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성 탐방로" 탐방/ 2024년 4월 27일
부산동부시외버스 터미널 7시 20분 버스를 타서,
경주시외버스 터미널, 8시 10분에 도착했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한참 기다려,
10번 버스를 탔다.
분황사에 오니 도로변 가로수가 하도 싱그러워 분황사 정류장에 내렸다.
걷고 걸어 당초 목적지 보문마을앞 정류장에 왔다., 9시 10분.
진평왕릉으로 간다.
못자리 만들기 위해 논에 물을 넣었네.
보문마을 가는 길, 꽃은 이미 져버린 겹벚꽃 길
등꽃이 활짝
진평왕릉 주차장, 9시 35분.
진평왕릉
이팝나무 한 그루
꽃이 활짝 피었다.
양산부터 경주까지 길 가에 이팝나무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고목에도 잎이 피고
진평왕릉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9시 45분.
보문 마을을 거쳐 "명활성 탐방로" 진입로를 찾아 간다.
연산홍도, 꽃잔디도 활짝 피었고,
할미꽃은 이미 할머니가 되었다.
모란도 때를 만나
보문마을 정류장, 9시 55분.
설총 무덤
■ 비담의 난과 명활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27 善德王 조에,
"왕 16년(647) 정월에 毗曇 · 廉宗 등이 여왕은 능히 선정을 베풀지 못한다고 말하며,
반란을 도모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삼국사기>, 41권, 列傳 제1 金庾信 上 조에,
"선덕왕 16년(647)은 왕이 돌아가신 해(1월 8일)고 진덕왕이 즉위한 원년인데,
대신 비담과 염종은 여왕으로서는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며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고 함으로,
왕은 친히 궁내에서 이를 막았다.
이때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주둔하여 서로 치고 막기를 10여 일 동안 하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밤 삼경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때 비담 등은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내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 하자,
군사들이 이 소리를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대왕은 이 소리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유신은 왕을 보고 말하기를 ‘길하고 흉한 것은 무상한 것으로서 오직 사람들이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紂王은 赤雀으로 해서 망하고,
노 魯나라는 기린을 잡음으로 해서 쇠약해졌고,
고종 高宗은 꿩이 와서 울음으로 해서 흥하고,
정공 鄭公은 용이 싸웠으므로 해서 창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망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온즉 성신 星辰의 이변 같은 것을 가히 두려워할 것이 아니오니,
청컨데 대왕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하고는 곧 허수아비 偶人을 만들어서 연에 달아 이를 바람에 따라 띄우니,
불덩이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그 다음날 유신은 사람들을 시켜 길 가에서 선전하기를,
‘어제 저녁에 떨어졌던 별이 간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적도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들고,
또 백마를 잡아서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지어 말하기를
‘천도는 양이고 강건하고 음이 유순하고, 인도 人道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은 법인데,
이 도리를 바꾸게 된다면 곧 대란이 일어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담의 무리들은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고자 하고,
아랫 사람으로서 웃 사람을 침범하려 하니,
이는 소위 난신적자이므로 사람과 귀신이 다 함께 미워하는 것이오며 천지가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늘은 이에 무심한 듯 도리어 성신의 변을 왕성에 나타나게 하시니,
신들이 의심하는 바는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 하늘의 위엄은 오직 사람의 정성에 달렸으므로,
선은 선으로 여기시고 악은 악으로 여기시면 신도 부끄러움을 만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유신은 모든 장병을 독려하여 적을 공격하니,
비담 등의 무리는 패주하므로 이를 추격하여 모조리 참살하고 그 구족을 죽여 버렸다."
여기가 "명활성 탐방로" 진입구이다., 10시 10분.
이곳을 출발, 반시계 방향으로 해서 이곳으로 돌아온다.
국제신문 근교산 <명활성 탐방로>를 따라간다.
길이 제법 거칠다. 그리고 길 오른쪽 좀 높은 언덕은 명활성 토성의 흔적인 듯하다.
나무들 뒤로 보문호가 보인다.
각시붓꽃
보문호
정토암, 11시 25분.
석성의 흔적
제2발굴지, 11시 35분
제1발굴지, 11시 50분
북문터, 11시 55분
성문 밖으로 나왔다.
■ 사적 명활성은,
명활산을 둘러싸고 있는 신라시대 산성으로 경주 주변의 남산신성, 서형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수도 방위 시설로 큰 몫을 한 곳이다.
성의 둘레는 약 6km로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는데,
석성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축성 방식을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에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고, 눌지왕 15년(431)에도 왜구가 이 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자비왕 18년(475)부터 소지왕 10년(488)까지는 이곳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
선덕여왕 때에는 비담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성 주변에서 진흥왕 12년(551)에 만든 작성비 作城碑가 발견되어,
공사 총책임자, 실무자, 공사기간 등 당시 축성에 관한 내용을 전해 주는데,
처음에는 토성이었다가 이때에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여 겨진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위의 안내 표지 글을 옮겨 적었다.
■ 경주 명활성 북문지 발굴조사
사젹 제47호 명활성은 종합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6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북문지가 확인되었다.
북문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함께 확쇠(문짝을 고정하는 철제 유물), 띠쇠, 쇠못 등이 출토되어 문루가 있는 너비,
3.6m의 외개형 外開形 문이었으음을 알 수 있다.
문지 동쪽에 반원형 치성 雉城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북문지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곡성 曲城이라고도 한다.
곡성이 확인된 신라성은 보은의 삼년산성, 문경 고모산성에 이어 3번째로 확인되었으며,
신라 석성의 특징적인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명활성은 5세기에 축조하여 6세기까지 꾸준히개축되었고,
647년 비담의 난 이후로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활성 작성비문(551)의 고타문 古他文이 북문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의 안내 표지 글을 옮겨 적었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와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연못도 보인다.
양지꽃
무너진 석성
성을 한 바퀴 돌아서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12시 45분
보문마을 꽃 구경
목향장미
어느집 담장에 활짝 핀 불두화
진평왕릉 주차장, 1시 5분.
진평왕릉 쪽을 한 번 돌아보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황복사터가 있고, 국보 황복사지 삼층석답도 있어,
들러볼까 했는데, 너무 덥고 지쳤다.
빨리 돌아가 쉬고 싶어 포기할 수밖에, 많이 아쉽다.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숲머리 정류장에 왔다, 1시 30분.
정류장에 도착하자 곧 10번 버스가 왔다.
오늘 10.5km를 걸었다.
날씨 맑고 많이 더워 힘들었다.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 1시 50분.
2시에 출발한다는 버스가 2시 15분에 들어왔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명활성 어느 쉼터에서 셀카
첫댓글 자세한 설명, 명활산성에 대해서 알아갑니다.
더운 날씨에도 좋은 걸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