데 엄마한테 매일 혼이 났죠.(웃음) 저도 친구들이 밖에서 뭐 하나 보고 재밌을 거 같으면 나가서 함께 놀았어요. 제가 조금 더 성장해서는 부모님이 자가를 마련해서 아파트에서 살았고요.
저는 집보다는 자차를 마련하는 게 꿈이에요. 캠핑카를 사서 스크린 달아놓고 방방곡곡을 누리면서 내가 만들었던 혹은 좋아하는 영화를 틀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제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머리가 새하얗게 센 할머니가 자기 집인 캠핑카를 끌고 어디론가 다니는 거죠. 그걸 ‘모터홈’이라고 부르는데, 언제 그 집을 마련할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정이든 씨) ⓒ복음과상황 정민호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더 다양한 주거환경을 경험하셨을 것 같아요.
가원: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다니다가 대학을 진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왔어요. 다행히 기숙사에 합격해서 그곳에서 주로 살았고요. 한번은 기숙사 입주 심사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앞길이 막막하더라고요. 학기를 앞두고 발표가 난 거라서 갑자기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대구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었어요. 친구 부모님도 저를 잘 알고 계셔서, 사정을 듣고 집에서 지내라고 해주셨죠. 또 기숙사는 방학 때 우선순위가 계절학기 수강생들에게 있었어요. 그래서 계절 학기를 듣거나 학교 활동을 하면서 기숙사에서 산 적도 있고, 방을 빼고 집에 내려가거나 경기도에 사시는 이모 댁에서 지내기도 했죠.
이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 배급 회사에서 일을 잠깐 했는데 집에서 3시간 거리였어요. 침대 하나 두면 꽉 차는 지인 집에서 잠깐 얹혀서 살았죠. 이후에 회사 조합원의 집에서 지내기도 했고요. 그때 고양이랑 살아봤는데 고양이는 귀엽지만 함께 사는 건 어렵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때 다니던 회사랑 같은 건물에 민쿱이랑 민달팽이유니온(이하 ‘민유’)이 있었어요. 이후에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서울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민쿱 직원분들이 기억나서 바로 연락했어요. 감당할 수 있는 집세를 고려하기도 했고 아는 분들이니까 심적으로 편했던 거죠. 달팽이집에선 집을 처음 보러 갈 때 식구들과 만나는 문화가 있는데 그때 족발을 시켜주셨거든요. 먹으면서 얘기 나눴던 게 좋아서 살게 되었어요.(웃음) 사실 학교에서 집까지 1시간이 걸리지만 사람들이 좋아서 선택했던 거죠.
독립을 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처음부터 좋은 거주지를 찾기가 쉽지 않잖아요.
현정: 스무 살이 되어서 독립을 했는데 그때부터는 계속 월세를 살았어요. 처음엔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친구 집에서 지냈죠. 춘천에서 학교를 다녀서 주거비 걱정은 크게 없었어요. 알바하면 부담할 수 있는 정도였거든요. 졸업하고 나서는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을 했지만 학생 땐 용돈을 조금씩 받기도 했고요. 월세 형태는 꽤 다양했어요. 동생이랑 같이 살기도 하고 혼자 살기도 했는데, 거의 1년마다 원룸을 옮겨 다녔고요. 언젠가는 집주인이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냐고 사생활을 간섭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무섭더라고요. 그땐 나이가 어렸고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 성인이고 계약을 맺은 관계인데 내가 통금 시간까지 지켜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러다가 집을 못 구해서 한 달 정도 친구네 집에서 얹혀산 적도 있는데 서로 패턴이 너무 다르고 건물 상태도 열악해서 빨리 집을 구해야겠다고 느꼈어요.
"올해 초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자륵파브릭’(Sargfabrik)이라는 주택협동조합을 방문했어요. 여러 명이 주택협동조합을 구성해 공동체 주택을 만들었어요. 벌써 20년이 다 되었는데 가족 단위로 살기도 하고 혼자 살기도 하더라고요. 그 집에 사시는 한 분이 농담 삼아 여긴 몇 년 지나면 양로원이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안 나가고 계속 사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송현정 씨) ⓒ복음과상황 정민호
평소 주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당장 청년 주거 문제라 하면 ‘지옥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청년들이 지하(반지하)와 옥탑방·고시원에 거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가원: ‘지옥고’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 문제가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학교 다닐 때부터 기숙사 건립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에요. 그분들 때문에 청년들이 이런 주거환경에 내쳐졌다고 표현하면 너무 과격할까요? 기숙사든 임대주택이든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집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어요. 작년에 아파트를 주제로 한 어떤 강연을 들었는데, 유독 한국은 아파트가 많은 나라잖아요. 저질의 주거 환경뿐 아니라 애초에 선택지 자체가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정: 우리가 들어갈 연희동 주택도 심한 반대에 부딪혔던 과정이 있었어요. 주택 내의 커뮤니티실을 주민들과 어떻게 공유할지 얘기도 많이 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을 많이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느꼈죠.
이든: 친구들 자취방을 많이 가봤는데 한 번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옥탑방을 간 적이 있어요. 피곤한 몸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오가면 진짜 힘들겠다 싶더라고요. 지하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 아주 좁은 공간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요. 지금은 젊으니까 그런 집에서 살 수 있다고 쳐도 나이가 들었을 때 더 좋은 곳에 살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저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친구들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빛도 잘 들어오고 개인 공간이 구분된 집에서 살고 있는 거니까. 여길 몰랐다면 제 경제력으로는 그런 자취방조차도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가원: 불법개조, 쪼개기방 등을 공급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부엌이랑 화장실을 같이 해놓은 집도 있어요. 외국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분 공동으로 추진해 공급하는 공공성을 가진 주택들도 많더라고요. 한국은 아직 정부 주도의 대규모 위주 사업이 많아요. 민쿱 같은 단체가 많이 생기고 공공성을 지닌 주택의 공급이 더 늘어나서 다른 대안적 주거를 사회가 더 많이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청년들도 ‘지옥고’ 같은 선택지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겠죠.
청년들의 문제로는 와닿지 않지만, 한국 사회의 거주 문제를 언급할 때 부동산 투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이든: 부동산 투기는 집을 재산 불리는 목적으로 보는 거잖아요. 투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거지 투기 자체가 청년들의 이슈는 아닌 것 같아요. 부모님 세대가 ‘월급 모아서 언제 돈을 벌어, 누구는 어디 집을 사서 돈을 불렸어’ 하는 얘길 들어요. 얼마 전에 청년들이 부동산 문제에 감히 발을 들일 수 없으니까 주식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보기도 했고요. 2030 청년 개미들이 많아졌다는 얘기였죠. 집을 삶의 공간으로 보고 싶어도 투기의 수단으로 보는 기성세대들에게 어쩔 수 없이 영향받는 거예요. 세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계층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또 최근에 예전에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았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주택가의 고급화를 위한 개발) 때문에 이런 동네가 내년이면 없어진다는 거예요. 유럽은 오랜 건물들도 고쳐서 쓰지만 우린 아파트가 지어져야 집값이 오르는 구조잖아요. 집의 좋은 점들이 남게 되는 게 아니고 개성 없는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서죠. 경제적 논리나 발전적 측면에서는 부동산 투자가 필요할 수 있지만 제게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니까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현정: 지금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집을 사는 게 모든 국민의 꿈인 것 같아요. 세입자는 불리한 위치에 매번 서기 때문이죠. 지금은 새 임대차보호법이 생겼지만, 이전까지는 2년마다 이사 가야 했잖아요. 투기의 결과로 청년들이 주거비로 피해 보는데 연예인들이 얼마에 건물을 사서 얼마에 팔았다더라 하면 다들 ‘우와 잘했다 대단하다’ 하잖아요. 이런 사회 분위기가 용인되면서, 임대주택이나 청년주택을 혐오하는 정서가 더 만연해지는 것 같아요.
달팽이집에서 ‘따로 또 같이’ 살면서 집에 대한 관점이나 삶의 태도가 바뀌기도 했나요?
가원: 저는 사회주거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데, 교육을 받고 일에 투입되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집이란 게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느껴요. 혼자 살아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같이 사는데 삐걱대면서 살면 아무리 좋은 건물에서 살아도 소용없는 게 되어버리잖아요. 최근에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는데 저희 동네 근처로 이사 올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포함한 친구들이 근처에 살고 있는 점도 그 친구가 집을 고르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았어요. ‘이사할 때 나 불러!’ 했는데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좋더라고요. 이게 달팽이집에서 우리가 늘 얘기하는 네트워킹, 안전망인 것 같았고요. 사실 집을 생각할 때 사람을 빼놓을 수 없잖아요. 사람 없으면 그건 집이 아니라 모델하우스니까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집하고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집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내부 인테리어를 주로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달팽이집이 제 가치관을 많이 바꾼 것 같아요. 주변 환경에서 누군가와 늘 연결된 삶을 꿈꿔요. 혼자 사는 집에서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은데,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죠.
"최근 해외 뉴스에서 친구 여섯이 나중에 같이 살 집을 사놓고 지금은 그 집을 여행자들 숙소로 임대한 사례를 봤어요. 이거다 싶어서 친구들한테 제안했죠. 우리만의 실버타운을 만들자고요. 비혼이어도 혼자 살 필요는 없고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다시 혼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가까이 살면서 서로를 돌봐주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집에서 며칠씩 안 나오면 문 따고 들어가고.(웃음) 그런데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김가원 씨) ⓒ복음과상황 정민호
함께 살며 서로 좋은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현정: 달팽이집은 집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데 더 가치를 둔다는 느낌이 들어요. 집을 계획할 때 보통 경제적 가치를 더 고려하잖아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우선해야 하는 게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것 같아요. 어느 지역에서 보증금 얼마에 역세권인지 아닌지 이런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고려하는 거죠. 저는 집을 사지 않더라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택협동조합을 통해서 발견했어요. 또 주거공동체 안에서 집이라는 물리적 형태를 넘어서서 삶의 철학, 자연친화적인 것들을 꿈꾸고 있고요. 채식을 하는 다혜 님(달팽이집 사람들은 이름에 호칭을 붙여 쓴다 - 편집자) 영향으로 잠시 채식을 하기도 했죠. 이런 가치들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살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연희동 집으로 이주하면 텃밭에서 채소들을 재배해서 먹고 싶어요. 거기엔 여러 명이 살 수 있으니까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죠. 쓰레기를 덜 배출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건물 단위에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든: 가족 안에서 문화나 규칙은 부모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잖아요. 자식들은 적응하거나 순응하거나 불만이 있어서 뛰쳐나오기도 하고요. 저도 부모님 집에서 불만이 많았는데 집을 나와서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과 그때그때 규칙을 만들고 생겨난 문화 속에서 살면서 역설적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나와 정말 너무나 다르다는 걸요. 그래서 요즘엔 부모님도 그 사람 자체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얼마 전에 엄마한테 편지를 썼어요. ‘엄마는 이런 사람이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분이다, 근데 나는 엄마와 달리 게으른 사람이고 부족한 점이 있다. 우린 너무 다르고 그런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고 했어요.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여행도 같이 가고 시간도 더 보내자고. 만약 앞으로 결혼을 하거나 누군가와 함께 살 때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이 저와 안 맞아도 이제는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으니까 우리가 함께 2호 집에 살았을 때 마지막 룸메이트랑 갈등이 있던 게 기억나네요. 다른 층에 사는 분들에게 고민을 털어놨는데 같이 풀어보자고 해서 아침 7시에 자리가 만들어졌죠.
가원: 서로 생활 패턴이 다르고 소통하는 데 오해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2호집이 종료되면 꼼마집에서 다혜 님과 관계를 만들어 갈 텐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2호집의 마지막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요. 당사자들은 몰랐지만 사람들끼리 회의를 많이 했었어요.(웃음)
현정: 사실 저도 그렇고 누구나 겪었을 일이에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갈등에 휘말리기도 하고요. 문제가 일어났을 때 당사자들끼리만 해결하도록 두지 않았던 문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늘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함께하면서 의지했고요.
너무 좋은 말들만 나눈 것 같은데, 누군가에겐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까요? 함께 살면서 어떤 점이 가장 불편한지도 나눠주세요.
가원: 저도 이상적으로 보일까 봐 걱정돼요. 실제로 달팽이집 안에서도 갈등이 많았고 달팽이집이 여러 군데 있는데 각자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있거든요. 처음 달팽이집을 시도할 때, 적극적으로 동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동체 실험과 자치 운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집을 꿈꾸고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있었고, 우려하셨다는 분들도 펀딩으로 도움을 주셨다고 해요. 그분들 덕에 저희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잖아요. 이런 걸 보면서 대한민국의 주거 현실 속에서도 집에 대해서 나름대로 꿈꿀 수 있게 되었어요. 불편한 점은 공간을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없다는 점이죠. 우리 집 거실은 물론 제가 많이 구조를 정하긴 했는데….(웃음) 청소도 불편하다면 불편해요. 청소를 안 하는 사람은 청소를 잘하는 사람이 불편하니까요.
현정: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게 불편한 요소죠. 혼자 있으면 규칙이 없을 수 있잖아요. 밤늦게 요리를 한다든가 음악을 크게 튼다거나. 가족들과 살아도 지켜야 하는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요. 누구와 살든 혼자 살아야 할 때보단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니까. 저흰 화장실이 거실에 있는데 샤워하고 나서 옷을 입고 나오잖아요. 그것도 암묵적인 규칙이죠. 함께 사니까 에어컨을 살지 말지, 또 언제 에어컨을 켤지 정하는 것도 함께 의논해야 해요. 이런 불편함을 통해서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배워요. 전에 가족과 살 때는 그런 논의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더 여러 명이 있다 보니까 반상회라는 회의가 필요하죠. 계속 나오는 주제도 거창한 게 아니라 ‘청소 같이하자’는 얘기예요. 세세한 걸 같이 얘기하면서 소통하는 게 뭔지 배우고요. 불편하면서도 배운 게 있다는 좋은 마무리입니다.(웃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함께 살면서 집에 대해 꿈꿀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각자가 꿈꾸는 집에 대해 묻고 싶어요.
이든: 저는 집보다는 자차를 마련하는 게 꿈이에요. 캠핑카를 사서 스크린 달아놓고 방방곡곡을 누리면서 내가 만들었던 혹은 좋아하는 영화를 틀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제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머리가 새하얗게 센 할머니가 자기 집인 캠핑카를 끌고 어디론가 다니는 거죠. 그걸 ‘모터홈’이라고 부르는데, 언제 그 집을 마련할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품고 있는 메시지는 다르지만, 민쿱에서 ‘집 있는 사람만 시민이냐, 빌려 쓰는 사람도 시민이다’라는 문구를 쓰잖아요. 저는 이동하는 집을 꿈꾸는 건데 등기에 올릴 수 없으니까 집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한 곳에 적을 두어야지만 어디 시민이고 국민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어요.
현정: 올해 초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자륵파브릭’(Sargfabrik)이라는 주택협동조합을 방문했어요. 여러 명이 주택협동조합을 구성해 공동체 주택을 만들었어요. 벌써 20년이 다 되었는데 가족 단위로 살기도 하고 혼자 살기도 하더라고요. 그 집에 사시는 한 분이 농담 삼아 여긴 몇 년 지나면 양로원이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안 나가고 계속 사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처음 조합에 가입했던 게 20대인데요, 지금은 30대가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 개인이 가지는 불안함은 커졌어요. 나이로 청년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사회에서 앞으로 청년이 아닌 세대가 될 텐데, 점점 같이 살 사람을 구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 협동조합 모델은 협동조합기업이 있고 여기서 공급하는 집에 사람들이 들어오는 개념인데 앞으로는 수요자들이 뭔가를 만들어서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빌려 쓰는 모델이지만 나중에는 여건이 되면 소유하는 모델을 만들 수도 있겠고요. 대안적인 주거들을 계속 고민하면서 나의 거주 문제는 물론 사회문제도 풀어보고 싶어요.
가원: 이번 연휴 때 시골에 내려갔는데 어른들끼리 누구네 어떤 분이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나누더라고요. 남 일이 아니라 당장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고 앞으로 나도 그런 고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노년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 때 저는 요양원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이뤄 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소중한 사람들과 노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제는 혈연주의나 가족중심주의에 묶이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모습이 다양해질 거라는 걸 미디어도 자주 다루잖아요. 저를 포함해서 제 친구들은 비혼주의자가 많아요. 최근 해외 뉴스에서 친구 여섯이 나중에 같이 살 집을 사놓고 지금은 그 집을 여행자들 숙소로 임대한 사례를 봤어요. 이거다 싶어서 친구들한테 제안했죠. 우리만의 실버타운을 만들자고요. 비혼이어도 혼자 살 필요는 없고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다시 혼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가까이 살면서 서로를 돌봐주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집에서 며칠씩 안 나오면 문 따고 들어가고.(웃음) 그런데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친하다고 느껴지는 관계도 같이 살아보면 또 새로운 관계가 된다는 걸 공동체에서 배웠어요. 2호집에서 다른 층에서 살던 우리가 지금 하우스메이트로 함께 살면서 관계들이 달라졌거든요. 함께 살면 친구들과의 관계도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해졌어요. 그때도 살아있고, 여전히 친구라면 언제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온 나는 학기마다 기숙사 건물 내에서 짐을 싸고 푸는 일을 반복했다. 기숙사 신청 기간을 놓쳐서 한 학기 동안 근처 고시텔에 몸을 담은 적도 있는데, 또래 학생들이 거주했고 비교적 ‘괜찮은’ 곳이었지만, 집이 아닌 ‘방’에서 살면 사람이 힘들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1년 후 교환학생 신분으로 간 타국에서는 복도식의 1인실 기숙사를 썼다. 같은 층을 쓰는 이들이 있었지만 거실이 없어서 이들을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방에 돌아오면 무거운 고요를 물리치기 위해 늘 음악을 틀어야만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민쿱에서 발행한 ‘원룸상식사전’을 구입했다. 집을 구경하고 계약할 때 필요한 것들을 망라한 안내서였다. 이 책으로 공부하면서 방문할 예정이었던 집의 명의가 공지된 명의와 다른 것을 발견했는데, 이를 지적하자 ‘보러 올 필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임차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주거권을 가지고 싶었고, 결국 셰어하우스 형태의 사회적 주택을 제공하는 민쿱의 조합원이 되었다.
내가 살았던 층은 비교적 멤버 교체가 잦아서 공동체 문화가 약했지만, 2호집 건물 전체에서 매달 열리는 반상회에서 ‘공동체’를 느꼈다. 교회 밖에서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함께 음식을 먹고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나누며, 무엇보다 서로의 필요(주거 문제)를 충족하는 공동체를 경험했다.
2호집 임대인과 조합 측의 계약이 끝나고 그곳에 살던 나를 포함한 좌담 멤버는 꼼마집으로 함께 이주했다. 집이 넓어지고 혼자 방을 쓰게 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여전히 매달 반상회로 만난다. 청소 규칙을 정하고 함께 먹으면서 안부를 묻고 서로의 고민을 나눈다. 또 거실에서 마주칠 때 인사하고, 누군가 갑자기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면 같이 먹기도 한다. 이 ‘사소한’ 행위는 코로나 시국에 어둠 속 흰 조약돌 같은 힘을 발했다. 좌담 내내 서로를 ‘식구’라고 부르는 이들과의 시간은, 어쩐지 매달 여는 반상회 같았음을 밝히며 글을 마무리한다.
첫댓글 함께 음식을 먹고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나누며 무엇보다 필요를 충족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