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
―관용구로 구성된 어떤 말놀이
오은
여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남자의 애간장이 탈 때마다 여자는 콧대를 세우고 연막을 쳤습니다. 여간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여자의 고사리 같은 손과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각광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깨를 쏟으며 지지고 볶는 동안, 알토란이나 떡두꺼비를 닮은 아이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어색한 풍경에 제법 구색이 갖추어졌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간을 녹일 때마다 남자의 간은 점점 콩알만 해졌습니다. 급기야 여자는 남자의 간을 빼 먹었지만 정작 자신의 간에 기별은 가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헌신짝 버리듯 남자에게 퇴짜를 놓았습니다. 변죽을 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미립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큰맘 먹고 가슴에 칼을 품었지만 간이 떨어져 나가 무도 베지 못했습니다. 복장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사랑에 대해 개뿔도 몰랐습니다. 남자는 더위를 먹고 열병에 걸리고 급기야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늘도 캄캄하고 눈앞도 캄캄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아침이 올 때마다 정수리에서 나사가 하나씩 빠져나갔습니다. 쪽박이라도 차고 사시나무 떨듯 울고만 싶었습니다. 남자에게는 여자도 없고 여지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남자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아가리를 벌려 엿을 먹였습니다. 여자에게 욕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엿이든 욕이든 뒷맛이 소태처럼 썼습니다. 여자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웃 마을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여자는 살아남을 것 같았습니다. 간이 이미 부을 대로 부어서 여자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할 수 있었습니다. 밥맛이 떨어질 즈음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신들린 아이들이 동네방네 찬물을 끼얹고 놀았습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 버리자, 남자는 두 손 들고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짐을 싸면 쌀수록 짐을 벗는 것 같았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에는 어른들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가을이 겨울을 앞질렀습니다. 살판난 아이들이 쾌재를 부르며 겨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호텔 타셀의 돼지들』,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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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 198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현대시》로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가 있다.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첫댓글 '관형구'의 사전적 의미는 "관형어의 구실을 하는 어구. ‘맑고 고운 마음’의 ‘맑고 고운’ 따위"를 말한다.
'관형어'의 사전적 의미는 "체언 앞에서 이들을 꾸며 주는 문장 성분"이다.
다시, '체언'의 사전적 의미는 "문장에서 조사의 도움을 받아 주체의 구실을 하는 단어. 명사, 대명사, 수사가 이에 속한다."
따라서, 오은의 시에서 '관용구로 구성된 어떤 말놀이'의 의미는 명사, 대명사, 수사를 꾸며주는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유통언어만을 사용해서 의도적으로 제작한(?) 말놀이가 된다. 시를 쓸 때 관형구는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는 제재의 반대편에는, 관형구를 의도적으로 사용해서 성공한 시도 있는 것이다. 관습적 표현이냐, 의도적 표현이냐에 따라 시의 성패가 엇갈린다.
이 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를 재사용함으로써 재미와 새로움을 찾아내고, 더하여 관용구에 대한 비판을 수면 아래에 깔았다. 시에서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아 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란 발견과 발명을 동시에 수행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적어도 이 시에 쓰인 관용구들은 쓰지 말아야지 하다보니, 이 시에서 '관형구란 이런 것 ', '사고의 깊이란 이런 것'을 동시에 보게 된다.
감사합니다 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