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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2)
[연재] 임영태의 남미 여행기 (12)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아르헨티나 군부의 잔혹한 인권 탄압,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 역사의 중심 무대였던 마요 광장, 즉 5월 광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리가 투숙했던 호텔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선 우리들은 5월 광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그 옆을 지나쳐 중심 거리를 걸어서 아테노 서점까지 갔다. 돌아오면서 오벨리스크, 멀리 국회의사당을 보고 대사관 거리를 지나 5월 광장까지 왔다. 5월 광장은 아르헨티나 독립을 위한 5월 혁명의 역사를 고스라이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의 성지, 상징이 된 곳이기도 하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의 1973년 9월 11일 쿠데타에 이어 1976년 3월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로 남미의 주요 국가들에 군사정권이 등장해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브라질에서는 1964년 군부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장기집권하고 있었고, 페루에서도 1968년 군사정권이 들어서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 군부는 미국의 지원 아래 반공, 안보, 경제발전을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독재정치를 이어가며 민주화운동가들을 납치, 고문, 살해, 암매장하는 등 엄청난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이 가장 잔혹하게 인권 탄압을 자행하며 공포정치를 폈는데,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속된 아르헨티나 군부정권 통치기간 동안 저지른 만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르헨티나 역사의 현장 오월광장 [사진-임영태]
1976년 3월 아르헨티나 군부쿠데타 세력들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후 거리를 장악한 중무장한 군인들 모습.
1976년 3월 24일 국가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권력을 탈취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부쿠데타 세력은 만성적인 정치적 혼란과 ‘아르헨티나 병’으로 불리던 반복적인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들의 ‘최종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식 생활양식을 반대하는 그 누구”라도 국가 전복 행위자로 간주했고, “공산주의와 비기독교적 생활양식으로부터 아르헨티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 장악이 필수적이었다고 강변했다. 군사통치위원회는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헌법적 기구가 소진되었고 제도적 틀 내의 교정 가능성이 종식되었으며 정상적 과정을 통해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면서 “책임감과 민족정신에 충만한 군부가 신의 도움에 힘입어 완전한 국가 회복을 이룩함으로써 국민에게 혼란을 안겨주었던 상황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밝혔다(박구병, “누까 마스‘와 ’침묵협정‘ 사이: 심판대에 선 아르헨티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 2002).
쿠데타 세력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의회를 해산하고 기존 법령을 폐기하고 권력을 군사통치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군부에 집중시켰으며 언론을 장악, 통제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군부 정권은 헌법적 제약을 뛰어넘어 수시로 포고령을 선포하고 군대, 경찰, 정보기관, 그리고 ‘아르헨티나 반공동맹’과 같은 극우 무장조직을 동원해 민주화운동가와 그 가족들, 학생, 진보적 지식인, 언론인, 노동운동가 등 정치적 반대세력, 진보적 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납치, 연행, 구금하고 고문, 살해, 실종자로 만들었다. 군부정권이 납치, 실종자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은 민주화운동가만이 아니었다. 가톨릭적 정의, 반공주의적 정의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판단되는 모든 사람들이 납치,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 독재정권의 정보기관과 우익단체들은 민주화 활동가와 양심적인 지식인, 시민, 그 가족들을 납치, 고문, 구타, 암살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재산 강탈과 영유아 탈취와 강제입양이라는 반인륜적 패륜행위까지 서슴지 않았했다(박구병 2002).
아르헨티나 ‘실종자조사위원회’의 공식 보고서 와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가장 끔찍한 불법 구금, 고문시설이었던 라플라타 강변의 해군기술학교 자리에 세워진 아르헨티나의 국립역사기념공원의 실종자들 명단이 적혀 있는 기념벽. 향후에도 확인되는 대로 이름을 적을 예정이다.
희생자들의 얼굴로 새겨진 “이제는 그만”이란 뜻의 포스터
40년 전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정권 시절 실종자들의 현재 모습을 추측한 이미지
군부 정권은 단순히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치와는 크게 상관없었던 수많은 시민들까지 납치해서 고문하고 학살했다.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군인이나 경찰들에게 잡혀간 사람들 100명 중 99명은 아예 세상에서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7년간의 군부독재 기간 동안에 약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납치된 뒤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아닌데 이처럼 엄청난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은 집단학살, 제노사이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이 같은 만행에 대해 ‘더러운 전쟁’이라는 오명이 붙은 것은 군부가 국민을 상대로 가히 전쟁을 치렀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군부정권 시절 사라져 실종된 국민들 중 노동자가 반을 차지했고, 그밖에도 언론인, 법조인, 지식인과 학생, 종교 지도자 등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라졌다. 군부정권 종식 후에 구성된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가 1984년 9월 발간한 5만여 쪽에 달하는 공식보고서 『눈까 마스(Nunca mas)』를 발간했다. ‘눈까 마스’는 스페인어로 “이제는 그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눈까 마스’에 따르면, 그때까지 확인된 실종자 8,960명 중 86%가 35세 이하의 청년층, 30%가 여성, 여성실종자 중 10%가 임신 중이었다. 임산부가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낳은 아이들은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비밀리에 군부 정권 관련자들에게 입양해 키우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실종자의 48%가 블루칼라(30%)와 화이트칼라(18%) 노동자였고, 학생이 21%, 전문직 종사자 10.7%, 교사 5.7%, 자영업자 5%, 주부 4%, 언론이 1%, 사제나 수녀 0.3%, 복무 중인 병사 2.5% 등이었다. 전문직 종사자 중에는 심리학자, 정신 병리학자, 사회학자 등이 많았다. 변호사 107명과 지방 상공회의소 의장과 판사까지 실종자에 포함돼 있었다(박구병, “‘추악한 전쟁의 상흔: 실종자 문제와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투쟁”, 2003).
군부 정권에 반대한 사람들에게는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은 뒤 납치돼 사라졌다. 재판도 없었고 이들을 고문, 살해하는 데 그 어떤 증거도 필요 없었다. 그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는 ‘실종(desaparesio)’이나 ‘실종된 사람들(desaparecidos)’이라는 말은 거의 고유명사처럼 돼 버렸다. 아르헨티나의 군부 정권은 이른바 ‘테러리스트’라고 부른 정치적 반대세력을 체포, 구금, 고문, 학살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전역에 약 300개에 이르는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 운영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근방에만도 수십 개의 수용소가 설치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는 집단 학살을 위한 죽음의 수용소를 특별히 새로 건설했던 반면,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변두리 지역의 학교나 체육관 등 대규모 건물들을 개조해서 수용소로 사용했다. 군부정권은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체포한 사람들을 ‘죽음의 비행’을 통해 대서양 바다에 떨어뜨려 살해하는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하영식, 『남미 인권 기행』, 레디앙, 2009, 90-91쪽).
한국전쟁 전후 시기 한국에서도 민간인을 대량으로 집단학살한 뒤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바다에 버리는 수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전쟁 상황도 아닌데 민간인을 상대로 이 같은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세력은 민주화운동가, 시민을 납치, 살해하고 매장하거나 비행기로 바다에 던져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아르헨티나 민주화운동의 상징 ‘오월광장 어머니회’와 군부정권 붕괴
1976-1983년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의 국가폭력과 인권탄압은 1955년 이후 대여섯 차례에 걸쳐 발생한 선배들의 군부통치와는 간단히 압도했다. 너무도 잔인한 군부정권의 인권탄압에 국민들은 공포에 짓눌린 채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일부 급진세력은 무장투쟁이라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군부의 잔혹한 탄압에 소멸되고 말았다. 조직적인 시위나 민주화투쟁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대중들이 모일 수 있는 음악 공연 등을 통해 저항을 시도했지만 이 또한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공포에 짓눌린 대다수 국민들은 침묵하는 것이 유일한 출구였다. 이처럼 어둠이 세상을 뒤덮고 있던 아르헨티나에 한 줄기 빛의 역할을 한 것은 ‘오월광장 어머니회’였다. 자신의 아들과 딸, 사위와 며느리, 손자 등 가족이 납치돼 사라진 실종자들의 어머니들, 할머니들이 만든 단체였다. 평범한 주부였던 에베 데 보니피티는 자신의 두 아들과 며느리가 사라진 뒤 같은 처지의 어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1977년 4월 30일 같은 처지의 어머니 14명이 첫 집회를 시작했다.
‘오월장장 어머회’의 집회를 해산시키는 아르헨티나 군인들[사진-임영태]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시위
실종된 자식의 이름과 태어난 날짜를 새긴 흰 기저귀천 스카프를 머리에 쓴 어머니들은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분홍빛 집) 앞에 펼쳐진 오월광장의 독립기념 조형물 주위를 돌며 침묵 행진을 벌였고, 그 뒤 매주 목요일마다 행진을 이어갔다. 군부정권의 살해 협박과 집회 금지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침묵 행진을 계속했다. 집회 금지에 대응하기 위해 어머니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침묵 시위를 벌였다. 어머니들은 1979년 8월 22일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고, 침묵시위와 함께 실종 사례를 접수받기 시작했다. 어머니회는 1979년 12월 국제인권단체 관련자의 방문과 함께 벌어진 대규모 거리 행진을 계기로 활동 폭을 넓혔다.
그들은 희생자 가족의 회합을 넘어 점차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는 여러 세력과 정치적 연대를 맺어가며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1980 8월에는 약 2,000명, 1982년에는 약 2,500여 회원을 확보했다. 군부정권이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해 (군부)과도정부가 들어선 뒤인 1982년 12월에는 10만 명이 참가한 행진을 이끌어내는 등 대규모 저항과 집회를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월광장 어머니들의 행진은 민주화 이행기와 민주정부 등장 이후에도 계속됐다(박구병 2003). 이들의 요구는 사라진 사람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한국의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창립 모델이 됐다.
아르헨티나 민주화투쟁의 상징인 오월광장 어머니회 회장 에베 데 보나피니(2022.11.20 사망)
잔혹한 인권유린과 부정부패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군부독재정권은 1980년대 초반 경제정책 실패로 인플레이션 등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군부정권은 경제위기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1982년 4월 영국을 상대로 한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을 도발했다. 말비나스 섬은 1520년 마젤란 항해 후 스페인 소유가 됐고 1763년 프랑스가 점령했다가 다시 스페인 소유로 넘어갔다. 독립 후 아르헨티나 소유가 됐던 것이 1833년 영국이 점령, 영국 영토가 된 곳이다.
대서양 한 귀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 대한 영유권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아르헨티나 군부의 판단은 착오였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안고 살아가는 영국으로서는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되더라도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군사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던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참패했고, 무모한 전쟁을 벌인 군부정권은 결정적인 위기에 처하게 됐다.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국내의 정치, 경제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영국을 상대로 말비나스 소유권을 탈취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함으로써 정권의 몰락을 재촉고 말았다.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 관련 지도
말비나스 전쟁에서 영국군에 포로로 잡힌 아르헨티나군
1976년 쿠데타 이후 군부정권은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더러운 전쟁’을 벌이며 국민을 살해하고 공포정치를 폈으나 국민의 불만은 점차 높아져 갔다. 무엇보다 군부정권 시기 경제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정치적 부담이 가중됐다. 군부정권은 ‘아르헨티나 병’이라는 경제문제의 근본원인이 정부의 간섭과 강력한 노동조합 활동에 있다고 보고 국영기업의 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강력한 노동조합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켰다. 아르헨티나는 450억 달러의 외채 위기와 1000%에 달하는 극한의 인플레이션, 그리고 15%가 넘는 실업률 등 총체적인 경제위기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이처럼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비델라 장군은 1981년 비올라 장군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으나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자 또 다시 갈티에리 장군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야 했다. 갈티에리는 내부 위기를 대외 전쟁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영국 대처정부의 즉각적이고 단호한 대응과 미국의 영국 지지, 군사적 열세와 전술 실패 등이 겹쳐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 전쟁의 패배 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군부정권이 퇴진하고 선거를 통해 알폰신 민간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사법적 정의를 실현한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작업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서 본 것이지만, 중남미 여행을 통해 브라질, 멕시코, 콜롬비아에서는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이기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경제 상황도 안 좋고 앞날의 전망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시민들이 크게 우울해 하거나 비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치안도 남미에서는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대적이지만 어려운 조건에서도 비교적 낙천적이고 ‘신사적’으로 보이는 이 나라에서 왜 그처럼 심각한 인권유린이 자행됐을까? 또 멕시코 등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경제위기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유독 아르헨티나가 그토록 자주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남미 여행 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고 아르헨티나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고민이 됐던 문제였다.
아마도 이와 관련한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경제적 요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가 읽은 몇 가지 글이나 자료만으로는 여기에 대한 답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같은 군부정권의 인권 유린이 있었지만 칠레나 페루, 브라질은 고문, 학살의 규모가 수천 명 단위인데 비해 아르헨티나는 수만 명 단위로 차원이 달랐다. 왜 그랬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아르헨티나 군부가 친독일, 즉 친나치 성향이었고, 전후 독일의 나치 전범들의 도피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그 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나치 전범들의 중요한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아르헨티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의 잔혹함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했다. 계속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그 문제는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이제부터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군부독재 정권을 경험한 남미국가들과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민주화 이후 군부독재 정권 시절의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사 정리, 과거사 청산은 쉽지 않다. 가해자가 버젓이 살아서 여전히 국가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하기는커녕 자신의 정당성을 항변하고 피해자를 향한 이중의 가해행위와 협박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들이 과거사 청산을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거나 묻어두고 가는 ‘침묵’과 ‘망각’을 통한 해결책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르헨티나는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비교적 과거사 청산이 잘 된 ‘모범국가’에 속한다.
7년에 걸친 군부독재 시기가 끝나고 알폰신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 청산 문제가 대두됐다. 처음 알폰신 정부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1983)’를 설치하고 5만 쪽에 달하는 조사보고서 『눈까 마스』를 통해 전국에 340곳에 이르는 비밀감옥 시설의 존재, 가해 군인 15,000명 이상 확인, 실종자 최소 8,960명에 이르는 사실 등을 발표하며 적극적인 과거사 정리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 항소법원은 비델라를 비롯한 9명의 군사통치위원회 지도부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육군을 대표한 비델라와 함께 삼두체제를 구성했던 해군의 에밀리오 마세라 제독에게 종신형, 공군의 오를란도 아고스티 장군에겐 징역3년9개월, 비델라에 이어 대통령직에 올랐던 로베르토 비올라 장군에겐 징역 16년 6개월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네 명은 방면되었다.
알폰신의 뒤를 이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은퇴 후 부패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진16> 부부가 대통령을 지낸 키르치네르 시대에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이 본 궤도에 올랐다.
군부쿠데타 40주년이 되는 2016년 3월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군부독재 묵인에 대해 사과했다.
대법원이 이 판결을 최종 승인하고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증거들을 군사법정에 송부하기로 결정하자 다음 차례 처벌 대상이 된 중하급 장교들이 강력히 반발하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알도 리코 중령이 주도하는 ‘부활절 쿠데타’ 기도가 발생하고 군장교들이 집단적으로 참모총장의 교체, 인권재판의 종결, 정부와 언론의 반군부 캠페인 중단 등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같은 군부의 반발과 압력에 굴복한 정치권은 1987년 6월 6일 「강요에 따른 복종법」을 통과시켜 상관의 명령을 수행한 중령 이하 장교 1,100-1,200명가량에 대한 처벌을 면제시켰다. 1988년 1월 중순 리코 중령은 두 번째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도 모하메드 알리 세이넬딘 대령이 주도하는 세 번째, 네 번째 쿠데타 기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알폰신 다음에 등장한 메넴 정부는 ‘더러운 전쟁’ 관련자에 대한 수차에 걸친 사면령을 내려 군부 인사들을 모두 석방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까지의 쿠데타 관련자들에게까지 사면령을 내렸다. 다만 네 번째 쿠데타 기도로 인명 사망자까지 발생하게 한 세이넬딘은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이와 같은 민간정부의 대 군부 유화 정책과 가해자 사면을 통한 사회통합 추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몇 차례의 법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진행된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피해자와 가해자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과거사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게 만들었다. 2003년 군부독재 정권 시절 투옥됐던 좌파성향(페론주의 좌파, 신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 출신)의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츠네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과거청산 논의가 다시 점화되었다.
변호사 출신의 키르츠네르는 군사정권 시절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좌파 페론주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군부독재 주모자들과 조력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법처리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취임 연설에서 비델라 정권 시절 투옥당하고 고문당했던 자신의 경험을 거론하며 이행기 정의의 이념을 잘 표현한 “기억, 진실, 정의”를 인용, 과거사 청산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육군과 공군 장성의 75%에 해당하는 31명, 해군 제독의 절반인 15명을 퇴임시키고 군부독재 시절 이후 진급한 신진인력으로 군부를 교체했다. 키르츠네르는 연방경찰의 인적 쇄신도 단행하고, 대법관 9명 중 5명을 부패 혐의로 고발, 압박하고 의회의 동의를 얻어 사임시켰다. 군사쿠데타 28주년이 되는 2004년 3월 24일 새로 총사령관에 임명된 로베르토 벤디니는 대통령과 각료, 주요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대학에 걸려있던 비델라의 초상화를 제거,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의 의지를 극적으로 표현했다(최용주,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정리: 사법적 정의 실현을 중심으로”, 2024).
2003년 8월 아르헨티나 의회는 ‘기소중지법’과 ‘명령준수법’의 효력은 제정 당시로 소급하여 무효가 된다는 취지의 소급법을 제정하였고, 2005년 6월 대법원은 ‘기소중지법’과 ‘명령중지법’은 위헌이며 두 법의 소급무효를 규정한 2003년 의회 입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의 많은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2006년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원은 비델라를 비롯한 군부 쿠데타 주역 3인에 대한 메넴의 사면은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2007년 4월 연방대법원은 비델라와 마세라에 대한 사면을 기각하고 이들을 인권침해 혐의로 재기소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같은 사법개혁으로 군부독재 시절 인권침해자에 대한 기소와 재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2012년 기준으로 1,926명이 인도에 반한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이 중 766명이 기소됐으며, 기소자 중 262명은 유죄, 20명은 무죄, 나머지 306명은 재판 중 사망했다. 재판에 회부된 가해자 대부분은 납치, 고문, 살해를 직접 지시하고 현장에서 실행했으나 불처벌법에 의해 기소에서 제외됐던 중간간부급 전직 장교와 경찰간부들이었다.
2006년에는 군부독재 시절의 경찰총수 2명이 납치, 살인, 고문, 아동 유괴, 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76-1983년 사이에 자행된 살인행위 중 몇 건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기소되었다. 2007년 3월 법무부는 인권범죄 기소를 담당하는 특별수사부를 설치해 국가테러에 관련된 범죄 재판을 신속히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정비했으며, 2012년 10월 연방검찰청은 아동 납치 및 불법 입양 전담 기소부서를 신설했다.
또한 2010년 7월 호르헤 비델리와 에밀리오 마세라를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범죄, 살인, 아동유괴 등의 새로운 죄목으로 재기소했다. 비델리는 2011년 12월 22일 종신형을 선고받고 2013년 5월 17일 옥중에서 사망했고, 재판을 기다리던 마세라는 2010년 11월 8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군부독재정권 시절 국가폭력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해 비교적 성공적으로 사법처리를 했다. 그런 점에서 아르헨티나는 과거사 정리의 핵심 과제중 하나인 사법정의 실천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 같은 사법정의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 발전을 공고하게 만들었다(최용주, 2024).
한국의 과거사 청산은 아르헨티나와 비교하면 사법정의 면에서 특히 미진하다. 1980년 5.17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짓밟고 인권유린을 자행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사법적 처리는 법원의 유죄 선고 후 사면으로 흐지부지됐다. 4.3제주사건과 여순사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 등 과거사 기구의 조사를 통한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됐으나 가해자와 우익세력들은 시도 때도 없이 ‘폭동, 반란’ 등의 용어를 써가며 진실규명을 외면,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군부독재 정권 시절 고문, 불법구금, 가혹행위 등을 자행하며 사건을 조작한 인물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은 아예 불가능했고, 진실규명 후에도 계속해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을 향해 ‘간첩’ ‘반역자’ 등의 용어를 써가며 명예를 훼손하는 등 2차 가해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의 법정에 가해자를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역사의 법정에라고 반드시 세워서 심판해야 할 것이다.
2024년 3월 24일 1976년 쿠데타 48주년 기념집회가 열린 오월광장 모습. 과거사 청산을 통해 민주화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아르헨티나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경제 문제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1930년 이전까지 세계 5대 경제부국의 반열에 올랐던 아르헨티나가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다른 중남미 국가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고,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한 채 경제위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또한 잘 이해되지 않는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칠레가 개방과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해 경제발전에 성공한 반면,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와 같은 포퓰리즘, 국가주도의 경제개입 등으로 경제위기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르헨티나에 여전히 무시 못할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페론주의’를 죄악시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주장은 군부독재정권과 민주화 이후 메넴 정권 같은 여러 민간정부가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타당성이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남미전문가 이성형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의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복적인 경제위기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은 무엇일까?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오월광장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사진기자로 보이는 두 명이 대통령궁 앞에서 카메라를 설치한 채 이른바 ‘뻗치기’를 하고 있다. 새로 선출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정부가 제대로 된 경제정책으로 성공할 것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기자들은 기행과 막말을 일삼아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는 별명을 얻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궁 앞에서 버티고 있는 사진 기자. [사진-임영태]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걷다가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2시경 호텔로 가서 비로소 체크인 한 뒤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피로가 몰려들어 잠깐 동안 눈을 붙였다. 눈을 떠 보니 2시간이 금방 흘렀다. 우리는 호텔 직원을 통해 저녁에 극장에서 공연하는 탱고 공연을 예약했다. 스페셜인데 1인당 140달러라고 했다. 대금은 극장에 가서 직접 지불하라고 한다. 저녁 승합밴을 타고 탱고 극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극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스페셜은 1인당 200달러, 일반석은 130달러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격을 놓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140달러에 입장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마침 호텔에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부부를 만나 그들과 동행했다. 그들은 140달러에 입장이 합의됐는데 우리한테는 200달러를 내라고 해서 한참을 논쟁했다. 미국 교표 부부의 도움을 받아 항의하며 협상을 벌인 끝에 애초 예약한 대로 140달러에 입장할 수 있었다. 포도주가 무한정으로 리필되었고 저녁식사로 소고기 스테이크에 빵, 물, 야채, 과일, 감자구이 등이 나왔다. 우리는 포도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우리와 동행한 노부부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살고 있는데 은퇴 후 크루즈 여행 중이라고 했다. 칠레 리마까지 비행기로 와서 크루즈 여객선으로 태평양 바닷길로 여행해 남아메리카 최남단 우수아이아를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성했다는 것이다. 호텔에 엄청난 손님이 몰려들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크루즈 단체 여행객이 투숙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객실 수가 엄청난 대형 호텔이어서 이걸 유지하려면 크루즈 여행 같은 대규모 관광객을 유치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헨티나에 왔다면 탱고 공연을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코스라 할 수 있다. 춤에 문외한인데다 별로 흥미도 없는 나는 말만 들었지 탱고를 본 적이 없다. 동영상 화면으로만 봤던 것과 달리 극장에서 직접 보는 탱고 공연은 훨씬 감동적이었다. 김 원장님은 길거리 공연과는 달리 상당히 통제되고 절제된 탱고여서 감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아마도 탱고의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무대 공연으로 상업적으로 포장된 춤이 갖는 한계를 말하는 듯했다. 나도 저 춤을 극장에서 여러 차례 보게 되면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매너리즘으로 보이게 될까? 하지만 탱고를 처음 보는 나는 원장님과는 느낌이 달랐다. 고혹적이며 펄떡이는 생명력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모든 육체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격정적인 탱고의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극장의 탱고 공연. [사진-임영태]
극장에서 나온 포도주와 소고기 스테이크, 감자 튀김. [사진-임영태]
탱고 극장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탱고의 발상지 라보카 항구에서
1월 10일 수요일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라보카 항구로 갔다. 탱고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민 노동자들이 힘든 부두 노동과 고향을 향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추기 시작한 것이 탱고의 시작이라고 한다. 탱고는 유흥가 술집에서 시작된 춤이었다. 그 때문에 유럽의 우아함을 쫓고 싶었던 아르헨티나 상류층으로부터는 외면당했다. 이 춤이 유럽으로 건너가 유행하게 되자 아르헨티나 상류층도 이를 인정했다.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춤이라니까 재수입해서 아르헨티나에서 기교가 덧붙여졌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탱고는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춤이 되었다. 라보카 항구의 시장 거리 곳곳에서 탱고가 추어지고 있다. 그들은 관광객들을 식당으로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제 저녁 극장에서 봤던 것처럼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것은 아니지는 춤을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시장 거리 곳곳에서 관광객과 탱고 춤 포즈를 잡아주고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사진 4장을 찍는데 4달러를 받고 있다.
시장 골목에는 리오넬 메시, 마라도나, 프란치스코 교황 등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명사들의 모형 인형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반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체 게바라는 쿠바에 가면 없는 곳이 없다. 쿠바 곳곳에 게바라의 동상과 기념관, 거리이름, 기념품 등으 흔적이 남아 있지만, 정작 그가 태어난 곳에서는 잊힌 존재가 된 것인가 싶을 정도다. 그가 사망한 지 60여년이 다 돼 가는 데다가 혁명의 시대가 가고 자본의 시대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는 축구의 신이라는 메시나 마라도나가 훨씬 친근한 존재일 것이다.
특히 마라도나와 더불어 아르헨티나가 낳은 축구 천재 메시는 가장 유명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는 2022년 11월 20일부터 12월 18일까지 카타르에서 개최된 제22회 FIFA월드컵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어 영웅이 됐다. 나는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이 프랑스를 제치고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경기장면을 밤새워 봤다. 너무나 극적인 순간이었다. 음바페의 프랑스 대표팀은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골을 넣을 때마나 계속 골을 넣으며 따라 붙었다. 정말이지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연장전까지 가는 120분간의 혈투에도 3-3 무승부를 기록해, 승부차기 끝에 아르헨티나가 4-2로 승리했다. 세계 청소년 컵, 유럽 리그 컵, 올릭픽 금메달, 코파아메리카 컵 등 모든 컵을 들어 올렸으나 월드컵과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마음고생이 컸던 메시가 마지막으로 월드컵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메시 만세!’ 라고 외칠만한 순간이었다. 어찌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 감동을 잊겠는가.
프란체스코 교황, 마라도나, 그러나 역시 리오넬 메시가 최고의 영웅. [사진-임영태]
식당 앞 탱고 춤 공연. [사진-임영태]
라보카 항구의 골목 시장 거리 모습. [사진-임영태]
체 게바라와 리오넬 메시는 아르헨티나 산타페 주의 로사리오 시 출신이다. 게바라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가 됐으나 혁명가로 살다가 볼리비아 밀림에서 생을 마감했다. 메시는 철강 노동자 아버지와 청소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돼 아르헨티나를 빛냈다. 두 사람의 일생은 달랐고 사는 길도 달랐지만 아르헨티나를 빛낸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메시만 기억하지만 역사에서는 체 게바라가 더 빛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라보카 항구의 거리를 걸으면서 인천의 화교 거리가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곳, 이민자의 향수를 달래던 곳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라보카 항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문과 같은 곳이지만 우리나라의 부산항이나 인천항과는 그 규모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약소하다. 그건 아르헨티나의 경제규모, 특히 공산품 수출이 미미한 아르헨티나 경제 때문일 것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와 달리 아르헨티나는 농산물과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잠재력에서는 무한한 나라다.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가 미터기를 켠다. 남미에 와서 처음 있는 일이다. 호텔까지 4천 페소 정도 나왔다. 나이가 듬직한 기사는 거리 여기저기를 설명해 주려고 애를 쓴다. 고층건물들을 가리키며 20년 사이에 신도시가 형성됐다고 자랑한다. 아랍의 부호가 투자한 건물을 가리키며 아르헨티나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밤에는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도 잊지 않고 해준다.
라보카 항구에서 돌아와 오후 2시 호텔에서 체크 아웃하고 나왔다. 짐을 모두 갖고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과 라 레골레타 공동묘지를 찾았다. 국립미술관은 무료였다. 규모가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꼼꼼히 돌아보자면 최소한 한나절을 걸릴 규모지만 2시간 만에 대충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미술관에서는 작은 백팩 가방은 맡길 수 있었지만 캐리어는 맡아줄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번갈아 짐을 지키며 관람했다. 국립미술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라 레골레타 공동묘지까지 캐리어를 끌고 이동했다. 공동묘지 입구를 잘못 찾아서 한참을 헤매야 했다.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 정면. [사진-임영태]
국립미술관 내부 전시 그림. [사진-임영태]
라 레골레타 공동묘지는 5시까지 입장이 가능하고 6시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 공동묘지 입장료는 1인당 5천 페소였다. 티켓 구매는 현금은 안 되고 신용카드만 가능했다. 4시 반이 넘어 입장했다. 시간이 없어서 1시간이 채 안 되는 동안 대충 돌아보았다. 에바 페론 묘지를 찾았다. 사람들이 대거 모여 있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필수 관광지가 된 레골레타 공동묘지는 유럽 스타일의 다양한 건축물과 조각들로 유명하다. 부와 미적 감각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묘지들이 아르데코, 신고딕양식, 바로크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이 공동묘지 자리는 과거 수도승들이 채소를 기르던 정원이었다. 1822년 공동묘지 구역으로 정해져 현재 4,500여기의 묘지가 있다. 묘지 가운데 90개 이상이 국가적 기념물로 지정돼 있어서 정부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인물들이 대거 안치된 곳으로 역대 대통령을 비롯해 독립영웅과 작가, 노벨상 수상자 등이 잠들어 있다.
특히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이 가족 5명과 함께 잠들어 있어서 늘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가 찾은 날도 어김없이 많은 방문객들이 에바 페론 묘소 앞에서 참배하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에바 페론을 포퓰리즘의 상징, 천박한 선동정치의 대표인물로 혐오하지만 에비타는 여전히 민중들로부터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공동묘지를 구경하고 나오니 오후 6시가 가까이 됐다. 마음이 급했다. 비행기가 오후 7시 20분 출발 예정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서성인 끝에 공동묘지 앞에서 택시를 잡아 4천 페소에 흥정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 검색대 짐 검사 과정에서 또 다시 모기약이 문제가 됐다. 한참을 설명한 끝에 결국 돌려받았다.
라 레콜레타 묘지 내부 모습. [사진-임영태]
에비타(에바 페론 묘지). [사진-임영태]
우리를 태워 갈 제트스마트(JetSMART Argentina) 3140편 비행기가 연착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호르헤뉴베리 공항에서 오후 7시 20분에 출발해 아르헨티나 푸에르토이과수 공항에 오후 9시 8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는 비행기가 오지 않는다. 공항에 비가 내리고 기상 상태가 좋지 않다. 날씨 때문인지 예정했던 비행기 대신 다른 비행기로 대체되었다. 8시 20분경 대체 비행기에 탑승을 완료했다. 그러나 비행기에 탑승하고도 한참 동안 대기 상태로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8시 45분경 출발한 비행기는 10시 반경 이과수 공항에 도착했다. 캄캄한 한밤중이다. 예정시간보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결항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우리 앞날에는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태워갈 비행기가 들어오지 않고 연착, 마음을 애태우는 중이다. [사진-임영태]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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