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목사를 꿈꾸던 스님
자살시도 후 3일만에 깨어난 월정사
많은 이가 저를 만나면 “어떻게 하면 삶이 편안해질까요?”라고 묻습니다. 출가자이다 보니 저는 불교 사상에 입각한 해답을 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혜와 자비를 기르면 됩니다.”
지혜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기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초침이 바뀌는 순간에도 이 세상은 변화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랄 것도 ‘내 것’이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관계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당연한 이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너는 또 다른 나’라는 생각이 절로 싹트게 됩니다. 그리하여 타자에게 지극한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보듬듯,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보살피듯 타자를 불쌍히 여기고 타자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게 바로 자비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독자들이 타자에 대한 사랑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칼럼에서는 제 개인사는 물론이고 수행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음으로써 한 발 더 독자들 곁으로 다가가고자 합니다.
◇ 마가스님과 어머니 *출처=영화 '불효자'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중국 당나라 때 백장 회해 선사의 시에서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제 가슴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 가득 느꼈던 환희가 되살아나곤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집니다. 하지만 그 꽃들 중 어느 것 하나 가지를 찢는 아픔을 견디지 않고 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딛고 일어설 때 깊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게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이 있었고, 그 아픔이 제가 수행하는 데 크나큰 재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가자는 평전 보안 선사의 “이 문 안에 들어온 후에는 알음알이를 내려놓으라.”라는 가르침에 따라야 하므로 출가 이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옳습니다만, 여러분께 올바른 자비 명상을 설명해야 하는 터라 불가피하게 제 개인사를 털어놓고자 합니다.
제게 가장 큰 아픔은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전남 고흥의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는 4남매인데, 위로 형 하나와 누나 둘이 있고 제가 막내입니다.
근대화가 이뤄지기 전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한 농촌 풍경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터라 기운 옷을 입고 있다고, 아침저녁을 굶는다고 흉보는 이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가난하다 보니 상대적인 박탈감이랄 게 없었던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들마루에 앉아 보리밥에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던 고향 마을 사람들 모습이 그립기도 합니다.
어릴 적 제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집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부재(不在)와 무상(無常)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상은 정함이 없는 것이지만, 부재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을 경험하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지만, 부재를 경험하면 마음에 돌처럼 단단한 슬픔이 깃들게 됩니다.
제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도회지로 나가서 살림을 차렸습니다. 수행으로 마음의 응어리를 푼 뒤부터는 아버지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픽업(pick up)’당했다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됐지만, 그 전까지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제게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어린 제 영혼에 크나큰 상처를 줬던 것이지요.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여서, 훤한 대낮에도 집 안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힘겨워한 이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느닷없이 가슴패기를 쥐어뜯다가 쓰러지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먹고살기도 어려운 시절인지라 어머니는 병원에 가볼 엄두도 못 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당을 부르는 것밖에 없어, 무당이 마당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저와 형제들은 숨죽이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 없이 며느리하고만 살아야 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심정도 불편하기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날에 저는 따라나서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부모님이 함께 오시는데 저 혼자 어머니만 모시고 가려니까 부끄러웠던 것이지요. 어머니는 산까지 따라와서 저를 달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쭈그리고 앉아서 주워 든 소나무 가지로 땅바닥을 헤집기만 했습니다. 나뭇가지에 묻어 나오는 선연히 붉은 흙.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의 가슴을 후비는 고통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숨죽여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제 가슴에 뚜렷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더 자라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 마음속에서 잉걸불이 타는 듯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친구들을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곤 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폭력성으로 드러난 것이지요.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고등학생 시절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까지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아버지 집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장성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아내, 아들딸이 살고 있는 집을 그간 한 번도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에다 어머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새어머니에 대한 분노까지 겹쳐, 저는 위악적인 청소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말썽을 부리느라 바빴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줬던 상처를 저도 똑같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의 화가 극에 달해 아버지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잘못된 길을 가는 저를 보면서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희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자기부정이었습니다. 제가 자기부정이라고 한 까닭은 당시 저는 아버지만 미워하고 부정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저 자신, 그리고 훗날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될 제 모습까지 미워하고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저 자신은 물론이고 제게 투영돼 있는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저는 5년간 광주의 한 교회에 다녔습니다. 마음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지라 제게 교회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찾아가 항의했고, 그 일 이후 저는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됐습니다. 그런 나머지 터무니없게도 저는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자살하면 아버지가 평생 후회하면서 살겠지.’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저는 1년 동안 수시로 약국을 찾아갔습니다. 수면제를 모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약국에서는 한꺼번에 수면제를 많이 팔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드문드문 몇 알씩 사서 모았습니다.
이윽고 수면제 일흔 알을 모았고, 저는 강원도로 향했습니다. 강원도에는 어떤 연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굳이 강원도행을 택한 이유는 막연히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 오대산 설경 *출처=오마이뉴스
눈 쌓인 오대산은 장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설경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게 느껴졌습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준비한 수면제를 주머니에서 꺼냈습니다. 열 알, 스무 알씩 수면제를 나눠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습니다. 머지않아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저는 월정사에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산에서 죽어가는 저를 한 스님이 발견하고서 그곳으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제가 3일 만에 깨어났다며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부처님 가피로 다시 태어났으니, 여생은 부처님에게 바치게나.”
출가자로서의 제 첫 걸음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던 제가 뜻하지 않게 출가하게 됐으니 어찌 보면 이 또한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계속>
글 | 마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