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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1일 오늘의 역사
2021년 한국 골프 남녀선수가 사상 처음으로 같은 날 미국 그린을 동반 제패
여자 골프 세계 2위 고진영(26)은 2021년 10월11일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 콜드웰에서 막을 내린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코그니전트 파운더스컵에서 최종합계 18언더파 266타로 우승했다.
4시간가량 뒤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끝난 미프로골프(PGA) 투어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에서는 임성재(23)가 최종 24언더파 260타로 우승했다
한국 선수가 같은 주말 치러진 PGA와 LPGA 투어 대회를 석권한 것은 2009년 3월 양용은(49·혼다 클래식)과 신지애(33·HSBC 위민스 챔피언십) 이후 12년 7개월 만으로 이번이 역대 네 번째이나 미국 본토에서 같은 날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5년 10월 최경주(51·크라이슬러 클래식)-한희원(43·오피스디포 챔피언십)이 처음 동반 우승했는데 한희원이 우승한 대회가 악천후로 일몰 순연되어 하루 늦게 끝났다. 2006년 10월 최경주(크라이슬러 챔피언십)-홍진주(38·코오롱-하나은행 챔피언십), 양용은-신지애의 경우 LPGA 대회가 각각 한국과 싱가포르에서 열려 하루 시차가 있었다.
2010년 황인성 전 국무총리 별세
3선 의원과 농림수산부 장관에 이어 김영삼 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황인성(黃寅性·84) 전 국무총리가 2010년 10월 11일 별세했다.
1926년 전북 무주생인 고인은 육사 4기 출신으로 1968년 소장 예편 때까지 중앙경리단장·경리학교장·국방부 재정국장을 맡으면서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업무처리가 꼼꼼했다.
예편 뒤 1970년 무임소장관 보좌관, 1973년 김종필 총리 보좌관, 전북지사, 교통부장관, 국제관광공사 사장을 거쳤다. 6공 출범 후 고향 무주·진안·장수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11대 의원에 당선됐고, 12대 비례대표 의원 및 농림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1988~1993년엔 아시아나항공 사장·회장으로 재계에서도 활동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소속으로 다시 고향에서 당선됐고, 이듬해 김영삼 정부 초대 총리로 발탁됐다. 취임 10개월 만에 우루과이라운드 쌀수입 개방 파동으로 경질됐으나, 다시 민자당 총재 상임고문을 거쳐 1996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상임고문으로 갔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도 지냈다.
2010년 미국 게론(Geron)사 세계최초 인간 배아줄기세포 임상시험
2008년 미국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조치 해제
2004년 성우 장정진씨, KBS 오락프로그램 녹화 중 사고로 28일 만에 별세
KBS 오락프로그램 녹화 도중 송편을 먹다 기도(氣道)가 막혀 중태에 빠졌던 성우 장정진(張正鎭·51· 사진)씨가 중환자실 입원 한 달여 만인 11일 오후 6시23분 별세했다.
이대 목동병원은 사인을 ‘기도 폐색에 의한 저산소성 뇌경색’이라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달 13일 오후 7시쯤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KBS 2TV 오락프로그램 ‘일요일은 101%’ 추석특집 ‘골목의 제왕’ 코너를 녹화하다가 사고를 당했으며, 산소호흡기로 목숨을 이어왔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가학적 코너 진행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KBS의 공개사과와 프로그램 폐지를 요구하는 비난이 빗발쳤다. 특히 ‘일요일은101%’ 게시판에는 수천 건의 비판 글이 올랐으며, 글 제목에 검은 리본(▶◀)표시를 붙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강지원’씨는 “시청률에만 급급했던 결과”라며 “당장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국장을 포함한 PD·작가 모두 고인에게 사과하고 유족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석순’씨도 “사장은 대국민 사과해야 할 것이며, 관계자들 모두 징계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1977년 KBS 성우 15기 출신으로 만화 ‘삼국지’의 장비,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를 비롯, 각종 오락 프로그램에서 목소리 연기를 해왔으며 TBC 성우상, KBS 연기대상 공로상, KBS 연예대상 최우수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 대표적인 성우로 활동해 왔다.
2000년 이영섭 전 대법원장 사망
이영섭 전 대법원장이 2000년 10월 11일 사망했다. 이 전 대법원장은 1981년 4월 퇴임하면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에 대해 `내란목적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던 대법관들이 당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사법사상 유례없는 사태가 벌어진 직후인 1981년 4월 신군부에 의해 퇴임했다. 1978년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거쳐 1979년 7대 대법원장이 되는 영예를 안았지만, 재직기간중 유신정권 말기와 1980년 광주민주항쟁 등 역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겪은 남다른 마음 고생을 퇴임사에 담았던 것이다.
고인은 1951년 서울지법 부장을 끝으로 법복을 벗고 이화여대 법정대 교수로 재직하다 법률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1961년 대법관에 임명됐다. 그후 연임을 계속해 1979년까지 대법관을 지냈고, 1981년 대법원장에서 물러났다. 무려 20년간 대법관과 대법원장을 지내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세웠다.
1999년 99서울 NGO(비정부기구)세계대회 개막
‘99 서울 NGO(비정부기구) 세계대회’가 국내외 1115개 단체 7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11일 오전 개막됐다.
이날 개막식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전-현직 국가원수, 주한 외국공관 대사, 유엔과 국제 NGO 대표 등 세계 각국에서 400여명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 NGO 협의회(CONGO), 유엔공보처 NGO 집행위원회, 밝은사회클럽운동본부(GCS)가 공동주최한 이번 대회는 ‘21세기 NGO의 역할’을 주제로 5일 동안 전체회의, 주제별 종합회의, 분과별 토론, 문화행사 등을 펼쳤다.
공동대회장인 아파브 마푸즈 유엔경제사회이사회 NGO협의회 의장은 대회사를 통해, “서울 NGO대회는 전 세계의 NGO들이 유엔과의 협력 아래 다음 세기 NGO의 역할과 활동을 다시 규정하는 자리”라며 “유엔도 NGO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더욱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영상으로 메시지를 보내 대회 개최를 축하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올라라 오투누 유엔 사무차장,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 서경석 대표 등 4명의 연사가 참여, 20세기 NGO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20세기의 회고’ 전체 토론회가 열렸으며, 이어 유엔 루이스 프레체트 부사무총장, 국제자연보호연맹 라켈 카이트 상임고문 등이 참여해 ‘21세기 전망’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졌다.
대회 마지막날인 15일에는 사흘간의 분과별 토의결과를 통해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진로를 모색하는 전체회의와 평화대행진, 폐회식이 진행되며, 이날 ‘21세기 NGO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선언’이 채택되었다.
1999년 귄터 블로벨, 세포내 단백질기능 규명으로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8년 ‘뚱뚱이와 홀쭉이’의 뚱뚱이 역을 맡은 코미디언 양훈씨 별세
원로 코미디언 양훈(76)씨가 11일 오후1시 서울 동부이촌동 금강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양씨는 해방 직후 악극단에서 만난 고(故) 양석천씨와 콤비를 이룬 ‘뚱뚱이와 홀쭉이’에서 뚱뚱이 역을 맡아, 50∼70년대 라디오-악극-영화판에서 인기를 모았다.
충남 온양 출신인 양씨는 동인제악극단 청춘부대 등에서 활동했으며, 1995년 6·25 종군 연예인 공로패와 제9회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예술문화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96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출생
1996년 OECD 한국가입 초청 결정(29번째로 가입)
1961년 경제발전과 세계무역의 촉진을 위해 설립된 국제 기구. 유럽경제협력기구를 확장 개편하여 마련되었으며, 1964년에는 아시아와 다른 지역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회원국의 경제성장과 고용을 제고하며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으며, 2016년 기준 35개 정회원국이 있다. 한국은 1990년 10월 비회원국으로는 처음으로 OECD조선사업부에 가입했고, 1996년 12월 29번째 OECD 정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마이클 잭슨 첫 내한 공연
1996년 10월 11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첫 공연은 천재적 아티스트와 테크놀로지가 엮어낸 환상의 무대였다. 이날 저녁 8시40분부터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펼쳐진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은 말로만 전해 듣던 ‘금세기 최고의 쇼’를 눈으로 확인시켜준 초대형 엔터테인먼트였다.
잭슨의 공연은 대중음악 콘서트라기보다 음악-춤-드라마-비디오아트-조명 등이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에 따라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종합예술이었다. 잭슨은 이날 공연에서 형제들과 함께 노래하던 어린시절 ‘잭슨 파이브’때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노래인생과 환경보호, 반전 등 자신이 주창해온 메시지들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무대를 펼쳐보였다.
그러나, 공연이 성사될 때까지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1996년 9월 프라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바르샤바 등을 거친 후 아시아에 들러 공연하는 ‘히스토리’ 세계투어 계획을 발표하면서 알려진 서울공연은 일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반대에 막혀 무산될 뻔 하기도 했다. 잭슨은 이번 공연으로 2백20만달러(약 18억원)를 개런티로 받았지만 공연을 주최한 태원예능은 객석 판매율이 부진해 적자였다
1994년 북한, 단군릉 복원 준공
1993년 로버츠-샤프 박사, 절단유전자 발견으로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영국 태생의 리처드 로버츠 박사와 미국의 필립 샤프 박사가 `절단 유전자`를 최초로 발견한 공로로 1993년 10월 11일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발견으로 인해 사람 등 고등동물의 분화나 진화 등이 박테리아 종류와 어떻게 다른가를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즉 고등동물에는 박테리아에 없는 절단 유전자가 있어 유전자 재조합과정에서 여러가지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기초 생물학의 연구에 일대 변혁을 가져 왔으며, 암이나 다른 질환의 발병을 설명하는 중요한 의학적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전에 박테리아나 고등동물은 유전자의 구조와 작용이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유전자의 배열은 일정하며 여기서 생기는 메신저는 동일한 단백질을 만들어 유전성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77년 포유동물의 유전자에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지 않는 새로운 절단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절단 유전자는 유전자의 배열이 정상 유전자와 다르며, 유전자들의 단백질 생성 과정에서 그냥 잘려 나간다는 것이었다.
현재 의학적으로는 박테리아 같은 무핵세포는 이 절단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포유동물 같은 유핵세포는 절단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일부 선천성 질환은 절단 유전자가 잘려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것이 지중해성 빈혈이다.
1991년 소련 KGB 해체
1990년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뉴욕에서 남북영화제 열림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 1차전 평양 능라도 경기장서 열림
1989년 항공우주연구소 충남 대덕서 발족
1976년 신안 앞바다서 중국 송(宋)-원(元)대 유물 인양
전남 신안군 지도면 방축리 서북쪽 2km 바다 밑에서 중국 송(宋)-원(元) 대 도자기 등의 유물이 인양됐다. 유물은 어부 최형근씨가 1976년 1월 9일 끌어올린 그물에 청자병 등 6점을 건져내 당국에 신고하면서부터 알려졌다.
이 무렵 유물을 발견한 지점 부근에서 도자기 122점을 불법 인양한 사람이 검거돼 유물 122점 모두를 압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유물의 보존관리가 시급을 요하게 되어, 국내 학계는 급기야 같은 해 11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로 조사단을 긴급 파견, 예비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량의 유물이 매장돼 있는 것을 확인,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유물 인양작업은 2차에 걸쳐 진행됐다. 청자류(靑磁類) 1,253점, 백자류(白磁類) 441점, 잡유류 40점, 흑유류 56점, 철유류 7점, 천목류(天目類) 4점, 공기류(工器類) 105점, 청동기류(靑銅器類) 12점, 엽전(葉錢) 6,088점, 기타 68점으로 총 8,084점을 인양하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도굴꾼에 의해 불법 인양된 자기 3백57점과 어부들이 신고한 7점을 합하면 해저보물은 모두 8천4백48점이나 된다.
1974년 일본,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
1973년 문화예술진흥원 개원
1970년 해남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해남 화산면 거주 박양진 집에 거동수상자 1명 출현, 박씨의 처가 신고, 경찰이 사살
1969년 소련, 소유즈 6호 발사
1968년 미국, 아폴로7호 3인승 우주선 발사 . 궤도진입 성공
1963년 프랑스 시인 장 콕토 사망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가 1963년 10월 11일 74세로 사망했다. 1889년 파리 근교의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파리 사교계를 일찍부터 드나들었다.
17살 때 ‘콕토 시 낭송의 밤’을 열어 시단에 데뷔했으며, 20살 때 처녀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냈다.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 범위는 소설가, 극작가, 안무가, 평론가, 영화감독, 재즈 연주가 등 다양했고 재능도 뛰어났다. 사교 범위도 넓어 발레 프로듀서 디아길레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화가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세속의 명예를 한껏 즐겼다.
레종도뇌르 훈장, 옥스퍼드대 명예박사,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칸 영화제 명예회장 등 그에게 부여된 명예도 그의 관심만큼이나 폭 넓었다. 호기심이 강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으나 지나친 기교로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오늘날 칸 영화제에서 공식 로고로 쓰이는 ‘종려잎’은 콕토가 1955년 그린 것이다.
1963년 유엔총회서 남아(南阿) 인종차별 비난결의안 가결
1963년 에디트 피아프 / 장콕토 사망
길가에서 태어난 것 부터가 에디트 피아프의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3류가수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지 두달 만에 사라졌고 곡예사 아버지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세 살때 걸린 각막염으로 몇년동안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10대 때 낳은 딸은 두 살에 죽었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노래 몇곡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그날그날 살고 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세 때였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란 이름으로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작고 초라한 외모, 그러나 청중들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노래에 매료됐다. ‘샹송의 여왕’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의 삶은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는 여정이었다. 헤비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야말로 그가 느꼈던 진정한 첫 사랑이었다. 그러나 세르당 마저 비행기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자 죽은 연인을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찬가’였다.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은 ‘장미빛 인생’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잇따른 자동차 사고와 마약 중독은 서서히 그의 몸을 망가뜨려 결국 1963년 10월11일, 48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시간 뒤 평생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조금전 피아프의 죽음에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는 애도의 말을 남겼던 콕토였다.
1962년 제2회 바티칸공의회 개최
1962년 10월 11일 전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인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모여들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의 목적은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 전체에 걸친 교의나 율법에 관한 중요 사항을 토의하기 위해 교황이 바티칸에서 소집하는 회의로 지금까지 모두 2회 열렸다. 1869년 비오9세가 소집한 제1회 바티칸공의회에서는 교황의 수위권(首位權)-불가류성(不可謬性) 등 신앙상의 주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대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58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요한 23세(1881∼1963)에 의해 소집됐으나, 공의회 도중 교황이 사망하는 바람에 바오로 6세(1963~1968)가 계승, 회의를 주재했다.
제2차 공의회는 1965년 12월 폐막될 때까지 교회 ·전례(典禮) ·사목(司牧) ·계시 등에 관한 4개의 헌장과, 교회일치 ·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의 교령(敎令), 그리스도교적 교육 등에 관한 3개의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획기적인 교회개혁의 성과를 거두었다. 미사에서 라틴어 대신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각 지역의 전통과 관습에 맞게 전례를 진행하는 것이 허용됐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종교들과의 우의와 이해가 특히 강조됐다.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 등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과의 대화와 일치가 촉구됐고 유태교와의 역사적 화해도 추진됐다.
1962년 인도네시아 군중, 아시아경기대회 문제 불만으로 일본대사관 습격
1960년 4·19혁명 유족과 부상 학생, 국회의사당 점거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진지 거의 6개월이 지나도록 ‘반민주 사범’ 처벌도 ‘혁명입법’도 지지부진하여 학생들과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0월 8일 오전에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4·19발포명령사건’ ‘경기·서울 선거부정사건’ ‘제3세력 제거음모사건’ 등 이른바 6대 사건의 1심 언도공판이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장준택 부장판사 주심으로 진행한 이 재판은 첫 공판 이래 이미 95일이 지나 늑장 재판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공판 결과, 경무대 앞 발포 책임자인 유충렬에게는 사형, 정치깡패 임화수에게는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했으나 이익흥, 김종원(장면부통령 저격사건 배후), 조인구, 곽영주(4·19발표 사건), 신도환(정치깡패 사건)은 모두 증거 불충분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같은 재판 결과에 분노한 4·19 혁명 유족과 부상학생 3백여명은 10월 11일 오전 11일 30분 경 국회의사당에 난입, 지팡이로 국회의원석을 내리치며 의장석을 점령했다. 의사당 밖에서도 시민 1만여명이 모여 “특별법을 제정하여 반민주 원흉들을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국회는 ‘민주반역자 처리법안’ 등 각종 혁명입법을 서둘러 제정했다.
1958년 미국 달 로켓트 파이오니어 발사
1957년 북한, 휴전선서 남북교역을 제의
1955년 라오스 정전협정 성립
1953년 필리핀 대통령에 막사이사이 당선
1950년 중국군, 티베트 진군 개시
1950년 10월 11일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300만 티베트 인민을 해방시키고 중국의 서부 변경에 대한 방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의 진군을 지시했다`는 중국 정부의 발표가 있은 후 50여일이 지난 1950년 12월 1일 중국군 2~3만명이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했다. 그들은 필요한 토지와 식량을 요구했고, 이에 항의하는 티베트 각료들은 파직시켰다. 1951년 5월에는 티베트의 평화해방을 발표하며 티베트를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어 중국은 장차 있을 무력충돌에 대비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2000km가 넘는 장거리 도로를 건설하고 라사 부근에 비행장도 건설했다.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 장악력을 확보한 중국은 1954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북경 전인대(全人大)에 초대해 티베트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중국 내 소수민족 지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49년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원폭실험 중지 제안
1939년 아인슈타인 등 미국에 원폭개발 촉구
원자탄 개발 역사에서 오펜하이머와 함께 개운치 않은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한 사람의 천재는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다. 미국이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45년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이 떨어지기 6년 전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받아 본 아인슈타인의 편지 한 통이 미국 정부에 핵 개발을 `진언`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사실 이 편지에 아인슈타인이 사인한 날짜는 8월 2일이었다. 그 초고를 쓴 것은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였다. 아인슈타인은 질라드와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테라 등 3명의 헝가리계 물리학자들의 간청을 받고 편지에 사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박해를 받아 미국에 이주한 유태인이었던 이들은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의 반응은 신속했다. 즉시 상임위원 3명으로 우라늄 자문위원회가 발족했다.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아 원폭 개발에 전면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 세워진 것은 1941년 12월 6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하루전 일이었다. 원자폭탄의 산실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앨러모연구소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1942년 말 이곳 소장에 임명돼 노벨상 급 물리학자들을 이끌며 원폭 개발을 성공시켰다.
1928년 독일 비행선 대서양횡단 성공
1916년 원불교 개교
1915년 프랑스 곤충학자 파브르 사망
1912년 영국-프랑스, 해군군사협정 성립
1909년 진고개에 가스관 매설공사 착공
1904년 민속학자 송석하 출생
1899년 보어전쟁 발발
1899년 10월 11일 네덜란드 계 남아프리카 이주민으로 구성된 보어군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나탈주를 전격 침공했다. 3년간에 걸친 보어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 식민지를 획득했다. 이곳으로 대거 진출하기 시작한 영국인들과 일찍부터 이곳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이주민인 보어인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보어인들은 충돌을 피해 남아프리카 북쪽 지방으로 집단이주, 그곳에 트랜스발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다.
영국이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보어인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제1차 보어전쟁 (1881-1884)이다.
전쟁결과 영국의 종주권과 트랜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함께 인정하는 런던협정으로 양국관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1886년 트랜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이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내정간섭이 차츰 노골화됐다. 수차례의 협상에도 원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계속 갈등을 빚자, 마침내 트랜스발국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전쟁결과 보어군은 총병력 7만여명 가운데 7천여명이 전사했고, 집단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2만3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도 불명예스러웠다. 인구 50만명에 군병력 7만여명 뿐인 보어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영국이 동원한 군병력은 45만명이었고 이 중 5천7백여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만 해도 1만 6천여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1896년 민비, 뮈델 주교에게 세례 받음(민 마리아)
1891(조선 고종 28) 동아일보 창간한 인촌 김성수 태어남
1885년 프랑스 작가 모리아크 출생
1884년 미국 여성지도자 엘리노어 루스벨트 태어남
1821년 YWCA 창립자 조지 윌리엄스 태어남
1737년 인도 캘커타에 지진 30여만 명 사망
1592년 임진왜란 진주대첩
1531년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처형당함
1453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발발
계유정란은 1453년(계유년)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나중에는 조카(단종)를 쫒아내고 스스로 왕(세조)이 되었으며, 단종은 일단 상왕으로 물러났다.
후에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를 위한 노력이 실폐로 돌아가다 연산군은 단종을 상왕에서 폐위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러 강원도 영월로 유배 시켰다
이후 단종의 복위를 염려한 수양대군은 1457년 사약을 내려 단종을 죽였다.
그로부터 224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 왕으로 복위되고 단종의 묘호를 받았다.
1335년 조선 태조 이성계 출생
1170(고려 의종 24) 정중부의 난 일어남(음력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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