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산/석연경-
한계령쯤이던가
검은 산이 성큼 걸어왔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눈은 검은 산 검은 나무들 사이로 내리고
검은 나무는 검은 나무인 채
빗금으로 부딪쳐오는 눈발들 보고 있다
이제 모든 산은 눈의 세계
하늘의 투명한 그림자 눈 숲은 눈이 지나가지 못하게
꽁꽁 얼기 시작한다
눈이 덩어리져서 얼어붙는 겨울밤
당신에게 스민 어둠은 푸른빛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검은 산 다 타버린 검은 나무는 검은 채로
어둠 속에서 어둠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아침이 오고 태양이 눈을 데려가는 시간
투명한 그림자 눈 숲은 그것이 슬프다고 우는구나
검은 나무는 그러한 풍경을 지나보내고 있다
한때는 온 몸으로 너를 사랑하여서
이글거리는 우주의 한 풍경이었다
이제는 검은 산 검은 나무
우리가 사랑한 그 많은 시간들
우리가 입 맞추던 그 황홀한 순간들
이제는 어둠의 어둠 속 씨앗이 되어선
불현듯 나타날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불을 지르고 또 지나가겠지만
당신은 나의 삶이어서 불꽃은 또 피리라
슬픔이거나 기쁨이거나
살아가는 일은 타오르는 일이라서
-산이 있는 풍경/윤수천-
산을 내려갈 때에는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고개를 세운 채 내려갈 수는 없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위를 쳐다보면
아,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이것이다
산이 보여주려는 것
하늘은 무척 높다는 것
푸르다는 것
사람보다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을 보여주려고
산은 날마다 손을 내밀어
오라 오라 했나보다
-산/이자규-
누가 먼저였을까
열려진 문과 찾아간
이름의 관계
우린 그렇게 만났다
내 눈에 비치는 언어와
당신 귀에 들리는 풍경의 침전
가지 꺾인 폭설과
뿌리 뽑히는 태풍의
커가는 사랑이란
어느 날 비를 몰아내고
별과 함께 오는 밤의 낭독
전 생애를 푸르고
푸르게 흔들어
깊어졌을 때쯤이면 나는
당신 품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산 위의 바다 /한이나-
귀 열고 둘러보면 주위에 무수히 널려있는
儉자 品자 보랏빛 도장 하나
내 생애에 받은 적 없다
볼품없는 몸의 시시껍절한 생이
복어였던 듯 무당벌레였던 듯
뒤바뀐 몇 구비 전생
속으로 들어가 보니
왜 태어났냐고 왜 꽃 피었냐고
구불구불 산모퉁이 길바닥 위에
신비한 하늘 구름 문양을 그려놓고
마음을 수평선 너머로 끌어당기고 있다
너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바다의 질문이 물너울처럼 쏟아졌다
산 위의 바다에 서서, 바람의 도장
쾅 쾅 쾅 맨몸으로 맞고 있다
내 밖의 나
나를 아름답게 길들이고 싶은 거기
-기우는 산/최승철-
노을이 붉어지는 것은 사랑의 체위 때문일 것이라고
당신은 넓적다리를 모아 엉덩이를 한 번 더
올렸다 내립니다 곧 어둠이 몰려 올 것입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천년 동안 녹지 않았던 빙산(氷山)이 바다로 흘러가듯
목련의 하얀 꽃잎이 떨어져 빗방울에 젖습니다 당신의 손길이 빙속(氷速)
처럼 내 몸으로 잠입해 들어옵니다 목련의 꽃잎으로 스며드는 저녁의 속
도만큼 당신의 입 안에 고였던 침이 내 안을 타고 들어옵니다 유빙(遊氷)
의 밑면이 따뜻한 바다의 염도를 어루만지는 느낌입니다
내 신음은
발열 끝에 젖어드는 목련의 무게로
빗방울도 신음에 젖어듭니다
내 몸은 꼭 자궁 안에서만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듯 뜨거워집니다
새가 날아간 허공 쪽에서 낯익은 휘파람 소리 들려올 듯, 당신은 팔을 벌려
유리창에 두 손을 짚었습니다 유리창은 당신의 체온으로 습기를 머금었습
니다 나는 당신의 엉덩이를 뒤쪽에서 끌어안았습니다
내 입술은 당신의 귀를 핥습니다
들뜬 제 숨에 젖은 들짐승들의 심장처럼
어느 먼 산사의 풍경 소리가 체위 안으로 들려오는 것은 제 몸을 제 몸 안으
로만 포개는 수십만 소리의 동심원, 당신이 나를 뜨겁게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쥡니다 해수면의 출렁임처럼 내 몸에 와 닿는
당신의 따뜻한 혀가 어린 시절 내 발가락을 빨아당기던 피라미들의 은빛
뒤척임 같습니다 전선에 앉았던 새들이 날아가는 것은 당신의 가뿐 숨소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가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체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검은 산/박시하-
창밖에 검은 산이 있네요
자전거를 끌고 한 사람이 지나가고
꽃들이 먼지처럼 만발해요
먼 지붕이 이별의 노래를 불러요
어떤 별은 폭발하고
어떤 파도는 흰 포말을 일으키고
지나가는 이여,
모르는 사람들이여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어디선가 고양이가 죽어가고
모든 별에서 온기가 사라지는데
우리는 웃으며
마지막으로 꽃을 세는 사람이 돼요
볼 수 없는 사람이 돼요
부드바에서 슬픈 술을 마시면
웃음은 음악이 되나요
별처럼 멀리에서
포말처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같은 동경을 품고
같은 공허를 품고
같은 허기에 시달리는 우리
웃음은 감쪽같이 사라져요
울면서 서성이는 밤
모르는 장소에서 창밖을 봐요
멀리 보이는 검은 산을
벅차게 기다려요
-겨울 산을 오르며/나영애-
봄 여름 가을 색 다 벗은
알몸의 겨울 산
굽이굽이 흑백 능선
수묵화 한 점이다
모든 것 비워 내장까지 내보인 당당함
생각도 깊어
주름 깊게 잡고 앉았다
매년 되풀이되는 구도의 자세
제 몸에 둥지 틀고 사는 것들
어느 생명 하나 놓치지 않으려
끓고 엎드려 품었다
아직은 겨울이라 말하고 싶지 않은
낡은 옷 같은, 나
정유년 새해를 맞아 겨울 산을 오른다
귀는 좀더 두껍게 하여 팔랑 넘어가지 않게
심장의 눈까지 크게 떠
'이쁘다'말하는 사람의 이면까지 볼 수 있게
입은 좀 더 닫아 중간이라도 가게
위보다는 아래로 눈길 주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
겨울 산이 되리라
-겨울산/박현수-
모든 것이
이렇게 자명하게 드러나는 날이 오리라
대설주의보를 지나
어깨 넓은 겨울산이 제
허리에 걸린 길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제 몸을 관통하는
이념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인 적은 없다
몸을 안고 돌아오는
차가운 정신의 지도가 그려질 듯하다
함부로 밑줄 그을 수도 없는
혹한의 한 마디가
짙은 녹음을 헤치고
현란한 단풍을 털어 비로소 발음되고 있다
일점일획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단호한 한 문장이다
눈 녹은 물로
질척거리는 여기, 이 흐물거리는 구절들이
비로소 읽히기 시작한다
저 문장과 이 구절들은 서로의 부연이고 각주다
모든 것은 말해졌다
이제 더 이상의 깨달음은 없다
겨울산을 가로지르는 뇌문(雷文)
모든 것이 이렇게
자명하게 드러나는 날이 기필코 온 것이다
-산이 건너오다/김설희-
속을 다 비운 산이 어디 먼데를 돌아 제자리로 왔다
그가 흘린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를 돌아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의 가랑이를 슬쩍 지나간 바람 같은 것
당신의 정수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간 구름 같은 것
교통사고 현장에서 누군가의 피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은 것
그런 시간들이 그의 속이었을까
세상 감옥을 벗어난 물렁한 산 하나가 누워있다
산맥 같았던 핏줄이 얇은 살가죽을 겨우 들고 있다
가죽의 파랑사이 흙냄새가 물씬 솟아난다
헐거워진 아랫도리에서 계곡 물소리가 찔찔거린다
속을 다 버린 산에는 슬픈 새소리마저 사라졌다
벌거숭이, 누가 어디를 만져도 부끄러움이 없다
헐렁한 산은 이제 눈을 감고
지나온 대지에 깊숙이 뿌리박을 것이다
그리고 산은 다시 산으로 건너갈 것이다
-산 넘어 저쪽/이은봉-
밥을 찾아 내 발로 달려온 곳이므로 즐겁게 살아야 한다 힘들여 밥을 먹는 것도 다 살기 위한
것 아닌가
어떻게든 이 세상 살아가려면 아무 소리 마라 참고 견뎌야 한다
날선 칼날이 아랫배를 스윽 긋고 지나간다 뾰쪽한 송곳이 가슴께를 콕콕 찌른다 핏방울이 땅바
닥 위로 똑똑 떨어진다
시원하니, 시원하다 아프니, 아프다 아파도 꿍얼꿍얼 불만을 토로해서는 안 된다
노동을 파는 데도, 공짜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닌 데도 칼 쥔 자들은 늘 나를 굽어보고 싶어 한다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
밥줄을 쥐고 있으면서 굽어보고 내려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수만 년 동안 밥을 두고 서로를 잡도리해온 것이 인간 아닌가 온갖 우월감으로 어깨를 흔들어
대 온 것이 인간 아닌가
밥을 찾아 기꺼이 달려왔으므로 슬퍼해서는 안 된다 슬픔을 알기에 인간은 비로소 인간 아닌가
수많은 생명들이 아직도 물건에 지나지 않거늘 그냥 인간인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삶을 얻어 삶을 사는 곳은 다 고향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고향이 아니랴 객지에 살더라도
서러워 말아야 한다 어디에서 산들 서럽지 않으랴
밥을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삶이거늘 무엇을 서러워하랴 무엇을 아파하랴 평화와 행복은
언제나 산 넘어 저쪽 먼 곳에 있거늘…….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손세실리아-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흰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끈 눈물 같은 사리 한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
-트럭은 산으로 간다/박정석-
안개마저 소리를 지르는 일터
나무는 나체 코트를 입고 있다
얼어가는 하늘 아래
신전의 기둥 같은 나무들은 조금씩 솟아오른다
지붕이 기울어지면서 눈발이 날리기도 한다
하얀색 페인트 표찰과 능선이 만난다
엔진톱 울음, 나무의 젖은 살점들
기둥뿌리가 뽑히는 깊은 산
평소와 같은 날강도 굉음
나무더미를 실어내는 청색 제무시 트럭이 돌아온다
빈 적재함 끝
나무 기둥두 개
상처투성이로 꽂혀 있다
밤새 고문당하는 죄수처럼 끔찍하게 껍질을 벗긴 것이다
뾰족한 스파이, 피뢰침, 안테나
만져지는 보푸라기
문설주, 중방, 허물어진 벽
일찍 불이 켜진 눈동자
지칠 줄 모르던 사람이 신전의 기둥 속으로 넘어진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 쌓여 있던 낙엽이 들썩인다
칠이 벗겨진 사륜트럭이 다시 돌아온다
바람의 만장을 펄럭인다
신념처럼 천형처럼 썩은 트럭은 산을 오른다
-가을 산녘/구재기-
가을 산녘 한 켜로
푸른 하늘이 나는물*에 들어
온몸이 젖어드는데
억새풀꽃, 흰 머플러를 풀어헤치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산새 한 마리
가장 아름다운 울음 하다가
가볍게 스쳐온 길을 바라보다가
지쳐있는 깃털 하나
떨어뜨리는 걸 보면
울 일은 여전히 남아있나 보다
차라리 바람과 함께 하고 싶다
가을 산에 깊이 들어
온몸을 흔들어대고 싶다
풍장(風葬)으로
억새풀꽃 날리는 곳으로
가진 것 모두 놓아버리고 나면
흐미한 체온이
자꾸만 달아오르는
삭막한 여백의 가을 산녘
떠있는 구름이
오고 가는 걸 바라보며
생사(生死)에 기대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쥐고 있는 고삐를 놓아버리고 싶다
걸림 없는 발걸음을 하고 싶다
*나는물 : ‘샘’의 방언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