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어린 배꽃 환하게 손짓하는 춘삼월 하순. 올해도 어김없이 만복사 탑돌이는 저마다의 소원 성취를 비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등불을 켜서 든 남녀들이 인연의 짝을 찾게 해달라고 가슴 부푼 복회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만복사에 머문 지 벌써 반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밤이 깊어지자 목 놓아 울던 소쩍새 소리도 멎고 밤잠을 못 이루는 설잠(雪岑, 김시습)은 눈만 말똥말똥했다.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도 한심스러웠고 개탄스럽기만 했다. 지나온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소가 꼴을 먹고 되새김질하듯이 눈앞에 삼삼하게 서걱이며 떠오른다.
설잠은 어렸을 때부터 한성의 성균관 어름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 서당에서 글 공부를 했다. 뛰어난 한시 실력으로 궁에 들어가 세종 임금으로부터 비단을 선물로 받은 일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다섯 살 천재 시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앞날이 촉망되던 어린이였다. 열세 살에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자 그는 외갓집으로 가서 외할머니를 어머니 삼아 의지하면서 자랐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잃은 설잠을 다독이며 외손자를 아들처럼 길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병골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동해 바닷가 양양으로 가족을 데리고 내려가서는 그를 서울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어린 설잠은 삼 년 동안 어머니의 산소에서 시묘를 살았다. 시묘살이가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 같은 가장 큰 언덕이었던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운의 이어짐, 마침내 아버지마저 병으로 앓아누워버린다. 집안은 기울어 가는데 무슨 일인지 계모를 맞이했다. 또한 아버지의 강권으로 스무 살에 장가를 들었다. 이 무렵 서울 집으로 올라와 다시 글공부하면서 친구들도 사귀었다.
이른바 단종 원년에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亂, 1453)으로 마침내 수양대군이 보위에 올랐다. 말하자면 열두 살 어린 조카이자 임금이던 단종을 내쫓는 왕위 찬탈의 삼강오륜을 어긴 것이다. 설잠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모든 걸 던져 버리고 저항하다가 절간에 빌붙어 유리걸식하면서 나그네의 외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아예 집을 떠난 출가를 한 것이다. 물론 아내도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다음 해였다. 단종 복위를 꾀했다고 김 질(金礩)이 그의 장인이자 부원군 정창손에게 단종 복위의 음모를 고해바쳐, 정창손이 주동이 되어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을 재빨리 잡아들여 사형시켰다. 이들 사육신의 시체는 아무도 돌볼 수 없었고 길섶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뒹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육신의 가족들은 모두 붙잡혀갔으니 누가 볼 볼 수 있으랴. 해질 어름에 난데없는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승려가 나타나 사육신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길가 남쪽 볕 바른 언덕에 묻었다. 이 승려가 다름 아닌 설잠이었다. 이게 오늘날에 동작동 사육신의 묘소가 된 것이다.
설잠은 외모부터 승려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스러웠다.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길게 기르고 있었다. 머리를 깎음은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려 함이요, 수염은 대장부의 기백을 드러내려고 그리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생육신으로 설잠을 부르기도 한다.
설잠을 외모로 보면, 유림 같은 느낌을 주는 설잠이 아닌가. 왜 하필이면 남원의 만수산 아래 자리한 만복사에서 머물면서 마음을 달래고 글을 쓰게 되었을까. 남원의 유래를 보면, 절개와 의리를 중시하다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영령이 깃든 그런 곳이었다.
언젠가 만복사의 주지로 머물던 만허 스님 시절에 설잠이 반년 전에 만복사로 들어왔을 때 차를 마시면서 들려주었던 남원 지역의 유래와 공간의 혼이라 할 전설과 역사를 들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설잠, 재미는 없겠지만 내가 어린 행자 시절부터 이 절에서 밥을 먹고 살아오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듣고 보았던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소?”
“예, 큰 스님 듣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후백제 부흥군의 죽음과 춘향에 대한 이야기며 주논개의 고향이 남원이라는 정도로 밖에 모릅니다. 알려 주시면 훌륭한 공부 거리가 되겠습니다.”
며칠 전에 열너댓 되는 양생(梁生)이란 떠꺼머리가 만복사로 들어와 행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양생도 오라고 해서 만허 스님의 말씀을 함께 듣기로 하였다. 양생도 듣고 싶었는지 얼핏 함께했다. 만허 스님의 이야기는 불성이 깃든 이야기처럼 들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남원에는 보절면(寶節面)이 있습니다. 곧 ‘보배로운 소중한 절개를 지켰던 곳’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지요.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 고룡(古龍)-대방(帶方)-남원소경(南原小京)이라고 합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용(龍)은 임금을 말한다. 이르자면 작은 부족국가는 물론 신라 임금의 남녁 행궁이 있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남원소경이라고 하는 거지요. 대방(帶方)의 대(帶)도 뱀을 뜻하는바, 용을 가리킵니다. 용의 지역이란 말이 됩니다. 지형으로 보면 태백산맥의 용트림을 이르는바, 상고 시대의 이름은 거사물(居斯勿)이었다. 여기 물(勿)은 마시는 물도 되지만 여기서는 용(龍, 미르 辰(광주천자문))을 원관념으로 합니다. 정리하면 용 토템 문화를 누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사물-고룡의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남원의 역내에는 용(龍)이 들어가는 지명이 상당수 분포되어 있습니다. 〔용동-도룡리-용평-용호 계곡〕이 그런 경우입니다.”
양생 행자가 다소곳이 만허 스님의 이야기를 듣더니 바로 이어 만복사에 대해서 물었다.
“만복사에 대한 유래를 알고 싶습니다.”
만허 스님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불교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산의 이름으로 만행산(萬行山, 909m)-만행사(萬行寺)-만복사(萬福寺) 등이 생겨났지. 만행(萬行)이란 ‘만 가지 고행을 겪고 나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풀이도 있어. 본디는 임금이 만행산의 절에 와서 설명을 듣고 돌아갔다고 해서 귀정사(歸政寺)라고 하기도 했다. 만복사 터가 있는 곳이 만복리였다. 이는 만행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 문화적으로 보면, 순국 혹은 순절한 그 많은 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종교 공간 곧 불단이 있었던 곳이 만복사일 가능성이 있지. 이르자면 그것이 순국이든 순절이든 남원은 백제 정신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단다.”
만허 본인의 법호도 만허라 함은 만행산의 만(萬)이고, 모든 것을 비우고 진리에 매진한다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라는 풀이를 곁들여 주었다. 그러더니 설잠에게 궁금하다는 투로 말을 건넨다. 주지와 설잠은 띠동갑으로 남다른 친근감을 갖고 지냈던 터다.
“설잠 스님, 왜 머리는 깎았는데 수염은 기르셨나요. 어디 다니실 때는 선비들이 쓰는 갓을 쓰시고요?”
“스님, 그게 그렇게 궁금하실 수가. 수염을 기름은 장부로서의 기백을 갖고 싶어서이고, 머리를 깎음은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려 함입니다. 또한 갓을 쓴 것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생육신이라고 합니다. 벼슬이 없는 사람들이 쓰는 갓을 씀으로써 유자가 된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 함이지요. 승하하신 선왕, 단종에 대한 신하 된 자로서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서이지요.”
양생이 설잠의 이야기를 듣더니 궁금하다는 듯이, 설잠이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겸연쩍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문을 열었다. 만허 스님도 귀담아서 듣고자 했다.
“사육신과 함께 못하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지.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런 마음으로 무슨 벼슬살이를 하겠다고 과거를 준비할 생각을 접고 말았던 것이야. 말하자면 수양대군이 세조 임금이 된 이듬해(1456)였어, 성삼문 등이 상왕 복위의 음모를 꾸몄다고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고해바쳐, 정창손이 주동이 되어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계유정란에 잇단 2차 대량 숙청이라고 해야겠지. 성삼문 등의 사육신 시체는 길가에 버려져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은 모두 잡혀가 있었으니 누구 하나 시체를 거둘 수가 없었다. 참으로 경황이 없었지. 당시 나는 삼각산에서 승복을 입고 있을 때였어. 몇 사람과 함께 사육신의 시체를 대충 거두어 노량진 길가 남쪽 언덕에 묻어드린 것이지. 제대로 예도 갖추지 못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그렇지. 뒤에 흙을 모아서 무덤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
“참으로 기가 막힌 천인공노할 일이었네요. 그러고도 무슨 임금이라고 뻔뻔하게 임금의 자리에 올랐네요. 설잠 스님”
양생은 분통함의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자신이 무슨 설잠이 된듯해 보였다. 창밖에는 달빛에 배꽃이 환한데 먼데 개 짖는 소리가 가끔 들려 오곤 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다. 설잠과 양생 행자는 같은 동병상련이라도 된 듯 사람의 도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통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설잠의 꿈속에서 양생이 곧 자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꽃다운 봄밤이 깊어가는 그 날밤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 설잠은 풋잠이 들어 꿈속을 걷고 있었다. 못다 이룬 사랑의 꿈을. 꿈속에서 양생과 귀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불변의 사랑>이라는 글을 써 나아갔다.
귀녀(鬼女)의 친구인 유녀는 검소한 흰옷을 입고 법도가 있었다. 말없이 미소를 짓더니 시를 지어 읊었다. 귀녀가 양생을 만남에 대하여 일종의 격려와 행복을 성원하는 노래하는 시였다.
굳은 정절 지켜온 지 몇 해이런가.
향기로운 넋, 옥 같은 모습은 황토에 묻었네.
우습도다, 오얏꽃은 봄바람 속에
이리저리 흩날려 남의 집에 떨어지네.
저 낭자 이제야 고운 님 만났으니
하늘이 정한 인연 영원히 향기로우리라.
영원히 홍광처럼 사랑하며 사옵소서.
양생과 정을 나눈 귀녀는 유녀가 읊은 마지막 시구에 영감을 얻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감정을 몇 마디 칠언시로 읊어 내려갔다.
개령동 깊은 골에 봄 시름 가득하오.
꽃은 피고 지고 온갖 근심 스산하이
깊은 골짝 구름 속에 임을 볼 수 없네.
맑은 강 화창한 봄날 원앙새는 짝을 짓고
좋구려, 우리도 한번 동심결을 맺어보세.
가을날 부채처럼 이 몸을 버리지 마시오.
주고받은 두 여인의 시에 담긴 청초한 들꽃 같은 정겹고 그윽한 기품에 양생은 감명을 받고 메아리처럼 예스러운 시 한 편을 지어 자신의 정회를 풀어냈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인연의 끝이 닿은 듯
모름지기 술잔을 높이 들어 마시고 취해 보세
푸른 깁 모기장에 미풍은 살랑살랑
이제야 임을 만나 잔치를 열게 되니
오색구름 뭉게뭉게 찬란하기 그지없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인연이 정한 때문
마땅히 술잔 들어 나른하도록 취해 보세
가을 부채처럼 버린다는 말 거둬 주오.
영원히 환생하여 배필이 되어
꽃 피고 달 밝은 때 이별 없이 살아 보세.
양생과 귀녀와의 이별 모임이 끝나자 귀녀는 은 주발 하나를 꺼내어 양생에게 건네 주면서 간절하게 부탁하는 말을 이어 갔다.
“내일 보련사에서 부모님들이 저의 대상에서 제사 음식을 차려주실 것입니다. 만일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그 길목에서 저의 부모를 기다렸다가 절로 함께 가시어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 주십시오.”
“...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 날 양생은 귀녀의 말대로 보련사 가는 길목에서 귀녀의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녀의 말대로 조금 있더니 내로라하는 심 진사 집안에서 딸의 삼년상(대상)을 치르기 위하여 수레와 말을 끌고 보련사로 가고 있었다. 양생은 길가에서 귀녀가 준 은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이를 본 심진사의 길라잡이 종이 주인 어른에게 말을 한다.
“나으리, 아가씨 장례 때 함께 묻었던 은 주발을 저 사람이 훔쳐서 갖고 있습니다요.”
귀녀의 아버지 심 진사는 양생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어떻게 그 은 주발을 갖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양생은 전날 귀녀 곧 심 진사의 딸과 나누었던 약속이며 그동안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심 진사도 그동안 딸인 귀녀에게 있었던 사연을 털어놓았다.
“나에겐 열다섯 살 난 딸이 하나 있었네. 삼 년 전에 왜구들의 침략이 있을 때 순결을 지키려다 뜻 같지 않게 되자 스스로 자결을 했지. 경황 중에 정식으로 장례도 치러주지 못하고 만수산 골짜기에 자리한 개령사 옆 어름에 임시로 묻고 장사를 미루어 오다가 오늘이 대상이라 보련사 절에서 재를 올려 딸 아이의 명복을 빌어 주려고 가는 길일세. 그대가 약속을 지키려면 내 딸을 불러서 함께 오시게나. 서두르지 말고.”
말을 마치자 심 진사는 먼저 보련사로 떠났고 양생은 귀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대로 귀녀는 시녀를 데리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반갑게 만나서 보련사 절로 함께 들어갔다. 절 안에 들어가자 여인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으나 주위의 모든 이들은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귀녀가 양생에게 음식을 같이 먹자고 하였다. 이 말을 그녀의 부모에게 전하였다. 그렇게 하라고 하자, 오로지 수저로 음식을 먹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마침내 양생과 딸이 장막 옆에서 함께 자도록 허락하였다. 말하자면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한밤중에 무슨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 왔으나 무슨 말인지 끊겼다 이었다 를 되풀이하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오가는 대화였으니 이를 누가 알 수가 있으리. 귀녀가 곡진하게 양생과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였다.
“뜻밖에 삼세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서방님을 받들고 평생 동안 절개를 지키며 부인의 도리를 다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업보는 피할 수가 없어서 저승으로 가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보다 너무나 빠르게 슬픈 이별이 닥친 것입니다. 후일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그동안 너무나 여러 가지 고마웠습니다. 도련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귀녀의 혼이 떠날 때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문밖에서는 은은한 노래만이 들려 왔다. 이러한 노래의 사연을 죽은 자들이 함께 노래를 부른다. 양생에게는 이 시가 어떤 진혼곡과 같이 들렸다.
저승길이 촉박하니 애달프게 떠나네.
비나이다, 임이시여. 버리지 마소서.
슬프도다. 우리 부모, 내 배필 못 구했으니
아득한 구천에서 원한이 맺히겠네.
양생은 이제 귀녀가 확연하게 귀신임을 알게 되었다. 귀녀의 부모가 양생에게 말하였다.
심 진사 : 은 주발은 자네가 알아서 하시게. 또한 내 딸 앞으로 논과 밭, 그리고 노비가 있는데 이를 신표로 받아 주고 내 딸을 잊지 말아 주게나.
다음 날 양생은 술과 고기 등 제수를 차려서 지난날 귀녀와 함께 지냈던 개령동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임시로 만든 무덤이 있었다. 양생은 제수를 차려놓고 슬피 울면서 종이돈을 놓고 제를 올렸다. 제문을 읽었다.
양생 : 임이시여!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나는 귀녀였소. 그 모진 왜구의 난리를 만나서 홀로 몸을 지키려다 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이다. 얼마나 피맺힌 오랜 세월을 한스럽게 지냈을까요. 지난날 우리가 하룻밤 나눈 정이 있어 거미줄처럼 얽혔도다. 우리 사는 세상은 다르다고 해도 물과 고기가 되었네요. 하룻밤에 이별하고 나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당신은 달나라에서 난새를 타는 선녀가 되어 무산에 비를 내리리니. 나는 홀로 기댈 언덕이 없어지고 그리움의 나날을 보내겠지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리라 믿고 싶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다르겠지만 이 글을 듣는 그대 또한 공감하리라.
양생은 귀녀의 부모에게서 받은 전답을 팔아 절로 들어갔다. 사흘 동안 불공을 올리고 정성을 다했다. 문득 귀녀의 혼이 나타났다.
귀녀 : 고맙습니다. 서방님의 정성 어린 불공으로 저는 이미 다른 세상에서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다르다고 하지만 서방님의 은공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착한 업을 닦으시어 저와 함께 속세의 모든 업보를 끊고 해탈하소서.
양생은 그 뒤로 결혼하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약초를 캐며 조신하게 살았다. 아,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른다.
은혜로다 부처님이시여, 얽히고 매인 세상의 업보를 끊고 해탈 성불하여지이다.
고통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이를 건져 주소서.
반달이 아름답고 빛나는 저녁별처럼.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오 인연의 고개를 넘어간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만허 스님의 상좌가 궁금하다는 듯이 설잠에게 묻는다.
“왜구의 침략으로 열다섯 살의 양갓집 처자가 목숨을 던져 정절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생육신으로서 설잠 스님이 계유정난에 희생당한 사육신들을 상징화한 것은 아닌지요?”
알면서도 왜 묻느냐는 말투였다. 수염을 매만지면서 설잠은 아주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간다.
“아예 대놓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은 아니지요. 남모르게 음모로써 왕권을 빼앗고 그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선왕에게 먼저 사약을 내려 죽이려고 했던 것이지요. 11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단종은 임금이 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가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건이잖아요. 열다섯 젊은 나이에 정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버린 귀녀에 빗대어 쓴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만복사저포기>에서는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서 자신이 이기면 부처님께서 좋은 배필을 구해 준다는 자성예언(自成豫言) 같은 말을 합니다. 부처님의 힘을 빌어서 좋은 짝을 구하기를 희망하는 것이지요. 그 짝은 이미 죽었다가 되살아 나온 귀녀인 셈이지요. 내세에 대한 희망 사항으로 보면 될까요?”
“생육신으로서 죽음을 넘어선 변하지 않을 충성심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기 귀녀는 죽은 단종이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상좌는 좀 확연하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캐물었다.
“구태여 남원과 같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을 택해서 공간을 설정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생각할 나름이지요. 본디 글이란 쓰는 사람의 손을 떠나면 읽는 사람의 못이 되는 것이니까요.”
한참 동안 별말이 없었다. 남원의 옛 지명은 고룡(古龍)이니 이미 죽은 임금 곧 단종을 뜻하기도 한다. 상징적으로 보면, 용이란 임금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 임금의 도포를 용포, 임금의 눈물을 용루, 임금이 앉는 의자를 용상이라고 한다. 죽은 단종이 강원도 영월(寧越)의 청령포는 유배를 당하여 살다가 사약을 받기 전 스스로 자진한 곳이기도 하다. 한때 남원은 남원소경이라 하여 임금의 행차하여 머물던 행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남원을 대방(帶方)이라고도 이른다. 대방의 대(帶)는 뱀 곧 용을 상징하는 말이기에 더욱 상징성이 있다. 여기에 춘향(春香)과 같은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고, 후백제의 군사들이 백제 부흥을 꿈꾸다 일만 명 이상이 전사한 고장이기도 하다. 사육신의 죽음이나 생육신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의기는 설잠의 이기이원론과 맥을 함께 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만허 주지 스님이 화제를 돌려서 설잠에게 신중하게 이와 기에 대한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설잠, 스님이 삶과 죽음의 한계를 의와 기로써 이어 보려는 것은 이기이원론적인 논법인가요?”
“예, 주지 스님. 흔히 퇴계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사물과 사실을 지배하는 원리를 이(理)로 보고 이치에 따라서 ‘움직이는 힘’을 기(氣)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 가운데 이치가 있고 이치는 기를 통하여 드러난다고 봅니다. 생육신이나 사육신이나 같은 군주에 대한 도리와 충성심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의리가 이라면, 충성하는 마음의 작용은 기라고 할 수 있지요. 삶 자체가 이와 기가 함께 작동하는 것이지 결코 둘은 아닙니다. <만복사저포기>에서 귀녀의 환생과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과 의리는 한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실천이 없는 삶은 공허한 것입니다. 사단칠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단(四端)의 희로애락을 표면으로 하고 그 이면에 인의예지가 이(理)로 보면, 희로애락애오욕은 인의예지를 드러내는 기(氣)로 볼 수 있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만허 스님이 차를 들면서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설잠의 성정을 이해하는 듯한 표정이다.
“어떤 이는 설잠을 일컬어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 하더니만, 과연 그렇군요. 그것도 이기이원론으로 풀이가 가능한가요?”
마음으로는 유교 선비의 신념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불교 승려와 같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정신 따로 몸은 따로, 따로국밥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이기이원론적인 삶의 모습이 아닌가.
만복사 복회에 왔다가 잠시 만허 주지 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남원고을의 김생이 옆에 자리하며 차를 함께 하고 있었다. 만허 스님과 설잠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설잠과는 이미 몇 차례 만나서 차를 함께 했던 사이로 집의 나이로 거의 동갑에 가까운 터였다. 귀녀가 환생하여 양생과 사랑을 나누다가 마침내 남자로 다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서 물었다.
“설잠 스님, 귀녀가 나중에 남자로 환생하여 양생과 이별하고 양생은 사랑의 허무함을 깨닫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불자들의 윤회와 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심청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황후로 변신하여 눈이 먼 아버지를 찾아서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음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선왕께서도 환생하시어 나라와 겨레의 행복을 위한 세상을 만드셨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 형식으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마음이 간절하면 꿈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생육신으로서 설잠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공감을 가져 본다. 그것이 비록 꿈일지라도. 만복사 풍경의 뎅그렁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니 밖에는 꽃향기 날리는 봄바람이 만복사 뜨락을 싸 안고 있었다. 설잠은 다시금 잠을 이루며 꿈을 청한다. 달빛 어리는 창가에서. 꽃답게 살라고. 비우면서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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