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 황해 송화에서 의병 150명, 왜병과 접전
1909 시법권을 일본에 넘기는 기유각서 조인
1922 독립운동가 김영란(1894-1922) 사형 당함
1925 남한 일대에 대홍수
697명이 죽거나 다침, 가옥피해 59,942호
1946 제1회 여자경찰관 졸업
1948 대한민국 헌법 국회 통과
1950 한국군 통수권 미군에 이양하는 한-미 대전협정 체결
전시하 주한미군의 지위 및 재판관할권에 관해 체결된 이 협정은
임시수도 대전에서 서한교환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주요내용은
1) 주한미군과 그 구성원에 대한 배타적 재판권을 미군법회의에서 행사한다
2) 미군의 한국인구속은 미군과 그 구성원에 가해행위 했을 경우에 한한다
3) 미군은 미군 이외의 어떤 기관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 협정은 정식 조약을 맺거나 국회의 비준을 얻지도 않았다.
1960 사회대중당(위원장 서상일) 통일 3개항 주장
유엔이나 적당한 국제감시단의 감시아래 통일되어야 한다.
그 선행조건으로 1) 문화교류 2) 제한된 경제교류 3) 인사교류를 해야 한다
1973 대한 적십자, 추석 성묘단 상호방문 제의
1980 계엄사 합수부, 김대중 등 9명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구속
1990 MBC 노조,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전면 제작거부 결의
B.C.102 로마의 정치가 줄리어스 시저(케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태어남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1806 독일, 나폴레옹 보호하에 라인연방 성립
1817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쏘로우(1817-1862) 태어남
"고독처럼 좋은 친구를 나는 여지껏 알지 못했다."
I never found the companion that was so companionable as solitude.
1854 미국 발명가 조지 이스트먼 태어남
사진건판과 롤필름을 발명, 이스트먼 코닥회사 설립
1868 독일 시인 스테판 게오르게 태어남
대표작; 영혼의 한 해, 삶의 융단, 찬가, 새로운 나라
1884 모딜리아니 태어남
술에 취하면 옷을 모두 벗어버리거나 길에 쓰러져 잤다는 모딜리아니,
술집에서 "유태인인데 5프랑만 주시오"라며 그림을 팔았고,
부유한 한 미국인이 10프랑을 주자 5프랑만 받은 뒤
그가 잠든 사이에 지갑에서 돈을 모두 빼내 가난한 시인에게 주었다고.
팔리지 않은 데생 뭉치는 구멍을 뚫어 화장실에 매달았다고도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모디'(Modi, 불어로 '저주받은'의 뜻)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었다. 프란시스 카르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딜리아니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미묘한 차이
를 느끼게 하는 첨예한 감각으로 그는 어깨에서 발로 넘어가는 부
분이나 이제 막 피어나는 젖가슴의 순진무구한 곡선을 형상화했다.
그의 보일듯 말듯한 선 하나하나에는 모든 건축이 들어 있었다. 그
로서 그는 아주 조금 불러오른 듯한 배를 그려냈고, 영혼의 생생한
부분까지 움직임을 연상시켰으며, 이를 생생한 것으로 만들어 냈다."
1902 이탈리아 말코니,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에 성공
1920 칠레혁명 일어남
1946 중국, 전면적 국공내전 개시
1948 영국 공군 제트기, 대서양 횡단 성공
1990 보리스 옐친, 소련 공산당 탈당 선언
1993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동북 지역에 진도 7.8의 강진 발생
246명 사망 실종
▶1498 무오사화 발생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1498년(연산군 4년)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사관(史官)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의 비행과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1909 경술국치의 징후, 기유각서 조인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1907년 한일신협약의 부대각서(附帶覺書)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조인된 사법권의 위임에 관한 협약. 우리나라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이다. 1909년 7월 12일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제2대 통감 소네(會 荒助) 사이에 교환된 것인데, 모두 5개조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한국의 사법과 감옥사무는 완비되었다고 인정되기까지 일본정부에 위탁한다. ②정부는 일정한 자격이 잇는 일본인·한국인을 재한국일본재판소 및 감옥관리로 임용한다. ③재한국일본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외에도 한국인에 대하여 한국법을 적용한다. ④한국지방관청 및 공사(公使)는 각각 그 직무에 따라 사법·감옥사무에 있어서는 재한국 일본 당해 관청의 지휘, 명령을 받고 또는 이를 보조한다. ⑤일본정부는 한국사법 및 감옥에 관한 일체 경비를 부담한다.
이 각서에 의하여 한국의 법부와 재판소는 폐지되고, 그 사무는 통감부의 사법청에 이관되었다. 그리하여 그 직원은 일본인이 임명되고 우리나라의 사법권은 완전히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항일 지사들에 대한 재판에 있어서 일본인의 권한은 증대되었으며, 특별법을 자의로 만들어 더욱 철저하게 우리의 항일투쟁을 억압하게 되었다. 감옥사무를 일본인이 전담한 것도 항일세력에 대한 탄압과 감시행형(監視行刑)을 철저히 하려는 조처였다. 1909년 8월 현재 약 4,500명의 재감원이 있었는데, 감방 1평에 10여명을 수용하는 비인도적인 상태이었다. 이 각서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하는 전초공작이었다.
▶1950 대전협정 조인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한국군 통수권의 미군 이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이로써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군에게 이양되었다. 대전협정은 1950년 7월 12일 당시 임시수도 대전에서 서한교환형식으로 주한미군의 지위 및 재판관할권에 관해 체결된 한국과 미국 간의 협정으로, 정식 명칭은 ''재한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이다.
그 내용을 보면 ① 주한미군의 구성원에 대한 배타적인 재판권은 미국군법회의에서 행사하도록 하고, ② 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구속은 한국인의 미군 또는 그 구성원에 대한 가해행위가 발각된 경우에 한하며, ③ 한국정부는 전쟁이라는 절박한 사태에 임하여 미군은 미군 이외의 여하한 기관에도 복종할 것을 지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대전협정은 6·25전쟁의 절박한 상황에서 한국의 일방적인 양보로 이루어져 미군의 범법행위 등에 대해 한국정부는 주권국가로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67년 2월 9일 체결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제22조에 의해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
▶1982 반쪽 모스크바 올림픽 열림
- 분류 : 스포츠
- 지역 : 국외
- 내용 : 공산권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인 22회 모스크바 대회는 사상 올림픽 최악의 불구 대회였다. 1980년 초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하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모스크바 대회를 보이콧했다. 미국은 참가 거부에 그치지 않고 개최지를 변경하거나 연기하자는 적극 전략을 놓고 맹렬한 정치 공세를 취했으나, IOC는 어느 한쪽 강대국 편을 들 수 없어 스포츠와 정치의 분리 명분을 앞세워 미국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호소에 동조, 자유진영 20여 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81개국 6천여 선수가 참가, 대회는 예정대로 강행했다.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국가들은 선수를 파견했으나, 소련의 무력 외교에 항의, 국기 대신 오륜기 또는 각국 올림픽 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했다. 입장식에서 차기 개최국인 미국 국기 대신 로스엔젤레스 시기가 게양됐고, 폐회식에서도 <로스엔젤레스에서 다시 만납시다>로 표시됐다. 올림픽 강국 미국, 서독, 일본이 불참하자 경기는 소련과 동독의 독무대였다.
이 두 나라는 전체 메달의 51%를, 금메달의 60%를 차지했으며, 소련이 80개의 금메달로 종합1위를, 동독은 47개의금메달로 2위를 했다. 최악의 절름발이 대회 16일간의 열전을 아쉬워하듯 미샤곰의 카드 색션이 눈물을 흘렸으나, 미샤곰의 눈물은 어쩌면 불구 올림픽의 운명을 자탄한 것인지도 몰랐다.
▶1392 공양왕 왕위에서 축출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1389년 11월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추대 되어 고려 마지막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고려 제34대 왕으로 공양왕이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1391년 이성계일파에 반대하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정치무대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얼마없어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하여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1980 전두환 합수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조작으로 24명 구속 기소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계엄사는 김씨를 연행한지 닷새만인 80년 5월 23일의 중간수사발표에 이어 7월 4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김씨가 "우리 민족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대 국가적 불상사였던 광주사태의 발단도 배후조종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배후조종''의 주요 혐의사실로 "당시 전남대학교 복학생이던 정동년씨가 80년 4월 12일 자신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대학생 데모상황을 논의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계속 투쟁하라고 격려하면서 방문기념볼펜을 주어 내려보냈으며, 그 뒤 5월 5일 정씨가 다시 심복 김상현(한국정치문화연구소장0과 함께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학생데모자금으로 5백만원의 자금지원 요청을 하자, 우선 1차로 3백만원을 주었고 2차로 5월 8일 2백만원을 주는 등 모두 5백만원의 데모자금을 주었다"고 발표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정권장악에 가장 커다란 걸림돌로 생각되는 김대중씨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조작, 김시를 광주사태의 배후 조종자로 몰았던 것이다.
▶1902 마르코니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 성공
- 분류 : 과학
- 지역 : 국외
- 내용 : 1894년부터 이탈리아의 기술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볼로냐에 있던 리기(Augusto Righi) 교수의 도움을 받아 가며 헤르츠가 발견한 전자파를 전신에 이용하려는 실험에 착수했다. 우선 마르코니는 리기 교수로부터 어떻게 전자기파가 발생·방사·탐지되는 지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더나아가 마르코니는 브랑리보다 훨씬 좋은 수신 감도를 얻기 위해서 브랑리의 코히러를 개량해 나갔다. 수신 장치와 함께 마르코니는 보다 먼 거리에서 전자기파를 송수신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전체 장비 역시 개량해 나갔다. 마침내 1895년 마르코니는 자신이 만든 상당히 조야한 실험 장치로 약 2.4 킬로미터 거리까지 신호를 무선으로 전송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르코니가 무선 전신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마르코니의 전신에 대해서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때문에 마르코니는 더욱 자신의 장치를 개량한 뒤 좀더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영국으로 특허를 출원하러 갔다. 당시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이 무선 전신은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폭동 소식을 듣고 영국 함대가 몇 달 후에 그곳으로 출동했을 때는 이미 폭동은 끝난 상태가 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이 무선 전신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에게는 식민 통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 무선 전신은 원거리 통신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였던 값비싼 전선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편국의 입장에서도 아주 매력적인 발명이었다.
1896년 영국에서 특허를 낸 마르코니는 맨 먼저 영국 우편국에서 성공적으로 무선통신을 선보였으며, 189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메시지를 요트 위에 있던 황태자에게 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자신이 발명한 무선 전신의 실용적 가치를 영국 사회에서 점차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더욱이 1897년 자신의 이름을 딴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를 차린 마르코니는 무선 기술을 계속 향상시켜서 1899년에 이르면 약 120킬로미터까지 신호를 무선으로 보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지속적인 송수신 거리의 향상에 고무된 마르코니는 마침내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선 전신 장치의 개발한다는 엄청난 시도를 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의 대기권 상층부에 존재하면서 전파를 반사하는 전리층의 존재를 몰랐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전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은 160킬로미터에서 320킬로미터가 한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코니는 이 무모하기만 보였던 도박을 감행했고, 결국 마르코니는 1901년 12월 미국 뉴펀들랜드에서 영국의 콘웰에서 보낸 ''S''라는 신호를 수신하는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서양 횡단 무선 통신의 성공으로 지구적 규모의 전파 통신 및 라디오 방송의 시작되게 되었으며, 동시에 대기권 외각에 있는 전리층의 존재에 대한 연구도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