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허상을 꿈꾸는 여자
조미경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식어 버린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수희는 보안경을 끼고, 컴퓨터 화면에 눈길을 주고 있다. ‘아니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아차 지금이 몇 시지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네,’ 사무실 전등 스위치를 끄고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엄마? 지금 어디야, 혹시 집 근처?" 예은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아!…미안 엄마 퇴근 중인데…… 무슨 일 있니?” 수희가 예은의 전화에 신경을 쓰면서 운전하고 있다.
“그게 아니고, 오늘은 무슨 날인 줄 알아." 예은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난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퇴근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엄마는 정말 일에 미친 거야.“
예은의 전화에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자동차를 주차하고 집에 들어서니, 가족들은 수희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자 각기 방에 있다 뛰어나왔다. 수희 남편 영우는 중견 기업 임원이다. 잠옷 바람으로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거실로 나온 영우는 아내의 늦은 귀가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오늘도 혼자 야근했어? 직원들 놔두고 왜 혼자 난리야." 영우가 이마를 찡그리며 인상을 쓴다. 그럴 때마다 수희는 남편에게 미안하다. 늦은 귀가는 일찍 퇴근해서 쉬고 싶은 영우의 일상을 피곤하게 했다. 늦은 시간 식탁에 케이크가 차려져 있고 알록달록 예쁜 초가 타고 있다.
"축하한다, 우리 딸 이번에 큰일 했다, 앞으로는 더욱 잘 될 거야."
영우가 딸에게 축하를 건네자 수희는, 딸 예은을 보며 괜스레 미안하다.
저녁 조촐한 파티한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지난번 발주받은 B사의 기획안을 들고 혼자서 컴퓨터와 씨름하다, 퇴근이 늦은 것이었다. 엄마로서 0점에 가까운 수희는 남편 영우에게도 자식들인 예은과 아들 가람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수희와 영우의 딸 예은은 올해 27살이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A사의 비서실에서 근무 중이다. 틈틈이 영화 시나리오를 썼는데, 극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게 되어, 가족들과 조촐한 파티를 하고 있다.
"우리 딸 누구를 닮았을까? 일에 집중하는 것은, 네 엄마를 닮지 않았을까?” 영우가 예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에 집중하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너희 엄마처럼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고 오직 바깥일만 하는 것도 좋지 않아." 영우가 자식들을 앞에 두고 아내인 수희를 힐책하고 있다.
"아빠 그만 하세요, 그래요, 오늘은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인데 우리 지금부터 파티 시작해요." 예은과 가람이 합세해서 수희를 편들고 있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때 바이올린을 들고 나타난, 이 집의 둘째이며 막내아들인 가람이 축하 연주를 시작했다.
"아들 어쩐 일이야? 다시는 악기를 들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수희가 아들 가람을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자 옆에 있던 영우도
"그래 이제 가람이도 성인이 된 거지."
"아빠, 남자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제대했으면 성인이 된 거지."
딸 예은이 가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가람이 어깨를 으쓱한다.
가람의 연주가 끝나고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훈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희가 사무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딸각하고 열렸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정적이 감도는 빈 사무실에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 피곤을 몰아내기 위해 커피 한잔을 내려 마셨다. 새벽까지 끝마치지 못한 일 처리를 위해 키보드를 부산스럽게 누르고 있다. 적막한 사무실, 수희의 컴퓨터 기계음만이 요란스레 움직이고 있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사무실이 수선스럽게 술렁거리더니 책상 끄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서로 아침 인사 주고받는 소리까지 요란스럽다. 지친 표정이 역력한 수희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쉬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 미안한데, 그날은 내가 너무 바빠 내려갈 수가 없어요." 수희가 피곤하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하자 수희 친정엄마는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딸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힘드냐.” 매년 친정아버지 제사에 참석 못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신임을 잃었다.
남편은 회사 일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잠시 다녀오라고 안심시키지만, 수희는 한가하게 아버지의 기일을 챙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영상 작업한 파일을 스크린으로 이 부장과 함께 보면서 회의하고 있을 때였다. 일에 집중 못할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대표님 어디 편찮으세요?" 이 부장은 수희의 표정을 살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너무 안색이 창백합니다." 이 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희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아무래도 병원에 진료를 다녀와야 했다. 그동안 건강검진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바빠 잊고 있었다. 요즘은 지방 관공서에서 발주한 기획안을 마무리 짓기 위해 전 직원이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50대 후반인 영우는 회사에서 일등 공신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언제 밀려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장은 80대 초반의 나이로 후계자를 자신 장남을 차기 회장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있지만, 회장의 장남이 회사를 장악하게 되면 영우도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명예퇴직해야 하는 것이다. 영우가 모시는 회장은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와 직장 동료로 인연을 맺어져, 아들을 지금의 회사에 입사시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며칠 전 회장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영우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회사 일에 관여해서 지금의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물러나면, 다음 순서는 불을 보듯 뻔하다. 회사에서는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현 회장의 측근들이 요직에 앉아 인사에 개입하고 있지만, 만약 회장의 장남이 차기 회장이 되면 창업 공신들은 설 자리가 없다. 영우는 그동안 끊었던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50대인 회장의 장남이 새로운 회장에 추대가 되면, 제일 먼저 자신 목을 칠 것이라는 예상은 미리 하고 있었다. 그동안 회사를 키우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회장 아들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모두 말아 먹고 지금은 아버지 밑에서 경영 수업을 새로 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생각이 복잡해진다. 영우 자신도 쉽게 자리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직은 이루어야 할 일도 많고 예은이 결혼과 아들 가람의 유학문제등 가장으로서 신경써야 할 일이 아직도 산재해 있었다.
딸 예은이 영우와 수희 결혼 27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한 호텔 숙박권을 받고 수희는 기뻤다.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꼬물꼬물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한 딸이 사회인이 되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글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 예은이
그동안 틈틈이 쓴 시나리오가 독립영화 대본으로 채택되면서 원고료를 받았다. 원고료로 부모의 결혼기념일 선물로 대신한 마음이 너무나 예뻤다. 그동안 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잘해주지도 못한 부모였는데 큰 효도를 받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담감이 생겼다. 영우는 며칠째 들떠 있다. 결혼기념일에 모처럼 집을 떠나 잠시 여행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 것인지, 매일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 것인지에 대해 수희에게 묻곤 했다. 그러나 수희는 너무 바쁘다 보니 영우와 하루를 보내기 위해, 회사에서 늦게까지 남아 일해야만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기획안 수정하고 영상에 음악 작업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수희는 호텔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주말 아침 거실에서 들리는 분주한 소리에 수희가 잠을 깼다.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가 단잠을 깨우는 바람에 살짝 짜증이 났다. 새벽 3시 가까이 마지막 기획안을 수정해서 회사 게시판에 올려놓은 뒤 잠자리에 들었기에, 아직은 몸이 개운치가 않다. 수희가 휴대전화 보며 다음 일정을 확인하고 있다.
"당신 일어났어?” 영우가 앞치마를 걸치고 밝게 웃고 있다.
“냄새가 넘, 좋은데 뭘 만든 거야?”
"미안해 시끄럽게 해서." 영우가 수희에게 아부하듯이 말했다.
"당신이 새벽까지 작업을 하는 줄 몰라서 잠을 깨게 했어, 미안해."
"당신 그동안 나랑 결혼해서 살림하고 일하느라 시간이 없었잖아, 그래서 오늘은 내가 특별히 몇 가지 반찬을 좀 만들었지." 영우는 부산스럽게 싱크대와 식탁을 오가고 있었다.
식탁에는 수희가 좋아하는 빨간 장미가 화병에 담겨 있고, 갈비와 잡채까지 예쁜 접시에 세팅이 되어 있었다.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간편식만 먹었던 수희는 남편의 정성에 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어머 어쩜…당신 이거 직접 만든 거야?" 수희가 식탁에 앉으며 감탄했다.
"그럼 당신 내 솜씨를 못 믿는 모양인데, 나 이래 봬도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3년 복무를 한 사람이야……” 우쭐 해하는 영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알았어, 그럼 맛 한번 볼까." 수희는 젓가락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영우는 수희의 표정을 보면서 "어때 맛있지, 그렇지..."
"응, 간이 딱 내 입맛이야." 수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애들아? 너희들도 먹어."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가슴에 무엇인가 스치는 게 있다.
그날 저녁 영우와 수희가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빙을 담당한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그러나 정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약된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들의 친절이 베인 몸짓에 수희는 기분이 좋았다. 늘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친절을 기획했고, 음악과 분위기를 기획했었다. 그런 수희가 오늘은 타인이 준비한 기획안을 맛보고 있다.
"오늘의 추천 메뉴는 무엇인가요?“
영우는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직원을 불러 오늘의 추천 요리에 대해 질문을 했다.
쉬는 날 없이 일만 하던 수희는 모처럼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다른 요일보다 일찍 출근했다. 주말과 휴일 밀린 일을 처리하지 못한 수희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문자 메시지와 카톡을 확인했다. 남편 영우는 수희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것을 못마땅해해서 결혼기념일 동안 호텔에서 남편과 보내면서 꾹 참고 2일을 보냈다. 사무실에 아침 8시에 도착해서 컴퓨터를 열고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최종 점검하고 나니, 직원들이 한 명씩 사무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희는 정각 9시가 되자 전체 직원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오늘 아침 한 건의 기획 오더가 들어와 미리 회의 소집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수희네 회사와 꾸준하게 작업하고 있는, 역삼동에 있는 E사의 모델하우스 오픈을 위한 기획안을 수희 회사에 맡긴 것이었다. 모델하우스 오픈에 맞추어 내부를 실제 아파트 실내 인테리어와, 아파트 분양 공고 그리고, 아파트 청약을 위한 책자와 팸플릿 등의 전반적인 것들을 검토해서 최종적으로 금액을 정해서 계약서작성을 해야 한다.
이번에 직접 아파트를 착공하고 있는 천안으로 내려가서, 그곳의 현지 부동산 답사를 위한 팀을 꾸려야 하는 수희는 마음이 바빴다. 늘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수희는 잠시 회사 일이 없으면 불안과 초조로 혼자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런 그녀의 일 중독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어서, 직원들도 일이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작년에는 신입 사원 한 명이 입사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이유는 급여에 비해, 하는 일이 너무 많다였다. 수희는 직원들의 업무를 줄이기 위해 자신이 직원들 몫까지 일 처리를 하는 바람에 어느 땐 직원들의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오전 내내 회의를 마치고 점심은 간단한 도시락을 배달시켜서 먹으며 E사의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기획안 아우트라인을 잡고 있었다. 한참 일에 빠져 있는데 모르는 전화가 걸려 왔다.
"여기 병원인데 나수희 씨 얼마 전에 저희, 병원에서 건강 검진받으신 적 있지요?"
"예 있어요." 상대방은 수희의 긴장 상태는 묻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쏟아 낸다.
"다름이 아니라 나 수희 씨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병원에 나오셔서 정밀 검사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정밀 검사요?" 전화를 쥔 수희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고 갑자기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날 저녁 수희는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도중에 집에 갈 수조차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수희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앞으로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생각했다.
그날 영우는 회사에서 단체 회식이 있어 퇴근이 늦었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몇 번이고 영우에게 일찍 집으로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밤 11시가 다 되어 들어온 영우를 붙잡고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당신 왜 그래? 오늘따라 얼굴도 이상하고……"
"나 말이야 여보 나, 암이라고……”
"뭐…어? 다시 말해봐 당신이 대장암이라고…" 영우는 훌쩍이는 수희의 어깨를 흔들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야? 진정해 일단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나서 의사와 상담하게 되면 방법이 생길 거야." 영우는 수희를 안고 침울하게 말했다.
"애들에게는 말을 해야 할 텐데." 수희는 자신의 건강보다 아이들이 행여 힘들어할까 고민이다.
"예린은 괜찮은데, 지금 가람이는 유학 준비한다고 잔뜩 들떠 있는데. 엄마가 암이라고 하면
마음이 복잡할 거야."
"나 어떡하지 여보." 수희가 남편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가람은 교환 학생으로 미국 주립대에 입학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권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터라, 가람의 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자매결연 맺어, 미국의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내심 행복해하며 영어 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희는 그런 가람을 위해, 현금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유학에 관심이 많은 아들을 위해, 읽기 쉬운 동화책을 과 오디오북 등으로, 독해와 스피치 준비시켰으며, 원어민 강사를 채용해서, 자연스럽게 생활 속 영어를 체험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다음 학기로 예정된 교환 학생 연수를 위해 미국 대사관을 뛰어다니며 서류를 발급받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가람이 행여 자신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릴까 고민하는 수희는, 자신의 병을 아들 가람에게
당분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정밀 검사를 받기 위해, 아침을 굶고 병원으로 향하는 수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의 병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이미 종합검진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가슴에서는 불안감이 몰려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숨이 막혔다. 건강검진에서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까지 수희를 괴롭히는데도.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일에 빠져 사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고단백과 고지방 음식 달콤한 음식은 체중 증가로 이어져 성인병으로 이어졌다. 의사는 당장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 날짜를 잡기를 원했다. 그러나 수희는 두려움이 앞섰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음습하게 다가왔다. 수술 날짜를 남편 영우의 설득으로 겨우 날짜를 잡았지만, 두려움으로 밤이 두려웠고 순간순간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하늘을 찔렀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아버지가 암 투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날이 말라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내내 힘겨웠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얼굴이 홀쭉한 아버지는 수희를 걱정했지만, 끝내 병균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떠나셨다. 만약 자신이 혼자라면 진즉 집을 나와서 어디론 가에서 혼자 시간을 죽일 것이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순간에도 약 20여 년 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희는 극도로 병원을 싫어했다. 그 당시 수희는 가람을 낳은 후 극심한 산후 우울증 때문에 삶을 포기할 정도로 상태가 심했다. 자신 몸도 추스르지 못한 수희는 아버지의 건강 악화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 일로 수희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젊은 수희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그로 인해 의사를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수술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지만,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수희는 일하는 중에도 공포가 밀려왔다. 아직 회사에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리지 않고 태연하게 일 처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병원을 찾은 수희는 긴장감으로 얼굴이 떨리고, 손이 마비되는 증상을 겪었다. 검사는 아침부터 이어졌다. 대장암의 대가인 차 병욱 박사와 마주 앉은 수희는 약물 치료를 원했다.
"내 말 잘 들어요, 나 수희 씨. 암 같은 큰 수술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요." 박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박사님?" 수희는 떨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애원할게요. 방사선 치료나 약물 치료는 안 될까요?"
수희가 울면서 이야기를 꺼내자 차 박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재차 말하지만, 만일 종양이 더 넓게, 전이 된다면, 수술이 간단하지 않고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올 수도 있어요. 차 박사는 수희의 불안감을 해소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수희 씨의 마음은 잘 압니다. 우선 마음을 진정하셔야 합니다. 수술 후 치료만 잘하면 예전처럼 정상적인 일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의사를 믿고 맡겨 주세요.‟ 수희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얼굴이 져 있었다. 차가운 수술대 경험을 다시 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이번에도 병원 침대에 누워야 했다. 자신을 옥죄는 잔상이 눈앞으로 스친다.
차 박사는 계속해서 수희에게 수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수희는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다.
"하지만 나 수희 씨 앞날을 생각하셔야지요. 한 번 수술로 예전의 활기찬 삶을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수술을 받는 게 중요합니다.‟
종양 제거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기 전, 수희는 일기장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아직도 죽음의 공포와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해 믿음이 생기지 않아 내심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 참았다. 지금 자신이 도망치면, 남은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엄마 괜찮아? 딴마음 먹은 것은 아니지."
오늘도 예은은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위로를 건넸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오늘도 열심히."
자식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수희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 영우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 내내 수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수술 당일은 남편 영우가 연차 휴가를 내고 수희 곁을 지켰다.
마취에서 깨어난 수희는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자의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재차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자신이 숨 쉬고 살아 있음에, 다소 안도하는 눈치였지만 마취에서 깨어나 마치 꿈을 꾸는 듯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치부했지만, 부부로 몇십 년을 살아온 영우의 눈에 수희는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금식이 해제되고, 식사하게 되었지만, 수희는 음식을 거부했다. 수술 부위 통증을 호소하며 울기도 했다. 영우는 그런 아내를 달랬지만 수술 전과 달라진 아내의 태도에, 난감해했다. 수희의 담당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 했지만, 영우는 내심 불안했다. 식사를 거부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아내를 영우는 괴로웠다. 예전의 활기찬 아내를, 기대했지만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수희의 수술 경과는 좋았지만, 현실에 마주해서, 직접 뛰어드는 대신에, 자신을 무의식에 가두고,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는, 수희의 초점 흐린 눈빛이 불안했다.
회사에 연차를 내고 병실을 지키는 예린은 수희를 안도시키려 했지만, 말을 잃은 것처럼 침묵을 지키는, 일이 길어졌다.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 퇴원한 수희는 예전의 활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밤이면 몽유병 환자처럼 집을 나섰다, 새벽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가족들은 수희를 붙잡으려 했지만, 잠을 안 자는 수희를 번번이 놓쳤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영우는 아내를 데리고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수희는 암 수술 후 자신의 건강에 대한 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다시 회사 일에 열심히 열을 올리던 어느 날 퇴근 시간이 되어도 집에 귀가하지도 않고, 회사에도 없었다 수희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지고 연락이 두절 되었다.
수희는 퇴근 시간 무렵 직원에게 보고받았다. 지난번 A사의 기획안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동안 그런 일이 단 한 건도 없던, 수희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후 무엇인지 명확하게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가정과 회사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신의 뇌가 정신에 문제가 생긴 듯, 조금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 상실증을 겪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어떤 문제에 처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문제점을 찾기 위해, 무작정 고속도로를 달렸다. 도착한 곳은 한적한 어느 시골 바닷가였다. 한참을 달리다, 정신을 차리고 이정표를 살펴보니 태안의 어느 바닷가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늦은 시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수희는 몸을 추스르자,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 산소를 찾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바라본, 고속도로 옆 산에는 그동안 느끼지 못한 계절의 변화가 있었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어, 산에는 붉은 진달래가 방긋 웃고 있었다. 묘지는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수희 엄마와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다녀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희는 준비한 제사용품과 꽃을 아버지 산소에 바쳤다. 한참 묘를 응시하던 수희는 묘지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불효를 용서해주세요.’ 어느새 수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렀다.
‘앞으로 아버지 앞에 앉아서 넋두리를 늘어놓을지 나도 몰라요.’
수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너무나 예뻐해 주시던 아버지 산소 앞에서 펑펑 울었다.
한참 울고 난 수희 눈에 가녀린 할미꽃이 눈에 띄었다. 할미꽃의 전설을 생각하자 그동안 엄마에게도 늘 잔소리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80 노모가 생각이 났다. 몸도 건강하지 못한 수희 친정엄마는 병실에서 수희를 간호하다, 몸살이 났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엄마에게 자주 짜증을 부렸다. 몸이 아파 병원 침대에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지난 시간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을 끄고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된다, 하지 않았던가. 그럼 나는 이미 태어나는 순간에
암이라는 무거운 불운을 안고 태어났을까.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수희는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기고 상점에는 깜빡거리는 불빛이, 길가는 길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혼자 긴 한숨을 쉬던 수희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부모님과 시골 외갓집에 갔을 때 보았던 별들의 무수한 반짝임이 떠올라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별은 없고, 이따금 반짝거리는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은 별이 아니야. 별은 저렇게 반짝이지 않지.
알퐁스 도데의 소설 속 스테파니 아가씨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졌다.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희냐? 너 어디냐?" 혹시 딴 맘먹으려고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
수희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근심이 주렁주렁 매달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순간 수희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동안 쌓였던 원망을 쏟아 놓고 싶다.
수희는 울먹이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겨우 한마디를 건네는데 "엄마 걱정 마요, 나, 죽지 않아요." 수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냥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한심해서 그렇지.‟ 수희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것은 네 탓이 아니다, 넌 그냥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이제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면 네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니." 친정엄마와 긴 통화 끝에 수희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그동안 일에만 미처 살았는지, 삶에 대해 회의적이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대학 4년 내내 알바를 하느라 학우들과 제대로 추억도 쌓지 못했던 지난날. 휴일에도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늦은 밤에 귀가했다. 하지만 수희의 부모는 언니와 남동생만 챙기느라, 수희의 고생을 외면했다. 단 한 번도 등록금에 대해, 묻지 않던 부모님.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자신에게 왜 그리 냉담했는지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너무 화가 나서 아버지 산소 찾는 것을 등한시했던 수희다. 서운한 감정이 쌓여 친정엄마를 자주 찾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야 후회가 밀려온다.
그토록 고생해서 겨우, 졸업 가운을 입은 날에도, 수희는 가족들의 축하 꽃다발도 없이 혼자 학사모를 쓰고, 기념사진 한 장 달랑 찍은 게 전부다.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그 시간 남동생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시느라 그랬다, 이해하려 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언니조차도 자신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가슴에는 원망과 분노가 싹트고 있었다. 수희는 엄마와 통화한 후 가슴에 쌓인 원망이 해소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가슴이 조금 시원해진다. 엄마가 처음으로 수희에게 진심을 말했다. '미안하다고 이미 지난 일이니 잊어버리라 했다.
영우는 아내 수희가 걱정되었지만, 회사를 쉬면서 아내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딸인 예은도 직장 일에 쫓기면서도, 간간이 전화 통화를 했다.
수희는 가족들이 보기에,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은 갈등과 번민으로 복잡했다.
매일 일정표를 확인하면서, 몸의 변화를 인정하려 했다. 하지만 수술 후유증인지 몸은 예전의 날렵함이 사라지고 둔하고 걸을 때 어기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특히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하는 스트레스 때문에, 폭식과 거식증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늦은 저녁 가족들이 모두 잠에 빠지면 혼자 잠에서 깨어 냉장고 음식을 몰래 먹다 들키기라도 하면 가족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해서 어느 때는 울고 싶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수희가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조금 전 대기실에서 머리의 가발을 봐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아주 몸매가 날씬하고 예뻤다. 특히 한복의 선이 고와서 수희는 살짝 질투가 일었다. 그런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떨리지 않아요?" 여자는 긴 한복 자락을 들고 자리에 앉으며 입꼬리에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사실 저는 지금 긴장이 돼서 죽을 것 같아요." 여자가 말했다.
"그쪽도 떨려요?" 하고 수희에게 물었다.
"예 사실 조금 떨리네요." 수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수희는 그동안 수많은 기획 행사를 치르면서,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위해
심호흡시키고, 무대 매너를 가르치고 지시했던 사람이다.
"이런 자리에 온 것이 처음이라 많이 떨려요." 여자가 다시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세요? 하고 수희가 여자에게 묻자
"저는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데, 옆에서 미인대회 참석해 보라 권유해서요."
"그러시군요." 학원장 옆에 있던 여자는 필기한 것을 열심히 외우면서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혹시 무대에 섰을 때, 스피치 연습한 것을 잊어먹을 것 같아 무척 긴장돼요."
그런 그녀의 웃음기 어린 얼굴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학원장이라는 여자가 수희에게 물었다
"무슨 일하시는 분인지 궁금해서……”
"아, 나는 기획사 대표예요."
"기획사 대표요?" 학원장이라는 그녀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데 나올 생각을 했어요?"
수희가 웃으며 "사실 그동안 일에 빠져 사느라 나 자신에게 소홀했어요, 그래서 이번 미인대회를 계기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려고 나왔어요."
"선물이요? 무슨 선물이요? 학원장이 수희에게 물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살이 너무 쪄서 긴장감을 가지면서 살아 보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학원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앞으로 죽자 살자 살을 빼서 멋진 여자가 되는 꿈이요."
"한복을 입어서 뚱뚱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학원장이 수희의 몸매를 살피며 말했다.
"한복이 풍성해서 그렇지, 수영복을 입혀 놓으면 볼만 해요. 수희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한창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스탭이 다가오더니 리허설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수희는 어깨띠를 살폈다.
"지금 저 어깨띠 괜찮아요?" 학원장이 수희에게 물었다.
"제가 볼 땐 괜찮아요." 두 사람이 어깨띠를 새로 고치고 있자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수희와 학원장보다 나이가 젊어 보이는 여자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더니, 죄송한데 제 어깨띠도 좀 봐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래요, 어차피 우리 중에서 누군가 상을 받고 모델이 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돕자고요." 쾌활한 학원장의 말에 수희가 나서서 젊어 보이는 여자의 어깨띠를 바로 잡아 주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심사가 시작되었다는 안내 방송 후에, 심사위원들이 자리에 착석하고 행사가 진행되었다.
수희가 자신의 회사에서 직접 기획할 때는, 조명과 카메라의 위치 행사 진행하는 스탭
그리고 남. 여 M.C 대본까지 수정, 해 주는데 오늘 진행자들은 호흡이 느리고 답답했다. 수상자를 결정하고 점수를 집계하는 동안, 연예인들이 출연해서 흥을 돋우는 시간이 있었다.
수희는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장까지 호명이 되었는데 마지막 대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자, 미리 포기한 어떤 참가자는 기분이 상했는지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후문을 통해서 빠져나갔다. 수희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참가자 37번 나수희, 그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그날 저녁 수희가 트로피와 왕관을 들고 퇴근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센티미터의 아찔한 굽 높은 신발을 신었더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지만 기뻤다.
대학 시절과 퀸으로 뽑힐 때처럼 기분 좋은 흥분이 지속되었다. 가족들은 수희 손에서 빛나고 있는 트로피와 왕관을 보고 놀라는 한편 이어지는 수희의 발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은은 몽환적인 수희의 삶을 보아왔던 터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영우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다시 말해봐 당신. 앞으로 뭘 하겠다고?" 어이없어하면서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수희를 노려 보는 영우의 표정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왜 그래 당신,” 영우는 수희가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병원에서 퇴원 후 우울증으로 한동안 사는 일에 심드렁하더니 느닷없이 다이어트를 한다며 비싼 다이어트약 먹고 살을 빼더니, 한복 모델 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더니 사람이 변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수희의 기획사 일만 해도 그렇다. 늦은 시간까지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실행해서 기획안을 따내도, 다른 회사에서 더 싼 가격에 일을 채 가게 되면, 직원들 월급 주기도 버겁다. 그런 아내 수희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땐 차라리 작은 일을 맡아서 적게 남아도 좋으니 편안하게 일하라고 조언도 한다.
그런데 수희는 작은 회사 일은 도무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지금 당신 건강이 우선인데 지금 일을 벌여 놓고 나중에 가서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는 거야 엉?"
남편의 말에 수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미안해 여보. 나는 꼭 모델 일하고 싶어." 수희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다.
모델 일하고 싶으면 취미로 한 번씩 대회에 나가서 추억만 만들면 되지."
"뭐……모델 스쿨에 입학하겠다고. 당신 나이가 몇이야 대체……"
영우와 수희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예은이 부부 사이의 긴장감을 해소하려 애를 쓴다.
"아빠 이제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야 해요, 모델 일 하고 싶다면 잘하시도록 격려가 필요해요." 예은은 어느새 수희 편을 들고 있다.
"너는 그것을 말이라고 하니? 네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팔청춘도 아니고 50이 넘은 여자가 모델을 하겠다고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영우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 하다, 또 건강이 망가질까 걱정이다.
"젊고 날씬한 젊은 아가씨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이도 많은 아줌마를 모델로 쓰냐는 거지.”
영우는 얼굴이 벌게져서 난리를 쳤다.
"당신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어요."
나는 이미 결심했어요
이제부터는 집안일도 잘하고 회사 일도 모두 잘할 테니까, 당신은 조금만 기다려 줘요."
"당신이 아는 그런 젊은 아가씨 모델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시니어 모델 같은, 나처럼 아줌마도 한복 모델은 할 수가 있어요."
수희도 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한복 모델은 한복을 입고 카메라를 보니까 마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누가 믿어, 아무래도 당신은 환자 같아 연예인 병에 걸린 것 같아."
지치고 힘들 때면 가장 예뻤던 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꺼내어 바라보며
힘을 얻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모습의 그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 수희는 D신문사와 N 유튜브 채널 공동으로 개회하는, 시니어 모델 선발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약 일주일 전에는 성형외과에 가서 눈가와 입매에 보톡스를 주입했다. 몰라보게 젊어진 모습에 한동안 취해 있던 수희는 스피치 연습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번 대회에 입상하게 되면 젊은 모델들처럼 각종 의상 화보 촬영과 TV 방송 광고에 출연할 기회가 생긴다.
성탄절을 2주일 앞둔 어느 날 강남 모 호텔 연회장에서 행사가 진행이 되었다.
행사 시작 2시간 전부터 지역 방송사와 유튜브 채널에서 카메라맨들이 무거운 카메라를 설치하고 각도를 재면서 행사 준비하고 있었고, 신문 기자들은 노트북을 가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행사는 방송 3사에서 인기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등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수희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긴장감이 밀려온다.
1차 평상복 심사 후 휴식 시간을 10분 정도 가진 후 바로 드레스 심사에 들어가기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수희는 드레스 렌털에도 많은 돈을 들였다.
작년도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에서 미스 진이 입었던 드레스를 어렵게 찾아서 착용했다.
수희가 대기실에서 워킹 연습하고 있다. 심사위원들 눈에 자신감과 밝은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늘 꿈을 꾸었다.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꼭 한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지금 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드레스 심사가 끝나고 유명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심사위원들의 점수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심사위원으로 자리에 착석 한 사람은, 모델 업계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고 유명 연예인과 사회의 저명한 인사까지 자리하고 있어 수희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대기실에 앉아 수상자를 한 사람씩 호명할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으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오늘 수상자로 뽑히지 않으면 어떡하게 하는 초조함이 수희를 힘들게 했다.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수희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수희에게 말을 걸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가꾸면서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수희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200X97.8)
|
첫댓글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불타는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허상을 꿈꾸는 여자
현실성이 있어서 좋왔습니다
해가 나는군요
좋은 하루를 보내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