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에 흠뻑 젖어 버린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1. 일시 : 2003. 7. 17 (목)
2. 여행요약 : 대구출발(10:40) → 안강휴게소(12:10) → 늦은아침 먹고 출발(12:40) → 독락당 도착(13:10) → 옥산서원(13:40) →양동마을(14:30) → 늦은점심 먹기(15:40) → 다시 관람(16:10) → 대구로 출발(17:00) → 대구도착(7:00)
끈질기게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추어 아침엔 해까지 반짝 비춰 주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고향이 영덕인 나로서는 대구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의 안강이 결코 낮선길이 아니다. 등잔밑이 어둡다던가? 늘 고향으로 오고 가는 길에 두고도 이제서야 찾아가 보게 되었으니... 사실 지난주에 고향을 다녀오던 길에도 양동마을의 화려한 기와지붕들을 눈여겨 보며 지나가지 않았던가.
대구시내를 벗어나 하양을 지나며, 명희가 옆에서 삶은 계란을 까준다. 소금까지 찍어 준다. 운전을 할 때만 누리는 특권이다. 12시가 조금지나 휴게소에 들러 계란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배를 우동으로 마저 채워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제촉했다.
▲옥산서원 정문 풍경
옥산서원 2Km 남겨둔 지점에서 공사로 인해 차들이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양동마을에 먼저 들린후 돌아오는 길에 옥산서원을 둘러 보려던 계획을 바꾸어, 옥산서원으로 먼저 향했다.
1572년에 설립된 옥산서원은 四山五臺의 경승지로(道德山, 花蓋山, 舞鶴山, 紫玉山) (觀魚臺, 澄心袋, 詠歸臺, 濯纓臺, 洗心臺) 명산이 둘러싸고 있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데, 과연 서원옆을 흐르는 계곡은 어느 이름난 계곡 못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건너야 하는 외나무다리
계곡에 좁고 깊은 곳에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으로 건너가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제법 아찔해 보이는 곳에 좀 더 넓고 편리한 다리를 놓아도 좋을 법한데 왜 하필 외나무다리일까. 이유인즉 세상 욕심이 많은 자는 외나무다리를 건너기가 무섭고, 반면 욕심 없는 자는 건너기 쉬울 것이니, 학문을 배우기 전에 세상의 욕심을 모두 버리고 건너 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옛 선비들의 학문에 대한 숭고한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옥산서원 계곡 건너 독락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언적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 사랑채이다. 오늘 여행에서 본 많은 전통 건물 중에도 가장 내 마음에 기억되는 집이다.
▲시냇물을 볼 수 있게 살창을 뚫은 담
독락당은 한국 전통건축의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살이의 특이한 평면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하는데, 그런 전문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사랑대청에서 집 옆을 흐르는 시냇물을 볼 수 있도록 담에 살창을 뚫어 놓은 것은 한 눈에 봐도 독특했다.
건축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독락당의 정면은 동쪽 계곡쪽이다. 다시 말하면, 동쪽 자연을 향해서는 열려진 정면이나, 남쪽 인간사회를 향해서는 닫혀진 형식이라 인간사회와의 절연과 자연을 벗삼기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독락당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 정혜사터 13층 석탑을 둘러 본 다음 양동마을로 향했다. 한시간 전에 막혔던 길은 어느새 시원스레 뚫려 있었다.
▲양동 민속 마을
양동마을 주차장에는 방금 대형버스에서 내린 일본인 관광객들이 단체로 마을 안내판에 둘러서서 안내자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 프린트해 온 지도를 들고, 가장 가까운 향단 코스를 향했다.
첫 번째 들린곳은 관가정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성종 때의 문신인 우재 손중돈(1463-1529)이 종가인 서백당에서 분가하여 살았던 집으로 조선시대 중기 건축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향단의 안채 대청
두 번째 들린곳은 향단인데, 이름 참 특이하다 생각하였는데, 회재선생(1491-1533)이 경상감사로 있을 당시 건축하여, 선생이 다른 곳으로 전임하면서 동생인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에게 물려주어 여강 이씨 향단파의 파종가를 이루게 되었고 농재선생의 맏손자인 의주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는 당호가 붙혀졌다.
이름뿐만 아니라 이 건물 역시 상당히 기억에 남는데, 마을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부터가 인상적이다. 흥(興)자모양으로 지었다는 이 건물은 철저히 풍수사상에 따라 지어져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많이 탈피 되었다 한다. 허나 솔직히 그런면은 아무리 보아도 우리 같은 사람 눈에 들어 올리 없다. 다만 안채 대청마루에 올라보니 행랑채 뒤 편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종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안방마님의 발 아래 있는 듯 했다.
흔히 사랑채와 안채가 별천지 처럼 느껴지는 것이 옛 가옥인데, 이곳은 아들의 신혼생활을 원할히 해 주고자, 안채 대청 옆에 아들만 드나 들도록 작은 문이 달려 있는 것 또한 무척 이채로웠다.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집중 별당 건물이다. 무첨당(無添堂)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글씨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그외에도 대성헌, 근암고택등을 둘러 보았는데, 같은 옛 고택이지만 각 건물들마다 저마다의 뜻에 따라 전해져 오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떤땐 길을 잘 못들어 사람이 살고 있는 사가를 기웃 거리기도 하고, 수국, 상사화, 과꽃이 나란히 피어 있는 아담한 꽃밭을 지나기도 하고, 어느 흙담 위에는 강아지풀이 수북히 자라고 있었고, 조금 열려진 대문 안으로 개 한 마리가 평화로이 졸고 있었다.
▲양동마을에서
무첨당으로 들어서는 골목 어귀에 있는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시켜 굴비구이와 각종 나물찬들과 함께 명희가 기절해도 모를만큼 맛있게 먹고 있는데, 한 일본인이 다가와 어슬프게 인사를 건내더니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데고는 머라머라 한다. 놀란 명희는 고개부터 돌리고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야할지 입으로 넣어야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찰칵 한다. 메뉴 어쩌고 하며 ´캄사하므니다´하고 사라진 일본인... 어쩌면 내일부터 일본 인터넷에 내 사진이 열심히 떠 다닐지도 모른다며 웃고 말았지만, 매일 사진을 찍고만 다니다가 남한테 그것도 외국인한테 찍히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하튼 일본 관광객들은 그들의 관심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관광객들 보다 더 열심히 찍고 기록하며 구석구석을 다니고 있었다. 물론 처음보는 풍경들이 신기하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모습은 과히 열성적이었다. 내나라에 대한 관심이 그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 더 열심히 우리나라를 기록하고자 다짐하며 조금씩 내리는 비를 뒤로하고 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