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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는 옛부터 어른들이 연리광김이라해서 명문가문으로서 명성이 자자했었습니다. 연리광김이란 연안이씨와 광산김씨를 칭하는 말입니다. 광산김씨는 대제학 7명을 배출하였는데 3대째 대제학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는 광산김씨가 이 명문가문의 반열에 낄수있는 매개체 이기도 합니다. 대제학은 벼슬의 꽃으로 불리는 관직이었습니다.
흔히 해동 명문가를 꼽을 때 연리광김(延李光金), 즉 연안이씨와 광산김씨를 꼽고, 덧붙여 달성서씨를 포함해 '연리광김달서'라는 말을 관행처럼 사용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의 출처를 알고 사용하는 분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리광김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조선 후기에 출판된 <홍재전서(弘齋全書)>를 통해서 입니다. <홍재전서>는 조선 정조 23년(1799)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시문, 윤음, 교지 등을 모아 엮은 184권 100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일득록(日得錄)>>에 실린 원문 내용입니다.
(丙辰正祖宣皇帝莊孝王二十年 淸仁宗嘉慶元年 )
○ 이용수를 규장각 직각으로 삼으니 용수는 정귀의 후손이다. 조선은 중세 이래로 문벌을 숭상해서 현조(顯祖)가 한 사람 있기만 하면 곧 현부(賢否)를 불문하고 급제(科甲)와 작록을 세습하여 이른 것이 10여 세대(世代)가 되므로 (지금은) 홍문록에 든 사람 수를 가지고 서로의 자랑을 다투곤 하는데, 용수는 성품이 더욱 교만하여 평소(平居)에 사대부의 벌열을 셈할 때면 반드시 첫손가락을 비워서 스스로를 내세우고는 둘째손가락부터 다음 차례를 꼽았다. 이로서 시속 사람들은 말을 지어 이르기를 '연리광김'이라 하는데, 연리란 용수이니 선세(先世)는 본래 중국 농서사람으로서 연안군에 와서 살았고, 광김이란 광산 김씨이니 즉 김장생의 일문(一門)이다.
이로써 연리광김의 어원은 연안이씨의 이용수가 자기 문중을 첫손에 꼽기 위해 사용했고, 이어 세속에 자리잡은 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달성서씨를 더해 '연리광김달서'라는 말이 관행적 명사로 자리잡있던 것이지요.
3대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에 대해서 광김 묘산도 설명후에 후미에 별도 설명
광산김씨 평장동 광일문
광산김씨(光山金氏)중흥터전 일군 양천 許氏부인
명문가를 일으켜세운 烈女: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천마시풍형의 명당에 묻힌 주인공이 바로 광산 김씨 김국광의 장남 극뉴다. 도선국사가 조선의 8대 명당이라고 그의 결록에 적어 놓을 만큼 명혈로 손꼽히는 천마시풍형에 묻힌 극뉴의 직계 후손들이 연이어 명사로 배출된다는 점 흔히 ‘光金’으로 줄여 사용해도 알만한 사람은 모두가 光山 金氏임을 금방 안다. 우리나라 수많은 성(姓)씨 중 명문의 서열로 상위의 자리를 지켜온 성씨가 바로 광산 김씨 가문임을 부정한 사람은 별로 없을 성 싶다.
‘光金’ 중 특히 사계(沙溪) 金長生 선생의 후손이라면 맞선도 보지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겠다. 우리나라 역사상 학문과 도덕성이 뛰어나 온 백성이 나라의 사표로 삼는 인물로 평가 받아 문묘(文廟·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18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한 가문에서 2명의 인물이 배향되기는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송시열· 송길준 선생과 광산 김씨의 김장생· 김집(金集) 선생 등 2 가문뿐이다. 특히나 부자가 함께 문묘에 배향되기는 광산 김씨가 유일하다.
이렇듯 광산 김씨가 우리나라의 명문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2가지의 큰 변수가 작용했다는데, 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됨으로써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2개의 요인 중 한 가지는 사계 선생의 7대 조모인 陽川 許氏의 정절과 자기헌신을 꼽을 수 있다. 허씨 부인의 일관되게 문벌을 지키겠다는 일념, 즉 정신적인 유산이 후손에게 계승 돼 큰 음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는 양천 허씨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후손에 미치어 이른바 조선 8대 명당 음택을 얻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크게 우는 형세)의 대혈을 김극뉴가 차지하게 됨으로써 그 발음(發蔭)이 후손에 크게 미치어 발복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했던 열녀 사례중 울산 김씨의 민씨 할머니와 남원 양씨의 이씨 부인의 생생한 사례는 두 사람 모두가 험난하기만 한 열녀의 길을 걸으면서 직접 집터나 묘터를 찾아내 한 가문을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해 일으켜 세운 풍수지리학의 실증적 사례라고 본다. 그런데 양천 허씨와 그 후손 김극뉴 묘소가 명혈에 쓰여지고, 이내 후손에 길이 감응(感應)됨으로써 명문의 반열로 올라서는 또 다른 특색을 띤 이른바 열녀와 풍수지리학이 간접적인 관련을 맺은 사례라고 볼수 있는데 이것이 이번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니까 열녀 허씨 부인에 대한 미담소재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명당발복에 의해 광산 김씨가 중흥의 탄탄한 초석을 다져왔는데, 이를 상·중·하 3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하겠다.
허씨 부인은 충청 관찰사 김약채(金若采)의 큰 며느리로, 그의 친정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이다. 허씨 부인 남편 김문(金問)은 고려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그런데 허씨 부인은 안타깝게도 17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 철산(鐵山)만을 남겨둔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됨으로써 그 험난하고 시련에 얽힌 정절의 생애를 걷게 된다.
친가의 부모가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고 택일까지 잡아놓자 허씨 부인은 죽기를 맹세하고 친정집에서 몰래 나와 어린 아들 철산을 업고 수백리 머나먼 길을 걸어 시가인 충청도 연산으로 내려 왔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낙남(落南)길에 험준한 산을 넘다가 칠흑같은 산중을 헤매일때면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한 바람에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연산땅에 정착한 허씨 부인은 아들 철산을 정성껏 양육하고 글 공부에 열중하도록 돌보면서 종신토록 수절하니, 조정에서는 정려를 내렸고 이후 철산으로부터 후손 대대로 내려오면서 광산 김씨의 문벌이 맥을 잇게 된다. 허씨 부인의 공로가 지금까지 맥맥이 이어온 것이라 믿는다.
여지승람과 삼강행실록에 적힌 역사적 사실로는 양천 허씨의 묘갈은 후손 김집이 쓰고, 정려중수기는 후손 김지수(金志洙)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허씨 부인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연산의 시가는 충남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소재하는데, 이 곳에 터를 잡은 지는 철산의 할아버지인 김약채때 부터라고 한다. 허씨 부인의 지극정성에 힙입어 성장한 철산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그 아들 국광(國光)은 좌의정 시절 8개월간 혼자서 의정부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맏아들 이름을 ‘극히 부끄럽다’라는 뜻으로 부끄러울 ‘뉴’자를 넣어 극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열녀 허씨 부인의 지극정성이 가문의 맥을 잇게 했고 마침내 그 후손 김극뉴가 8대 명당으로 알려진 천마시풍형의 명혈에 들어, 그 산소의 발음에 의해 김극뉴의 아들 종윤으로 부터 호, 계(휘), 장생으로 이어진다. 바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천마시풍형, 즉 도선국사가 조선의 8대 명당이라고 그의 결록에 적어 놓은 그 명혈에 묻힌 주인공이 국광의 장남 극뉴이고, 그로부터 그의 직계 후손들이 연이어 명사로 배출된다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닐까 싶다.
광산 김씨의 시조인 김흥광으로부터 23세 손이 되는 김극뉴의 묘재를 찾아가려면 전북 순창읍에서 태인, 임실, 전주로 통하는 2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구림면에서 내려오는 793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직전해 마흘리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가다 작은 고개를 넘어서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옆에 있는 용마초등학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을 올려다보면 빼어나게 우뚝 솟은 용마산(龍馬山)이 보인다.
마치 주위의 모든 산을 제압하고 군봉을 통솔하듯이 특립특출(特立特出)하게 솟아 있는 산의 기세와 수려함이 그 아래 어딘가에 대지명당을 작혈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한 눈에 짐작 할 수 있다. 이 산봉이 곧 마흘리 뒷산, 즉 김극뉴의 묘터를 만드는 용마산이고, 그 바로 뒷쪽에 또 하나의 수봉이 용마산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來龍해 응결된 장덕산이 있다.
용마산의 산세와 위용으로 봐서 주산과 현무봉을 겸하는 성진(星辰)이라면 장덕산은 그 소조산격의 산봉우리가 될 것이다. 풍수지리학을 연구하고 관심과 이해가 깊은 사람마다 용마산의 형국을 목성산(木星山)이라하고, 또 금성산(金星山)이라고 해서 혼란스럽지만 필자의 눈에는 금성체를 겸한 목성체가 분명하다고 느끼면서 구성(九星)으로는 탐랑성(貪狼星)에 접근되는 산의 형국으로 보아왔다. 그 후손들 중 재력가 보다는 현달한 인물이 더 많이 배출된 점으로 미뤄 봐도 필자의 견해에 큰 차이가 없으리라 믿고 있다.
다음 회엔 김극뉴를 비롯한 그의 후손의 묘터에 대해 산도와 함께 자세히 소개할까 한다. [남도일보]
[출처] 광산김씨(光山金氏)중흥터전 일군 양천 許氏부인,servicekorea|작성자 무재칠시 명문가를 일으켜 세운 烈女 광산 김씨(光山金氏) 중흥터전 일군 양천 許氏부인 풍수기행: 주산, 현무봉에서 낙맥된 산줄기가 묘터를 정확하게 작혈 ‘천하대지는 하늘이 땅에 비밀스럽게 숨겨 둬’ 정교한 통맥 진혈 핵심에 안장, 절로 감탄사 밖에서 육안으로 살필수 없는 기세등등한 맥 김극뉴를 비롯한 그 후손들의 산소가 줄지어 자리잡은 묘터는 마흘리 동구밖 길목에서 육안으로도 훤히 볼 수 있다. 용마초등학교에서 100m쯤 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마흘리로 진입하는 농로를 따라 마을에 도착한다. 다시 마을뒤 제실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다가 좌측 비탈길로 오르면 명터 천마시풍형의 혈장(穴場)에 다 다르게 된다. 산도에서 보듯이 제일 상단에서 3번째의 산소가 김극뉴의 묘이고 가장 위에 자리한 묘소가 남원 감찰을 지냈으며 이 혈을 찾아서 점혈했다는 김극뉴의 장인 함양 박씨와 그 부인이 합장 돼 있다. 또 그 바로 아래의 산소가 박씨의 딸이자 김극뉴 부인의 묘이다. 그리고 혈장 상단의 3개의 묘소중 제일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 묘소가 김극뉴의 산소이자 이 혈장내에서 가장 중심이며 핵심의 진혈처가 되는 자리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곳 명당 자리는 본래 함양 박씨의 소유였다고 한다. 김극뉴의 부인 박씨 묘가 뒷편에 자리잡고 있어 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부인 박씨는 김극뉴보다 17년 앞서 타계 했는데 그 친정 아버지이자 당시 남원 감찰을 지낸 함양 박씨는 관직에 봉직하면서도 틈틈이 풍수지리학 연구에 몰두해 전북 3대 지사로까지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 외손의 번성을 기약하기 위해 이렇게 유명한 천하대지를 사위에게 내 주면서, 그 중심의 진혈처 핵심에는 사위 김극뉴 산소자리로 소점해 두고, 본인과 부인의 묘소는 상단에 정해 합장하게 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 명당음택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겠지만 큰 혈터를 만들게 되는 이곳의 국세는 크고도 장엄하다. 호남정맥이 내장산맥과 백암산, 백학봉, 곡두재와 감상굴재, 대각산, 금방동 하령을 건너 추월산, 천치재를 지나 강천사로 유명한 강천산(583.7m)을 만든다. 호남정맥은 산성산과 광덕산을 거쳐 옥과의 설산을 지나 광주 무등산으로 기복 비룡해 가고 강천산에서 동쪽으로 분맥한 한 산맥이 무리산(557.5m)과 순창에서 임실로 가는 27번 국도 갈재를 지나 마흘리 용마산 뒷쪽 장덕산을 일으켜 세운 다음, 거기에서 짧게 낙맥 과협한 용맥이 천마시풍형의 주산 용마산을 멈춰 세웠다. 주룡맥과 주산이 강한 만큼 이 혈을 둘러싼 사신사(四神沙·현무 청룡 백호 조·안사) 모두 크고 장엄해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와 함께 풍수지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용마산에 올라가서 혈장 쪽으로 급하게 경사를 이루며 내려 쏟는 맥락의 기세며 그 기맥에 깃들어 있는 바위와 암반 등 소나무 숲에 가려서 바깥에서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조악하고 기세등등한 래용맥에 놀라게 된다. 그처럼 기세가 강하게 급경사로 내려 쏟는 산맥이 과연 주산 바로 아래쪽에 접근돼 있는 묘터에 혈을 맺을 수 있는 것인가. 이렇듯 의아스럽고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심룡(尋龍·혈을 맺으려고 행룡하는 맥을 자세히 살펴서 분석함)에 임해 본 사람이라면 공통된 소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혈처가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기우에 불과함을 확인하게 된다. 급작 조악하던 주룡맥은 묘터를 50~60m쯤 남겨놓고 평맥이 부드러운 맥으로 전변(轉變) 박환하면서 마치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이 초점으로 모아지 듯, 한 곳으로 초점화 되면서 벌의 허리와 같다고 하는 속기(束氣·지기를 한곳에 묶음)의 결인처를 만들고, 결인처를 지난 입수맥(혈처를 형성시키기 위한 마무리 용맥)부터는 언제 그렇게 조악했느냐는 듯 다양한 색깔이 황갈색에 섞여서 윤색이 감도는 토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겉흙만 보고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석맥에 토혈의 전형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하겠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묘터를 형성하기 위해 주산, 현무봉에서 낙맥된 산줄기가 묘터를 정확하게 작혈하려고, 그 나아가는 맥의 꺾여 도는(龍脈交度) 형태가 그토록 정교하고, 전광석화와도 같이 빠르게 형성 돼 튼실한 용세를 타고 흘러온 땅의 기운을 혈처에서 감돌게 하는 것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다시말해 용마산에서 급하게 내려 쏟은 용맥이 우선해 90도 가까이 절룡(節龍)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룡하는가 싶더니, 잘룩한 결인처에 이르러 다시 다른 방향으로 살며시 돌아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변국된 맥이 기어오르듯 살며시 솟아오른다. 이어 좌선으로 꺾여진 그 곳에 김극뉴의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서, 작혈으로 정교한 통맥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고 있노라면 ‘천하대지는 하늘이 땅에 비밀스럽게 숨겨둔다(天藏地秘)’는 터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어 절로 눈을 비비게 된다. 이렇듯 참된 묘터를 다시 확인하면서 부자간에도 시샘한다는 명당대지의 중심터를 선뜻 사위인 김극뉴의 묘터로 내주고 자신은 진혈을 맺으려고 돌아 꺾어지는 곳을 지나쳐 래룡하는 과맥 가까운 곳에 비껴 안장케 한 박 감찰을 생각해 보면서, 풍수지리에서의 이른바 살신성인(?)의 어려움을 몸소 실천한 그 배려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어떤 풍수연구가가 평하기를 김극뉴의 산소자리는 바로 천마의 기가 가장 많이 응집돼 작용하는 콧구멍이라고 분석하고, 그 하단에 안장된 후손의 묘터에 대해서는 가벼이 언급한 것을 보고, 동호인 입장에서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아 지금도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다. 거기에 스민 깊은 뜻이 있을테니 더 이상 언급은 피하려 한다. 물론 중국 주자가 지은 물형풍수서인 ‘산릉의장’이 세간에 퍼져 많이 읽혀짐으로써 묘터나 집터를 사물의 생김새에 비유해 명명한 탓에 매우 흥미를 유발했고 또 빠르게 널리 파급돼 일반화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물형으로 혈을 지칭하고, 또 그 물형에 의존해서 혈의 핵심자리를 찾으려는 허황된 노력이 뒤따랐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물형에서 말하는 말의 콧구멍은 과연 어디 만큼이고, 알을 품는 모양이라는 포란형의 둥주리는 어떤 것이며, 옥토끼가 달을 바라본다는 옥토망월형의 눈은 대체 어디쯤인가를 변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따져 들어가면 십인십색, 백인백색으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물형론은 흥미를 느끼고 호기심을 갖게 할지는 모르지만 진혈을 찾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 현장에 가면 절로 느끼게 된다. 보다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심룡기법과 심혈의 방법을 정립해야 풍수지리학이 일반화되고 모든 사람에세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두가 기본에 충실하면서 지기가 서리어 감도는 자리를 찾아내는데 깊은 연구와 격조있는 고민을 해 나가야 된다고 제언해 둔다. 하기야 필자도 명혈대지에 대한 간산을 하고 나면 속으로 느끼고 어설프게 이의점을 제기하는 속성이 발동되기는 매 한 가지인 듯싶다. 앞서 소개한 민 할머니 산소에서 “어줍잖게 상석에 있는 민 할머니 진혈에서 방장산 방향으로 손진맥으로 완만하게 내려간 맥을 밟아보면서 차석의 자리는 없는 것인가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갖고 발길을 돌린다”고 언급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사례가 아닐까. 그러나 ‘새로운 탐구는 합리적인 회의와 의문점에서 싹이 튼다’는 어느 과학자의 말에 힘입어 용기를 내 보기도 한다. 또 풍수지리학 강의를 통해 학문적 동지애로 맺어진 150여명의 수강회원들의 문제제기와 질문에 응답해야 할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면 나름대로 견해를 밝혀야 한 탓에 절제된 몇 마디로 응대하곤 한다. 조선 8대 명혈대지임이 도선국사의 결에서 밝혀졌으며 특히나 그 혈의 주체가 된 김극뉴의 발음에 의해 광산 김씨가 명문중의 명문으로 번성함으로써 이미 검증된 천마시풍의 진혈에 대해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런데도 7~8회에 걸쳐 이 혈을 다녀오면서 상석의 진혈 핵심에 안장된 김극뉴 선생의 산소에 감탄하고 나서는 거기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내민 북동맥의 연장으로 인해 시누대가 우거진 비탈진 언덕을 돌아다보면서 상석 아래에 차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궁금증에 사로잡히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경솔함으로 인한 후회가 남는 것은 아닐까 또 스스로 고민도 해 본다.[남도일보] [출처] 명문가를 일으켜 세운 烈女 광산 김씨(光山金氏) , servicekorea|작성자 무재칠시
"光山金氏의 영원한 심볼인" 光山마크는 누가 만들었나 ?
광산김씨대종회 초창기때에 총무부장을 역임하신 故 김용표(金容杓)일가께서는 광산김씨의 영원한 상징인 광산마크를 창안해 숭조목족과 일가화합을 강조하신 애족의 일가로써 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으며, 이제 광산김씨의 광산마크는 백만 광김의 표식으로 종기, 뺏지, 종보, 책자 각종 문서등에 빠질 수 없는 심볼이 되었으며, 전국 어디에서든지 이 마크만 보면 우리 광김 일가임을 금방 알수 있게됐다. 광산마크는 한문으로 빛광자(光) 뫼산자(山)를 혼합한 것으로 위, 아래의 글자를 조합하면 빛광(光)이 되고 아래의 글자는 뫼산자(山)이다. 또한 광산마크를 창안한 故 용표일가의 長子 경중(景中)일가는 양간공파/의정공파/사의공파 후손으로 충남 논산시 양촌면 반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전주, 안양, 부산북부, 서울남부, 수원지방노동사무소장을 거쳐 현재 노동부 산업재해 보상보험 심사위원장(별정직 2급)으로서 오늘도 공직의 정도를 걷고 있으며, 저서로는 "산재보험법(2), 여자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등이 있다. (이미지 참고 :월간 광산뉴스) -------------------------------------------------------- 財團法人光山金氏大宗會?學文化財團 運營 및 ?學金 支給規定 2007. 5. 1 制定 第1條(目的) 이 規定은 財團法人 光山金氏大宗會?學文化財團(以下 本財團이라 한다)의 運營과 ?學生 選拔 및 ?學金 支給에 관한 事項을 規定함을 目的으로 한다. 第2條(?學金支給 對象의 範圍) ?學生은 大學(4年制이상)에 在學中인 學生으로서 品行이 方正하고 學業成績이 優秀하나 家庭的 經濟的 事由가 學業을 계속하기 困難한 學生으로서 本財團 所定樣式에 依한 受惠申請을 한 學生에게 支給한다. 第3條(?學金支給人員數와 支給額 決定) 1. 本財團 理事會는 當該年度事業計劃 樹立時에 ?學金 支給對象 人員을 策定하여야 한다. 2. ?學金支給額은 大學登錄金 相當額으로 한다. 但, 豫算의 範圍內에서 支給한다. 第4條(?學委員會의 設置와 構成) 1. 本財團에 非常設 ?學委員會를 둔다. 2. ?學委員會는 11人 以內로 構成하되 本財團 理事長 및 大宗會長은 當然職으로 하고 本財團의 任員 또는 事務責任者와 宗親會의 敎育界 人事로 構成한다. 第5條(?學委員會의 機能) 1. ?學委員會는 다음 事項을 議決한다. ①?學生 選拔 ②?學金 支給額의 決定 ③?學金 支給中止 處分의 決定 ④?學生 親睦團體의 構成 및 指導 ⑤?學會誌 또는 會報의 發刊 普及 ⑥其他 ?學運營에 必要한 事項의 決定 및 施行 2. ?學委員會에서 決定된 事項은 本財團 理事會에 報告하여야 한다. 第6條(?學基金의 區分) 본 財團의 ?學基金을 特別?學基金과 一般?學基金으로 區分한다. 第7條(特別?學基金) 特別?學基金은 光山金氏宗員 및 篤志家의 特志에 依하여 金2阡萬원 以上을 特別히 出捐한 境遇에 固有한 名稱을 붙인 ?學基金을 말한다. 다만, 數人이 共同으로 出捐할 수 있다. 第8條(一般?學基金) 一般?學基金은 光山金氏宗員 中 一座(額數不問) 以上의 出捐에 依하여 造成된 ?學基金을 말한다. 第9條(?學基金 造成) 본 財團의 任員과 光山金氏大宗會 任員(常任顧問, 顧問, 會長, 副會長, 理事)는 ?學基金 造成에 協力한다. 第10條(?學金支給) 1. ?學金은 各學期別 納期를 勘案하여 一定期間을 定하여 受惠者에게 支給한다. 2. ?學金 支給期間은 1年單位로 하며 每年 대종회 신년하례회에서 支給한다. 3. ?學金 支給時 授與하는 ?學證書 內容에 基金 高額出捐者의 雅號를 기재할 수 있다. 第11條(?學金支給中止) 選拔된 學生이 다음 各號의 1에 該當하는 境遇에는 ?學金의 支給을 中止할 수 있다. 1. 學校에서 懲戒(除籍, 停學)處分을 받은 때 2. 한 學期以上 休學한 때 3. ?學金을 目的以外의 用途에 使用한 때 4. 其他事由로 所屬學長의 支給中止要求가 있을 때 第12條(事務處理) 本財團의 ?學金 受惠申請者는 다음 書類를 具備하여 所定期日內에 本財團에 接受 시켜야 한다. 1. 申請書(本財團所定樣式) 1通 2. 戶籍騰本 1通 3. 學業成績證明書(申請時의 直前學期末) 1通 4. 納入金領收證寫本(當該學期) 1通 5. 財産稅納入證明 및 非課稅證明 6. 家庭環境 및 自己紹介서 1부 (本財團 所定樣式) 7. 寫眞 (小明暗板) 2매 第13條(會計年度) ?學金支給의 會計年度는 政府의 會計年度와 같다. 但, 特殊事情이 있을 때에는 監督廳의 承認을 받아 달리할 수 있다. 附 則 第10條(準則) 本 規定에 明示되지 아니한 事項은 定款에 準한다. 第11條(施行) 本 規定은 2007年 5月 1日부터 施行한다. ---------------------------------------------------------------표어 1. 先祖陰德 追慕하고 一家敦睦 이룩하자
광산김씨 신라 신무왕의 셋째아들 흥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컫는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의 자손이다.
'광김'의 첫 정승(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과 영의정을 지낸 극성(克成)은 이들의 후손이며 장생은 국광의 5대손이다. 그는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集)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槃)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제학은 홍문관ㆍ예문관의 정2품 벼슬로 전임관이 아니고 타관(他官)이 겸대하였다. 오직 문관만이 할 수 있었으며 문형(文衡)이라고 하는데, 국가 최고의 문병(文柄)을 장악하여 사령ㆍ과거시험등을 통할하고 학문과 관계되는 제반사를 관장하였다.
대제학의 임기는 본인의사에 따라 결정하며 종신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벼슬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영의정이 부러워하는 벼슬자리로 "3대가 선(善)을 베풀어야만 대제학 한 명을 배출할 수 있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양반 문벌가문을 결정하는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핵심적인 벼슬이었다.천하의 대제학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조선양대 문벌을 말할때 '연리광김'이라고 하는데, 이는 연안이씨와 광산김씨(전주이씨는 왕실이라 제외)가 공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대제학 7명씩 배출하여 수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왕손인 전주이씨도 조선왕조를 통틀어 873명의 문과급제자 중 단 7명 만이 대제학이 될 정도로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든 관직이었다. 이처럼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이라는 직책은 학문하는 모든 선비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제학을 조선왕조 통틀어 3대가 연속 배출한 가문이 있으니, 명문(名門)중의 명가(名家)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최대의 명문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3대 대제학 가문은 모두 4가문으로, (전주이씨 백강 이경여 家),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家), (달성서씨 약봉 서성 家), (연안이씨 월사 이정귀 家)등이다. 전주이씨 밀성군파 이경여 家(이민서-이관명-이휘지) 왕손인 전주이씨 중 세종대왕의 5번째 아들 밀성군 후손이 명가를 형성해 정승 6명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 중 백강 이경여 집안에서 좌의정3인, 우의정 2인이 나왔다. 백강 이경여는 숭명배청파의 1인으로 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바로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를 필두로 손자 이관명과 증손 이휘지가 연이어 대제학이 되는 영예를 안아 3대 대제학이 되었다.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家(김만기-김진규-김양택) 우리나라 대표적 가문(문과 265명, 정승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 공신 9명, 청백리 5명 배출), 사계 김장생(문묘배향)자손은 대대로 석학거유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알아주는 집안으로 꼽는다. 광김은 이조에서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는데 모두 김장생 한 사람의 자손이다. 김장생의 증손이자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아들 진규, 손자(영의정) 양택이 연이어 대제학에 올라 명문가를 더욱 빛나게 했다. 현대 인물로는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김수환추기경 등 수없는 유명인사가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다. 달성서씨 약봉 서성 家 (서유신-서영보-서기순) 달성서씨는 이조에서 문과 140명, 정승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 청백리 1명, 공신1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약봉 서성은 선조조 5도 관찰사와 3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후손이 크게 번창, 약봉일가를 이루었다.
약봉의 8대손인 서유신은 영의정 서지수의 아들로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아들 서영보,손자 서기순(청백리)이 3대에 걸쳐 대제학에 올라 번창하는 가문에 힘을 실었다. 현대인물로는 시인 서정주, 흥사단 이사장 서영훈 등이 있다. 연안이씨 월사 이정귀 家(이정귀-이명한-이일상) 연안이씨는 조선시대 최초의 3대 대제학 가문으로 문과 250명과 정승 8명, 공신 12명, 청맥리 7명을 배출한 조선왕조 양대 양반가문이다. 조선중기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이정귀는 14세때 승보시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쳤으며,<조선간행록>을 간행하여 뛰어난 문장(문학)실력을 보여 주었다. 아들 이명한, 손자 이일상이 연이어 대제학을 지냈다. 이밖에 조선시대 3명 이상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은 광산김씨(7명), 연안이씨 (7명), 전주이씨(7명), 안동김씨(6명), 달성서씨(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5명), 풍양조씨(4명), 안동권씨(3명), 남양홍씨 (3명), 여흥민씨 (3명), 경주이씨(3명), 연일정씨 (3명), 해평윤씨(3명), 양주조씨(3명), 고령신씨(3명), 청풍김씨(3명), 해주오씨(3명) 등이 있다.
문과급제자 100위권 성씨 * 문과급제자수 중 ( ) 안 숫자는 해당 문중 집계 *인구수(85년통계)
[고려시대 명문가문]
고려 전기에 주된 귀족 가문은 왕실 외척으로 세력을 누렸던 안산김(安山金), 경원이(慶原李), 경주김(慶州金), 파평윤(坡平尹), 해주최(海州崔), 강릉김(江陵金), 광양김(光陽金), 평산박(平山朴)씨의 8 가문입니다. 고려 후반기 충선왕 당시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당대 1급 가문으로는 다시 언양김(彦陽金), 정안임(定安任), 경원이(慶源李), 파평윤(坡平尹), 안산김(安山金), 철원최(鐵原崔), 해주최(海州崔), 공암허(孔岩許), 평강채(平康蔡), 청주이(淸州李), 당성홍(唐城洪), 황려민(黃驪閔 ), 횡천조(橫川趙), 평양조(平壤趙), 그리고 신라왕손 김흔(金琿) 일가 (一家)등 15개 가문이 열거됩니다. 김혼은 경주 김씨 이므로 이로 보면 고려 전기에서 후기까지 왕실과 통혼 가능자로 계속된 집안은 파평윤(坡平尹), 경주김(慶州金), 해주최(海州崔), 안산김(安山金)씨 이렇게 4가문입니다.
《고려의 10대 갑족(합계 58인)》
[자료 출처 : 한국족보문화연구원]
위 두 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홍유로 추정되는 남양홍씨, 최영장군의 해주최씨, 윤관 장군의 파평윤씨, 서희, 서공으로 알려진 이천 서씨, 김부식으로 알려진 경주김씨 등이 문과관련 문벌입니다.
규장각 [奎章閣] 조선시대의 관아. 설립년도 : 1776년 설립목적 : 정치, 경제, 사회 등 현실문제의 학문적 해결 주요업무 : 국립도서관
출처 : 두산백과사전
정조대
순조대
헌종대
철종대
고종대
한국의 명당 신숭겸의 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안동김씨 김번의 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고령신씨 시조묘 (경북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반남박씨 시조 응주 묘 (전남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
청풍김씨 김인백의 처 안동권씨 묘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경북 예천 정사묘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동래정씨 시조 묘 (부산시 진구 양정동 화지산)
청주한씨 한란의 묘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광산김씨 김극뉴의 묘 (전북 순창군 임계면 마흘리)
광산김씨 족보 1600년대 필사본 광산김씨족보
1853년(癸丑)에 간행된 광산김씨족보(光山金氏族譜)
1843년(癸卯仲夏平章洞刊) 간행된 광산김씨족보(光山金氏族譜)
1901년 목활자본 광산김씨사온승공파보, 면암 최익현선생의 서문
1939년(을묘보) 광산김씨족보(光山金氏族譜)
한국사에서 광산 김씨의 위상 광산 김씨는 명문거족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수많은 성씨 중에 제일 앞자리에 설 수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연면히 이어오는 선조들에 대한 경모정신은 타 성씨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신라 말기에 입성한 광산 김씨는 고려조에도 정치?외교?문화 각 분야에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계?신독재 양선생의 문묘배향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가문의 영달을 이루었다. 인구수에서도 적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음에 관심을 가지고 고려 이후 시대 순으로 역사상의 위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어느 한 성씨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문중에 대하여 허물은 덮어두고 장점만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역사상에 전하는 것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이후의 자료는 너무 방대하고, 고려 이전의 자료는 너무 빈약한 것이 연구에 어려움을 더한다. 그러므로 족보나 가승의 자료보다 정사에 나온 것을 기초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후손 통정대부 김현뢰(金賢賚)가 쓴 평장동 유허서 에도 (“鳴呼平章洞卽我先祖新羅王子公卜居之地”) 아-- 평장동은 우리 선조 신라왕자공께서 터를 잡아 사시던 곳으로---로 시작되어 있고 통정대부 퇴어자 김진상(金.鎭商)이 쓴 왕자공 휘 흥광 유허비 음기에도 光州治地 --平章洞--- 我始祖新羅王子金公之遺墟也로 되어있다. 그리고 신무왕의 3자설과 헌강왕의 3자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으니 광산김씨 최고 오래된 문헌에 준 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신라왕들이 지방 곳곳에 왕족을 보내어 살게 한 것도 그 한 예가 되겠다.
왕자인 흥광도 서일동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광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평장사가 있는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평장동) 산 76번지가 이곳이다. 당시 무진주, 즉 광주 또는 광산은 오늘날의 광역시 개념이다.
3. 고려왕조와 광산 김씨 인물
이자겸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광산 김씨 김정준의 외손자이다. 『고려사』에 그의 열전이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김부식의 앞에 있다. 이 당시 이름난 문벌로 유홍(柳洪)의 문화 유씨, 김부식의 경주 김씨, 김인존의 강릉 김씨, 김은부의 안산 김씨, 이자겸의 인주 이씨, 윤관의 파평 윤씨와 어깨를 나라니 하는 광산 김씨였다.
본글은 지난 8월10~11일까지 서천 춘장대 해수욕장 건양대학교 수련원에서 가진 광산김씨 대종회 임원이사 |
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