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군사정변 후 1962년 12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로 제3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이 헌법에
따라 이듬해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직접 선거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한편 박정희 측근이었던 류승원은 군사정변 후 대령의 신분으로 인천의
9대 시장이 되었다. 개항장 정씨 형제의 막내였던 정진영씨
일가와 친분이 있던 류승원이 인천의 시장이 되어 온 것이다. 류승원 시장과 정씨 일가의 인연은 정진영
일가가 인천을 떠나 벽성에서 살 때부터 연결이 되었고, 개인적 친분과 함께 집안의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추리된다. 그러나, 이 당시 류승원 시장보다 연상이었던 큰아버지는
인천시장을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류승원 시장은 1963년
준장으로 예편을 하고 인천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후로도 7대만 빼고 계속 국회의원에 당선해서 1980년까지
인천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런데, 인천 지역은 보수파보다는
진보의 성향이 강한 도시로 친척들은 대부분 공화당보다는 신민당을 더 지지했다.
한편
인천 지역의 또 다른 정치인인 곽상훈은 제헌의원으로부터 계속 국회의원을 지내며 1955년에 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5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4대
5대에서는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419혁명이후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장면 내각의 우유부단함을 질타하면서도 군사 정권의
회유를 거절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1972년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고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곽상훈은 516이후 백범 김구 선생 기념 사업협회 회장으로 활동을 했고, 이어서
1966년부터는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 대하여 고른 인사 정책을 펼 것을 요구하여 정부 내각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64년 베트남에서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본격적인 베트남전에
뛰어들고 한국에 참전 지원을 요구했다. 1965년부터 월남 파병이 진행되고 미국은 추가로 민간 지원까지
요구했다. 1967년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생활을 위하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월남에 갔다. 당시 월남에 간 근로자들은 대부분 625 동란을
통해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그 정도의 위험은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각오를 대부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때마침 수인역의 미군부대에는 감원 바람이 불었고,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 함께 다니던 친구들과 함께 월남의 군수물자 지원 회사에 취직을 했다. 아마도 필코라는 회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더 위험한 일을 하는 모험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의 부산물과 고물
등을 수거하는 일을 많이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였다. 인천에는 실제로 이런 기회로 기반을 마련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신흥동에서 숭의동으로 이사를 온 후로 월세집을 매년 이사했는데, 아버지가 월남에서 일한지 일년이 안되어
숭의동에 단독 주택을 살 수 있었다. 그 때 그 집의 매매가는 30만원이
좀 넘었다. 가끔은 은행 송금을 하지 않을 경우도 있었다. 우편으로
편지에 동봉해서 돈을 보내올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신포동에 있는 환전상에 가서 돈을 직접 바꾸곤
했다. 신포동에는 달러 환전상이 많이 있었다. 68년에는
미국에서 TV와 냉장고를 보내왔다. 그 당시는 그런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월남과 한국을 오가는 하사관들이 있었는데 이 하사관들은 당시 가전 제품을 관세없어
통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래서 수고료를 지불만 하면 어떤 물건이던 가져올 수 있었다.
68년에 TV가 들어왔을 때는
대도시로 구분되는 인천이지만 그리 흔하지 않아 동네의 큰 이슈였다. 김일이 레스링을 할 때는 동네 극장이
따로 없었다. 69년에는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중계 방송을 했다. 이 때도 동네 이웃들이 몰려와서 난리가 났다. 이후부터는 TV보급이 많이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반도에서
철도 개통 1호는 서울과 인천 구간인 것처럼 1968년에는
우리나라의 첫 고속도로인 경인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부고속 도로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당시 고속도로 건설 자금은 월남에 파병된 군인의 목숨값에서 나온 다는 얘기도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에 개통이 되고 이 구간중에 가장 난구간은
추풍령 고개로 이 구간 공사 중에 많은 인부들이 죽어 추풍령 휴게소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968년에는 여름에 1년 근무를
한 아버지가 휴가를 나왔다. 한 달을 쉬었는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 휴가를 보냈는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그 때 처음을 가족 여행을 떠났다. 기차로
부산에 내려가서 부산 해운대와 태종대를 둘러 포항 구룡포와 호미곶을 둘렀다. 그 당시 그곳이 인적이
많지 않았던 곳인데 마침 여름이라 동네 아이들이 바위 사이의 깊은 곳을 다이빙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 태종대의
자갈 소리는 정말 자갈자갈하고 포항 호미곶의 바다는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바닷가도 파도가 부딪히는
곳은 수심이 쑥 들어가지만 조금 나가면 아이 무릅도 안되는 천연해수욕장은 내 생애에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다. 특히
인천의 바다만 봐 오다 이런 푸른 바다를 본다는 것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당시 인천의 바다는 거의
똥바다에 가까웠다. 바닷가에는 원목을 들여와 해상 건조를 하여 통나무가 둥둥 떠다니고, 그 원목에서 나오는 기름끼는 끈적거림이 심했다. 끈적거리는 바다의
추억은 1980년도까지 계속되었다.
나의
기억은 지금 1970년을 달리고 있다. 당시 숭의동에 장안
극장이 있었고 하춘화라는 어린아이가 팝송을 부르던 모습을 봤다. 그 시절에는 용현시장에 안에 있던 한일극장을
가끔 갔었다. 한일극장에서 본 영화중에 “내일을 향해 쏴라”가 기억난다. 폴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갱영화로 마지막에 장면에
볼리비아의 경찰에 포위되어 총을 쏘며 뛰쳐나가는 모습은 쇼킹한 장면이었다.
TV에서 주말에는 KBS에서
주말의 명화는 빼 놓지 않고 봤다. 오프닝을 알리는 볼레로풍의 “아랑푸에즈
협주곡” 은 그 시절에 대한 각인의 효과가 있었다. 그 때
TV 영화로 존웨인, 커그 더글러스, 율 부린너 등등의 영화는 빼 놓지 않고 보는 영화였다. 가끔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화도 기억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보게 만드는 서늘함을 주는 충격의 영화들이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당시 SF
영화로 충격적인 주제였다.
어쩌다
AFKN에서 영화를 봤는데 금지된 장난이었다. 영화의 중간
중간에는 기타곡으로 유명했던 ‘사랑의 로망스’라는 기타곡이
자주 나온다. 아마도 이곡의 연주는 세고비아 아니면 로메로의 연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이 만든 상처는 순진한 아이들에게도 큰 상처를 줬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아이 뽈레트는 기차역에서 미쉘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부르짖는다. “미쉘! 미쉘! 미쉘!” 여운이
큰 영화였다.
“전쟁은 도덕과 양심을 파괴하며, 숨어있는
인간성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게 한다.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참전한 월남전은 베트남인들에게 어두운 기억을 남겼다.
한국
군인들이 한국에 귀국할 때 많은 월남인들이 환송에 동원되어 나왔다. 군인들이 손을 흔들며 아쉬움을 표시하며
눈물로 작별을 고할 때, 많은 베트남인들은 “웃기네. 나쁜 놈들아!”라고 했다.
첫댓글 글을 읽으니 드뎌 나의 어린 시절, 동시대가 나오는구려~ 잊혀진 소중했던 추억이 되살아나는 시간이었소. 고맙소^^
류공! 오랜 만이네. 요즘 많이 바쁜가 생각했네. 그리 나쁜 병은 아니지만 몸을 괴롭힐 뿐이네. 한 번 봐야지. 즐거운 명절 보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