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국악인들이 말하는 국악의 미래 | |||||||||||||||||||||||||||||||||||||||||||||||||||||||||||||
서영민, 장호정, 정은호, 상금주, 이지연씨의 ‘내가 국악을 하는 이유' 전통과 창작을 함께 배운 이들의 다양한 전략…문화운동세대 90학번 활약도 '눈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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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기자 parksoyoung@cbinews.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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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정의는 아직 분명치 않다. 옛 우리 음악이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또한 전통성과 정통성이 훼손되지 않고 전승되는 우리 식의 음악어법으로 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 음악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음악’이라는 용어를 서양음악에게 빼앗겨 버렸다. 엄연히 말하자면 우리 음악이 ‘음악’이 될 것이고 서양음악은 ‘양악’이 돼야 맞다.
대금, 아쟁, 가야금, 태평소, 철현금등의 악기를 다뤘고, 대금산조, 해금산조, 아쟁산조, 피리산조등을 엮었다. 서용석류 대금산조는 이생강류 대금산조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나라 대표산조다. 또한 ‘태평소와 관현악’과 신민요곡인 ‘신뱃노러, 이외에 ‘산조기악 협주곡’등을 작곡했다. 큰형 영호씨는 아쟁을, 셋째형 영훈씨는 피리를 전공했다. 둘째형 영주씨는 목사님. 그리고 막내 영민씨는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해금을 배웠다. 어머니 또한 아버님의 제자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면 작은 국악단이 결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명망을 떨쳤던 서씨 가족은 96년 어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요양차 근거지를 전주로 옮긴다. 서씨는 국악예고와 중앙대 한국음악과를 졸업한 후 전남도립국악단에서 첫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정읍시립국악단에 잠시 있다가 2002년부터 3년여동안 서울에서 개인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아내의 직장을 따라 청주에 내려왔고, 지난해 3월 시립국악단 상임단원이 됐다. 그는 청주에서 제2의 국악인생을 펼칠 계획이다. 민속악을 전문으로 하는 기악팀 창단을 준비중이다. 그 가운데서도 ‘시나위’. 시나위는 기본 장단은 있되 즉흥 창작해야 하는 서양의 째즈 같은 공연이다. “기본길이 있지만 흩어진 것을 따로 모으는 시나위는 각자 다른 가락을 소화해야 합니다. 즉흥적으로 받아치는 재미가 쏠쏠하죠.” 특히 본청(本聽)에서 만날 때 희열은 맛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서씨는 홍옥미씨로부터 첫 레슨을 받았고, 이후 지영희씨에게 해금산조 사사, 아버지에게 서용석류 해금산조를 사사받았다. 이어 셋째형에게 태평소를, 큰형에게 아쟁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아쟁, 태평소, 대금, 해금을 다루지만 역시 전공은 해금이다. 서씨는 “서울의 아류 공연을 하고 싶지 않아요. 일단 내년에는 개인발표회 및 삼형제 공연도 할 예정입니다. 또 사물장단에 음을 입히는 작업을 구상중이죠. 일종의 역발상인데 악기를 위해 사물이 반주를 하는 것입니다”라며 희망찬 계획들을 풀어냈다. [풍물] 씨알누리 12년째 근속한 대구처녀 장호정 “공연 통해 사람들이 잠시 쉬어 갔으면 좋겠어요”
대학교 풍물패 출신인 그는 졸업 후 90년대 풍물로 문예운동을 펼쳤던 씨알누리의 명성을 믿고 청주에 왔다고 했다. 사실 고향인 대구지역에 마땅한 풍물패가 없어서 선진기술을 배워오겠다는 야무진 각오도 있었다. 당시 단원으로는 라장흠, 김준모, 임오섭, 서길원씨가 있었다. “사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있었던 것이 무슨 죽을 때까지 뼈를 묻어야 겠다는 거창한 각오 때문은 아니었죠. 단지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남자들만의 문화, 첫 사회생활, 혼자 사는 외로움, 낯선 지역색 등 모든 문제들이 겹쳐 몇 번 짐도 꾸렸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연습일지를 보면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풍물굿패 씨알누리는 세 번의 큰 전환점이 있었다. 장씨도 2001년부터 동해안 별신굿을 송동숙 선생님께 사사받았고, 지금도 소리와 춤, 설장구 등을 배우고 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평생 갈고 닦아도 순간 놓아버리면 제자리 유지가 아니라 후퇴거든요. 내 것을 만들지 못해 나이 들어 거짓말 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추석연휴이후 3주 만에 처음 하루 쉬었다는 장씨. 10월은 지역축제가 많아 초청공연이 많다. 그는 찾아가는 문화 활동, 국악풀제 수업과 1년에 한번 이상 해외공연교류도 떠난다. 그래서일까. 아직 솔로다. “결혼하고 그만두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 지레 겁먹은 같기도 해요. 앞으로 이뤄갈 예술에 대한 목표가 더 크다고 하면 믿으실래요. 하하” “무대에서 제 이야기를 했을 때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씨알누리 공연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잠시나마 환기됐으면 좋겠어요. 풍물은 참 밝고 신명나는 장르이거든요.” 장씨는 언제나 “열심히 해야한다”는 주문을 걸고 있다. 그리고 그는 10년, 20년후에도 그 주문을 계속 걸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피리]피리부는 사나이 정은호 “내년에는 작곡 공부 본격적으로 해볼터”
큰형은 클라리넷 연주자이고, 둘째형은 직업은 의사지만, 바이올린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했다. “집 옆에 바로 국악예고가 있어서인지 서양악기보다는 국악기에 매료됐어요”라고 말하는 정씨. 그는 고1때 처음 피리를 배웠다. 정씨는 서울 국악예고와 전북대 한국음악과를 졸업하고 전주에서 터를 잡는다. 2000년 진주시립국악단, 전주시립국악단에 활동하다가 지난 2003년 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곳에 머무르다 보면 발전이 없을 것 같아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당시 지휘자가 추천을 하기도 했고요.” 피리는 일주일동안 연습하다가 하루를 쉬면 다시 원상태로 복귀되는 ‘정직한 악기’다. “피리는 10년을 불어도 1년 쉬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두고 흔히 입심이 빠진다고 하죠.” 피리 연주자로서는 끝없는 인내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정씨는 10여년 동안 피리를 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피리는 다른 악기와 달리 수명이 짧다. 나이 들면 힘이 빠져서 소리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 따라서 피리연주가들이 지휘를 따로 공부해 지휘자로 남는 경우가 많다. 또한 피리는 협력할 수 있는 악기라는 장점도 있다. 중앙대 대학원 총장이자 유명한 작곡자·지휘자인 박범훈 선생도 피리연주자였다. 박범훈 선생의 작품 중에 ‘메나리를 위한 피리 3중주’, ‘창부타령’등이 대표적인 피리 창작곡이다. 악기를 따라 사람 성격도 닮아가는 것이 국악계의 불문율. 피리는 톡톡 튀고 밝은 것이 특징. 정씨 또한 그래 보였다. “내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지휘법을 체계적으로 연마할 계획입니다. 또 기회가 되면 유학도 갈 예정이고요.” 정씨는 한상일, 송선원, 유경수, 김원선 선생에게 사사를 받았다. 또 그는 피리외에도 섹스폰, 기타도 다루지만, 역시 서양악기는 ‘꺾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판소리] 가야금을 배우다 판소리에 반해 ‘턴’한 상금주 “느리지만 천천히 소리길을 잘 가고 싶어요”
충남 부여가 고향인 그는 전주 백제예술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하고, 94년 23살의 나이에 다시 소리를 배웠다. “전라도는 워낙 소리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히려 악기하는 사람들이 드물죠. 조통달 선생님께 흥부가와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그후 그는 목원대 한국음악과에게 편입해 노동은 교수의 지도아래 판소리를 더 배웠고, 99년 청주시립국악단 상임단원이 됐다. 충북은 소리하는 사람이 20%라면 악기하는 사람이 80%다. 전라도와 국악 지형이 판이하게 다른 셈이다. 따라서 국악단에서 소리하는 사람은 상씨외에 황신혜(경기민요)씨가 유일한 단원이다. “소리는 악보화 되지 않아서 사사받는 기간도 길고, 뒤늦게 목이 트인다는 말처럼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 아직 공력이 부족해서 더 열심히 배워야죠.” 판소리는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를 5바탕이라고 한다. 상씨는 적벽가를 제외한 4바탕을 배우고 있다. 심청가와 춘향가는 국립국악원 김수연 선생에게 사사를 받고 있다. “아직도 사사 받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 완창보다는 느리지만 천천히 소리길을 정진하는 게 목표입니다.” 최근 그는 전국국악한밭경연대회에서 대상인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소리는 몸으로 하는 악기죠. 자연의 소리부터 귀신소리까지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모든 소리를 낸다는 것이 참 흥미롭잖아요. 판소리는 고수와 창자가 장시간 공연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장르입니다.” 판소리에도 창작의 바람은 불었다. 요즘에는 판소리가 북이 아닌 피아노, 전자바이올린과 협연되고 있다. “창작의 맛도 있지만, 역시 전통의 소리 맛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기회가 닿으면 가야금 병창을 하고 싶어요. 제가 공부한 가야금과 소리 둘 다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이니까요.” [기야금]서원가야금 연주단 악장 이지연 “원하는 음악 가야금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고파”
그는 동네 가야금 선생님을 소개받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실력있던 분이라 수법을 제대로 지도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93년 서원대에 입학하고 이후 숙명대 대학원에서 가야금을 전공한다. 지난 2003년부터는 서원대와 부강예고(서울)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교 4학년때 박현숙 교수님을 만난 것이 제 가야금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줬죠. 교수님 공연을 보고 한마디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력에 눌린 셈인데 이전까지는 늦게 시작했지만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많았는데, 교수님 공연을 보고 평생 배워도 따라 잡을 수 있을까하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방황도 많이 하고, 가야금이 제 인생에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기죠. 돌이켜보면 저를 성숙하게 해준 밑거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후 이씨는 정말 열심히 가야금을 연습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지난 99년 탄금대 가야금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2001년 부산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는 2등상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12현 가야금 외에도 25현 가야금을 잘 다루는 젊은 국악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가야금 연주는 기본적으로 정악과 산조를 익혀야 합니다. 25현 가야금은 졸업후 중앙관현악단에 들어가면서 배우게 됐어요. 김인숙 선생님에서 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최근 서울관현악단, 대전연정국악단과 25현 가야금으로 협연을 했고, 국악작곡가 이경섭씨의 음반에도 참여했다. 현재는 서원가야금연주단 악장을 맡고 있다. “전통음악을 잘해야 창작 음악도 잘한다는 것을 체감했어요.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하고 싶은 음악을 가야금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요. 또 선생님들의 나이가 됐을 때 12현 가야금도 잘 하고 싶고요. 12현은 '쌓는 음악' 이니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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