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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
[연재] 임영태의 남미 여행기 (11)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의 노숙
1월 8일 월요일 저녁 8시 30분 우리가 탑승한 아르헨티나항공(Aerolines Argentinas) AR1857편은 밤 11시 25분 부에노스아이레스 호르헤뉴베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2시간 55분 비행 예정 시간에 거의 제대로 맞춰 도착했다. 비행티켓은 10월 초에 구입했는데, 28만원이었다. 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이 너무 늦어서 우리는 숙소를 구하지 않았다. 하룻밤을 공항에서 노숙하며 밤을 지내기로 한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하니 배가 많이 고팠다. 공항 로비 1층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햄버거와 감자칩으로 저녁을 때우고 밤을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았다.
2층 로비에 의자가 편안한 커피숍 스타벅스가 있어서 자리를 잡았다. 청소가 끝나자 우리는 재빠르게 긴 소파형 의자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뒤늦게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우리 자리가 명당자리여서 아침까지 지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평소 스타벅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우리들이지만, 밤새 커피 한 잔 안 마셨는데도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그냥 쉬게 해준 것에 매우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경험으로 스타벅스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상승한 것도 사실이다.
공항에서는 내가 한국에서부터 가져간 담요를 요긴하게 썼다. 부피 때문에 나는 담요를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공항에서 3일간이나 노숙하기로 돼 있었고, 파타고니아의 경우 산장에서 자야할 수도 있어서 가져가기로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호르헤뉴베리 국제공항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우리는 번갈아 가면서 잠을 잤다. 자는 동안 혹시 짐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라틴 국가들에 비해서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하는 아르헨티나이지만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조심하는 게 상수다. 김 원장은 여행정보를 검색하느라 거의 밤을 지새웠다.
짧은 여행 기간이었지만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중요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이나 멕시코와는 느낌이 들었다. 브라질이나 멕시코는 아주 역동적인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비교적 차분하다고 해야 할까? 브라질이나 멕시코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눈 뜨고 코 베어갈 것 같은 그런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조용히만 다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문화적으로도 유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남미의 유럽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같은 스페인의 식민지를 겪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상대적이지만 치안 면에서도 칠레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이나 멕시코 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인종 구성에서도 아르헨티나는 백인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브라질과 멕시코는 백인과 인디오, 흑인, 혼혈(메스티소, 물라토) 등 복잡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특히 멕시코는 메스티소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인구 구성의 차이가 낳은 문화와 사회 분위기의 차이도 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멕시코는 라틴 국가 중에서 가장 큰 나라들이다. 브라질은 인구(2억1천만 명, 2022년 기준)와 영토(851만㎦) 면에서 압도적이며 경제규모 또한 2023년 기준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다. 멕시코는 1억3천만 명(2022년 기준)의 인구와 196만㎦의 영토, 세계 12위의 경제규모(2023년 기준)를 자랑한다. 아르헨티나는 영토 면적은 멕시코보다 넓은 279만㎦이지만 인구(4천7백만 명, 2022년 기준)와 경제규모는 24위(2023년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는 한 때 세계 경제부국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만성적인 인플레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경제위기가 반복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병’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라틴지역의 경제 위기를 상징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페론주의’와 포퓰리즘 문제, ‘더러운 전쟁’으로 상징되는 엄청난 국가폭력과 인권탄압, 비교적 성공적인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 이행을 보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실력도 갖추고 있다.
공항에서 바라본 아침 바깥 풍경. [사진-임영태]
부에노스아이레스 호르헤뉴베리 국제공항. [사진-임영태]
스쳐 지나가는 찰라의 여행만으로 아르헨티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다만 느낌을 이야기할 뿐이다. 어쨌든 아르헨티나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흔히 하는 말로 ‘신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든 것은 이처럼 사람들도 좋고 문화적으로도 매력적인 이 나라에 왜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와 국가폭력이 자행됐을까? 자연 환경도 좋고 자원도 풍부한데 왜 계속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길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구경에 나서다
공항에서 밤을 새면서도 공항 바깥이 어떤 풍경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침 6시경 공항 창밖을 보니 바로 바다가 보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자리를 잡은 항구 도시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항구가 바로 바다 앞에 있을 줄은 몰랐다.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하룻밤 노숙의 피로는 씻긴 듯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 즉 순풍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공항바깥 공기도 좋았다. 도시의 매연냄새도 별로 없었다. 자연속의 도시 같았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데 우버택시를 이용했다. 숙소까지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택시비용은 5,300페소(8,000원 정도)가 나왔다. 바닷가를 따라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30분이 채 안 걸렸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 아직 이른 출근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시내의 교통체증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시내 곳곳에 나무가 많고 깨끗했다. 페루 리마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숙소 근처 바다 풍경. [사진-임영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 짐을 맡겨 놓은 뒤 바로 거리 구경에 나섰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호텔 체크인은 할 수 없었다. 오후 2시가 되어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중심지에 위치한 큰 호텔이어서 많은 손님들로 붐볐다. 대형 크루즈 선객들이 숙박을 하고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체크인 할 때까지 호텔에 짐을 맡겨 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1월 9일 화요일 아침 9시가 채 안 된 시각 우리는 호텔 숙소에서 나와 걸어서 시내 관람에 나섰다. 길거리 음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저 유명한 엘 아테노 서점까지 걸었다. 시내 거리를 걷는 도중 달러 환전 호객을 하는 환전상들을 많이 만났다. 엘 칼라파테에서는 1달러에 일반적으로 900-950페소 정도로 교환해 주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1000-1050페소로 바꿔주었다. 우리는 거리 환전상에게서 약간의 돈을 바꾸었다. 여전히 아르헨티나 경제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흔들리고 있고, 국민들은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달러를 갖고 있어야 돈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암달러 환전 거래에 나서고 있다.
키르치네르 문화 센터. [사진-임영태]
거리 곳곳에 노숙자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단이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숙자들은 아르헨티나의 힘든 경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져서 노숙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대로 보는 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른바 ‘아르헨티나 병’과 페론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정권의 ‘더러운 전쟁’과 민주화 이행기의 ‘침묵협정과 망각에 대해서, 그리고 민주화 이후 키르치네르 정부의 과거사 재개와 사법적 정의의 실현에 대해서 생각했다. 신자유주의의 정책과 복지정책을 오고가는 아르헨티나의 경제정책적 지그재그와 계속되는 경제위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2023년 11월 19일에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2차 결선 투표에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인물 하비에르 밀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 전 진보적 정권의 경제정책이 모두 뒤집혔다. 밀레이는 아르헨티나의 초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중앙은행을 아예 없애고 페소화 대신 달러로 대신하겠다는 극단적인 언사까지 쏟아낸 신자유주의 신봉자이다. 그는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비롯한 진보적인 성향이 조금이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밀레이는 10월 22일 1차 투표에서 29.99%를 얻어 2위를 했으나 3위를 한 파트리시아 불리치와 선거연합을 성사시켜 결선 투표에서 55.65%를 득표해 44.35%를 얻은 여당의 마사 후보를 제치고 승리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말레이는 환전 때 공식 환율을 따르라고 강력히 지시했으나 실제로 아르헨티나에서 환전은 공식환율 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게 될 말레이 정부가 아르헨티나의 초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 위기 상황도 해결하게 될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우리가 목적지로 삼아 도착한 엘 아테노 서점은 원래 1,050석 규모의 오페라 극장이었던 곳이다. 2000년 경영위기를 맞자 그루포 일사 출판사가 건물을 임대해 대형서점으로 재탄생시켰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은 1층이 지하철과 연결돼 교통이 편리하고 아름다운 서점을 구경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찾으면서 유명 명소가 됐다. 오페라 극장의 원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서점으로 재탄생시켜서 운치가 있고 아름답다. 규모는 한국의 대형서점인 교보문고와는 비교되지 않지만 예술적 품격이 느껴지는 곳이다.
엘 아테노 서점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엘 아테노 서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오벨리스크 탑이 눈에 들어왔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결승에서 아르헨티나가 프랑스를 누르고 우승한 뒤 엄청난 인파의 시민들이 오벨리스크 주변 거리에 모여 축제를 벌였던 광경이 떠올랐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 대표가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 순간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했다. 현존하는 최고의 축구선수인 리오넬 메시는 엄청난 실력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코파아메리카컵과 월드컵 등에서 우승을 하지 못해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2021년 코파아메리카컵과 2022년 월드컵 우승으로 메시는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선수가 됐다.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평가받게 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물 중 하나인 오벨리스크 탑. [사진-임영태]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오월 광장’
우리는 엘 아테노 서점에서 다시 걸어서 마요광장, 즉 오월광장까지 이동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멀리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고 각국 대사관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났다. 오월광장에 도착해 오월혁명기념탑과 기마동상, 정면에 위치한 대통령궁과 주변에 자리잡은 시청사, 키르치네르 문화회관 등을 보았다. 오월광장의 독립기념탑과 대통령궁을 보면서 우리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의 ‘더러운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생각했다.
사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지인 마요광장(Plaza de Mayo)은 우리의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마요광장은 오월광장으로도 불리는데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최초로 선포한 ‘5월 혁명’을 비롯해 온갖 정치적 사건의 중심무대가 된 곳이다. 아르헨티나의 5월 혁명은 1810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당시 스페인이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독립운동 시위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중심 무대였던 마요광장에 ‘오월광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다. 1810년 5월 혁명 사건으로 독립정부의 의회인 프리메라 훈타가 조직됐으나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 독립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호세 데 산마르틴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오월광장. [사진-임영태]
오월광장의 5월혁명 기념탑. [사진-임영태]
5월광장의 기마동상. [사진-임영태]
스페인은 멕시코 부왕령(수도 멕시코시티)과 페루 부왕령(수도 리마)에 이어 1776년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을 중심으로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을 설치, 남미 남부지역을 통치했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상과 함께 미국독립선언(1776년), 프랑스대혁명(1789년) 등에 영향을 받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독립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1810년 5월 혁명이 일어났고 1814년부터 호세 데 산마르틴이 지휘하는 독립투쟁이 전개됐고, 1817년 산 마르틴이 이끄는 독립군이 안데스를 넘어 칠레 산티아고와 페루 리마에 입성함으로써 남미지역의 독립을 현실로 만들었다.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의 투쿠만에서 의회가 소집돼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 후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중앙집권주의 세력과 지방분권 연방주의 세력 사이에 갈등이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대립은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연방제를 실시하면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지방 토착군벌 출신의 전형적인 카우디요(caudillo)였던 로사스는 1852년 반대세력에 축출돼 추방되었다.
카우디요란 19세기 초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등장한 라틴아메리카의 지방군벌 출신의 정치지도자들로 독립 후 독재정치를 한 인물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한 뒤 부패정치, 족벌정치 등을 펴며 야만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를 보여주어 중남미 정치에 악영향을 미쳤는데 그 폐해는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 멕시코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포르피리오 디아스, 아르헨티나의 로사스, 페론, 베네수엘라의 파에스 블랑코, 고메스, 브라질의 바르가스, 쿠바의 바티스타,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아이티의 두발리에, 니카라과의 소모사 등이 대표적이다.
로사스의 축출 후 아르헨티나는 1916년 무렵까지 미국의 정치모델을 모방한 헌법을 채택한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정치권력이 과점되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 개인재산의 보호, 언론과 보도의 자유 등 자유주의적 원칙을 표방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농업과 목축업이 성장하고 수출이 크게 늘었고, 이를 기반으로 도로, 교량, 항구, 철도,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이 크게 확충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사진-임영태]
하지만 자유주의적 정치권력은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과 노동계급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이민정책으로 새로 유입된 유럽의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로 아르헨티나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1914년 전체인구는 780만 명에 이르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구는 150만 명이나 됐다. 이와 함께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정치에 참여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보통선거권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중산층과 노동자, 여성, 소수 인종, 그리고 하급 장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정치세력, 정당으로 급진시민연대(급진당)가 등장해 세계대공황(1929) 시기 이전까지 이리고옌, 알베아르 등이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1929년의 대공황과 함께 경제적 위기가 찾아왔고 급진당도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1930-43년까지 군부가 정치에 개입했고, 전쟁이 끝나가던 1943년 페론이 등장,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정치의 중심무대에 올랐다.
페론의 집권과 축출, 재집권
보수적 정치학자나 경제학자, 보수주의자들이 포퓰리즘(Populism)의 부정적인 측면을 거론할 때마다 페론주의를 빼놓지 않는다. 대중영합주의 또는 대중추수주의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포퓰리즘을 단어 뜻으로만 보면 인민주의 또는 민중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 유지하기 위해 대중의 인기에 편승한 정책이나 대중을 동원한 정치 행동을 일컬을 떼 사용되고 있다. 포퓰리즘의 사례로 종종 거론되는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됐을까?
세계 경제공항이 발생하기 전까지 세계 5대 경제부국으로 거론될 정도로 잘 나가던 아르헨티나는 대공황의 여파로 큰 타격을 받았다. 대공황으로 아르헨티나는 수출이 40%나 감소했고 외국인 투자가 줄어들고 실업이 증가했다. 정부는 경기 회복 정책을 폈으나 인플레이션만 낳았다. 수입 관세에 의존하던 재정 수입이 감소되면서도 재정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됐다. 수출시장 축소를 극복하기 위해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지주, 자본가들은 급진당 정부와 갈등하게 됐고, 1930년 9월 6일 군부 쿠데타로 이리고옌 급진당 정부가 전복되었다.
군부 쿠데타와 함께 군부 지도자 우리부루 중장이 주도하는 광범위한 정치연합(전통 보수주의자, 우익 민족주의자-파시스트, 그리고 진보 민주당, 독립사회당, 사회당 등의 중도좌파 정당을 망라한 연합)이 구성됐으나 곧 해체되었다. 군부는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지주 귀족층, 급진당 내 비주류, 가톨릭 세력, 군부가 결합한 콩코르단시아(Concordancia)라는 정치동맹을 만들었다. 콩코르시단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출 경제에 기반한 자유무역, 자유 시장,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국가 개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으로 전환했다. 높은 관세와 차별적인 환율 제도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자본가들이 아르헨티나에 직접 투자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에서 외국자본의 비중이 높아졌다. 아르헨티나 산업에 투자된 총 자본의 50%에 달하는 외국자본, 회사들이 육류 가공, 전력, 시멘트, 자동차, 고무, 원유, 의약 등 핵심 산업을 사실상 독점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1934-1936년 크게 회복됐으나 1937년 다시 폭락했다.
대공황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가 부침을 겪었지만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기업수가 증가하고 노동계급과 노동자 조직도 비슷한 성장했다. 1930년대 두 개의 대규모 노동조합이 통합되면서 노동자총연맹(CGT)이 출현했고, 1943년 경 조합원수는 30-35만 명에 이르렀다. 콩고르단시아 정부는 노동계급과 노동자조직의 증대로 인한 사회혁명의 위기의 속에서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이에 1943년 군 장교들의 비밀조직인 연합장교단의 의해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전복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연합장교단은 신식민지 상태를 끝내고 외국 시장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친독일적인 태도를 가졌다. 이들은 독일의 경쟁국가인 영국과 미국이 공모해 아르헨티나를 농업 위주의 경제식민지 상태로 묶어두었다고 보았다. 친독일적이었지만 2차 대전 중에는 중립을 지켰다. 2차 대전 후 아르헨티나 정치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게 되는 페론도 이 연합장교단의 일원이었다.(벤자민 킨‧키스 헤인즈, 『라틴아메리카의 역사-하』, 그린비, 193-208쪽 참고)
1895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후안 도밍고 페론은 1941년 연합장교단에 가입했고 쿠데타가 일어날 때 중령 계급에 불과했지만 곧 지도자급 인사로 부상했다. 1944년 노동부 장관이 된 페론은 정권의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론은 노동부 장관 시절 노동조합 내부의 생디칼리즘(무정부주의)과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을 지원했고 노동조합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부통령에 선임된 페론은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으며, 첫 부인을 잃고 독신 상태에서 미모의 젊은 여성 에바 두아르테를 만나 1945년 결혼했다. 페론의 대중적 기반과 급진적 정책에 경계심을 품은 군부는 미국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전복 혐의로 페론을 체포하고 부통령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러자 1945년 9월 17일 대규모 반군부 시위가 전개되었고 10월 17일 페론은 석방되었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
194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페론은 노동자와 중산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54%의 득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페론은 전후 호황을 바탕으로 노동자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수출로 확보한 막대한 흑자를 바탕으로 노동집약적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철도와 공익사업을 국유화하고, 화물, 철강, 금융 분야에서 국영기업을 조직하는 등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
페론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 중 하나는 ‘에비타(Evita)’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미모의 젊은 부인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이었다. 에비타는 노동 계급과 후안 페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대중적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에비타는 1947년 여성의 투표권이 부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해 페론주의 페미니즘 정당을 만들어 페론의 정치적 기반을 지원했다. 또한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어 주민단체들을 구호,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고, 빈곤여성을 위한 사회, 의료, 법률 서비스 지원 사업도 적극 펼쳤다. 이 같은 에비타의 노력을 바탕으로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여성표의 65%를 얻었다. 그러나 1952년 7월 26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에비타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후안 페론과 노동자‧여성 사이의 밀착 관계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1952년 페론이 대통령에 재선된 뒤 아르헨티나 경제는 급격히 후퇴기에 들어갔다. 페론 정부는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농업 수출을 늘리고 임금을 동결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정책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은 감소하고 농업 수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페론은 자본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섰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의 증대는 국제 수지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용증대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페론 정부는 두 번째 재임기간 동안 대규모의 통화팽창을 통한 재정확대 정책으로 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에바 페론.
마돈나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에비타의 포스터.
하지만 페론의 신경제정책은 노동자와 기업가, 군부로 이루어진 동맹 핵심세력 사이를 분열시켰다. 페론은 정치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라는 이름의 ‘정의주의(justicalismo)’를 내세우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가톨릭교회와 언론,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했다. 산업자본가들은 지주, 농업 단체들과 손을 잡고 임금을 낮추고 생산성 증대를 추구하며 페론 정부와 대립했고, 임금 동결과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임금이 하락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도 약화되었다. 결정적으로 군부가 등을 돌렸다. 페론은 힘의 균형, 군부의 경쟁과 분열 통치, 매수 등을 통해 10여년 간 군부를 능숙하게 통제했지만 결국 군부의 신임을 잃고 말았다. 1955년 9월 쿠데타로 페론은 축출되었고,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페론주의 정당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처음 파나마로 망명했던 페론은 이후 스페인으로 망명지를 옮겼다. 페론을 축출한 군부는 페론주의를 대신한 온건우파 중심의 정치체제로 재편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노동자와 학생, 급진운동세력의 저항으로 흔들리자 1970년 6월 레밍스톤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했다. 하지만 노사분규가 재연되자 불만을 품은 군부가 1971년 3월 레밍스턴을 축출하고 라누세 장군을 내세웠다. 라누세는 급진좌파세력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탄압하면서도 페론주의 정당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등 정치활동을 복원했다. 1973년 10월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이 대통령, 부인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후안 페론이 1974년 7월 1일 사망하면서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사벨 페론은 낮은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 에바 페론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외국에 있던 에바 페론의 유해를 아르헨티나로 송환하는 등의 정책을 취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계속되는 경제 혼란으로 노동자와 서민, 중산층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폭동이 발생하고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1976년 3월 군부 쿠데타로 페론 정부가 무너지고 말았다.(벤자민 킨‧키스 헤인즈, 『라틴아메리카의 역사-하』, 그린비, 209-224쪽 참고)
페론 정부는 무너졌고, 더 이상 페론은 정치가로 재기하지 못했지만 페론주의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음 주에도 이어가야 할 것 같다.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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