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는 계절마다 나름의 매력과 유혹을 지닌다.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사색과 어린 시절 고향집 같은 향수에 젖어드는 여행지가 있다. 빛 바랜 전통 가옥과 덩굴에 휘감긴 돌담길 풍경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화마을, 창평 고을을 찾아갔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담양고을 보다도 규모가 컸으며 뿌리 깊은 선비의 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창평은 전통을 계승하고 학문을 숭상하고, 문무백관을 배출한 이 지역의 대표적 선비 고을로 충·효·예 의 고장답게 충절 정신 또한 투철하다. 임진왜란의 빛나는 별 제봉 고경명선생의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 11대손으로 구한말 의병대장을 지냈던 녹천 고광순 선생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 고광훈은 연곡사를 야습한 일군에 대항하여 호서 의병장 김동신, 고광순, 윤영기, 신덕순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구례사람들이 세워준 순의비가 지금도 연곡사에 남아있으며 고향 창평에서는 포의사를 지어 배향하고 있다. 고광순의 후손인 고정주는 규장각 직각(현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에 돌아와 창흥의숙(현재 창평 초등교)을 설립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선생 등이 이곳에서 수학했다.
그 유서깊은 고장의 삼천리 삼지천 마을 돌담 고샅길.
옛날 원님 객사터였던 이곳은 옛스러운 미적 감각으로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긴 돌담과 고옥이 잘 보존돼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 지정 문화재(제 265호)가 됐다. 1510년 경부터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창평 고씨(昌平 高氏)'와 관련된 인물들도 내 고장의 자랑에 한몫을 하고 있다. 삼지천 마을 초입부터 담쟁이 넝쿨로 토석 담을 뒤덮은 골목길을 휘감고 들어가면 고옥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상삼천과 하삼천 마을까지 약 3.6k까지 이어지는 마을의 돌담길과 고옥이다. 삼지천은 천룡의 주산 끝에 천신이 있다는 등, 천룡과 연계돼 ‘천지등’ 등 기풍이 세고 북소리가 땅에서 울려나와 좋은 골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옛 관헌과 벼슬아치들이 집중적으로 마을을 형성해 그 풍요로움을 드러냈나 보다.
전통한옥의 안채나, 처마 안쪽으로 놓인 대청마루, 지붕의 자태 등 굵직하게 치올린 선의 윤곽과 섬세함에 선현의 지혜와 풍류가 잔뜩 묻어난다. 담은 토석 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혼재해 있어 포근함과 아늑함이 절로 느껴진다. 켜켜이 쌓아 올린 돌담에 핀 야생화와 담쟁이 넝쿨. 정겹고 가을과 겨울 풍경이 교차되는 지금, 정겨움 속에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창평 삼지천 마을의 가옥들
고재선 가옥(지방 민속자료 제5호)은 고려 경종1년(916)때 폐사된 대자암 절터에 조선 세조3년(1457) 추제 김자수가 벼슬을 사임하고 귀향해 상월정을 창건했다. 그래서 정자라기보다는 사찰의 분위기다. 김자수는 손자사위인 성풍 이씨 덕봉 이경에게 양도했고 이경은 사위인 학봉 고인후에게 다시 이를 넘겼다.
고재환 가옥(전남민속자료 제44호)은 정문으로 들어서는 돌담길이 널찍하다. 이 가옥은 1925년에 건립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한옥이다. 유종헌 가옥(문화재자료 제192호)은 일명 '와송당의 정침(臥松堂의 正寢)'이라고 불리는 문화 유 씨의 종가다. 송강 정철이 문화 유씨 석헌 손녀와 결혼, 신방으로 사용하기도 한곳이다. 안채인 정침(正寢)은 5칸, 2칸의 대청과 좌우에 방 2칸과 좌편에 부엌 1칸 구조로 되어있다. 남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모양으로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
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 남극루(南極樓)가 있다. 노인 공경과 장수기원의 상징성으로 지은 덕루(德樓)다. 1830년대 장흥사람 '고광일'을 비롯한 30여명이 뜻을 모아 노인들의 편안한 여생을 기원하고 즐거이 지내라는 의미로 옛 창평 관아의 문루를 이축해 지은 누각이다. 정호는 장수를 기원한다. 남극, 즉 남극성(노인성)을 상징한다. 노인성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라 하여 이를 보는 사람은 장수한다고 전해져온다.
여행 tip
'너른 들'이라는 뜻의 창평. 풍요로운 들녘에서 얻어낸 소산물이 넉넉해 천석꾼 만석꾼이 많았고 이들 지주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 주저 없이 돈을 내놓았다. 소산물이 풍요롭다보니 자연스럽게 음식문화도 발달했다.
조선시대에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던 창평 쌀엿과 한과, 그리고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죽염, 죽염된장, 전통 떡갈비 등 창평의 특색을 살린 전통음식이 많다. 이 가운데 창평 쌀엿은 조선시대 창평에 부임한 현감들이 한양 대감들에게 선물했을 정도였다. 한과의 시초가 바로 엿이라고 한다. 창평 쌀엿은 찹쌀을 주원료로 만들며 바삭바삭 씹히며 부드럽게 부서지면서 입안에 들러붙지 않는다. 전통 창평 쌀엿이 맛있는 이유는 '조청'에 있지만 무엇보다도 창평의 옥토에서 생산된 최고품질의 쌀과 이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에서 있다. 아울러 창평에서는 한과도 유명하다. 과(菓)라는 말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수로왕조의 기록에 처음으로 제수에 올렸다는데서 유래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귀족들이 즐겨먹던 ‘유밀과’ 과자가 있었다.
유밀과는 불교행사인 연등회 때나 각종 행사에도 반드시 올려 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다과상으로 올렸으며 훗날 한국의 전통적인 제조방법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사랑받는 한국 전통과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밖에 창평 읍내에는 창평국밥, 창평안두부, 떡갈비, 한우불고기집 등이 있다. 광주와 가까운 지역이라 주말이면 일부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않고 결혼식이나 명절날이 가까워 오면 창평 쌀엿과 한과를 구입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사진/ 1.2.3.4-빛 바랜 모습으로 담쟁이 넝쿨이 뿌리를 내린 향토미와 서정성을 간직한 삼천리 삼지천 마을 돌담 고샅길.
5.6.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 석양 놀을 받고 서 있는 남극루(南極樓). 노인 공경과 장수기원의 상징성으로 지은 덕루(德樓)라 한다.
첫댓글 창평이 너른들 이라는 뜻? 괜찮은데욤! ^^*
창평 하면 국밥, 국밥 하면 창평...얼마전에 국밥 묵으러 한번 댕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