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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한민국 축구를 3대 키워드를 뽑자면 벤투호, 아시안 게임 금메달, 그리고 박항서의 베트남일 것이다.
오늘은 이 박항서 신드롬에 찬물을 조금 끼얹을까 한다.
지난 1년 동안 대한민국 언론은 박항서 감독을 가리키며 “비주류”의 반란이라 칭송했다.
그러나 정작 글쓴이는 박항서 감독을 수식하는 “비주류”라는 단어를 봤을 때 “박항서 감독이 비주류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동안 한국 축구계에서 비주류란 축구협회 현대 라인에 반기를 든 인물 혹은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이 있는 인물들을 비주류라 칭해왔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은 국내 활동 당시 공개적으로 정치 행보를 보이지 않았기에 이 조건에 딱히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선수 또는 지도자 커리어로 봤을 때 비주류라 칭할 수 있을까?
오늘의 글은 여기에 집중하려 한다.
1. 한양대 출신인 내가 축구계에선 비주류라고?
어느 날 우연히 박항서 감독에 관한 기사를 봤다.
그동안 워낙 많은 기사가 나와서 하나라도 안 보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해당 기사는 박항서 감독이 한국 축구계에서 비주류인 한양대 출신이고 그 영향으로 선수 시절 대표팀도 못 가며 선수 시절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한양대가 한국 축구계를 연고대와 함께 삼분하는 존재인 걸 알고 쓴 걸까?
아니면 그걸 알면서도 박항서를 언더독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걸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한때 한국 축구계에는 이런 얘기가 있었다.
한국 축구의 지분을 나누자면 고대가 4 연대가 4 그리고 한양대가 2
흔히 얘기하는 설포카 연고 서성한의 한양대가 서성을 누르고 연고한이라고? 너 한양대 훌리건이냐?
아니다. 이곳은 축구판이다.
한양대는 의외로 축구계에서 지분이 높은 학교이다.
연대와 고대 축구부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한양대는 축구부에 꽤 많은 투자를 했고 그 결과 한국 축구 대표팀에는 한양대 출신이 꽤 많이 있다.
이름 있는 선수들이 연대나 고대의 오퍼를 까고 적극적인 구애를 보내는 한양대로 진학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때 이회택 기술위원장을 필두로 축구협회 실무진 사이에서 한양대 라인에서 큰 존재감을 낸 적도 있다.
물론 일을 잘하진 않았다. 축구협회가 제일 시끄러웠던 시기니깐.
또한 박항서 감독은 서울 경신고 출신이다.
산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난 박항서 감독은 경신고에 입학 후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걷기 시작한다.
바로 이 경신고 역시 한국 축구사에서 빠지지 않는 축구 명문이다.1905년 창단한 경신고 축구부에는 한국 축구 1세대이자 전설로 남은 고 채금석 선생과 고 김용식 선생을 배출했으며, “차붐” 차범근 감독 역시 경신고 출신이다.
우리 세대들에겐 유명하진 않지만, 김진국 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도 경신고 출신인데 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 공격 전술은 좌진국 우범근이었을 만큼 뛰어난 선수였다. 또 김정남 전 울산 감독의 형제인 김강남, 김성남도 유명하지만 사실 위 인물들 모두 다큐에서나 만날 수 있다.
이처럼 박항서가 다닌 경신고는 상당한 역사를 지닌 축구 명문으로 박항서는 이 경신고에서 주장까지 맡으며 팀을 이끌었고, 그 활약을 바탕으로 3대 축구 명문 중 하나인 한양대로 진학하는 상당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또한 박항서는 성인 무대 진출 역시 순탄했는데 실업팀인 제일 은행 축구단에 입단(당시에는 K리그가 없었다.)했으며 육군 축구팀을 거쳐 럭키금성(훗날 LG 치타스) 창단 멤버가 된다.
그러나 박항서가 대표팀에서 활약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근데 그 이유가 정말 한양대 출신이라서일까?
그렇지 않다.
박항서가 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렸을 당시 주전팀 박항서 포지션에는 조광래가 있었다. 지금 대구FC 대표이사인 그 조광래 말이다.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조광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화축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조광래의 위상은 지금 한국 대표팀의 기성용과도 같다. 조광래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주전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던 어떤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대표팀 중원의 산이었다.
그리고 조광래에겐 10년 동안 대표팀에서 함께한 동갑내기 파트너 박창선이 있었다.
박창선 역시 정상급 선수로 86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첫 골을 넣은 선수이다.(두번째 골은 김종부 감독)
마지막으로 어디든 뛸 수 있던 허정무도 중원에서 버티고 있었다.
지금 벤투호에 이 상황을 대입하자면 K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이는 중앙 미드필더가 있는데 대표팀에 전성기 시절 기성용 구자철 정우영(?) 등이 버티고 있는 격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당시 축구 대표팀은 지금의 클럽처럼 운영되었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국위 선양을 위해서라면 뭐든 가능하던 시기였고 80년대 축구 선수들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A매치 기록이 100경기 가까이 되면서도 클럽 커리어는 100경기가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선수도 있었다. (꼭 국위 선샹을 위해서 뭐든 가능했던게 아니라 그냥 뭐든 가능하던 시절이긴 하다.)
이처럼 86 월드컵과 86 서울 아시안 게임이 끝이 나고 조광래 박창선 허정무 등 대표팀 허리 라인이 은퇴를 선언하며 박항서가 뛸 수 있는 포지션에 공백이 생겼지만, 당시 정부는 88 서울 올림픽을 위해 일찌감치 대표팀 집중 육성에 나섰고 80년대 초반부터 지금의 연령별 대표팀 격인 어린 선수들을 중점으로 미래를 보고 팀을 꾸린 상황이라 끼인 나이였던 박항서는 아쉽게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처럼 박항서가 대표팀에서 활약이 없었던건 온전히 실력 혹은 당시 대표팀 상황에 의해서지 그가 한양대를 나와서가 절대 아니다.
만약 그가 한양대 출신이라 대표팀에 가지 못했다면 80년대 당시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다른 한양대 출신 선수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분명 대표팀 활약은 아쉽지만 박항서는 경신고 시절 신문에 이름이 오를 만큼 전도유망했고 프로 생활을 하며 시즌 베스트 11에도 뽑히는 등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낸 인물이다.
2. 25년을 프로씬에서 쉬지 않고 일한 내가 비주류라고?
박항서에 대한 기사가 워낙 많이 나오다 보니 다른 기사도 읽게 되었는데 그 기사에는 이런 얘기가 있었다.
이른 나이에 은퇴한 박항서가 국가대표 스타 출신이란 커리어만 있었어도 당장 프로팀 감독직을 맡았을 거라고.
이건 정말 미친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박항서 나이가 30살이었다.
물론 앞으로 언급할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냥 웃겨서 넣어봤다.
대표팀 경력은 조금 아쉽지만 나름 성공적인 선수 시절을 보낸 박항서기에 비주류라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박항서가 비주류가 되려면 지도자로서 엄청난 개고생을 하거나 야인으로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았을까?
1988년 30살의 나이로 은퇴를 한 박항서는 친정팀인 LG 치타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트레이너를 시작으로 코치까지 약 7년을 LG에서 보내며 우승 1회 준우승 1회 등 성공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다 94년 박항서 지도자 인생을 바꿀 첫 번째 인연을 만난다.
바로 1994년 미국 월드컵 김호 대표팀 감독이다.
김호 감독은 박항서 코치를 대표팀 트레이너로 기용했고 박항서는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96년 수원 블루윙즈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 김호는 이듬해 박항서를 영입하고 당시 수석코치 조광래, 코치 최강희, 2군 감독 박항서라는 지금 보면 정말 미친 라인업의 코치진을 꾸린다. (여담으로 박항서가 수원 코치로 갈 때 계약금 7천만 원에 연봉 4천 8백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김호가 지휘하는 98-99 수원은 K리그 역사에서 가장 강했던 팀 1위 2위를 다투는 시절로 박항서 역시 총 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2000년 박항서의 지도자 인생을 바꿀 두 번째 인연을 만나는데 모두가 아는 히딩크이다.
히딩크 시절 얘기는 모두가 아니 넘어가겠다.
그렇게 박항서는 12년 동안 2개의 프로팀과 2개의 대표팀을 거치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코치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사람 일이 항상 좋을 순 없듯 2002년 이후 박항서는 내리막을 걷는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감독으로 부임한 박항서는 축구협회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축구협회 내부 병신 싸움에 박항서가 희생양이 되었으며 결국 3년 동안 함께 했던 축구협회와 척을 지고 화려한 조명을 떠나 야인 아닌 야인의 길을 걷게 된다.
박항서가 대표팀에서 나온 2003년, 보통의 경우라면 클럽 감독을 되어야 했다.
선수 시절 이름을 날렸거나 코치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40대 초반을 시작으로 감독을 맡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보통이고 당시 박항서는 44살로 동기들에 비해 다소 뒤처지고 있었다.
하지만 02 아시안 게임 사태를 이유로 박항서의 몸값은 땅에 떨어졌고 결국 박항서는…긴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대표팀을 떠난 뒤 아주 잠깐 쉰 박항서는 포항 스틸러스 수석코치로 부임하며 곧바로 현장에 복귀했고 이후 전남 드래곤즈 기술고문을 거치는 등 야인 아닌 야인의 3년을 보내게 된다. 동기들은 한창 감독으로 활동 중인데 박항서는 코치로 남아있어야 했으니 이는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 3년 동안 야인의 길을 걸은 박항서는 2005년 신생팀 경남FC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다소 늦은 47살의 나이에 본격적인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경남을 시작으로 박항서는 전남, 상무에서 감독 생활을 보냈고 2017년 내셔널리그 창원시청을 끝으로 국내 생활을 접고 베트남으로 떠나는데….
이게 과연 비주류 지도자의 삶일까?
박항서는 89년 지도자로 입문해 3년을 제외하면 프로 무대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인물이다.
이 3년 중 1년도 그나마 전남에서 기술고문을 맡았던 시간이다.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프로 코치는 물론 대표팀 코치로 2번의 월드컵을 경험하며 4강에 올라갔고 K리그에서 감독으로 3팀을 맡으며 9시즌을 보냈다.
박항서는 프로 지도자로만 대략 25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게 비주류의 삶이면 대체 K리그의 인싸들 커리어는 어느 정도란 얘기인가?
대한민국 언론의 얘기처럼 박항서 감독의 커리어 한국 축구의 야인이고 잡초라면 과연 경남 김종부 감독은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김종부 감독은 무려 18년을 아마추어 무대에서만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렇다.
이 글은 김종부를 빨기 위한 빌드업이다.
농담이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박항서의 선수 시절과 지도자 시절을 전혀 비주류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너무 인싸라서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렇게 프로 무대에서 오래 활동하는 지도자는 드물다.
그렇다면 언론은 왜 박항서를 비주류라 부르는 것일까? 대체 왜?
혹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른들의 세계라는 높으신 분들에 의해 한 사람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모두가 하나되어 비주류라 칭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도 없이 그를 비주류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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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이네
2002년 이후로 매번 미디어에도 자주 나오고 거의 전 국민들이 알고 있는 감독인데 비주류라니
빅클럽을 안맡았다뿐이지 비주류는 아니지요
술 한잔 자시고 주류로 가봅시다
박항서가 비주류 였다면 베트남 신드롬 일때 사람들이 박항서가 누구? 이래야하는데 이미 인지도가 주말연속극 주연처럼 나이대 상관없이 다 알고 있슴.
이번 베트남 감독 되고 활약하기 전까지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박항서는 비주류라면서 이런 감독에게 기회를 안 준 축구판은 역시 썩었다고 하는 거 보고 어이가 없었음
무지에 편승한 축사국류 헛소리에 빤한 사실을 이렇게 길게 설명해야 한다니 슬픈 현실...
진짜 비주류는 김호 박종환 김학범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분류되는데, 결국 축협은 주류 비주류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중용해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누가 주류든 비주류든 그걸로 논란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웃기다는 얘기.
외모가 비주류죠..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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