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무너진 여리고(1) (수 6:1-7)
= 자 아 론=
요 약
여리고성은 먼저 옛사람의 자아를 상징한다. 즉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 주권중심의 회복 즉 자기 십자가 혹은 자아처리를 교훈한다. 여리고성 정복 방법은 사람의 소리는 들레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군대가 여리고성을 돌고 돌다가 외치며 들어가 칼날로 멸하고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아처리란 나는 철저히 부인되고 오직 여호와 중심이 나의 일상적인 행동이 되고 여호와 중심이 나의 열심이 되고 여호와 중심이 나의 감사와 찬송이 되고 나아가 여호와 중심이 나의 영적 싸움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리고성을 재건축해서는 안 되듯 날마다 내가 죽는 생활이어야 함을 교훈한다.
설 명
<내가 죽어지려면>
1. 십자가에 못 박힘을 믿음
2절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붙이심=십자가의 승리의 예표
2.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
8-9절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이 행열은 하나님을 중심의 형렬임
3.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
10절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자기 소리를 내지 않음= 최고의 금기사항
4. 매사의 삶 속에서 깨어지라
3절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6은 사람의 수, 사역의 만수, 기적 준비수
6. 늘 감사하며 살라
5절 "양각나팔 -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양각나팔=복음의 상징, 큰 소리=신앙의 고백
7.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복함
21절 "칼날로 멸하니라"
칼은 하나님의 예리한 말씀의 상징
8. 늘 깨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
24절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불은 성령의 상징
9. 항상 경건함으로 사는 것
26절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장자와 계자의 죽음= 영육 간의 시험
(강해)
이 시간에는 "무너진 여리고"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져라, 나를 죽여라, 자아를 죽여라, 죽어야 산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설 수 없고, 성령께서 주관하실 수 없으며,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 완악한 자아를 처리하시기 위해 온갖 연단을 주실 수밖에 없다는 등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자아처리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은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막10:27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고, 잠21:15에도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여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왕의 마음이란 좁게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내가 죽는다란 과연 무엇인가?
1. 이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믿는 것입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하셨습니다.
여기 붙이다란 군사적인 용어로 '권력이나 통치권을 넘겨주다', '어떤 사람에게 승리를 허락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이미 붙이신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즉 그 성취가 아직 미래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있으므로 이미 성취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붙였다란 거의 항상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승리의 복음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이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롬6:10-11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2.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8-9절에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했습니다.
여기 군대의 행열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행열은 하나님을 중심의 형태라는 점입니다. 즉 양각 나팔 불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전군과 후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자아파쇄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주권신앙의 확립입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내가 주가 됨에서 물러나 이제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겸손이라, 혹은 순종이라, 혹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C.C.C 전도 소책자인 사영리에 나의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는지 묻는 그림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가 나의 마음의 왕좌에 앉아 왕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기쁨과 마음의 안정 그리고 영적인 풍성함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 주권 중심의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여 마음을 목석처럼 피동적으로 만들거나 마음을 파괴하여 절단 내서는 안 됩니다.
3. 자아 처리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했습니다.
자기 소리를 드러내지 않음이 여리고 작전의 최고의 금기사항입니다. 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란 소리란 마음의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내가 도무지 나타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온전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금지된 자기 표현 방식 세 가지 즉 외침과 음성과 말이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는 동의어일 뿐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크든 작든 무슨 일이 있든지 그 어떤 것에도 자기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내 생각에 아무리 옳고 좋아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하면 버려야 합니다. 자기 앞길을 정할 때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4. 자아 처리란 매사의 삶 속에서 실천됩니다.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여기 엿새의 6은 사람의 수요(계13:18), 사역의 수요(창1:31), 기적을 위한 준비의 만수입니다(요2:6). 즉 엿새는 매일 충실해야 할 일상의 삶을 가리킵니다. 즉 일할 때나 쉴 때나 길 갈 때나 자녀를 교육할 때나 전도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매사의 삶이 곧 영적인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분들이 있고 매일 같이 환경만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데 언제나 자신이 훈련 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역경에 처함도 훈련이요 풍부에 처함도 훈련입니다.
마치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매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표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기도하고 기다리며 찾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미숙할지라도 나는 무엇을 하든지 내 뜻대로는 하지 않겠다 라는 이 다짐이 확실히 서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5. 자아 처리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복하는 삶입니다.
4절에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했습니다.
여기 7일 그리고 일곱 번의 7은 완전한 사역의 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고 돌고 또 돈 것처럼 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동일한 사건이지만 깊이 깊이 음미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은 것처럼 주님이 이루신 은혜를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그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자기를 버리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예수의 복음과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아직도 자기를 위한 기도이지 주님을 위한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이 서로 크겠다고 싸운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았을 때는 주님을 위한 애매한 고난까지도 오히려 합당하고 다행스러우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6. 자아를 처리 받음이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5절에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 소리가 나타날 때 여리고가 무너지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제사장의 일곱 양각나팔은 구원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이 나팔 소리가 들릴 때 백성들이 외신 큰 소리는 입술의 시인의 상징입니다. 이 때 강대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신기한 것은 우리가 복음에 서서 감사할 때 자아가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입술의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입술의 시인은 성화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을 기억하고 또 이미 예수 안에서 승리자가 되고 복된 자가 됨을 생각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한 번 감사해 보세요. 이상한 것은 내가 죽어집니다. 감사로서 내가 죽어진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적인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과연 그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랬을 때 놀랍게도 다 이겨지고 죽어지고 평안이 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7.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1절에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칼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말씀을 알 때 내 고집을 버리게 됩니다. 고집이란 알고 보면 무식의 산물입니다. 무식할수록 용감하고 무식할수록 고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면 그 진리에 순복하고 자아를 내려놓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후10:5의 바울처럼 말씀의 칼날로 모든 이론과 교만과 악한 생각들을 파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불신도 불순종도 교만도 의심도 죽여야 합니다. 불만 불평도 세속과 욕심도 무지와 방종도 죽여야 합니다. 악성 부패성 죄성 인간성 등을 처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녀노유 불문하고 우양 나귀까지 다 죽이라는 것은 말씀과 다르다면 이유 불문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함입니다.
8.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24절에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했습니다.
여기 불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의 불은 죄를 소멸하는 불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을 때 초대교인들처럼 나를 잊게 됩니다. 성령 충만할 때 내 중심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항상 경건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26절에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여호수아의 맹세는 500년 후에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왕상16:34을 보면 아합왕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들 이름이 존귀한 고귀한 이런 뜻입니다. 이는 또 다시 자아가 출현해서는 고귀한 것이 희생된다는 경고입니다.
즉 여기 장자란 출4:22에 선택받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한 것처럼 자아가 살아나면 내 심령에 은혜가 소멸되어 죽어진다는 뜻이요, 계자는 막내로서 가령 막내 아들 베냐민이 육신의 상징이었듯 육체까지도 고통 속에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 순간이라도 혹은 무슨 일일지라도 내가 나타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자아를 죽임 마음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주요 왕이 십니다.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가나안이 없었듯 우리 자아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참된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아래 나를 매장시키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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