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여섯째 이야기, 인간만사 새옹지마(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6)
[삽화-백소(白笑)]
고성호는 해운대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오광주를 만났다. 아마 오광주가 거기 머물고 있는 듯했다. 먼저 가서 자리잡고 앉아 있었는데 조금 지나다 남자와 같이 들어왔다. 누군가 하고 실례가 안 될 정도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니 광주가 먼저 소개했다. 자기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신랑이란다. 재미동포 사업가란다. 악수를 하는데 인상이 선해 보였다. 몇 마디 나눴는데 미국에 오래 살았는지 한국말이 약간 서툴다는 느낌을 주었다. 오광주는 고성호를 대학 동기라고 하고, 농담조로 첫사랑이라고 하면서 웃었다. 남자도 따라 웃었다.
남자는 조금 앉아 있다가 일이 있다면서 일어섰다. 결혼할 여자가 첫사랑과 만나는데 신경 쓰이지도 않나? 둘이는 결혼식도 안 했는데 호텔은 한 방 쓰나? 이런 생각들이 마구 밀려들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나 하고 밀어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오광주는 학교 다닐 때 보던 모습과는 달리 화려해 보였다. 밝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어딘가 그늘진 구석이 있다고 고성호는 느꼈다. 그런 느낌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통했던 사람끼리 가질 수 있는 느낌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고성호는 생각했다.
오광주는 부산에서 결혼식을 한단다. 그러면서 청첩장을 주었다. 시댁이 부산 출신이란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다시 결혼식을 해야 한단다. 결혼식을 두 번이나 같은 사람과 해야 한다니 웃기지 않냐면서 큰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가 우스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오광주의 태도가 왠지 과장되게 느껴졌다. 남편은 사업을 하고 자기는 대학원에 다닌단다. 한국문학 전공이란다. 미국에 가서 한국문학을 하는 것도 어쩐지 어색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객관적일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고성호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서 내의 제조 회사에 다니면서 노조 만들다가 전출당한 이야기를 했다. 오광주가 써클 친구들한테 얼핏 들었다면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냐고 묻는다. 그건 결국 집착이 아닐까 생각한단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니 자기는 정말 행복하단다. 그러리라는 생각을 안 한 것 아니지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착은 뭐고 자기가 행복한 건 무엇하러 말하나? 그 말이 나오고부터 다른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건성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이후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헤어지기 직전에 오광주가 한 말은 기억이 났다. 네가 한 번은 자기를 찾을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찾으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사실 열심히 찾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결혼식에 꼭 오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자리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혼식장도 좌석을 예약해 놓나? 그때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은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겠다고 답은 했지만 내가 거길 왜 가냐고 속으로 말했다. 가서 ‘하얀 면사포’라도 불러야 하나? 그것보다는 그런 결혼식 자체가 싫었다.
그 뒤로 오광주를 만난 일은 없었다. 소식도 몰랐다. 아니 딱 한 번 들은 일이 있었다. 과 동기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써클 동기들을 만났다. 그 중 하나가 오광주가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재미동포 사회에서는 많이 알려진 일이라고 하였다. 그때가 박근혜 탄핵 때였다. 오광주의 아버지는 전두환 정권에서 고위직을 했는데 아마 노태우 쪽에 더 가까웠던 모양이다. 노태우 정권 때 정부 요직까지 하다가 김영삼 정권 때 부정비리 혐의로 감옥에 갔다. 고성호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니까 그렇게 된 것 같다는 것이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권 출신으로 김영삼 정권에서 탄압을 받으면 더욱 수구적 행동을 할 텐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반론도 있었다. 고성호는 오광주의 원래 품성이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계는 있지만 불의에 저항하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했다. 남편과는 잘 살고 있냐는 걸 묻고 싶었지만 그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서 무얼 할 것이냐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삽화-백소(白笑)]
그날 오광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되고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박근혜 탄핵 때 이후로는 또 어떻게 지내는지 들은 바가 없었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알려고 노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잊고 사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후 고성호의 삶이 너무 바쁘고 팍팍해서 한갓 옛 추억을 되씹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광주를 다시 만났을 당시에 하던 어용노조 민주화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회사의 압력이 너무 거셌고, 민주화를 추진할 역량이 아주 미미해서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퇴사를 하였다.
노조민주화운동도 시들해지고 영 사는 재미가 없을 때 퇴직한 동료가 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의를 제조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지에 수출하는 일이었다.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듣자 구미가 당겼다. 내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터이고, 회장 비서를 했던 경험이 사업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동업자 동료는 고성호보다 먼저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했었다. 내의 제조 중소업체도 여러 군데 연결해서 물량도 공급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뒤로는 한 달에 3분의 2 정도는 해외에 있었다. 특히 중국에 많이 나갔다. 모든 게 순조로웠고, 돈도 꽤 벌었다. 그런데 대학 동기가 연락을 해서 민주동문회에 회비를 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소식지를 받아 보다 보니 언제까지 이렇게만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정세도 뒤숭숭해졌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거리의 시위가 날이 갈수록 거세져 갔다. 그러던 차에 민주동문회의 선배가 신돌석씨를 소개했다. 그래서 지역 퇴진운동본부에 결합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신돌석씨가 옆에서 보아왔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운동을 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저 후원하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모임을 하고 뒤풀이 자리에 가면 고성호가 언제나 내는 것으로들 알았다. 집회 비용 등으로 큰 돈을 내기도 했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대단한 기대를 했다. 그런데 왠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2년차가 되면서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사상 최초로 북미정상회담까지 열려서 정말 이제 뭔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는 다시 얼어붙었다.
그 시기와 거의 맞추어서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뭐 별일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중국 수출길이 막혔다. 사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창고에 물건을 넣어두고 기다렸다. 처음에는 여행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길어지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생인 아들과 고3인 딸이 있었다. 돈 나갈 일은 많은데 들어오는 돈은 없으니 큰 일이었다. 벌어놓은 돈으로 1년은 버텼지만 2년째 되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알바 했던 택배가 떠올랐다. 고성호 주변 동료, 선후배 중에도 택배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터넷 구인광고에서 적절한 곳을 찾았다. 온라인 배송업체였다. 재벌회사의 이름을 쓰고 있고, 사실상 재벌회사 소유이지만 법적으로는 독립된 회사였다. 그리고 택배기사들도 자기 차를 사서 회사와 계약을 맺는 관계였다. 말하자면 법적으로는 근로자가 아니라, 자영업자인 셈이었다. 이런 고용구조는 많이 들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조금 무리해서 작은 용달 하나 사고 취업을 했다.
일 시작하기 전날 아내는 울상이 되었다. 남편이, 가족이 이제 전락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성호는 이상하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로 나타났다. 택배기사들의 불만이 가득해지면서 노조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한번 경험이 있는 고성호가 보기에 굉장히 즉흥적이고 순진한 사람들의 시도였다. 처음에 약간 거리를 두다가 개입을 해서 이것저것 조언을 하게 되었다. 나이도 고성호가 많은 편에 속했다.
택배기사들의 불만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휴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회사는 무조건 일주일에 하루만 쉬었다. 공휴일도 없고 연차도 없었다. 경조사도 없었다. 만약 그 하루 이외에 아프거나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쉬게 되면 대신할 차를 써야 했다. 그런데 그 비용이 하루 일해서 버는 돈의 배가 넘었다. 대신 일하는 사람에게 그 돈이 전부 가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먹고 절반 정도를 주었다. 회사는 이득도 취하고 쉬지 못하게 옥죄는 효과도 있는 것이었다.
[삽화-백소(白笑)]
부친상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3일장을 치르고, 삼우제까지 하면 하루밖에 못 쉬는 규정에 따라 이틀 내지 사흘치를 대신 일할 차를 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손해가 엄청났다. 회사에 경조사니 예외로 하자는 요구를 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장례문화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불만들이 확산되어 나갔다. 그 결과 노조를 결성하게 되었다. 민주노총 화물연대 소속의 지회로 출발했다. 그런데 화물연대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근무형태, 계약 관계, 작업 환경 등이 상당히 달랐다. 조합원들의 정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지역의 몇 개 온라인 택배회사에도 노조가 있는 곳이 있었다. 고성호는 이 회사들에 노조가 없으면 노조를 만들고, 노조가 있는 곳끼리 연대를 해서 단일노조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가칭 배송노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화물연대에서는 탈퇴를 하였다. 고성호는 비로소 자기 일을 찾은 것 같고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생각해 왔나? 노조 결성을 함께 추진한 사람들이 고성호더러 위원장이 되라고 하였다. 하지만 고성호는 고사했다. 자기가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을 내세우자는 생각이었다.
노조가 결성되고 고성호는 부위원장이 되었다. 온라인 택배회사의 노조를 찾아다니면서 구상을 설명하여 호응도 얻었다. 노조가 없는 곳의 노동자들을 은밀히 접촉하고 소모임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노조가 결성되자 좋은 점도 많지만 어려운 점도 있었다. 회사가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강경하고 교묘하게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노조가 있기 전에 택배기사들이 운송을 거부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그것은 내가 사장인데 하기 싫으면 안 한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노조가 생기니 불법 파업이 되고, 업무방해가 따라 붙었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온라인 배송이 특정 업체에 집중되면서 회사의 경영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노조에서 회사 경영 상태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단순히 엄살만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결국 회사는 폐업의 길로 들어섰다. 폐업을 막기 위한 강경투쟁을 하기에는 조합원의 의식이나 전투력이 아직 열악한 상태였다. 한 달 정도 교섭을 계속하다가 결국 해고수당을 준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였다. 각자 소유한 차에 회사명과 홍보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지워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노조를 지속성 있게 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에 고성호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고성호의 삶은 그 동안 많이 달라졌다. 민주노총 지역본부와도 꾸준히 교류를 해서 노동운동에 대한 감을 많이 익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후원만 하던 단체에 나가서 대표가 되었다. 사업할 때와는 달리 택배기사를 하니까 오히려 활동할 시간을 낼 수가 있었다. 아내와 아들, 딸은 아빠가 활기차게 움직이니 좋아하는 듯하였다. 회사는 그만두더라도 활동할 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 동안 코로나19 유행이 끝났다. 창고는 견디다 못해 처분했는데, 이전의 동업자는 다시 사업하려고 모색하면서 고성호에게 제안을 했다. 고성호도 사업을 다시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에 대학생이 둘이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때인 것이다. 게다가 사업을 잘 해서 지역 단체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중국 수출길이 코로나19에 이어 윤석열 정권의 대중국 적대정책 때문에 쉽게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것도 기약할 수 없는 내일로 미뤄야만 하였다.
그런 중에 다시 배송업체에 취직할 길이 생겼다. 학교에 급식 배식도 하고, 유명 화장품을 배송하는 일이었다. 고성호는 다시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쉬이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도 점심 먹으면서 다른 택배기사들이 고사장은 노조 만들려고 들어왔지, 언제 만들 거야,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리 말할 정도면 회사는 다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성호는 펄쩍 뛰면서 먹고 살라고 들어왔지 누가 그러려고 들어왔냐고 눙치곤 했다고 한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를 보여주는 고성호가 이번에는 어떤 복을 불러올지 신돌석씨는 궁금하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