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캠퍼스 내에는 나무들이, 특히 꽃나무들이 많았다. 가지 사이사이로 연한 분홍빛, 보라빛 꽃잎들이 색색들이 고개를 모두 내밀고 그 자태를 뽐내고 있을 때 그 모습은 그야 말로 무릉도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감상할 사람은 학생들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모두 바쁘게 강의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넓디 넓은 캠퍼스 내의 풀밭에서 기대 누워있는 검은 머리 남자였다. 머리는 허리보다 더 길게 오는 듯 푸른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어 검은 잔디와 푸른 잔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치 잠든 것처럼 편안해보이는 표정으로 문자 그대로 캠퍼스라이프를 즐기는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곧, 붉은 눈동자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업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는지 아십니까."
나직하고도 매력있는 목소리 속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눈을 뜨지 않고 입술 끝을 들어올려 웃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한 그런 미소였지만 어두운 와인빛 눈동자로 무심하게 바라보는 그는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번쩍 눈을 뜬 남자의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듯 여러색을 담아내고 있는 오팔과 같은 색상이었다. 아니 색상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저 보석을 박아놓은 것 같았으니까.
"세이라키아 로비니아 군."
자신의 풀이름을 호명받은 세이는 대답대신 작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하얀 화면 안에 두글자가 씌어졌다.
-휴강.
*
[에페세이] 붉은 눈빛 For 오드아이님
네, 다시 짧게 돌아온 아잣입니다.
에페세이를 너무 간만에 써봐서.... 이게 뭔가 싶은 무언가가 탄생해버렸습니다 ㅠㅠ
전반적으로 알콩달콩이라고 했는데, 에페스에게는 알콩달콩이라고 해도 세이에게는 약간의 호감이 있을 지는 몰라도 귀찮은 무언가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풀어봤습니다... 하하하;;
주의 : 실제 조교와 교수가 이런 사이 일리는 없습니다. 망상임을 알려드립니다.
에페세이 달달물로요!! 현대판으로 내용은 에페스와 세이가 같은 대학교에서 서로 알콩달콩 부딪치는 걸로 엔딩은 서로 잘 되는 걸로 부탁드립니다^^
*
아스란 대학교 행정학과의 수석졸업생이자, 사과대(사회과학대학)의 조교인 세이라키아, 통칭 세이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그를 몰래 훔쳐보고 있던 여학생들은 꺄, 꺄 거렸지만 듣지 못한 세이라키아는 들고있던 서류철을 주의깊게 살피기만 하고 있었다.
서류철을 내려놓은 그는 손을 뻗어 서류더미 사이에 있던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 세이는 약간의 한숨을 동반하고 전화에 집중했다.
상대가 받았는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툭 하니 내뱉었다.
"지금 갈테니 자리에 앉아 있으시죠."
무어라 대답하는 상대의 말이 들렸고 세이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소꿉친구 카밀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또야?"
"네.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카밀의 힘없는 대답을 뒤로한 세이는 몇몇 서류를 추려내서 사무실을 나섰다. 물론 그 앞에 서 있던 여학생들은 각기 익숙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체 했지만 이미 세이의 시선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발은 빠르고 정확하게 목적지로 향했다. 교수연구실 앞에선 세이는 시선을 돌려 호수를 확인했다.
-301 / 에페스 레티미온
그리고 마치 노크의 정석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가볍고도 적확한 위치에서 노크를 했다.
"들어와."
명쾌한 대답이 들림과 동시에 세이는 벌컥, 교수실의 문을 열었다.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있던, 에페스는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를 보자마자 세이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지만 에페스는 되려 잔뜩 웃음을 머금었다.
"에페스 레티미온 교수님."
"에페스라고 부르라니까. 뭐, 말해봐. 무슨 일이지, 세이라키아?"
"오늘 다섯개의 수업을 모두 휴강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호오, 세이라키아가 나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 걸?"
"전 누구처럼 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리고 굳이 덧붙여드리자면 이번 학기부터 전임 조교로 임명한 건 교수님 본인이 아닙니까."
사무적이라는 말의 표본처럼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는 것에 마음이 여린 사람은 상처라도 받을 법 했지만 상대는 에페스였다. 오히려 빙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 어느 쪽이든. 그보다 커피라도 한잔 하지."
세이는 또다시 한숨을 깊게 쉬었다. 미간에 주름이라도 잡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야기하기는 글렀군. 세이는 말 대신 혀를 차며 그렇게 생각했다.
*
"오늘 저녁 술이라도 한 잔 하지."
갑작스레 조교실에 그렇게 통보한 에페스의 행동에 조교실은 잠시간 벙쪘다가 이내 환호에 잠겼다.
에페스의 밑도 끝도 없는 행동에 의아한 것은 열명이 넘는 조교들 중에 오로지 카밀과 세이 뿐이었다. 세이는 벌써 일주일 째 잠을 자지 못하고 논문과 씨름하고 있었고 오늘 오후에 마감이었다. 그래서 오늘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카밀은 아침에 생일 축하한단 말과 함께 작은 케이크 하나를 건넸을 뿐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세이는 아침에 변변한 생일상을 못받았다는 걸 카밀은 뻔이 알고 있었다.
세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평상시 지적으로 반짝이던 세이의 와인빛 눈동자는 반짝이는 빛 대신에 눈 밑으로 다크서클만이 그득그득 할 뿐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세이는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동료 조교들의 말에 그저 손을 흔들며 보냈었다. 점심도 먹지 않은 채, 논문에 매달리고 있는 세이가 어서 조교를 그만 두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싶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카밀은 동료들과 식사를 마친 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다가 살며시 옆에 두었지만 세이는 고맙다고 말한 뒤 커피만 집어들어 호로록 삼킬 뿐이었다.
"샌드위치도 먹어, 세이. 속 상해."
"조금 있으면 끝나니까요. 제출 후에 먹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카밀."
"으휴, 마음대로 해."
카밀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버리고는 세이에게 올라오는 업무를 자신 쪽으로 한 움큼 들고갔다.
"카밀?"
의아함을 가득담은 세이의 목소리에 대신 방긋 웃어버린 카밀은 "됐어, 논문에 집중해. 마감 두시간 남았잖아." 라는 말과 함께 세이의 어깨를 툭툭쳐줄 뿐이었다.
그렇게 세이의 논문제출 마감시간인 오후 3시. 세이는 딸깍,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논문을 제출한 다음 몇가지 일정을 빠르게 읽어봄과 동시에 축, 의자에 몸을 기댔다.
"수고했…"
카밀의 말은 마저 이어지지 못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에페스 때문이었다.
"오늘 업무는 네시까지지. 학교 앞 주점으로 네시 반까지 집합. 오늘 빼는 건 없다. 알고 있겠지? 그리고 세이라키아는 지금 내 교수실로 오도록."
졸린 눈으로 교수실로 향하는 세이의 뒷모습을 보던 카밀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업무 종료를 외치는 오후 4시. 하나 둘 가방을 챙겨 주점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향했다. 카밀도 가방을 챙겨들고 가장 느즈막히 조교실에서 나왔지만 세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이의 가방까지 챙겨들고 나온 카밀은 그리로 오겠거니 싶어 기다렸지만 주점으로 나온 교수들 중엔 에페스는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던 카밀은 이내 학과장의 말에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로비니아 군과 레티미온 교수는 오늘 제출한 논문과 관련해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조금 늦을 거라는 의향을 보내왔네."
분명 끝냈다고 긴장을 풀던 세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카밀은 조용히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
조금 뒤 도착한 에페스와 세이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세이의 술이 약하다는 것을 익히알고 있던 카밀은 세이가 도착하자마자 비틀거리는 세이를 부축했지만 에페스는 그런 카밀을 스윽 살펴본 뒤 학과장에게 가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곧 이야기를 들은 학과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발표했다.
"곧 로비니아 군이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논문 통과 상태가 아주 좋아서 둘이 먼저 한잔하고 왔다는 군요. 같이 건배 한 번 합시다."
세이도 잔을 들었고 그런 세이의 모습에 카밀은 불안했다. 분명 세이는 내일, 오늘의 일을 기억 못할 것이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 같이 있던 에페스와의 일도!
가볍게 건배를 마치고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는 사이 카밀은 세이를 불러냈다. 조금 어지러운 듯도 보이는 세이는 흔치 않게 기분이 좋아보였다.
"세이, 괜찮아?"
"아아, 괜찮습니다. 후, 카밀. 오늘 기분이 꽤나 좋군요."
카밀에게 희미하게라도 웃는 세이의 얼굴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런 세이를 바라보던 카밀의 표정은 세이의 다음말이 이어지자 점차로 굳어졌다.
"에페스 교수님이, 제 논문의 통과여부와 관계없이 취업이 가능할 것 같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으응… 축하해, 세이."
카밀의 애매한 대답에도 세이는 웃었다. 마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웃는 세이한테 아무런 마음도 없이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주진 못한 카밀은 일어섰다.
"나 잠깐 편의점에 좀 다녀올게, 세이. 먼저 들어가 있어."
말을 마친 카밀은 시선을 돌렸다. 편의점에 들어가 캔커피를 들이키자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도 같았다.
편의점에서 나서자 곧바로 보이는 풍경에 카밀은 그만 달려나가버리고 말았다.
*
에페스가 세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그의 입술에 입맞추고 있었다. 세이는 붉어진 얼굴로 피하지 않고 에페스를 받아주고 있었다. 에페스의 반대쪽 손은 아기를 안아올리듯 가볍게 세이의 부드럽고 가는 목을 받치고 있었다.
세이의 붉은 눈이 탱글거리는 푸딩처럼 잔뜩 빛을 머금었다. 스르륵, 빛이 감겨버렸다.
입술을 떼자 힘을 완전히 풀어버린 세이를 에페스는 끌어안았다. 이미 술에 취해 반쯤 잠들어버린 세이를 안아올린 에페스는 빙긋 웃어보였다.
저 멀리 달려가는 카밀의 뒷모습을 보며 에페스의 미소는 점점 더 깊어갔다.
카밀과는 반대쪽으로 에페스가 걸어나갔다. 반짝거리는 네온사인 사이로 에페스의 검은 머리칼이 붉게 물들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와인으로 물들인 것 같다고 하는 세이의 눈동자처럼.
첫댓글 으,아니 이런 보배로운 글이라뇨 ㅜㅜㅜㅜ 아잣님 감사합니다ㅜㅜㅜㅜㅜㅜ 오랜만에 보는 에페세이라 너무 좋네여...
아잣님 글은 언제봐도 정말 보배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