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에 가기로 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대한민국 전국 곳곳에 있는 국립공원을 다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의 반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그 돈을 해외에서 흥청망청 쓰고 난 뒤에서야 조국인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한국에도 아름다운 문화 유산이 많다
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얼굴은 역사가 살아있는 문화유적과 오랫동안 변치않은 상태로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 그리고 수천년동안 손으로 전해져 온 식문화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급속히 발전해 선진국의 반열에 든 한국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지만 항상 일본・중국보다 덜 유명한 나라라는 인식이 못내 아쉬웠다. 지금은 K-POP의 영향으로 지구 반대편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지만, 외국인들이 일본의 교토, 중국의 베이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듯이 우리 나라의 역사도 잘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산
역사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건 바로 산 (山)이다. 어릴적부터 국토의 70%가 산인 척박한 환경에서 경제 대국을 이룬 한국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산이라는 존재를 마치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곤 했다. 하지만 산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난개발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지킬 수 있었다. 개발이 힘든 경사진 땅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의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은 한국 정부는 국립공원을 지키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다. 국립공원을 탐방하기로 한 건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눈으로 담기 위해서가 첫 번째 이유이며, 내가 직접 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전하기 위해서가 두 번째 이유였다.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대한민국
첫 번째로 탐방한 국립공원이 덕유산이었던 건 아니다. 역사를 너무 사랑한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한 국립공원은 아마 경주 국립공원일 것이고, 가장 먼저 탐험한 국립공원은 집에서도 가깝고 첫 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인 지리산 국립공원이었다. 그럼에도 덕유산을 국립공원 탐험기의 선두주자로 선택한 건 지금이 몹시도 추운 겨울이며, 좋든 싫든 겨울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경이기 때문이다. 덕유산의 사진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반드시 외국에 나가야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선입견을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립공원 이야기 1 - 덕유산 국립공원
덕유산은 1975년 2월 1일에 대한민국의 열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 거창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장수군에 걸쳐있는 산으로 최고봉인 향적봉의 높이는 1,614m이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덕유산 국립공원의 면적은 229.43㎢로 총 7개의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덕유산 탐방지도 (출처: 국립공원)
이 중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으며 인기있는 곳은 덕유산 리조트가 위치한 설천 지구다.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서 내린 뒤 30분만 걸으면 정상인 향적봉까지 다다를 수 있다. 적상지구를 제외한 6개의 지구가 덕유산 능선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갖추고 있다. 경상남도 함양에 위치한 영각지구에서 출발하여 남덕유산을 거친 뒤 삿갓재대피소에서 하루 묵은 뒤, 무룡산・향적봉을 거쳐 구천동지구로 하산하는 26.9km의 종주코스는 지리산・설악산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종주 코스로 손꼽힌다.
적상산
적상산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적상산 사고가 있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이기도 하다. 적상산의 높이는 1,034m로 덕유산에 비하면 작지만 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가 볼 만하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산이라 덕유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될 정도다.
덕유산 종주의 첫째 날 여정, 영각사에서 삿갓재까지
사람없어 한적한 영각사
덕유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음에도 내가 가기로 한 코스는 영각사에서 출발해 구천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장장 27km 길이의 종주 코스였다. 영각사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에 있는 조그만 절이다. 함양에서 영각사로 가는 농어촌버스는 07:30, 09:30, 13:00, 15:30, 17:00 총 다섯 번 운행을 한다. 영각사는 1907년 화재로 소실된 뒤 강용월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6・25 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그 후 1959년에 해운 스님이 법당을 중건한 것이 현재 남아있는 영각사의 모습이다.
상고대로 가득한 덕유산은 아름답다
영각사에서 첫 번째 봉우리인 남덕유산까지 가기 위해선 오르막길을 2시간 30분동안 걸어야 한다. 남덕유산의 높이는 1507.4m로 곤돌라로 오를 수 있는 설천봉과 비슷하다. 기상청에서 눈이 올 거라는 예측은 자주 틀리지만, 내가 덕유산 종주를 시작하기로 한 이 날만큼은 정확하게 맞췄다. 다행히 폭설 수준의 눈이 아니라 소복이 쌓이는 눈이라 걷는 길이 힘들기는 커녕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춥지도 않아 장갑을 낀 상태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찍은 사진에선 덕유산의 아름다운 설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눈이 내린 덕분에 나무에 달라붙은 서리는 엄청난 두께의 상고대를 만들어 나를 반겨주었다.
바위 봉우리인 남덕유산
눈으로 덮인 덕유산 등산로
하루종일 눈이 올 거라는 기상청의 말대로 남덕유산 정상에 올랐을 때도 눈은 그칠 줄 몰랐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덕유산 능선에 오르니 오를 때는 반가웠던 눈이 야속하기만 했다. 눈발 사이로 보이는 남덕유산의 바위 봉우리 뒤편으로 펼쳐진 능선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며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남덕유산에서 다음 봉우리인 삿갓봉까지는 1시간 20분이 걸린다. 월성치까지 내리막길을 걸은 뒤 1,419m인 삿갓봉까지는 다시 오르막길이다. 악 (岳) 소리가 난다는 설악산・치악산과 달리 덕유산은 지리산・소백산과 비슷하게 등산객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완만한 능선을 가지고 있다. 눈 때문에 시야가 가려 아쉽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같은 느낌을 주는 덕유산 능선이라 눈이 쌓이는 와중에도 편안하게 등산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삿갓봉의 상고대는 가히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삿갓봉은 바위로 이뤄진 남덕유산과 달리 끝이 없는 상고대로 이루어진 봉우리였다. 여전히 구름으로 뒤덮여 앞길을 분간하기 힘들지만 상고대가 피어오른 삿갓봉은 너무나 아름다워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등산한 보람이 있었다. 앞서가던 등산객들도 상고대의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듯 했다.
능선 위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삿갓재 대피소
삿갓봉에서 대피소가 있는 삿갓재까지는 내리막길로 40분 거리다. 덕유산은 3대 종주 코스답지 않게 대피소는 향적봉과 삿갓재 단 두 개밖에 없어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곳에서 하루를 묵어야 한다.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정도라 등산을 할 수 있지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피소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다음날엔 눈이 그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등산 가방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덕유산의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한다.
과연 구름이 걷힌 덕유산의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왼쪽은 전라도, 오른쪽은 경상도지만 둘 다 첩첩산중이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백두대간에 접해있는 무진장 (무주・진안・장수) 지역이 경상도와 비슷하게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무진장과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전라도는 평야가 많은 곡창지대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왜적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경상도를 구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덕유산 능선이 경계가 된 경상도와 전라도지만 결국 어느 정도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서로 도우며 살아왔던 지방인데 지역 감정이란 악 (惡)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눈보라가 몰아치는 삿갓재 대피소라 그런지 평소에는 하기 힘든 생각을 하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