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여 낯선 나라로 들어선다. 우리나라와 경도는 좀 차이 나지만, 위도는 거의 정반대인 남태평양의 섬나라다. 계절이 반대일 뿐 기후는 우리와 같을 것이리라. 우리가 이른 봄에 떠났으니, 여긴 늦가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첫눈에 보이는 진한 갈색 피부와 우리의 두세 배는 됨직한 허리를 끌어안고 뒤뚱거리는 원주민이 가득하니 역시 남국의 낯선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비만은 건강과 장수 그리고 여성의 아름다움 유지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 하고,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 여성들이라면 질겁할 일이건만, 그들은 무심한 듯 그저 편안히 일상을 살고 있다. 무릎이 어찌 견디는지 특히 궁금하다. TV를 통해 서양인들의 그런 모습을 종종 보지만 그들의 심리가 참 궁금하고 재미있다. 잠시 후 만난 여행 안내인은 환경보호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나라이니 공항이나 산업시설은 물론 도로 등에서도 선진국답지 않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귀띔해준다. 풍요를 그대로 보여주는 나라가 매우 많지만, 이 나라는 검소한 국민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단다. 이 나라는 목축업으로 선진국이 된 몇 안 되는 나라의 하나란다. 과연 조용한 가운데 풍요를 누리는 것으로 보인다. 어딜 가도 낮은 오름 같은 구릉과 목장 천지다. 얼핏 제주를 연상한다. 하긴 제주는 한라산이 가운데에 웅장하게 떠억 버티고 있지만…. 불과 삼사십 년 전에 만든 것도 부수고 새로 만드느라 분주한 우리나라와는 참 다르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려니 낯익은 노래가 구성지게 귀속을 파고든다. 연가 ‘포 카레카레 아나’다. 아까 공항을 나설 때도 어디선가 들리는 듯 했는데…. 나는 평소에도 이 노래를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의 음성으로 즐겨 듣는다. 뉴질랜드 민속음악의 대표곡이다. 이번에 이 나라를 반세기만의 첫 해외 여행지로 정한 동기도 이 노래를 즐겨 듣던 마음이 한몫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안가요로 일찌감치 불려 진바 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누구나 한두 번은 들어 본 가사일 것이다. 이 나라는 이웃나라 호주처럼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을 했지만, 유일하게 원주민과 영국인이 공생하는 나라란다. 여행지 곳곳에서 백인보다도 더 많이 보인다. 절구통처럼 뚱뚱하고 표정은 무뚝뚝하며 진한 갈색 피부의 그들을.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이제는 독립한 미국 캐나다 인도 남아공 호주 등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 원주민이 이렇게 평안한 나라도 드물단다. 세계최고의 선진국 미국엔 원주민보호구역이 있다. 얼마 안 되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 속에서 편안(?)하게 산다. 언젠가 김용택 시인의 문학강의를 들을 때 ‘우린 자연을 마구 파헤쳐 놓고는 미안한지 생태공원이란 것을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만들어 놨다고 광고하니 참 웃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안내인의 말을 들으며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와이토모동굴이다. 참 인상적이다. 아마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흔히 있는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매달린 석회암 동굴이지만, 천장에 가득 매달려 있는 수십만 마리 반딧불이(개똥벌레의 일종인 glowwarm)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진도 찍을 수 없다. 조명도 최소한이고, 대화도 소곤소곤 이상은 안 된단다. 마치 어린 날 마당에 멍석을 펴고 누워 바라보던 밤하늘의 은하수 바로 그것이다. 참 아름답고 환상적인 정경이다. 몇 자 기록할까 하여 열었더니, 흐릿한 불빛을 보고 다른 관광단체의 가이드가 다가와 끄라고 핏대를 낸다. 반딧불이의 서식환경의 훼손을 최소화하려는 이 나라 정부의 방침이란다. 속상하지만 끄고 밖에 나오는 대로 몇 자 적었다. 이 나라의 환경보호 정책은 어딜 가도 눈에 띈다. 우리가 배울 점이다. 번지점프는 이젠 아주 흔한 놀이시설이 되었고, 우리 동네공원에도 이십여 미터짜리가 있지만, 타우포 번지점프장에서 오십여 미터 아래 계곡으로 뛰어내리는 서양 처녀들을 보며 그 용기에 감탄하지만, 보기만으로도 가슴이 오그라드니 역시 내 가슴은 콩알만 하다. 더욱이 레드우드 숲에 들어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나무 밑에 서니 새삼 왜소한 나를 발견한다. 여기도 이럴진대 미국의 옐로스톤 공원의 메타세쿼이아 숲에 서면 어떨지…. 이 위대한 자연을 머리만 영리한 인간들이 이겨 보겠다고 건방을 떤다. 자연의 심판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가끔 바다 속의 고래처럼 긴 숨을 내 쉬는 간헐천을 내 눈으로는 처음 보았지만, 방송에서 많이 보아서인지 그다지 신기하지는 않다. 곳곳에 노란 유황흔적이 많지만, 내 코는 알음체도 안 한다.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용암이 끓어 넘치는 광경이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활화산 화이트섬이 있다. 지난 12월 초에는 예기치 못한 대규모 분화로 섬을 방문한 많은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이후 관광이 금지되었단다. 평생 다시 못 볼 관광코스인데, 참 아쉽다. 북섬을 떠나 남섬 퀸즈타운에 내리니 며칠 지낸 북섬과는 확연히 다르다. 공항 앞의 나지막해 보이는 산의 높이가 자그마치 2,300미터나 된단다. 백록담이나 대청봉보다 훨씬 높다. 남섬엔 이런 산이 백 개가 넘는단다. 3,000미터가 넘는 것도 오십여 개. 북섬에 산이 거의 없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두 섬이 이렇게 다른 것은 잘 이해하기 어렵다. 또 하나 환경보호 정책의 결정판을 본다. 남섬과 북섬은 이십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다리도 해저터널도 없다. 오로지 배와 비행기로 오갈 뿐이다. 국토가 반 토막이 난 것이니 우리라면 퍽 불편해할 텐데 잘 참는다. 대마도를 경유하는 해저터널을 구상하는 한일 양국이나, 37km나 되는 도버해협의 유로터널, 23km가 넘는 일본의 혼슈-훗가이도 터널도 있는데…. 다리도 그렇다. 요 정도의 거리라면 세계 각국에는 이미 건설된 다리가 많다. 수심이 좀 깊지만,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얼핏 새만금을 떠올리며, 우리라면 다리가 아니라 흔해빠진 남섬의 산 하나를 허물어 아예 해협을 메워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한테 맡기면 이삼년이면 거뜬할 텐데…. 하긴 이런 다리나 터널을 뚫는다면 파생되는 문제점의 하나는 기존 항만경제가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특성상 남섬은 그저 관광객들로 번잡할 뿐이니 그들을 위해 큰 자본투자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보다. 한일 간의 해저터널도 건설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상호간의 이해득실이 앞서는 이유도 있단다.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표면에 드러낸 환경보호가 아닐 수도 있다. 피오르드 협곡이 잘 발달되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밀포드사운드를 가잔다. 지도를 보니 퀸즈타운에서 사각형의 세 변을 250km나 돌아서 간단다. 직선거리로는 50여 km라는데(이미 있는 도로에 30여km 구간만 신설하면 어렵지 않게 지름길을 뚫을 수 있어 보인다. 우리 같으면 새로 고속도로를 놓았을 것이다. 멀리 돌아서 가는 수많은 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고려하면 무엇이 진정한 자연보호일까 의심스럽다.) 도로도 왕복2차선 좁은 도로니 가는 데만 서너 시간은 걸린단다. 한 시간이면 뒤집어 쓸 텐데. 참~ 이 나라는 어딜 가도 고속도로가 안 보인다. 철도가 있긴 한데 꼭꼭 숨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개발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란다. 그나마 그 잘난 도로가 공사로 막혔다며 되돌아왔다. 우회로도 없다. 제길.. 입이 쑤욱 나온다. 인근의 국립공원을 거닐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 자연과 원시림 말고는 볼게 없다. 돌아오니 하루가 다 갔다. 국가이기주의인가 오만함인가. 어쩌면 폴 새뮤얼슨의 말처럼 자신들은 욕심을 버리고 작은 소유에서 진정한 국가행복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망과 조급증 그리고 이런 불편을 결코 방치할 수 없는 한국인의 정서를 생각하면, 이 나라는 자연보호란 미명하에 과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관령을 관통하는 영동고속도로가 있건만, 양양고속도로가 또 필요하고, 미시령터널이 필요한 우리정서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 날 탄 호수의 증기선은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증기선이라고 자랑한다. 과연 영화에서나 보던 대형 여객선처럼 시커먼 연기를 마구 뿜는다. 가축이 내뿜는 방귀가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키는 원인의 하나라고 하는데, 환경보호에 민감한 나라답지 않게 엉뚱하다. 남섬과 북섬을 부지런히 오가는 배도 이럴 것인데, 연구해 봄직하지 않은가.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온통 목장과 산악이다. 가이드는 애써 칭찬하지만 그게 그거다. 절친한 벗과 동행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퍽 지루했으리라. 다만, 인상은 역시 풍요롭고 여유롭고 민도가 높은 선진국이라는 느낌이다. 오후에 몇 시간을 달려 고도 4,500미터의 만년설을 뒤집어 쓴 마운트쿡 밑까지 트래킹. 평지를 90여분 8,000여 보를 걸었다. 여행 온 이래 처음 땀을 살짝 흘렸다. 이 산도 지구온난화현상으로 정상의 만년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에 지난달까지 활활 타던 호주산불에서 날아온 검은 재가 덮여 정상부의 눈은 색이 누렇다. 올 겨울의 눈이 덮여야 하얀색 본래의 흰 왕관을 되찾을 것이란다. 또 하나의 지구지문이 기록되고 있다. 유럽과는 다르게 화장실문화가 우리와 친숙하다. 무료이며 곳곳에 있고 청결하다. 지병이 있던 나에게는 아주 반가운 것 중의 하나다. 중국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이 우리네 오륙십 년대식 뒷간에서 용변을 보며 질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곳곳의 관광 안내표지에 영어 외에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가 표시되어 있기도 하고, 안내방송이 때로 우리말로 방송되기도 하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렸는지 알만 하다. 조국의 국력신장에 무한히 감사하지만, 과한 것은 아닌지 고개가 갸우뚱해 진다. 모처럼 해외여행을 하며 여러 생각을 한다. 문학작품을 보며 비평을 하듯 좋은 것 부족한 것 과한 것을 찾아보니 대략 이러하다. 여하튼 우리도 한 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아마도 국토면적 대비 고속도로 총연장이 어느 나라보다 길지 않을까. 도로에 묻히고 훼손된 자연환경은 얼마나 많을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은 얼만지…. 이번 여행에서 고민거리를 얻어왔다. 만약 만약에 나에게 국토교통부를 맡으라 한다면(^^), 태안과 보령 사이의 해저터널 건설 등 수 없이 진행되는 도로 신설과 간척사업부터 재고해 봐야겠다. 이러다간 우리나라의 형상이 호랑이가 아니라 네모진 자루모양이 되고, 그나마 황해를 메꾸자고 하겠다. 세계는 결국 초대륙 판게아(Pangaea)로 돌아갈까 걱정이다.
(2020.2.22. 뉴질랜드에서) |
첫댓글 개인이 걱정한다고 될일이 아닌듯 합니다만 선생님은 애국자십니다.~~^^
어느 글 모롱이마다 나라 걱정이 배여 있습니다~~^^
역시 여행은 많은 느낌을 받는 듯 합니다.~~^^
여행이라고는 못하는 나는 정말 부럽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제가 걱정한다고 될일이야 뭐 있겠습니까. 다만, 느낌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이지요. 우리나라는 너무 급하고 조금도 불편한 걸 못참으니 문제지만, 이 나라는 너무 교만하니 문제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검소하고 서둘지 않는 국민성은 배울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선생님.
목축으로 발전한 풍요 땅 아주 좋은 곳을 여행 하셨군요
반세기 많의 관광을 하시면서도 나라사랑 하시는 마음이 환경부 장관을 넘어 대통령으로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ㅎ
우리나라 정책을 담당 하시는 분들이 정암 선생님 글을 한번쯤은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환경 사랑에 나름대로는 한 몫은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나름대로 느낀게 많으니 몇자 적어 봤습니다. 미흡한 것도 과한 것도 있더군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한 번 다녀온 곳입니다. 여유가 있고 평화로운 곳이지요. 여러 가지로 배울 점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렇죠? 말씀 고맙습니다.
뉴질랜드에 다녀 온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여행담을 세세히
느낌과 함께 펼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뉴질랜드의 여행 잠시 즐거움으로 해 보았습니다
공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