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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 시인 신경림 "시를 읽으면 세상의 즐거움 하나 더 갖고 사는 겁니다."
'한국 문단의 작은 거인' 시인 신경림
신경림 시인은 여전히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소년이 되기도 하고, 수사기관에 쫓기던 청년이 되기도 하고,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했던 내가' 살던 산비알 무허가촌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중풍 앓던 아버지, 암에 걸린 그의 아내까지 함께 살던 안양의 비산동에도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간다. 그리고 열한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 뒤에 실은 '시인의 말'에 이렇게 되뇌인다. 어쩌면 시도 그에게 '꿈과 같은 큰 축복'이 아니겠냐고.
"이제는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살고 있다는 시인 신경림. 160cm정도의 작은 체구에 다부진 눈빛은 '한국 문단의 작은 거인'이라는 표현이 과언이 아님을 보여주며 60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의 내공을 느끼게 했다.
- 열한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펴냈다고 들었는데...
"시를 쓴 지 60년 가까이 되어간다. 이제 시가 무엇인지 알만할 때도 됐다. 그런데 시는 항상 똑같은 것 같다. 첫 시집이나 지금이나 시집을 펴낼 때면 조심스럽고 긴장된다. 나로서는 마지막 시집일 수도 있으니까. 온 힘을 다했다."
- 표제자인 사진관집 이층은 어떤 공간인가.
"시골에 살 때 늘 사진관 앞을 지나다니면서 들여다보곤 했다. 사진관에는 바다 사진도 있고 사막 사진도 있고 낙타나 고래 사진도 있어서 사진관집에 들어가 있으면 뭔가 세상으로 통하는 길,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 같은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시에서 풀어놓은 공간의 추억을 따라가다 보면 긴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제 살아온 삶을 돌아볼 시기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살아온 공간, 시간이 시가 되어 함께 나열된 것 같다. 충주, 안양, 홍제동, 30년 가까이 산정릉까지, 곳곳에서의 추억이 시가 되었다."
시의 제목이기도 한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은 1970년부터 7년 동안 살았던 곳으로 특히 시인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공간이다. 그 집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와 중풍 앓는 아버지, 암에 걸린 아내까지 함께 살았다. 그리고 모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시대의 고난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겪었던 시절이었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며 조용히 울음을 삼키던 시절이었다. 시인은 그 시절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싫다"고 연발해 오히려 그리움이 짙게 묻어나게 했다.
- 요즘도 그 시절 꿈을 많이 꾸는지.
"자주 꾼다. 꿈속에서는 늘 옛날이야. 그러니까 꿈속에서도 늘 알지. 이게 꿈이라는 걸. 이제 나는 돈도 많이 있고 잘 사는데 꿈속의 내 모습은 항상 가난하고 어려워. 꿈인 걸 알고 깨려고 해도 잘 안 깨져. 꿈속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억압체계이고 나는 매일 수사기관 사람들에게 쫓겨. 다시 그런 시대가 돌아올까봐 두렵고 다시 옛날처럼 가난해지면 어떡하나 두려워. 그런 것이 그 시절의 꿈을 꾸게 하는 것 같아."
- 시를 보면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대단하다.
"재주를 부리는 흔적이 없을 때 좋은 시가 된다. 두보의 시는 어수선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단순 소박하게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사실 시인 두보는 온갖 테크닉을 동원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고수의 경지다. 중국의 평론가 기윤의 평처럼 두보의 시가 좋은 이유는 그 뛰어난 솜씨의 바느질 자국이 안 보이게끔 썼기 때문이다. 진짜 뛰어난 시에는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재주 부리는 것이 눈에 보이면 그건 벌써 하수의 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갖고 시를 쓴다"
- 시 쓰는 나름대로의 창작법이 있는지.
"머릿속에서 대개 다 쓴다. 착상이 떠오르면 머릿속에서 계속 굴려서 암송할 정도가 된다. 원고지로 옮겨 놓을 때는 대체로 머릿속으로 다 써놓았을 때다. 처음 시 쓸 때부터 이렇게 써왔다."
- 아름다운 시란 무엇인가.
"특별히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가장 잘 그려낸 시가 아름다운 시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는 괜히 잘난척하고 남을 가르치려는 시다. 그런 시는 정말 재미없고 생명력도 없다."
- 오랜 시간 시를 써왔기 때문에 시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을 것 같다.
"그렇다. 많이 변화했다. 한때는 시가 이 시대를 변혁해나가는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시가 우리가 사는 현실, 삶 속에 깊이 뿌리를 갖고 있을 때 가장 감동을 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쓰는 시는 지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역시 그런 시를 쓴 경험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썼던 시가 가장 즐겁지 않았던 것 같다. 일단 흥이 나지 않는다."
- <가난한 사랑의 노래>가 수능시험에 출제되었었다. 시인이 직접 그 문제를 풀었는데 맞은 것보다 틀린게 더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문제 빼고 다 틀렸다. 내가 쓴 시를 내가 풀었는데.(웃음) 그런데 시에는 정말 정답이 있을 수가 없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를 두고 '맞는 것을 골라라'고 하면 여러가지 정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앞으로 시를 시험 문제로 낼 때는 문제를 '틀린 것을 찾아라'라고 만들어 범위를 넓게 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문학 교육에는 특수성이 필요한가.
"그렇다. 정답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과는 거리가 먼 것이 문학이다. 대신에 폭넓게 여러 가지를 읽게 해야 한다. 학생들이 시와 소설에 가까워지게끔 하는 것이 문학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을 찾아주거나 시험 문제를 위한 교육은 문학의 교육이 아니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 <별> 중에서
그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펴낸 것도 이 같은 고민에서 시작됐다. 중고등학교 선생들로부터 아이들에게 시 가르치는 것이 어렵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를 쓴 시인이 직접 알기 쉽게 소개하는 방법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사들과 동행하며 진행한 이 작업을 통해 교사들 입장에서, 학생들 입장에서, 시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시와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MBC 느낌표에 좋은 책으로 소개되며 오랜 기간 인문서적 베스트셀러를 차지했었다.
시인은 대학시절 강의는 뒷전으로 듣고 매일 헌책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헌책방에서 만난 친구들과 독서회도 만들어가며 책 읽는 데 열을 올렸다. 그 시절 책과의 추억에 대해 묻자 이에 답하는 시인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 한층 밝아졌다.
- 어릴적에는 어떤 책을 읽었나.
"어릴 때는 아동문학가 현덕의 책을 즐겨 읽었다. 시는 임화,
이용악, 백석 이런 시인들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 외국 작가로는 도스토옙스키, 앙드리 지드의 작품을 좋아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고1 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고3때 <죄와 벌>을 처음 읽으며 전집을 읽기 시작했다."
- 청계천 헌책방의 단골이었다고 들었다.
"그때 청계천에는 헌책방만 수백 개가 있었다. 전쟁통에 집에 쌓여있던 책들이 서점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서점 한가득 책들이 쌓여있으면 책 찾느라고 젊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나도 그때 학교 강의는 잘 안 듣고 매일 거기에서 살았다. 돈이 없어서 사지는 못 했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운 좋으면 막걸리 한잔 값으로 책 사고 했으니까. 친구도 많이 만났다. 매일 서점에서 책보고 술 먹고. 다음에 감옥에서 또 만나기도 하고 그랬다.(웃음)"
- 청계천 고서점이 상징적인 의미였던것 같다.
"정말 그렇다. 청계천 곳곳에 있던 술집, 헌책방이 당시 한국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시절 <타임>지에 '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필 수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질 수도 없다. 아무 희망이 없다'는 내용의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걸 보고 한국 학생들이 다 분개했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회화를 가르치던 외국 교수가 그 기사를 보고는 '이 기자는 한국을 속속들이 안 다녀본 사람이다'라는 얘기를 했다. 청계천의 고서점을 가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희망이 없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젋은 사람들이 배를 곯으면서도 책을 찾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이 나라는 만만치 않은 나라구나'는 생각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 직접 자신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대표작이라기보다 애착이 가는 시는 초기에 쓴 시로는 <갈대>같은 시가 있다. 22살에 썼으니 아주 어릴 적 쓴 시다. 그 뒤로 쓴 시로는 <농무>나 <파장>, <목계장터>같은 시들에 애착이 가고, 나이 먹어서 쓴 시 중에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낙타> 그리고 이번 시집에 실린 시 <별>에 애착이 간다."
- 질투심을 느끼게 한 시인이 있는지.
"주로 임화, 이용악, 백석, 서정주 시인을 꼽는 편이다. 서정주 시인은 지금 이야기한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생전에 뵌 분이다. 서정주 시인은 친일 문제 때문에 말썽이 늘 있으신 분인데 나는 그 양반을 미워할 수가 없다. 내 누이동생의 주례를 서주신 분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인간적인 분이기 때문이다. 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정말 재능이 뛰어났고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잘 구사했다.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를, 경상도 사투리는 박목월 시인이 시로서 잘 구사했다. 모두 뛰어난 시인들이다."
- 지금 이 시대에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시는 전 국민이 좋아할 수는 없는 장르다. 사실 시는 특별한 장르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읽을 생각도 안 할 뿐더러 쓸 수도 없다. 시를 읽는 것 자체만으로 언어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언어에 감각이 없으면 시를 읽어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시를 설명해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남들은 지닐 수 없는 이 세상의 즐거움을 하나 더 갖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시를 향유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밖에. 시를 계속 읽어가며 언어 감각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며 선명해지는 건 비단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뿐만이 아닐 것이다. 올해 팔순을 맞은 시인이 꺼내는 지난날의 아픔은 과장되지 않았고 관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리움은 처연하지 않았다. 묵은 그리움이 아득할 뿐이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서 행복하다."
(<설중행>)
시인이 지나온 길에서 얻은 인생의 깨달음이 행복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