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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0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프로골퍼 김주형(21세) 두달만에 세계 최연소 PGA 2승 달성
2022년 남미 베네수엘라, 최악의 산사태..사망·실종자 90여명
2021년 러시아 타타르스탄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해 22명의 사상자가 발생
2018년 남북단일팀 2018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수영 남자 계영 400m 사상 첫 메달 땀
2015년 터키 수도 앙카라 기차역 광장에서 IS 추정 자살폭탄테러 사망 128명
2014년 탈북자단체 등이 경기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대북전단 살포하려다 주민 및 진보단체와 충돌, 북한은 연천지역서 대북전단 향해 고사총 발사
2014년 방지일 목사 세상 떠남(103세)
2014년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17세 최연소 수상)와 인도의 아동권익운동가 카일라슈 사티아르티 노벨평화상 공동수상
2010년 세계적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 별세
호주 출신의 세계적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83)가 2010년 10월 10일 스위스 제네바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는 마리아 칼라스를 잇는 소프라노로 평가받으며 40년 넘게 활동했다. 영국 로열음대를 졸업한 후 1952년 오페라 '디도와 아이에아스'로 데뷔한 후 '라 스투펜다'(경이적 인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금세기 최고의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라고 극찬한 바 있다. 1990년 은퇴 후에는 스위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대영제국 훈장(1961)과 오스트레일리아 최고훈장(1991), 공연예술 평생공로상(2004) 등을 받았다.
2010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별세
'선군사상'과 함께 북한 양대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비서가 2010년 10월 10일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반신욕 중이었으며, 특별한 외상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사인은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1923년 1월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황장엽은 1997년 2월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 전까지 북한 김일성 김정일의 측근으로,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김정일 후계자 이미지관리를 전담해온 사상이론가였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10년간 맡으면서 70년대 중반 북한의 비동맹권 국가와 미수교국에 대한 외교를 지휘했다.
1997년 2월 12일 "인민이 굶어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며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을 통해 망명한 그는 이후 13년8개월 동안 김정일 정권을 공개 비판해왔다. 망명 후 남한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국내외 활동을 해왔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북한 인민들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고 김정일만 살린 반역정책”으로 비판하였다. 최근에는 후계자 김정은을 '그깟 놈'이라고 부르며 3대 세습에 대해 날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등극 행사를 하던 날 눈을 감았다.
정치권은 그에 대해 훌륭한 애국자, 분단시대의 영웅, 주체사상을 세운 학자이자 민족에 대한 열정을 가진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반영한 분단시대의 초상 등으로 평가하며 일제히 애도하였다.
2009년 100년 앙숙 터키-아르메니아 국교수립
2009년 10월 10일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과 에드바르드 날반디안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국교 수립 의정서와 관계 발전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근 1세기 만에 화해의 시대로 맞이하게 됐다.
양국은 의정서가 의회 비준을 얻어 발효된 날로부터 2개월 이내 국경을 개방하기로 했다.
이날 서명식에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연합(EU) 외교정책대표,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등 양국 관계 정상화를 촉구해온 국가들의 외교 수장이 자리했다.
양국이 화해 협력을 선택한 데에는 EU 가입에 힘을 얻고 유럽행(行) 석유.가스 채널인 코카서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터키), 터키와 교역 확대를 통해 경제 발전을 꾀하고 서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아르메이나) 기대가 깔려있다.
여기에 작년 8월 그루지야-러시아 전쟁 발발에 코카서스 지역 긴장 완화의 필요성을 다시 인식한 미국 등 서방의 독려도 한몫했다.
그러나 의정서가 발효되려면 의회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한 조사위원회 구성 문제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 분쟁 문제가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터키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영토 분쟁 해결 전에는 터키-아르메니아 국경 개방은 불가하다는 동맹국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 동조해왔다.
◇ 터키-아르메니아 반목의 역사
터키의 전신인 오토만제국 시절인 1차대전 말기인 1915~1917년 아르메니아인 150만명(추정)이 사망했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오토만 제국에 의한 ’인종청소(genocide)’라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인정을 추구해온 반면 터키는 내전의 희생자들이며 희생자 수도 부풀려졌다며 ’인종청소’ 용어를 거부하고 있다.
양국은 이번 의정서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역사적 기록을 불편부당하게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터키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를 독립국으로 가장 먼저 승인했지만 ’인종청소’를 둘러싼 역사적 앙금 때문에 이웃국임에도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 채 1993년 동맹국인 아르제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가 점령하자 터키-아르메니아 국경을 폐쇄했다.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르메니아계가 1988년부터 아제르바이잔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오는 것을 지켜보다 이들 주민 편을 들며 전쟁에 개입,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양국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6년여에 걸친 양국의 유혈 충돌은 3만5천여 명의 사망자를 낸 뒤인 1994년 러시아 등의 중재로 끝났지만, 이후에도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됐다.
2005년 제8차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 개막(서울 코엑스)
제8차 세계화상(華商)대회가 1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했다.
‘화상과의 동반성장, 지구촌의 평화번영’을 주제로 열린 이번 대회 개막식에는 세계 28개국 2500여명의 중국계 기업인과 500여명의 국내 기업인들이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한국과 중국은 국교수립 이후 비약적인 관계 발전을 이뤄왔다”며 “한·중 협력을 해외 화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인들 중에는 최태원 SK㈜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설영흥 현대차그룹 부회장 등과 이철상 브이케이 사장 등 중국 진출 중소기업인들이 참석했다. 중국 중화공상업연합회 황멍푸(黃孟復) 주석은 축사를 통해 “세계는 협력을 필요로 하며, 협력해야만 경제번영과 사회발전,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 강신호 회장은 이날 황멍푸 주석과 만나 한·중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접견에는 류촨즈(柳傳志) 중국 롄샹그룹 회장 등 10여명의 중국 기업인들이 참석했다.
개막식에 이어 열린 투자설명회에는 경제자유구역청과 9개 지방자치단체 대표들이 참석, 화교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관광·레저 등 18개 사업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투자유치 활동을 벌였다.
IT(정보통신)·BT(바이오)·CT(문화콘텐츠) 포럼도 개최됐다.
2005년 북한 조선노동당창건 60주년 기념행사(김일성 광장)
2004년 영화 ‘슈퍼맨’ 주인공 미국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 사망
2000년 세계최초 여성 총리 반다라나이케 前 스리랑카 총리 사망
세계최초 여성총리를 역임했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전 스리랑카 총리가 2000년 10월 10일 사망했다. 84세였다. 반다라나이케는 이날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장마비로 숨졌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현 스리랑카 대통령의 어머니이기도 한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당시 스리랑카 총리였던 남편이 암살된 뒤 정계에 입문했다. 그녀는 1960년~65년 세계최초의 여성 총리를 역임했고 1970년~77년에도 총리로 재임했으며 1994년 선출된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의 임명으로 2000년 8월까지 총리직을 역임했다.
1998년 국악신동 유태평양군 `흥보가` 3시간 완창
1997년 뮤지컬 퍼포먼스 `난타` 초연
1995년 로버트 루카스, 노벨경제학상 수상
미국 시카고대 교수인 로버트 루카스(58)가 1995년 10월 10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1970년 이후 현대 경제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미국 경제학계의 거물이다. 20년 전부터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어온 루카스 교수는 역대 경제학상 수상자 중 최연소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케인즈 학파의 계량경제학의 맹점을 질타한 `루카스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합리적 `기대이론`을 보다 정교화시킨 이코노미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루카스 비판`의 핵심은 과거 경험에 입각한 계량모델을 사용, 경기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경제정책을 쓸 경우, 당초 기대한 정책효과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 경제주체들이 과거의 경험을 기준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경제원리에 맡기고, 인위적인 경제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합리적 기대 이론은 1961년 루스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나, 본격적인 거시경제학에 합리적 기대이론을 도입한 것은 루카스 교수의 공헌이다.
1995년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파올로 구치 사망
1994년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첫 출시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40분쯤 전북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떠나 격포항으로 향하던 (주)서해훼리 소속 서해훼리호(선장 백운두, 1백 10t급)가 출항 20여분만인 오전 10시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파도와 돌풍에 휩쓸려 침몰, 승객 292명이 사망하고 65명은 위도 주민을 비롯한 어민들이 구조했다.
10일 오전 위도를 떠나 격포로 향하던 서해훼리호는 4.6㎞ 지점에서 삼각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각파도란 연이은 파도로 배에 호깅(Hogging, 배의 선수와 선미가 공중에 뜨고 배의 아랫부분 중간에 파도가 걸리는 것) 또는 새깅(Sagging, 배의 선수와 선미가 파도에 걸리면서 중간부분이 내려앉는 것)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10월13일 사고 원인을 과승 및 과적, 운항 부주의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사고 당시 사고구간인 위도~격포노선은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엔 하루 3회 왕복하고 있으나, 그외의 계절엔 하루 1회 왕복에 그쳐 주중엔 별 문제가 없으나 낚시꾼과 내왕객이 몰리는 주말엔 정원초과 등으로 항상 위험을 안고 다녔다.
이날도 207명 정원인 서해훼리호엔 정원을 훨씬 넘는 2백수십명의 승객들이 짐과 함께 가득 들어차 있었다.
1993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로 당선
1993년 10월 10일 실시된 그리스 조기총선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PASOK)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 보수파에 정권을 내준지 3년 반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그는 지난 1981년 총선에서 대승, 그리스 사상 최초의 사회당 총리가 됐으며 1985년에 재선되어 8년 간 정치무대를 지배했으나 1989년 6월 각료와 여당간부들의 잇단 수뢰사건이 터져 총선에서 패하고 퇴진했다.
파판드레우의 이번 승리는 앙숙인 콘스탄틴 미초타키스 총리의 신민주당을 누르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에게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9년 총선 때 그리스의 일부에서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존경을 받았던 그에게 대패를 안겨준 미초타키스는 파판드레우를 재임 중 횡령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파판드레우는 1992년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으나 그의 각료와 당간부 일부가 여러가지 부패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투옥되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그가 1974년에 결성한 사회당이 1989년에서 1990년까지의 3차에 걸친 전국선거에서 모두 패하자 일부 해설가들은 그의 정치적 사망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완강한 투사인 그는 38세의 새 부인 디미트라 리아니 여사의 도움으로 난관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1919년 2월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테네대 법대에서 급진적 좌익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1939년 군사독재하에서 좌익활동혐의로 투옥됐고 1940년 5월 미국으로 이민갔다. 미국 시민이 된 그는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받고 잠시 해군에 복무했으며 미네소타대와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59년 미국인 부인 마거릿 여사 및 4명의 자녀와 그리스에 돌아온 그는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1964년 의회에 진출했다.
1991년 서울대 규장각, 국내最古의 지도로 추정되는 동국지도 공개
1991년 쿠바 공산당 서기국 폐지
1991년 소련 비밀첩보기구 KGB 해체
1990년 남북한영화제 개막(~14일, 뉴욕)
1986년 방글라데시 여객선 침몰 200명 사망
1986년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 진도 7 강진 발생 1천여 명 사망 이재민 2만 명
1985년 영화배우 율 브리너 사망
`왕과 나`로 유명한 영화배우 율 브리너가 1985년 10월 10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율 브리너의 본명은 타이제 칸이고 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몽골인 광산 기사와 루마니아 집시 부모밑에서 태어난 러시아 출신 미국배우다. 청소년기에 클럽에서 발라드를 불렀고, 그 후에는 서커스 곡예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유랑극단 배우로도 활동했다.
TV 디렉터로 활동하다가 브로드웨이에 입성, 뮤지컬 `왕과 나`의 주연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246회나 되는 연속공연으로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을 수상했다. 영화로 된 `왕과 나`에도 출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왕과 나`는 태국의 왕 샴과 그의 가정교사인 영국인 안나와의 만남과 갈등, 사랑, 왕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그린 고전물이다. 훗날에도 `왕과 나`는 연극과 뮤지컬로 많이 공연되었고, 최근에는 주윤발과 조디 포스터가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율 브리너의 대표적인 작품은 `십계` `아나스타샤` `황야의 7인` `타라스불바` 등이 있다.
1983년 영국의 연극, 영화배우 랄프 리처드슨 사망
1981년 서독 본에서 30만명 반핵집회
1981년 10월 10일 유럽 각지에서 온 약 30여만명의 시위대가 서독의 수도 본에 모여 `유럽을 미소 양국의 핵실험장으로 하지말라`는 구호를 외쳐대며 사상최대의 반전-반핵집회를 가졌다.
집회에서는 반정부연설 특히 유럽전역을 포괄할 수 있는 핵배치를 시도하려는 서독 슈미트정권에 대한 항의시위가 계속됐다. 집회에는 장애자, 노인, 어린이, 노동자, 군인, 학생 등은 물론 평화단체, 종교단체, 환경단체 등도 참여했지만 서독과 네덜란드의 군인 등도 참가해 시위대의 눈길을 끌었다.
24일에는 런던과 로마로, 25일에는 브뤼셀로 이어진 반핵데모는 약 20여만명이 참가해 열기를 더해갔다. 파리에서도 반핵집회가 열렸다.
1981년 시아가 자메이카수상 방한
1980년 알제리 대지진
1980년 이라크, 북한과 단교발표
1980년 북한 제6차 노동당대회 10년 만에 개막
1980년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3년산성에서 국내최고인 5세기경의 서문터(4.8m×3.3m) 발견
1980년 공직자 재산등록제 실시검토 발표
1979년 청평 양수발전소 완공
1975년 어린이대공원에 어린이회관 개관
1973년 스피로 애그뉴 미국부통령 탈세혐의로 사임
1973년 해병대, 해군에 통합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병대의 필요성를 절감한 해군은 1949년 4월15일 해군에서 차출한 인원 380명으로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해병대 창설식을 가졌다
이후 해병대는 많은 전투를 통해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무적해병’ 귀신잡는 해병‘ 등의 칭호를 얻으며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후 해병대를 개편하기로 결정한 국방부의 시책에 따라 1973년 10월10일 해병대는 해군으로 통합되었다
1971년 서울 북악터널 개통
1970년 거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
강원도 거진 북방에서 해군함정이 간첩선을 발견,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휴전선 남방 5마일 해상에서 격침, 4명 사살 추정
1970년 피지,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알제리에서 저개발국 77개국회의 개최
1966년 울릉도 근해 간첩선 사건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 개막
유럽에서 탄생한 올림픽이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개막됐다. 제18회 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1964년 10월 10일 개막된 것이다. 94개국 5586명의 선수가 출전한 도쿄올림픽 개막식에는 7만5천4백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4년전 소련에 뒤졌던 미국은 금메달 수에서 다시 소련을 제치고 스포츠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얻은 금메달 중 가장 화제에 오른 것은 1만m에서 우승한 빌리 밀스였다. 밀스는 수우족 인디언의 혈통을 물려받은 해병대원이었다. 전통적으로 북유럽선수가 강한 1만m에서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밀스가 처음이었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도 2시간12분11초의 세계신기록으로 2연패했다. 또한 홍보용 포스터는 많은 외국인을 유치한 광고로 평가 받았다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 조약(PTBT) 발효
1963년 서울가정법원 개원
1963년 헤롤드 맥밀란 영국총리 사임 결정
1962년 인도, 태평양지역 10차 수산(水産)이사회 조선호텔서 개막
1962년 한국-아이슬란드 국교 수립
1962년 약의 날 제정
1961년 미국, 쿠데타로 새로 수립된 시리아 신정부 승인
1957년 육당 최남선 사망
신문학의 기수이며 계몽 운동가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춘원 이광수 및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일컬어진다. “동시대인으로부터 너무 앞서 있었기에, 그의 주위는 사면이 모두 처녀지였기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신기한 것이었기에, 시대는 그에게 ‘무슨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모든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였기에 그는 문학가, 학자, 사상가, 사업가, 저널리스트, 정치가가 되었고,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되고 말았다.”는 유진오(兪鎭五)의 평가처럼, 최남선은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1947년 소설가 최명희 출생
1946년 말레이지아연방 독립선언
1945년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이 평양에 입국해 활동을 시작하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1945년 10월 10일 창설됐다. 김일성의 권력 장정이 그동안 수면 하에서 진행됐다면, 분국 창설은 그것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33세의 새파란 김일성이 노련한 정치가 박헌영과의 담판에서 분국 창설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것 자체가 북한 권력의 향방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10월 5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는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지만, 결론없이 대립만 하다 분국 창설의 과제를 10월 8일 밤의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으로 떠넘겼다. 결국 분국 창설은 두 사람의 협의로 큰 문제없이 통과됐고 10월 10일 비밀리에 소집된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본회의에서 마무리됐다.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오기섭과 무정이 선출됐고 김일성은 집행위원에 선출됐다. 비록 책임비서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김일성은 북한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김일성이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의 저항이 컸고, 소련도 국내 투쟁경험이 적은 김일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기에는 아직 지명도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분국이 설치된 지 2개월 만인 12월 18일 마침내 북한 공산당 조직을 장악했다. 이날 열린 북조선 분국 비밀회의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된 것이다. 이로써 김일성은 명실공히 분국을 장악하게 됐으며 김일성의 분국은 사실상 북조선공산당으로 행세하게 됐다.
1938년 김원봉 조선의용대 창설
1938년 김원봉(金元鳳)에 의해 창설되어 항일운동에 다대한 공적을 쌓았다.
식민지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동포를 규합하고 파시스트군벌의 압제 하에 있는 모든 민중을 연합하며, 일본군벌을 타도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완성하고자 하였다.
민족 혁명당은 1938년 무한에서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원 하에 조선 의용대 결성을 주도했다. 조선 의용대는 1938년 10월부터 2년간 중국 남방의 각 전구에 배치되어 활동하다가, 1941년 4월 주력의 80% 정도가 화베이로 이동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조선 의용대는 점차 중국 팔로군에 편입되면서 민족 혁명당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조선 의용대를 지휘하는 군사 지휘부는 중국 측 4명과 조선 측 4명, 그리고 주임으로 중국인 1명, 총 9명이 지도 위원회를 이루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부대였지만 절대적으로 지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등한 세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중국 측은 수시로 조선 의용대를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으나 항일경력과 지휘력에서 중국이 무시할 수 없었던 김원봉의 노력으로 무산되었다. 의용대는 의용군보다 규모가 작은 부대로 주요 임무는 전투보다는 정치선전공작이었다.
1935년 거슈인 작곡, 오페라 `포기와 베스` 초연
1932년 이봉창 의사 순국
이봉창 의사는 1900년 신흥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 철도운전견습생으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사람의 양자가 되어 키노시타 쇼조 라는 일본 이름도 얻는 등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이봉창은 일명 사쿠라다몬 사건으로 불리는 일왕 히로히토 천황 폭탄 투척 사건을 일으켜 천황의 사살에는 실패하고 고관 대작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32세의 나이로 일본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1932년 세계최대 레닌발전소 준공
1928년 독립운동가 조명하 순국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가 1928년 10월 10일 이국땅 대만에서 스물 넷의 나이로 순국했다.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이 묻은 단검을 던졌다는 이유였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대만에 체류중인 조명하 의사는 일왕의 장인이 대만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 의사가 인파에 숨어있다 던진 검은 구니노미야의 왼쪽 어깨를 스친 뒤 운전사의 등에 맞고 떨어졌다. 구니노미야는 현장에서의 죽음은 모면했으나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27일 사망했다. 조명하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의거는 일본 당국의 보도통제로 한달 뒤에야 신문에 공개됐지만 야마나시 한조 조선총독은 이 사건으로 사직해야 했다.
1905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6·10만세사건’과 ‘금호문 의거’로 민족의식에 눈을 뜬 조명하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낀 조 의사는 1927년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는 길에 경유지인 대만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1919년 손문, 중화혁명당을 개조한 중국국민당 결성
1914년 오성학교 조선인 야구팀과 용산철도구락부 일본인 팀, 조선이 이기자 경기 후 난투극 벌여
1914년 조선호텔 개업
1913년 원세개, 중국대통령에 취임. 일본-러시아-영국-독일, 중국 승인
1911년 중국 신해혁명
20세기 들어 청조의 몰락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1911년 10월 10일, 양쯔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우창(武昌)에서 혁명파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시작된 것이다.
이튿날 혁명군이 우창·한커우(漢口)·한양(漢陽)의 우한(武漢) 3진(鎭)까지 장악, 혁명의 봉화를 지피자 중국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개월 만에 12개 성이 혁명진영에 가담하자 청조는 베이징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총리로 임명, 진압에 나섰다. 위안(袁)은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했으나 곧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주겠다는 혁명군의 제의를 받은 마당에 굳이 승산도 불투명한 내전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군도 힘의 열세를 느끼고 있었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수립이 선포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지만 쑨원은 3월 11일 위안에게 대총통직을 이양했다. 이미 2월 12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직을 내놓아 286년간에 걸친 청조가 무너진 뒤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국민의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1905년 대한적십자병원 개원
1905년 노르웨이-스웨덴, 분리법 확정
1902년 도량형규칙 공포
1901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출생
1897년 미국 장로회 선교사 베어드, 평양에 숭실학교 설립
1883년 부산~나가사키(長崎) 해저전선 부설 착공
1877년 `모리스` 자동차를 처음 생산한 영국의 너필드 출생
1861년 노르웨이 탐험가 난센 출생
1856년 추사 김정희 선생 사망
추사 김정희 선생이 1856년 10월 10일 나이 일흔에 한 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예술가로서의 생을 마쳤다. 충남 예산에서 영조의 사위인 김한신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서화와 금석학에 한평생을 몰두해 성균관 대제학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24살 때 청나라 때 대학자를 만나 필담을 나누고 `해동에서 제일 뛰어난 학자`라고 극찬 받았으며 무학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던 북한산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헌종 6년인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났고 철종 2년인 1851년 헌종의 묘천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대쪽같은 성품으로 귀향살이를 다녀온 그는 이후 과천 토담집에 칩거하며 그림 그리기로 여생을 보냈다.
추사는 조선 500년의 지도이념인 성리학 대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요구되는 때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깊이 체득하여 실사구시의 경학세계를 이루었고 금속학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고금의 필체를 수렴, 추사체란 독보적인 경지를 구현했다.
1816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출생
1813년 이탈리아 오페라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출생
1446년 세종, 공문서에 한글 사용(세종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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