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의 관객 수가 900만을 넘어 1000만을 향해 가고 있다 한다.
학교에서 전교조가 학생들을 동원하는 통에 숫자가 많아진 것이라 하며 애써 그 숫자에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긴 하나, 그렇게 동원된 인원을 감안하다고 하드라도 영화제작자로서는 대박임에 틀림없다.
막내가 우리 부부가 보도록 영화표를 예매해 놓았다고 하여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극장에서 하는 그 영화를 보았다. 날씨가 유별나게 춥다. 가면서 내내
마누라에게 당신 친구와 갈 것이지 왜 나를, 하다가, 딸년 덕분에 호강은 못할망정 이 무슨 해괴한 일이냐, 이 추운날 영화라니, 뻔한 요강대가리 전씨 이야기는 내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인데 그걸 영화로 볼 게 뭐 있나,고도 하였다.
그래도 마누라는 그 유명한 영화를 이렇게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태도이다.
늘 만나는 ‘수영장 친구’들에게 틀림없이 ‘형님들, 서울의 봄, 봤나요?’하고 이튿날 폼 잡을 일을 생각하고 나보다는 기분 좋은 표정이다.
다 보고 나오면서는 또 그랬다. “전두환이 남자는 남자다.”
내가 “남자다우려면 그런 짓을 해도 되는가?”하자 “세상이 그런 건데 혼자 고집한다고 뭐가 되남.”한다.
전두환을 전두광으로, 장태완을 이태신으로 뻔한 이름을 바꾼 것이 오히려 거북살스러웠으나 그런대로 졸지 않고 다 본 영화였다. 나는 영화 보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간혹 애가 영화표를 예매해 놓았다고 하여 억지로 간 영화관에서
졸지 않고 끝까지 본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끝까지 본 영화가 ‘서울의 봄’이었다고나 할까.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이어져간다. 한 패거리가 非道를 저지르면 많은 사람들은
그 영화의 주인공인 전두광이 말하는 것처럼 “빨아 먹을 것이 있어 들러붙는다."
일시 그것이 천하대세인 것처럼 보이나 거기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성계의 세력에 맞섰던 정몽주 등이 그런 경우였다. 세조에 맞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또한 그러했으며 명나라의 영락제에 맞섰던 방효유 또한 그러했다.
중세 유럽의 비도의 가톨릭에 맞섰던 스피노자나 루터 같은 사람도 그런 경우였다. 스피노자는 물론 스피노자를 돕거나 옹호하는 사람조차도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파문의 문장은 지금 읽어도 숨이 막힌다.
그 전두환에 맞섰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구나 우리 고교 선배님이 아니신가.
그 자신의 일생이 비극으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행적 또한 처절하다. 영화에는 안 나왔지만 장태완의 아버지는 아들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을 본 뒤로 곡기를 끊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고, 장태완의 아들은 서울대에 다니다가 행방불명 된 2개월 뒤에 그의 할아버지 산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장태완의 아내는 우울증을 앓다가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죽는다.
79년 12월 12일 당일, 영화에서 장태완으로 나오는 이태신에게 그의 아내가 '오늘도 못 돌아오느냐‘고 전화하는 장면에서 그때까지 담담하게 영화를 보던 나는 그만 눈물이 날 뻔 했다.
그 12. 12 사태는 그 이튿날 날이 밝은 뒤 전국민이 전말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날 밤중에 장태완의 부인이 전혀 아무런 낌새를 못채고 그토록 한가롭게 사적인 전화를 했을까. 더구나 남편이 수도를 지키는 수방사 사령관이 아닌가. 총성과 포성만으로도 여기 저기 전화하여 사태를 짐작했을 터이고, 아마도 남편과 통화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통화가 되었다면 그 통화 내용은 영화 보다는 달랐으리라. 그런 것이 디테일의 문제이긴 해도, 그 전화 장면에서 눈물이 날뻔 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이 감동하는 것은 큰 사건에서가 아니라 작은 일에서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감동하는 것은 죽기 직전 자기 제자에게 ‘닭 한 마리 외상 한 것을 대신 갚아주기를 부탁하는’ 그 말에서이다. ‘우리’라기 보다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러한 것 같다.
당시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을 지키려다 총격에 희생된 김오랑 소령 또한 그의 부인이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눈이 멀었다든가.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경우, 형장에서 죽고 난 뒤 그의 부인은 종의 신분이 되어 신숙주에게 하사되었다한다. 세종 치세 시에 집현전에서 같이 공부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 신숙주는 종이 된 성삼문의 부인을 하사 받는 심경이 어떤 것이었을까? 친구인 성삼문이 참 세상을 모르는 어리석은 친구라고 알았을까? 용기가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했을까?
명령일하에 전군을 동원할 수 있는 자리의 인물에게는 언제나 쿠데타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 중요할 뿐. 그러나 전두환에겐 12. 12가 의거인지 봉기인지의 명분이 없었다. 나는 전두환에게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12. 12를 왜 일으켰느냐고. 김재규를 잡아 넣은 것은 그렇다 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왜 잡아 넣었나? 대통령이 하고 싶었다고? 남의 집 물건이 탐나 그걸 가지러 담 넘어 들어가면 그건 도둑이나 강도가 아닌가.
대통령을 하는 것도 절차를 무시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도둑이나 강도나 다를 바가 없다. 5. 16 쿠데타는 혁명공약부터 내걸었다. 그토록 박정희를 닮고 싶었으면 혁명공약이 왜 필요했는지도 배워야 했을 것을.
박정희는 자신들의 행동이 강도짓이 아니었음을 혁명공약을 통해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얼마 뒤 자신이 국민투표에 나서서 당선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다 같이 12. 12의 강도 짓을 저질렀으나 뒤에 감옥에 들어갔을 때 전두환과 노태우는 죄목이 달랐다. 전두환은 권력 찬탈이 죄목이었고, 노태우는 불법적인 정치 자금이 죄목이었다. 12. 12에 대해 노태우는 국민투표에의 대통령 당선으로 면죄가 된 셈. 전두환은 자신의 12. 12 행위가 뒤에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을 윽죄게 될 줄 몰랐다. 알았다면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판사판 국민투표를 실히하여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박정희 아래엔 김종필이 있어 혁명공약을 만들고 다시 국민투표에 이어 공화당을 만들었다. 심지어 공화당의 상징으로 황소를 내세운 것 또한 김종필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 아래에선 어떻게 그런 인물 하나 없었나.
첫댓글 고1때 10.26, 고2때 서울의 봄과 5.18
당시 수학여행을 고2때 갔었는데 마산에서 출발하여 동해안 서울을 거쳐 광주를 통과하여 마산으로 복귀예정이었으나 5.18로 광주가 차단되어 천안쪽에서 바로 마산으로 돌아왔죠.
이후 80년대 내내 대학가는 5.18로 화염병과 투석, 그리고 최류탄이 난무했었죠.
그 당시 민주화운동은 적합한 것이었으나 아직까지도 일부 정치인이 독재와 싸우는 민주투사로 코스프레하는 것은 목불인견
催淚彈(최루탄) : 눈물을 재촉하는 포탄. ㅎㅎ
아침에 글 쓸 때 술이 안깼는데 결국 오타를 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