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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에는 향기가 없다.
신외숙
봄꽃에는 향기가 없다.
진달래 숲길을 헤치며 등반하는 감성 캠핑족들 사이에 경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5시간 동안 운전한 끝에 드디어 항구에 닿았다. 공영 주차장에 자동차를 파킹한 후 섬으로 가는 여객선에 올랐다. 진달래가 만발한 산 정상에 올라 맘껏 봄을 향유하고 싶었다.
바닷물을 가르는 동안 그는 가슴속 깊이 자연을 호흡했다. 갈매기가 떼를 지어 날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받아먹으며 계속 배 주위를 맴돌았다. 여객선 안에는 등산복 차림의 남녀들이 몇몇 보였다. 저들은 봄을 만끽하기 위해 직장에 연차를 내고 왔을 것이다.
아님 백수이거나. 경민은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어떤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덧 그들 무리와 합류하고 있었다. 여객선은 항해한 지 한 시간만에 섬에 닿았다. 기분 좋은 화창한 봄날씨였다. 백팩을 멘 등산객들은 삼삼오오 목적지인 산을 향해 걸어갔다.
한 십 리쯤 걸었을까. 등산로 입구가 보였다. 안내판에 산봉우리와 해발고도를 알리는 숫자에 모두 시선이 집중했다. 진입로는 평평한 맨땅으로 벚꽃과 개나리가 군락을 지어 피어 있었다. 봄향기에 취해 저절로 마음이 업그레이드 되는 기분이었다.
진분홍과 샛노랑 새하양이 뿜어내는 봄 색상이 마음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딱 머물고 싶은 순간이었다. 마치 천국 지상낙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감성 캠핑이라지. 누군가 지나며 말했다.
그래 맞아, 이게 감성이고 낭만이지. 이보다 더한 행복이나 평안은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모두 천사 날개를 달고서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고 있었다. 중간에 쉬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무언가 홀린 듯이 산줄기를 따라 계속 전진했다. 언젠가부터 경민은 캠핑에 도전했다.
장비를 구입하는 데만도 거금이 들어갔다. 어떨 땐 직장 동료와 함께 떠났지만 대부분 혼자 캠핑을 했다. 소형 자동차도 구매했다. 자동차 회사 영업사원인 친구의 권유도 있었지만 캠핑을 위해 무리해서 구매한 것이다.
캠핑은 그에게 새로운 진면목을 알게 했다. 도전이나 모험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자연이 주는 힐링 효과는 대단했기에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여행과 캠핑은 힐링의 대명사였다. 자연은 마음을 순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마음의 찌든 때를 욕망을 일시에 잠들게 했다.
또 자연은 넉넉한 마음을 품게 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악인은 없을 것이었다. 지금 경민이 가는 곳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ooo산이다. 해마다 많은 백팩커들이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리에 가까운 대장정을 두고 진행하는 산행은 고난도 이전에 그만큼 뷰가 좋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에는 벚꽃 무리와 개나리가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바위틈 사이로 진달래도 수줍게 피어 있었다. 바위 돌산을 걸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소리가 등산객들을 덮었다. 어미새 새끼새가 등산객 주변을 돌면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16킬로가 넘는 백팩을 메고서 산행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국을 오가고 있다. 어깨와 등짝이 무너져 내릴 듯 땀이 비오듯 흐른다.
가끔씩 까마귀도 날았다. 이왕 시작한 산행 끝까지 정상에 이르고 말리라. 경민은 자신에게 다짐하고 채근했다. 자! 좀 더 힘을 내자 끝까지 도전해 성취감을 누리자. 중간에 포기하면 안 간 것만 못하리. 등짝이 무너져 내리고 피곤이 엄습했다.
미니멀로 준비했다지만 가방의 무게는 16킬로가 넘었다. 슬슬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숨이 차 더 이상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눈을 떠 바라보니 정상을 500미터 앞두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반드시 정상에 올라 맘껏 뷰를 감사하며 조물주를 찬양하리라.
그는 돌산을 오르며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그 청량감이라니, 행복했다. 자연이 주는 기쁨에 온몸이 떨려왔다. 자연은 힐링이다. 평안이고 안식이다. 외치며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눈앞에 산 이름과 해발고도가 적힌 돌 표지판이 보였다. 감개무량이었다.
이 기쁨을 위해 고난의 행군을 한 것이다. 가슴 가득 환호의 물결이 들려왔다. 산 아래 초록 풍경 드라마가 펼쳐져 있었다. 양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후두둑 빗방울마저 듣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일기예보에는 전혀 없었는데 비라니?
어서 박지를 정해야겠다. 경민이 서두르는 사이 다른 등산객들도 서둘러 박지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박지(泊地)가 보였다. 거대한 바위 사이에 작은 공간이 보였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서둘러 텐트를 꺼내 피칭을 했다. 일인용 텐트라 장소가 협소해도 안성마춤이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는 랜턴을 꺼내 걸었다. 불빛이 텐트 안을 비추면서 마음속에 설렘이 일었다. 평안과 내밀한 기쁨이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초록 향기가 코끝에 다가왔다. 아늑한 느낌과 함께 행복이 가슴속에 출렁였다. 그는 발포매트를 깔고 침낭을 편 뒤 자리에 누웠다. 바람소리와 함께 거센 빗줄기 소리가 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비 소식에 횡재 만난 기분이었다. 마침 최적의 박지를 찾은 것에 감사가 나왔다. 가방 안에서 바로쿡과 생수를 꺼냈다. 발열체를 넣고 물을 붓자 치직하고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용기에 생수를 붓고 라면을 넣었다. 텐트 안에 습기가 가득 찼다.
라면은 끓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멎었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데 맛집이 따로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솔로 캠핑을 하는가 보았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혼자만의 아늑함과 자유라니. 그는 시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간단하게 혼자서 커피 타임도 가졌다. 보온병에서 물을 꺼내 믹스커피를 타 마셨다. 다른 캠퍼들은 원두커피를 직접 갈아 마시는데 비해 그는 믹스커피를 즐겼다. 고기 대신 일품요리를 선호했고 불멍은 하지 않았다. 화재에 대한 염려도 있었지만 아예 장비조차 없었다.
내일 아침에 일출 광경을 보려면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침낭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산행을 하느라 피곤한 탓인지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잠을 자면서 걱정했다. 내일 아침에 비가 오면 일출 광경을 못 볼 텐데. 새벽에 눈을 뜬 그는 텐트 밖으로 나와 날씨부터 살폈다. 어느새 비가 몀췄는지 청량감이 들었다.
밖으로 나와 정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많은 백패커들이 카메라와 장비를 들고서 일출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 주변으로 태양이 붉은 빛줄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비 구름이 걷히면서 바다 한가운데서 바닷물을 핏물처럼 물들이며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산이 바다를 품은 것인지 바다가 산을 품은 것인지 태양이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타올랐다. 세상에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모두 숨죽이며 카메라와 핸드폰으로 일출 광경을 찍고 있었다.
조물주에 대한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누군가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외쳤다.
창조주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무 멋있어요. 하느님 짱입니다.
일출 광경을 보고 내려오니 텐트 주변으로 구름이 내려와 신선이 된듯한 느낌이었다. 옆을 지나던 여자가 또 외쳤다. 하느님 정말 짱입니다. 너무 멋있어요. 여행은 특히 산행은 미지의 그리움을 향해 나가는 길이다. 힐링의 대명사 여행은 백패킹이 단연코 압권이다. 설렘과 기대감이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씻어버리고 과거와 미래를 망각하게 한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어느사이엔가 자신감과 성취감을 누리게 된다.
경민이 처음 산행을 시작했을 때는 정상은커녕 중간도 가지 못하고 도로 내려오곤 했다. 힘들거나 지치면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리 주변 경관(view)이 좋아도 무리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실패할망정 자주 하다 보니 근력도 생기고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매일같이 달라붙던 피곤도 없어지고 짜증과 우울감도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다 자연 덕분이었다. 자연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숲에서는 피톤치트를 통해 폐를 정화시켜 주었고 다리와 어깨 근육을 강화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떠남에 대한 설렘은 웬만한 일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주말만 되면 기를 쓰고 산행을 하는구나 싶었다. 사계절 중 자연이 주는 색상의 변화는 절묘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오토 캠핑보다는 백팩킹이나 트레킹을 즐겼는데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백팩킹이나 트레킹은 경비 절감은 물론 혼자 여행하기엔 안성마춤이었다.
산행을 하다 보면 유투브 방송을 진행하는 유투버들도 종종 만났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촬영하는데 기술력이 대단했다. 드론으로 촬영하는 유투버들도 있었다. 그들은 산 전체를 기하학적인 측면으로 촬영해 영상을 올리는데 탄성이 절로 났다.
산(山)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겸손을 깨닫게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할 때 조물주의 빼어난 창조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종교에서는 자연계시라고 한다. 가끔 멧돼지나 고라니 다람쥐 산고양이들도 만나는데 이 또한 행운이다.
자연을 먹이사슬로 살아가는 동물들은 인간을 적대시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욕심에 발동이 걸려 해코지할 뿐이다. 산행에는 화기를 사용할 수 없어서 비화식인 바로쿡 발열 도시락도 구매했다. 핫쿡 음식도 사용하긴 했지만 바로쿡이 더 실용적이었다.
발열팩을 넣고 미리 조리된 음식을 용기 안에 넣고 데우기만 됐다. 늘 시간에 쫓기듯 살았는데 백팩킹을 하면서 본말이 전도되는 느낌이었다. 돈을 위해 일한다에서 여행을 위해 일한다로 사고가 전환되는 느낌이었다. 돈보다는 마음의 평안이 우선이라는 일종의 등식이 성립되었다.
솔로의 장점이자 이기심의 극대화였다. 피터지게 일해야 먹고사는 경쟁사회에서 도피처를 찾은 셈이었다. 어떤 날은 산행을 하다가 유투버를 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강인한 체력 외에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만한 힐링은 없다며 카메라 앵글을 그에게 갖다대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녀는 캠퍼 중에서도 인지도가 높았다.
동영상 조회 횟수도 백만 명이 넘었다. 그녀는 산행할 때 가끔 게스트도 초대했는데 험난한 등산 코스를 거뜬하게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해냈다. 그녀는 정해진 등산코스를 따라 산봉우리마다 꼭 등반하고야 마는 뚝심이 있었다. 낙엽에 발목이 푹푹 빠지고 눈밭에 나뒹굴어져도 반드시 정상에 도착했다.
한번은 밧줄을 타고 산을 오르는데 옆이 천길 낭떠러지였다. 강철같은 그녀도 소리를 빽 지르며 공포심을 나타냈다. 산세가 보통 험한 정도가 아니었다. 발 한번 잘못 내딛으면 그대로 천국행이었다. 뾰죽뾰죽한 기암 돌산을 오르면서도 멋있다 예쁘다를 연발했고 환호했다.
자연의 극치(極致)였다. 산행 중에도 카메라를 향해 끊임없이 멘트를 날리며 구독자에게 선물같은 기쁨을 주었다. 산 정상에 이르러서는 꼭 인증샷을 남겼고 박지를 찾아 텐트를 쳤다. 그녀가 펼치는 먹방도 맛집 수준이었다.
예상 외로 그녀는 전문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교환 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고 자신의 경력을 노출하기도 했다. 산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도 없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그는 근무하다가도 순간 순간 산행을 하고 싶어 몸부림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기 퇴직도 불사할 정도였다. 추운 겨울에는 설산에 올라 박지를 정하고 텐트를 치는데 피칭하는 데도 익숙해 전혀 힘들지 않았다. 뼛속까지 스며든 냉기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행복감은 더 충만했다. 바닷가를 중심으로 노지 캠핑을 하다 보면 가끔 황제 캠핑족을 만날 수 있었다.
수억을 호가하는 황제 캠핑카에 각종 고급 장비를 놓고 커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데 곧바로 유투브로 생중계 되었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낀 채 절대로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다.
럭셔리한 황제 캠핑족들은 특히 바닷가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묘한 질투심 같은 게 솟았다. 그들은 인간을 보호할 목적으로 주어진 자연을 거리낌 없이 훼손하기도 했고 고급 장비를 자랑하는 뉘앙스도 자주 풍겼다.
가끔씩 개나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캠핑족들도 있었다. 캠핑장에는 산에 사는 고양이들이 나타나 먹이를 얻어먹고는 사라지곤 했다. 어떤 여자는 고양이에게 줄 사료를 잔뜩 가져와 고양이에게 던져 주었다. 자연 사랑에 동물사랑까지 겹쳐지고 있었다.
산야도 그렇지만 바다여행도 평안과 위로를 주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캠핑을 할 때면 자유와 평안이 가슴 속을 꽉 채우는 느낌이었다. 자연은 사람이 줄 수 없는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자연의 넉넉한 품속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삶을 버틸 수 있는 내적 근육을 강화시켜 주었다.
어떤 여성 캠퍼는 일상처럼 산행을 즐기는데 자연인이 희망사항이라고 했다. 그녀는 항상 솔로캠핑을 즐겼다. 가진 건 힘밖에 없다면서 20킬로에 가까운 가방도 간단하게 들어 어깨에 맸다. 화로대를 꺼내 요리를 하고 먹방을 하는데 맛있다 소리가 연거푸 나왔다.
경민은 얼마 전 직장 근처에 있는 안산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은 자연 외에 인공이 첨가된 산이라 여겨졌다. 입구에 물레방아가 있는데 실제로 방아 기구가 보였다.
산자락에서는 인공폭포가 장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공이라고 해도 결코 규모가 작지 않았다. 안산은 산세가 험하지는 않았지만 산책로 치고 쉬운 길도 아니었다. 나무 계단을 올라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 입가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정말 멋지다.
그 이외에 어떤 말이 또 필요할까. 안산 전체가 벚꽃으로 파묻혀 흰 눈산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안산에선 등산객이 아닌 산책객들이란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대부분 젊은층으로 연인이나 가족들이 많았다
산 중턱에는 공연무대도 있었다. 객석도 보였는데 어느새 노점상들이 몰려들어 커피와 옛날 과자 등을 팔고 있었다. 벚꽃 잎이 흩날려 사람들 머리 위에 옷가에 앉았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여자들도 있었다. 옷을 갖춰 입은 반려견은 암수가 맞는지 서로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고 있었다.
온몸이 흰털로 뒤덮인 포메리안은 수컷인 푸들에게 다가가 몸을 비비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견주인 여자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얘, 너는 여자애가 자존심도 없니? 어디 여자애가 남자한테 꼬리를 치고 그러니?”
주변에 웃음이 확 퍼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메리안이 푸들 앞에 벌러덩 눕더니 다리를 쫙 벌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포메리안 견주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얘, 너는 창피하지도 않니? 어디 여자가 남자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거니? 내가 너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
포메리안은 푸들이 단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견주가 아무리 목줄을 당겨도 안 떨어지려고 발악을 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견주는 목줄을 계속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저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다니까.”
그러자 푸들 견주도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안산은 인공으로 조성된 꽃밭도 보였는데 튜울립이 수선화가 무리져 피어 있었다. 튜율립은 고매한 꽃의 여왕처럼 보였다. 꽃망울이 피지도 않았는데도 화려한 색상으로 눈길을 당겼다. 수선화는 사연 많은 여자처럼 노란 꽃잎을 시위하듯 보여 주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산이 있다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봄을 지내자. 경민은 속으로 말했다. 그때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여자가 지나가는데 얼핏 봐도 수준급의 미인형이었다. 곁에 선 남자 역시 모델을 연상시킬만큼 꽃미남이었다. 둘은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일부러 커플룩을 연출하는 듯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집중했다.
혹시 연예인 아닐까? 어떤 여자가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여자가 경민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경민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경민도 그녀와 눈빛이 딱 마주쳤다.
아! 그의 마음속에 소리없이 아픔과 감동이 밀려왔다.
진혜였다. 얼마만이던가. 대학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둘은 캠퍼스에서 유명한 CC였다. 추억이 10년이라는 세월의 수레바퀴를 타고 나타났다. 아픔이 상처가 가슴을 헤집고 되살아났다. 여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머뭇거리는 동안 남자가 손을 잡아끌며 채근했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본 거야?
여자는 남자의 잡은 손을 풀더니 그대로 내리막길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마치 무슨 급한 일을 만나기라도 한 듯이. 해후(邂逅)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해후(邂逅) 오랫동안 헤어졌다 우연히 만남이란 뜻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반가웠고 황홀했다.
세월이 지나도 그녀는 여전히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유행가 가사처럼 V라인 S라인으로 사람들이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옆에 섰던 남자는 누구일까? 남편?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공식적인 만남이거나 연인 사이 같아 보였다. 부부 사이라고 보기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면 애인?
그럴지도 모르지.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누가 보아도 선남선녀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연예인 부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차림도 요즘 젊은이들처럼 자유분방했다. 꼭 끼는 청바지에 짧은 셔츠 차림이 20대처럼 보였다.
대학 시절, 경민과 진혜는 늘 같이 붙어 다녔었다. 외모에서부터 둘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도서관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리고 캠핑도 늘 함께 다녔다. 둘은 감정에 충실했지만 선은 넘지 않았다. 젊었지만 절제할 줄 알았고 서로를 배려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진혜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이기적이었다. 절대 손해 보거나 양보할 타입이 아니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자기는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집안이 결코 부유한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진혜는 한번도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경민이 다른 남친과 달리 순진하고 외모도 번듯한 편이니 그냥 재미 삼아 만나는 거라고 했다.
어쨌든 진혜는 퀸카 중의 퀸카였다. 너도 나도 그녀를 여친 삼고 싶어했다. 그러고 보면 경민은 행운아인 셈이었다. 진혜는 취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스펙도 쌓지 않았고 공부에도 흥미가 없는지 졸업하는 걸로 만족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얼굴 보기가 힘들어지더니 결국 소원해졌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전히 취준생인 그를 두고 대놓고 말했다. 나는 어떤 가능성이나 모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이든 확실한 게 좋다. 불투명한 미래를 놓고 승산을 걸거나 손해를 감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감정은 일시적인 거라 믿을 게 못 되니 자신은 현실을 더 중시할 것이라 했다.
한마디로 불확실한 경민의 미래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때 여자애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
그녀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절감했다. 그녀와의 절연은 아픔과 상처가 되어 오랫동안 그의 뇌리를 잠식했다. 그러나 닥친 현실은 가혹했다. 따로 뒷배가 없었던 그는 취업을 위해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다.
거듭되는 실패와 도전을 한 결과 간신히 공직자가 되는 행운을 안았다. 공무원은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관문이었다. 전공과 하등 관련 없는 직종이었다. 그것도 하위직이었다. 더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다. 힘들더라도 여기에서 멈추고 안주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날이 갈수록 후회가 몰려왔다.
취업을 위해 쌓았던 스펙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고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느라 가끔 오류도 발생했다. 간신히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설움이 마음속에 몰려왔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말단 공무원도 친절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해마다 공공기관 청렴도 조사를 해서 불이익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이다. 박봉이라 해도 업무가 간단치가 않고 책임져야 할 분량도 많았다. 그래도 자신은 나은 편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취준생 딱지를 떼지 못하고 캥거루 노릇을 하는 축들도 많았다.
그들은 되지 않게 금수저 흙수저 타령을 해댔지만 그것이야말로 무능력의 표시가 아니던가. 공무원이 안정적이라 해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가끔씩 이직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리고 세월은 AI라는 인공지능이 나타나면서 있던 직업마저 사멸시키는 괴물 역할을 했다.
AI는 언제 경민의 목숨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지 몰랐다. 대인(對人) 업무를 하느라 시빗거리가 발생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상부기관에 고발하겠다는 파렴치범도 있었고 근무태만이라는 얼토당토한 경고를 들은 적도 있었다. 옛날 말로 치자면 복지부동이었다. 경민의 성격 중의 맹점이 소심함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겁이 많고 도전정신이 희박했다.
모험하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했고 언제나 안정된 것만을 원했다. 한마디로 외골수였다. 면접에 합격한 일반 회사도 있었지만 영업직이 대부분이고 수입도 일정치 않은 데다 무엇보다 시간에 많은 구애를 받았다. 시간 외 근무 수당이 있었지만 그것도 피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안전빵을 택하고 말자. 그는 고졸이나 다름없는 하위직 공무원을 택했다. 그야말로 박봉이었다. 생전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났다. 말단 공무원으로 평생을 마친 아버지는 식구들 배를 곯리지는 않았지만 무능력이란 단어를 일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살았다.
그나마 시골에 가진 전답으로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지만 돈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가족에게 병이 발생하면 뭉텅이 돈이 들어가는데 그때마다 돈 꾸러 다니는 모습에 그는 여간 부아가 나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그에게 장남 역할 제대로 하라고 채근할 때면 머리끝이 쭈볏할만큼 진저리가 났다.
요즘같이 비혼 무자식이 대세인 시대에 장남 역할을 강조하다니, 그는 고향에 발걸음을 내딛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볼 때마다 취직은 했냐, 사귀는 여자는 있냐? 여자를 볼 때는 맏며느리 역할 잘할 건강하고 생활력 강한 여자를 골라야 한다. 고리타분한 시대에 뒤떨어진 말만 했다.
아무리 현 세태를 이야기해도 전혀 듣지 않았다. 요즘 세상은 안 그렇다니까요 말해도 자기 고집만 내세웠다. 저러니 꼰대 소리를 듣지. 그는 냅다 소릴 질렀다. 아버진 세대차이란 말도 모르세요? 누가 요즘 같은 세상에 봉제사하고 시부모 노후 봉양할 맏며느리 있다고 툭하면 맏며느리 타령하세요?
그러니께 니가 역할을 잘혀야 할 거 아니냐?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인께.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귀에 경읽기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제사 지내줄 손주 타령도 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기로 조상님 제사를 잘 모셔야 복을 받는 거란다. 그러면서 기독교 믿는 며느리가 들어와 종중 제사를 폐했다는 이웃 이야기를 하면서 거품을 물었다.
그의 부모님은 20대 초반에 결혼했지만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야 아들인 경민을 얻었다. 그때 그의 조부는 이제 죽어도 원이 없다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경민의 귀에 대고 골백번도 더 했다. 경민은 명절 때 말고는 고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명절 때 미혼 자녀에게 결혼이나 취직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그렇게 조언하는 데도 그의 부모는 멈추지 않았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은 절대 건너뛰지 않았다. 하소연과 함께 진저리 나는 잔소리를 하고는 언제 또 올 거냐고 부모 걱정은 안하고 사냐고 거푸 대답을 요구했다.
한번은 경민이 근무하는 직장으로 찾아와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그의 이름 석자를 대면서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직원들 사이에서 그는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안내하는 여직원에게 나이와 결혼여부까지 묻더니 우리 아들 어떠냐고 의견까지 제시했다.
그 일로 인해 경민은 그 여직원한테 오해를 사 큰 곤욕을 치렀다. 그녀는 경민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부모님까지 소환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날 부모는 경민이 살고 있는 원룸에 와 보고는 또 한바탕 잔소리 폭탄을 늘어놓고 갔다. 결혼도 다 때가 있다. 아까 보니 그 입구에 있는 아가씨가 인물도 좋고 착실해 보이던데 어떠냐며 또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단번에 빡쳤다. 하지만 고집 센 부모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알아서 할 테니 제발 고향에서 맘 편히 계시라고 하고는 돌려보냈다. 그의 부모도 눈치를 챘는지 알아서 하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날마다 기력이 쇠하는 부모를 보는 노릇도 쉽지 않았다.
경민도 부모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주변에서 결혼에 실패하는 커플들을 볼 때마다 차라리 싱글이 낫다고 매번 다짐하는 그였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삼십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직장생활에도 이력이 붙으면서 그에게도 소개팅할 기회가 주어졌다.
경민 역시 보통 남자들처럼 맞벌이가 필수였다. 자신의 월급 갖고는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었다.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경민의 외모에 마음이 끌렸다가 계산기를 두들겨 보고는 포기하고 돌아섰다. 돈 걱정하며 사느니 차라리 싱글이 낫지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있다? 경민은 순간 진혜의 모습을 떠올렸다. 밝고 경쾌하면서도 이기적인 그녀의 면모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경민이 주변에도 비혼족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여전히 돈의 가치에 두면서도 한사코 희생이나 봉사는 거절했다.
경민은 진혜 커플이 떠난 자리에 서서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흰 벚꽃이 구름천지가 되어 펼쳐져 있었다. 바위틈 사이로 수줍게 핀 진달래도 보였다. 산책객들은 계단을 통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봄바람이 홍제천 물결을 일렁이며 하늘거렸다.
마음속에서 진혜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정식 부부가 아니라면 그 남자와는 무슨 사이일까? 애인? 그는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는 비탈길을 내려와 인공폭포 쪽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주변을 지나던 여중생들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와! 저 아저씨 멋있다 잘생겼다.
경민은 캠핑을 하면서 가끔씩 진혜를 떠올렸다. 대학 시절 그녀와 캠핑을 떠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미래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안 한 것 같다. 진혜는 주로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를 많이 했고 경민은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한 것 같다.
서로 생각하는 방향과 가치관이 달랐는데 어떻게 교제를 이어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희한했다. 트레킹을 하던 어느날 경민은 여자 유투버로부터 게스트로 초대받는 행운을 얻었다. 그녀는 큰 눈동자에 시원 시원한 성격으로 멘트도 재치있게 잘했다.
방송가로 진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갔는데 그는 깜짝 놀랐다. 경민 외에도 게스트가 두명이나 더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남자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자 캠퍼였다. 게스트 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갔다.
가파른 산길을 걸어가는데 그는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바위산을 지나 정상을 오르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중간 기착지에 발포매트를 깔고서 식사를 하는데 맛집이 따로 없었다. 고된 산행 끝에 밥맛이라니 시장이 반찬인 셈이었다.
간단하게 목을 축이고 나서 다시 산행길에 올랐다. 산 전체를 물들이며 노을이 지고 있었다. 모두 입가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와! 너무 멋있다. 바위 암벽을 타고 거친 돌산을 올라 간신히 정상에 도착했다. 거센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고운 황토에는 큰 바위에 쓴 산 이름과 해발 높이가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이 무거운 돌덩이를 어디서 구해 글자를 새겼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각자 가까운 곳에 박지를 정해 텐트를 쳤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주변을 산책한 뒤 텐트로 돌아왔다.
안에다 발포매트와 침낭을 깔고 백팩을 모로 세웠다. 다시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는데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별을 다 구경하다니 감개무량이었다.
이 맛에 백패커들은 등산을 하는지 모른다. 사방이 고요했다.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산짐승 소리도 들려왔다. 어둠이 이곳에선 두려움이 아닌 평안으로 느껴졌다.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다른 텐트들은 다 조용했다.
벌써 꿈나라로 직행한 것이다. 잠결에 바람소리와 짐승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비행기 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꿈속에서 그는 열기구를 타고 산등성이를 날고 있었다. 마치 날개가 달린 천사처럼 지상을 내려다보며 엄청난 희열을 만끽했다.
이튿날 새벽,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일찍 기상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안개 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붉은 해가 장밋빛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온 산야를 빨갛게 물들이며 대 서사시가 당장이라고 나올 것 같았다.
장엄하고 신비한 자연의 광경 앞에 모두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거대한 침묵이 자연을 오히려 환호하며 조물주의 솜씨를 강변하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트자 모두 떠날 채비를 했다. 이젠 하산해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산길에는 각각 흩어져 내려갔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그게 바로 인생이라면서. 돌아가는 길은 허무와 만족감이 빗금치듯 마음속을 오갔다. 긴장감이 수없이 마음을 드나들며 알 수 없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직장으로 복귀한 경민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신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자신이 근무하는 부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식이었다. 모두 우왕좌왕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 허둥대는 모습도 보였다. 직원들은 모두 의심 반 추측 반 헛소문이길 바랐다.
경민은 통장에 든 예금 액수를 계산했고 앞으로도 계속 들어갈 보험료도 생각했다. 장기 저축성 보험도 있었고 실비보험과 자동차 보험 주택청약 예금도 있었다. 갑자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이 조여왔다. 졸지에 직장을 쫓겨나 힘들어하던 지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그는 속으로 적이 안심했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겉으로는 걱정해 주는 척했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는 평소에도 타인의 행 불행에 대해 늘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일종의 냉소주의였다. 그 냉소주의에 발등 찍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예단하기는 이르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기로 정부 관할 기관인데 쉽게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여론이라는 게 때로는 방패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가끔씩 기자들도 나타나 인터뷰를 진행하다 가곤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존폐여부도 수그러드는 분위기였다. 그러면 그렇지.
취미생활도 너무 과하면 독이 될까. 무엇이든 한번 꽂히면 몰빵하는 경민이었다. 질리고 질려야 멈추고 돌아서는, 그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경민은 공휴일만 되면 캠핑을 떠나고 싶어 안달을 했다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캠핑장에 가 있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자연이 주는 기쁨은 새롭고 경이로웠다. 계절마다 새로운 색상으로 옷을 갈아입은 초목은 눈 호강을 시켜 주었다. 새소리 바람소리 숲 향기 장작 태우는 냄새도 향기로웠다. 꽃향기를 맡고 찾아오는 나비와 벌도 있었지만 모기와 해충도 많았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지만 기쁨은 두 배 이상 컸다. 캠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캠핑장에서 하는 오토 캠핑과 산이나 노지에서 하는 백팩킹 자동차 안에서 하는 차박이 있다. 캠핑의 진수는 한여름 빗소리를 들으며 즐기는 우중 캠핑과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와 함께 밤 풍경을 즐기는 설중 캠핑이다.
둘 다 극치(極致)를 이룬다. 유투브 동영상으로 시청해도 장면 장면이 환상적으로 예쁘고 낭만의 절정을 이룬다. 겨울에는 빙박도 가능하다. 얼음산을 기어오르고 꽁꽁 언 얼음 위에 텐트를 치고 얼음 낚시를 한다. 빙박을 할 때는 얼음의 두께를 살펴야 한다. 빙판 위에 텐트를 치고 야전 침대를 놓는다.
그 위에 담요와 에어 매트를 깔고 침낭과 우모복을 입고 자는데 침낭 안에 핫팩을 넣어 온돌방처럼 뜨끈 뜨끈하게 한다. 전혀 추위를 느낄 사이가 없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자연의 품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캠퍼들은 행복과 기쁨을 만끽한다. 일탈에서 오는 여유로움이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삶을 풍요롭게 한다.
캠핑카에서 취식과 취침을 하는 황제 캠핑도 있다. 그들은 카라반을 별도로 이용하는데 바닷가 근처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텐트의 종류도 다양하다. 원터치 텐트로 부챗살처럼 퍼지는 사각형이 있고 타원형도 있다. 산 정상에 올라 데크 위에 설치하는 소형 텐트도 있다.
기본적으로 텐트 외에 이너 텐트와 쉘터 타프가 있어 비와 바람막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외에 별도의 공간 없이 침낭과 발포 매트만 넣고 자는 비비색도 있다. 비비색은 몸은 침낭이 든 소형 텐트 안에 얼굴은 하늘을 향해 있어 별도 볼 수 있다.
요즘은 텐트가 대형화 된 것이 많은데 그만큼 용도도 다양하고 실용성이 크다. 우레탄 창을 통해 개방감과 함께 바깥 풍경도 감상할 수 있고 화목 난로를 설치해 따듯한 겨울밤을 보낼 수 있어 아늑한 감을 준다.
캠핑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백퍼센트 조립식이다. 의자 탁자 침대 버너 조리 도구도 다 조립식이다. 텐트를 칠 땐 우선 뷰가 좋은 곳으로 해야 한다. 물소리와 함께 빗소리를 들으며 하는 감성 캠핑은 낭만스럽다. 눈앞에 펼쳐지는 녹색 풍경과 텐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오감 만족이다.
캠핑장에서 하는 오토캠핑은 cctv가 설치돼 있어 안전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편의점이나 샤워실 등이 갖춰져 있어 편리하다. 주차 공간도 별도로 이용할 수 있고 백패킹 보다는 힘이 덜 드는 면에서 초보자들에게 편리하다.
경민은 처음에는 오토 캠핑을 주로 이용했지만 점점 산행을 즐기게 되었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대자연을 만끽하다 보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들었다. 가을이면 낙엽에 발목이 푹푹 빠지면서 걷는 기분도 좋았고 겨울이면 눈썰매를 타면서 동심을 즐기기도 했다.
그때는 미리 플라스틱 재질로 된 눈썰매를 준비했다. 그는 주로 정상적인 등산로만 이용했는데 지름길은 그만큼 위험도가 높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조난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철이면 일부러 혼자서 백패킹을 했다. 유명하다는 험산은 다 갔던 것 같다.
강원도에 있는 험한 산을 등반하다 중간에 지쳐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때 아득한 느낌으로 하늘이 빙빙 도는 착각을 일으켰었다. 마침 주변을 지나던 등산객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경민은 산행하면서 많은 백패커들과도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모두 산을 좋아하는 자연인들이었다. 그들은 직장을 은퇴하고 나면 꼭 심심산골에 들어가 자연과 벗하며 살고자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자연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자 은총이자 가장 큰 특혜였다.
속세를 벗어나 산 공기와 계곡을 벗하며 지내는 것은 그들의 로망이자 소원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요즘같이 미세먼지 황사가 극성인 세상에 그게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자연은 마지막 안식처였다. 요즘 은 웬만한 산골에도 인터넷이 설치 안 된 곳이 없다.
유투브 방송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의료 시설이 열악해 불편할 뿐이다. 전원 주택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귀농과 전원주택에 관한 사기 기사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처럼 자연인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꿈은 자유고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경민도 그 꿈의 행렬에 어느덧 동행하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여전히 부모의 성화가 빗발쳤지만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소중한 자유가 좋았다. 그 자유를 향해 항상 전진하고 싶었다.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이 뒤숭숭했고 경민은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 습관처럼 산행을 즐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몸에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면서 고혈압 증상이 발생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운동 중에서도 가장 열량이 많이 소모되는 산행을 하는데 고혈압이라니?
나중에야 알았다. 산행을 하면서 즐기는 고열량의 가공 식품과 지나친 음주와 흡연이었다. 백팩커들은 산행을 하면서 술을 꼭 지참했고 고열량의 가공 식품 그것도 햄이나 소시지 삼겹살 곱창등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음식을 선호했다. 조리방법이 간단했기 때문이다.
산행을 갔다 와서도 경민은 유독 그런 가공식품을 좋아했다. 거의 중독 증상이었다. 퇴근 후의 술 한잔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간 수치가 높게 나왔다. 경민은 생각했다. 앞으로는 술 담배를 줄이고 가공식품과 고열량 식품도 다른 걸로대체해야겠다. 그럴지라도 주말마다 이어진 산행을 멈출 수는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중독증세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답답한 도심을 벗어나 캠핑장이나 산행을 위해 자동차 페달을 밟을 때면 저절로 마음이 설렜다. 신세계로 나가는 환상을 보는 듯했다. 몸이 너무 힘들 때면 캠핑장을 찾아 피톤치트를 했고 여유가 있을 때면 산세가 험한 산행을 감행했다. 그가 산을 찾을 때마다 아는 유튜버들이 곧잘 눈에 띄었다.
그들 역시 경민처럼 삶의 목적이 산행인 것처럼 들떠서 방송을 진행했다. 시청자들에게 좋은 뷰를 보여 드리기 위해 산행을 하고 있다며 말을 맞추었다. 한번은 기암괴석이 있는 돌산을 오를 때였다. 거대한 바위는 평평한 것도 많았지만 창끝처럼 뾰죽한 게 더 많았다.
경민은 비교적 평평한 바위를 골라 산행을 했다.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몸이 기우뚱하며 곤두박질 칠 것 같았다. 산세가 험할수록 강풍이 불어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백패커들은 포기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끈질기게 올라갔다. 투지가 대단했다.
바위틈에 핀 형형색색의 꽃도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었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는 용기와 힘을 더해 주었다. 폭풍우를 맞으며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는 엄청난 성취감에 기쁨이 충만했다. 산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 무아지경이었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날도 경민은 백패킹 차림으로 설산에 올랐다. 이미 많은 등산객들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경사로를 오르고 있었다. 습기를 차단하는 패치와 아이젠을 착용했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변이 온통 설국이었다.
나뭇가지마다 쌓인 눈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상고대라 불렀다. 그대로 눈밭에 뒹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어떤 남녀는 눈밭에 그대로 엎드러졌다. 그들은 마냥 행복한 듯 너무 좋다. 너무 좋다를 연발했다. 산행을 하다말고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그들은 박지를 찾아 텐트를 설치하거나 도로 산을 내려갔다. 물이 흐르는 계곡 곁에 텐트를 치거나 얼음 빙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눈길을 헤치고 정상까지 갈 자신이 없다고 했다. 경민도 그들처럼 도중에 포기하고 적당한 박지를 찾아 텐트를 치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날의 수많은 산행 경력이 그를 자꾸만 채근했다. 정상에 이르면 더 많은 텐트촌을 보게 될 것이다. 각양 각색의 텐트들이 설국의 풍경과 함께 설중 캠핑의 진수를 맛보게 할 것이다. 경민은 눈길에 수없이 나뒹굴어지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아이젠을 착용했는데도 발밑이 미끈거렸다.
아뿔싸. 발밑을 보니 아이젠 끈이 끊어져 있었다. 조금 전 빙판길을 지날 때 느낌이 이상했었다. 자꾸만 미끌어지고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더니 기어코 아이젠이 수명을 다하고 만 것이다. 그만 하산할까 싶다가 나뭇가지에 걸린 리본을 보니 정상이 거의 다 왔음을 알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쳐왔다. 감격스러웠다. 오늘도 태양은 인간을 향해 혜량(惠亮)을 베풀고 있었다. 사방이 눈 천지로 눈 호강 마음 호강이 이어지고 있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더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근처에 마치 흰 이불솜처럼 보이는 눈밭이 있어 털썩 누워버렸다.
순간 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어 몸이 왜 이러지? 아득한 공포와 함께 몸이 어딘가에 쿵하고 내던져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이후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꼭 악몽을 꾼 것 같다. 이튿날 그가 눈을 뜬 곳은 병원 침대였다.
머리에 붕대가 감겨져 있고 발목에 무언가 단단한 게 옥죄고 있었다. 눈을 뜨니 환한 불빛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여기기 어디지? 그는 눈을 들어 사방을 살폈다. 자기가 누운 옆으로 환자들이 줄로 연결된 기구를 달고 있었다. 내가 사고를 당했던 거구나. 그렇다면 어제 산행길에서? 거기서 딱 생각이 멈추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여기가 어디죠? 제가 왜 여기에 있나요?”
“어제 등반 사고로 입원하신 거예요?”
“네? 등반 사고요?”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누우셨던 곳이 그대로 푹 꺼지는 낭떠러지 같은 곳이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던 헬기가 있어 빠르게 구조되신 거예요, 해마다 등반사고가 많이 발생하긴 하지만 그나마 운이 좋으셨던 거예요. 다른 산악인들이 도와 주셨길래 망정이지 큰일날 뻔했어요.”
간호사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어디가 얼마나 다친 거예요? 왜 발목이 움직이지 않죠?”
“골절 되었어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네? 골절이요?”
그는 재차 물으며 머릿속으로 장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마음에 칼이 꽃힌 기분이었다. 이어 병원비와 간병인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간병인이란 단어가 생각난 걸까 스스로 아연했다.
“다행히 뼈가 부서진 건 아니라 수술 받으시고 핀으로 고정한 다음 깊스를 하시면 회복이 되실 거예요. 수술 후 조기에 운동 요법이 이루어지고, 이르면 수술 다음날부터 관절을 움직이는 재활이 시작됩니다. 골절 부분은 고정구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일 때의 통증은 있을 겁니다. 치료 기간은 완치까지 2~3개월 소요됩니다.”
“네? 2-3개월이나요? 그런데 양쪽 발목이 다 골절된 건가요?”
“오른쪽입니다.”
그는 그제서야 발목을 내려다 보았다.
휴! 그나마 한쪽만 다친 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낭떠러지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구조된 걸까? 하긴 지나던 산악인들에게 발견됐다고 했지. 누군지 모르지만 나중에라도 꼭 사례를 해야겠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늘이 도운 셈이다.
“퇴원하신 후에도 재활치료는 계속 받으셔야 합니다.”
간호사는 기계적으로 말을 마치고는 병실을 나갔다. 지루한 병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보호자를 묻는 간호사의 말에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만일 고향의 부모님이 아셨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침 기회라 싶어 또 끝없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러게 진즉 결혼했더라면 아내의 보살핌을 받지 않았겠느냐. 뭐 할 일이 없어 추운 날 산에는 기어 올라가지고 생고생을 하느냐, 잔소리 폭탄이 이어질 게 틀림없었다. 마침 그가 입원한 병원은 통합 간호 병동을 운영하고 있어 따로 간병인을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곧이어 날아든 병원비 정산에 그는 넋이 나가는 줄 알았다. 헬기로 이송하느라 들어간 비용에다 수술비 등 치료비가 엄청났다. 실비보험을 처리했는데도 액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나왔다. 치료 과정도 너무 복잡하고 힘들었다.
재활 치료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라 더 짜증이 났다. 등산할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는데 재활치료는 좀처럼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더 괴로웠다. 그는 빠른 퇴원을 원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직장은 병가 처리를 하긴 했지만 대타로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언제 퇴원하느냐는 문자가 수시로 날아왔다.
퇴원한다고 자유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병원 측에서 맞춰준 신발을 신고 출근하는데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꾸준히 재활치료도 다녀야 했고 삶이 지루하고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주말만 되면 캠핑에다 등산에다 바빴던 지난날이 그리워졌다.
완쾌만 되면 원없이 산행을 가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그러나 의사 말로는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겨우 안정되는가 싶더니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그동안 치료받느라 운동을 못한 탓인지 뱃살이 늘더니 몸무게가 상승곡선을 타고 말았다.
또다시 고혈압에 당뇨증세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나이 사십도 안 됐는데 기가 막혀 눈물이 나왔다. 그는 생각했다. 등산할 때 버티던 힘으로 식사 조절을 하자. 그래,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을 하자. 등산이 헬스클럽으로 바뀐 형국이었다.
죽기살기로 식사 조절을 하고 운동을 한 결과 혈압과 혈당 치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또다시 캠핑이 등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가방을 챙겼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의사가 했던 경고성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가방을 챙겼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또다시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불길한 상상에 휘말렸다. 뉴스에 산불 기사가 나오자 이번에는 산행을 갔다가 불길에 휩싸이는 건 아닌가 걱정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서는 요동치듯 전에 갔었던 캠핑에 대한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 유혹인지 설렘인지 자신도 헷갈렸다. 딱 한번만 갔다 오자 딱 이번만. 하지만 매번 망설이다 끝났다. 대신 그는 매일 유투브로 캠핑 동영상을 시청했다.
대부분 솔로캠핑이 많았는데 대리만족 효과가 있었다. 어떤 남자 백퍼커는 험한 바위틈 사이에 타프를 설치하고는 계속 영상을 내보내고 있었다. 강풍에 타프가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그는 낭만이라고 외쳤다. 라면과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도 낭만이라고 외쳤다.
뾰죽한 바위 옆에 침낭을 놓고 잠을 청하면서도 낭만이라고 외쳤다. 그는 낭만가이가 틀림없었다. 강풍에 타프가 찢어지고 심하게 요동쳤다. 겨우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조차 그는 낭만이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하는 낭만은 혼자라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경민도 백퍼센트 공감했다. 솔로가 대세인 세상이다. 자유와 낭만만 있다면 인생은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것일 게다. 피터지게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슴 조이지 않아도 되는 낭만 가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캠퍼들의 바람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에 목숨 거는 이유가 풍요로운 삶과 노후대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몸을 혹사하고 밤잠도 줄여가며 경쟁의식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우다, 한순간에 미래가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언젠가 보았던 인터넷 기사 글이 떠오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그럼에도 생사화복과 미래는 오롯이 절대 주권자의 몫이다. 지나치게 미래에 대한 변수에 올인하느라 현재를 혹사하다 보면 한순간에 미래가 날아갈 수도 있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오히려 미래의 포석(布石)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다소 추상적이긴 했지만 공감되는 측면도 있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당장에 닥친 급한 불 끄기도 힘든 판에 정신적인 풍요로움 좋아하시고 있네.
일분 일초 이후의 일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 아니던가. 미래는 절대자에게 맡기고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연을 향유하며 살자. 이 또한 창조주가 허락한 특혜가 아니던가. 경민은 어느덧 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열심히 재활치료에 전념했고 완치 판정이 내려지자마자 등반 길에 올랐다.
답답한 도심을 떠나 또다시 대자연의 풍광 속에 몰입하자 세상에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연둣빛 나뭇잎이 계곡 물소리와 함께 봄의 환상곡이 온 산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코끝에 와 닿는 상큼한 산공기는 폐를 정화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야생화가 등산객들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험한 돌산을 오르고 뾰죽한 바위 틈새를 지나는데 갑자기 허리가 삐긋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강타했다. 그는 슬그머니 백팩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현기증이 일더니 산봉우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이 뒤로 휘청이더니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진입로 입구라 주차장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풀린 다리 근육에 다시 힘이 주어졌다. 백팩을 들어 어깨에 올리는데 어디선가 음률이 들려왔다. 피아노 연주소리였다. 언젠가 들었던 밝고 경쾌한 멜로디에 힘이 솟아났다.
경민은 다시 산행길에 올랐다. 오랜만의 산행에 다리 근육이 놀란 것 같았다. 무거운 백팩을 감당하느라 허리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다. 경민은 당초의 예정을 바꾸어 산 중턱에 박지를 정하고 타프를 쳤다. 발포 매트를 깔고는 그대로 누웠다. 행복했다. 산바람이 온몸을 맛사지하듯 휘드르며 지나갔다.
평안이 마음속에서 방금 전 들었던 음률과 함께 솟어났다. 그는 보온물통을 열어 커피 한잔을 타서 목을 축였다. 얼마 전 유튜브 동영상에서 보았던 남자 백패커의 말이 생각났다. 이 또한 낭만입니다. 그도 속으로 외쳤다. 그래 이 또한 낭만이다.
의미도 불분명한 감사의 말이 마음속에서 자꾸만 생각났다. 타프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파열음이 났다. 그가 누워 있는 타프 옆을 지나며 등산객들이 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정상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은 정상을 향해 가고 싶었지만 몸이 지쳐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고 좋았다. 푸른 삼림은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듯했고 찌든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자연만한 힐링은 없다. 창조주의 솜씨는 과학을 능가하고 인공과 견주할 수 없다. 그는 오랜만에 하는 산행을 두고 감성이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누워 휴식을 취한 다음 하산 길에 올랐다. 정상에 이르지 못한 아쉬움은 다음에 풀기로 하고 비탈길로 접어드는데 희열로 가슴 가득 몰려왔다. 돌 틈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천상의 음악소리 같았다. 천사가 연주한들 저만하랴. 자연이 주는 기쁨은 그 어느 것과 견줄 수 없다.
자연의 향취는 고갈된 감성을 충족시켜 주었고 근심 걱정조차 녹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자연의 힘이고 낭만이다.
경민은 유튜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아쉬움과 평안이 수없이 마음속을 지나갔다. 직장에 복귀한 그는 한의원에 가서 침치료를 받았다. 삐긋했던 허리가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다행히 심한 정도는 아니어서 생활에 무리는 없었다.
당분간 산행도 쉬기로 했다. 일상에서 산행이 빠지자 알 수 없는 허무가 찾아왔다. 전에는 사느라 바빠서 느껴보지 못했던 외로움이 밤마다 찾아와 잠을 설치기도 했다. 또다시 유투브 캠핑 동영상에 몰입했다. 동영상을 볼 때마다 산행에 대한 의지가 샘솟듯 솟았다.
저들이 갔던 산행 코스를 나도 반드시 해내고야 말리라. 다양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대리만족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퇴근 후 컴퓨터 앞에서 캠핑 동영상을 보는데 젊은 남녀가 황제 캠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바닷가 근처에서 카라반을 이용해 고급진 요리와 함께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장비 하나 하나가 고가(高價)로 보였다. 요리는 주로 남자가 했는데 영화배우로 보일만큼 인물이 출중했다. 그가 그릴에 있는 고기 한점을 구워 여자에게 내미는데 경민의 시선이 거기서 딱 멈추었다. 진혜였다.
남자의 눈빛에서 여자를 향한 깊은 사랑과 배려가 느껴졌다. 마치 나만큼 아내 사랑하는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였다. 구독자들에게 뭔가를 잔뜩 과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안산에서 그들을 보았던 봄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커플 세트로 입은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던.
그리고 경민과 눈이 마주치자 벚꽃 잎이 흩날리던 산자락을 뛰어서 내려가던 진혜의 모습. 그때 가슴이 아리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안심이 되었다. 그건 바로 잊고 있었던 미련 아쉬움 그리움이었다. 카메라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비추고 있었다. 갈매기와 등대도 잠시 비추다 사라졌다. 둘은 행복한 부부처럼 보였다. 대화 중에 가끔씩 여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면.
나이 삼십 대 후반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을만큼 둘 다 젊고 빼어난 외모였다. 남자가 버너에서 원두커피를 내리더니 여자에게 내밀었다. 커피 타임을 즐기는 두 사람의 눈빛은 평안과 사랑으로 가득해 보였다. 거센 파도가 화면을 달굴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중간 중간 광고 화면도 떴다. 배경 음악으로 한때 유행했던 노래가 나왔다.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이었다.
노랫말 가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경민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저 노래, 진혜랑 같이 캠핑 갔을 때 들었던 노래잖아.”
순간 행복감이 어이없게도 그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어이없는 얼토당토한 행복감이었다. 경민은 오랜 시간 동안 그 행복감의 정체에 고민했다. 아직도 그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한편으론 그녀가 누리고 있는 행복감에 대해 질투심도 솟았다.
그때 진혜가 구독자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마음이 따스해지고 싶거든 캠핑을 떠나세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낮은 바리톤 음성이 모 영화배우를 닮아 있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꽃에는 향기가 없는 거 아십니까?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매화 빼고는 말입니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는 한껏 힘을 주어 말했다. 옆에 있던 진혜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말 봄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거야?”
“그렇다 말이지요, 개나리나 벚꽃 진달래 향기를 맡아본 적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진혜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리고 말입니다. 인공은 자연이 주는 기쁨을 따라갈 수 없듯이 자연이 주는 만족도 신이 주는 만족을 절대 줄 수 없다 말이지요.”
진혜가 남편을 흉내내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진짜 진정한 만족은 바로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라 말이지요.”
그러자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이죠, 비로 그 만족을 전달하는 중간책이라 말이지요, 여러분 신적 만족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다음 동영상도 좋아요 구독 눌러주세요. 그럼 오늘은 이만.
잔뜩 궁금증만 안겨주고는 화면이 끝났다. 진정한 만족은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라. 그렇다면 저들은 신앙인인가? 그럴 수도 있지. 달라붙는 궁금증을 애써 눌러버리고 자리에 누웠다.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 속 깊은 데서 솟아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꺽꺽 울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어리석은 그리움과 함께 펑펑 솟아났다. 후회라는 진저리나는 감정과 함께.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도 눈물은 가슴을 적시며 자꾸만 솟아났다. 세월이 15년도 넘게 흘렀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걸까. 그런데 진혜 커플이 주장하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들에게 자녀는 몇이나 있을까. 황제 캠핑을 할만큼 여유로운 걸 본다면 진혜는 분명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쓸데없는 상상력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는 이튿날 지각을 했다. 직원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또 눈물을 흘렸다.
퇴근 후 그는 처음으로 혼자 근처 카페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연차를 낸 뒤 산행길에 올랐다. 자연에게 실컷 하소연하고 싶었다. 자신의 어리석은 그리움에 대해. 그리고 진혜 부부가 주장하는 진정한 만족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하산 길에 그는 오래 전에 유투브 방송을 진행했던 여자 백패커를 만났다.
눈동자가 크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마음이 넓은 여자였다. 경민은 그녀와 대화한 끝에 다음 주말부터는 성당에 나가 신심을 키우기로 했다. 등산이나 캠핑은 토요일이나 공휴일에만 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에 절제심이 생기고 안정된 평안이 느껴졌다.
성당에 나가 교리 공부를 하고 신심이 커질수록 진혜 부부가 말했던 신적 만족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그 형체가 분명해지자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도 그것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잔소리 폭탄도 달게 들을 작정이었다. 마음에 저력이 생성된 것인지 이상하게 평안했다.
그는 자동차 엑셀을 밟으며 신나게 외쳤다.
까짓 한번 살다 가는 인생, 진짜 만족을 위해 살아 보자. 고속도로를 지나는데 초록 삼림이 푸른 강물과 함께 그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자연은 초록 바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힐링하고 있었다. 역시나 자연은 힐링의 대명사이자 창조주의 선물이었다.
경민은 음악을 틀었다. 창조주의 솜씨를 찬양하는 흔한 멜로디의 찬양곡이었다. 고향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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