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지난 가을에 공세리 성당을 다녀온 후, 가톨릭 굿뉴스에 올렸던 제 글입니다. 마침 공세리성당 사진을 올려주신분께 감사드리며 답글로 제 졸필을 달아봅니다. *^^*
10월 28일 토요일 오후 4시00분 일치의 모후 cu 단원 80명은 버스 두 대에 승차하여 순교성지인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과천으로 빠져나오니 달리는 버스 창가로 가을이 빠르게 지나간다.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찍어봤다.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청계산자락의 갈색 단풍이 보기 좋다. 관악산 정상의 안테나가 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쪽빛 옥색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고 띄워놓은 조각구름 하나 없다.
cu.단장의 주송으로 시작기도를 바치고 저마다 조용한 묵상에 잠긴다. 아산만에 인접한 공세리는 농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며, 후덕한 인심 속에서 우리 순교 조상들이 신앙을 증거 해 온 곳이다. 묵상을 하면서 타임캡슐을 타고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봤다. 우마차가 다니던 길을 버스가 지나간다. 상투를 틀어 맨 촌로(村老)가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초동(樵童)의 손을 잡고 아산 포구로 가고 있다. 누렁이도 따라간다.
아산 포구엔 저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실려 온 공물(貢物)들이 바리바리 싸여있다. 포졸들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고 인부들은 소달구지에 가득 실린 공물(貢物 )을 창고로 운반한다. 이곳 공세리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서 거둬들인 나라의 세금을 공세창고에 저장한 후 다시 뱃길로 한양까지 운반하는 곳이다. 나는 200년 전의 타임터널을 통과하여 현세로 돌아왔다. 이곳 공물창고가 있던 곳에 100년 전에 성당이 들어섰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네 번째 성당으로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공세리 성당! 우리의 일행은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성당 ‘예수 마음 피정의 집’에 도착하였다. 까리따스 수녀원의 수녀님께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신다. 그런데 가만! 어디서 봤더라?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몇몇이 이구동성으로 얘길 한다. 드디어 해답이 나왔다. 평화방송에 출연하여 특강을 해 주시는 달변으로 소문난 황 모니카 수녀님이시다. 공세리 성당은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가 만나는 삼각점 야트막한 야산에 있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아산만과 삽교천은 교회 박해 시대에는 내포 지방 입구로 해상과 육로가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였다. 공세리 성당은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합덕성당의 전신인 양촌성당으로부터 분리 되었다는 설도 있음) 이곳은 내포지방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이 신앙의 씨앗을 뿌린 곳이기도 하며 후에 28위의 무명 순교자가 신앙을 피로써 증거 한다. 현재 성당이 위치한 9,0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곡창고지(貢稅穀倉庫地)로 유명했던 곳이다.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드비즈 신부가 이곳에 와서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었으나 1897년 공세창고 건물을 헐고 구성당(현 사제관)건물과 구사제관 건물(현 회합실,창고)을 짓게 되었다.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 의술을 활용 하여 한약을 조제하였고 많은 의술을 펼쳤다.
이조참판을 지낸 박만선이 이 일대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간척사업을 벌였다. 대를 이어 80년 동안 이어진 어렵고 힘든 간척사업과 고된 노동으로 몸이 닳고 헐어 고생하는 일꾼들을 위해 드비즈 신부는 고약을 개발하여 그의 한국명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으로 하였다. 후에 고약비법은 드비즈 신부의 비서인 이명래(요한)에게 전수됐으며 이명래의 사위와 그 사위의 사위에게 전수되어 오늘에 이어진다.(유진오박사부인집안)
“원죄 없으신 잉태의 모후” 성모상 앞에는 수령 삼백 년 이상 된 거목이 호위 군사처럼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고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게 위엄을 부리고 있다. 옆으로 약간 벗어난 한쪽으로 세분의 순교자 묘지가 있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비석이 서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박의서(사바스), 원서 (마르코), 익서(세례명 미상)삼형제이다. 세 분의 묘 앞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대도 준비되어 있고 성당 건물 주위로 해서 그 앞으로 십자가의 길이 지나간다.
거목의 호위 아래 옆으로 아담하게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붉은 벽돌로 고딕체로 지어진 성당엘 들어가 봤다. “슈고하난 쟈와 무거운 짐진 쟈난 다 내게로 오라. 나 너희를 도으리라.” 마태오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온다. 복음말씀은 제대 위 천정에 가로지른 석고에 새겨져 있다. 제대 뒤편 벽면에는 특이하게도 베네딕토 성인상이 모셔져 있다. 제대 머리 위에 베네딕토 성인이 모셔져 있는 이유를 오남한(루카)주임신부님은 이렇게 설명을 하신다. 성당을 짓기 전 이곳에 귀신이 들었고 동네아동들이 놀다가 여럿 죽었다고...베네딕토 성인은 마귀를 쫓아내는 성인으로서 이곳 주보성인으로 정했다고 한다.
공세리 성당 주보성인 베네딕토(480-560)는 ‘축복된’이란 뜻이란다. 움바르디아 수비아코에서 3년 동안을 동굴생활을 하면서 수도규칙서를 저술하였고 서방 수도승 생활의 초석이 되었다. 12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후에 서방교회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림을 받았다. 성체를 모시고 일어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시며 선종하셨다고 한다. 누이동생 ‘스콜라스티카’는 수녀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베네딕토 성인과 함께 안장 되어있다.
베네딕토 패 뒷면에는 십자가 안에 수직으로 “CSSML=CRUX SACRA SIT MIHI LUX”(거룩한 십자가가 나의 빛이 되소서)라는 기도가 새겨져 있고, 수평으로는 “NDSMD=NON DRACO SIT MIHI DUX”(악마가 나의 인도자 되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으며 가장 오른쪽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 아래에서 위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들어있다. 번역된 내용을 보면! “사탄아 물러가라. 헛된 생각을 하게 하지 말고 네가 마시는 것은 악이니 네 독이나 마셔라.” 아마도 이래서 주보성인으로 모셨나보다.
성가대석을 바라보니 100년 된 물건들이 그대로란다. 선조들의 얼이 담겨진 성당을 그들은 깨끗이 보존하였다. 밖으로 나와 종탑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푸른 가을 하늘에 십자가가 걸려있다. 햇살에 반사되어 빛이 난다. 밑으로 조금 걸어 내려오니 지하토굴로 만들어진 성체조배실이 나온다. 적당한 크기에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다. 순례자들이 묵상을 많이 한다. 4대 박해기간동안 순교자의 수를 1만 명에서 1만 2천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내포와 충청권이 60~70% 정도나 되고 이곳 에서 28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성당 주변에는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만 7그루나 된다. 감나무, 단풍나무,느티나무와 각 수종들이 어울러져 풍광이 빼어나다. 그래서 많은 영화감독과 CF감독들에게 인기가 있는 단골 촬영 장소가 돼버렸다. ‘모래시계’ ‘태극기 휘날리며’ ‘고스트 맘마’ ‘불새’를 촬영하였고 안치환이 은행나무 아래서 ‘소금 인형’을 작곡했고 god가 이 성당을 배경으로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다. 눈 덮인 겨울에도 아름다울 것 같아 여유를 갖고서 다시한번 가봐야겠다.
첫댓글 하숙생님 뜻깊은 공세리성당의 글을 어찌 이리도 잘도 쓰셨을까요... 한참을 공세리 뜰을 거닐며 글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마음에 담습니다... 김엘리사벳
글 감사드림니다. 어느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TV를 보다가 공세리 성당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바위 성지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고 기회가 되어 다녀왔습니다. 봄 초록빛 잎이 돋아나면 다시 들릴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유서깊은 곳인줄 알긴 알았었는데 이리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한참 읽고 감니다..
공세리 성당의 풍경 이야기를 잘 들려주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멘 !! 참미 예수님 ..
시간내서 꼭 한번 다녀 오리라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