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 이제 역사를 바로 세울 때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숙명인 것만 같다. 아버님의 사인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행위자를 찾아내야 한다.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기록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일제 시대 항일 독립군 장교 출신 보수 민족주의자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목사가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밝힌 말입니다.
서슬퍼런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 장준하 선생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 정권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원인도 제대로 밝힐 수 없도록 막았습니다. 왜 막았을까요? 박정희 정권이 장준하 선생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타살 증거가 나타난 어제는 67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친일파 매국노들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무려 67년이나 지난 것이지요.
더욱이 그 기간 중 일본 제국주의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18년 장기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수치스런 오욕과 반역의 역사이지요. 따라서 일본군 중위 출신 박정희에게 독립군 대위 출신 장준하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겠지요.
과연 장준하 선생은 누가 죽였을까요? 일단 박정희 독재 정권은 독립군 출신 장준하 선생에 대한 온갖 박해에 더불어 결국 죽음으로 몰고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를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 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 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을 할 정도로 강직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올곧은 민족주의자의 삶이었지요.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박정희는 자신의 일제 만주군 복무와 광복 후 좌익 남조선 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준하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박정희에게 열등감 폭발의 계기였을까요? 그러한 독재와 반독재의 대척점에서 장준하 선생은 의문의 사망을 했습니다. 장준한 선생의 의문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박스에 담긴 한겨레신문의 기사를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장준하, 박정희에게 “너는 만주군 장교…” 면박
장준하 '실족사' 끝나지 않은 의혹
경사 75도, 높이 14m 암반서 굴러 떨어졌다는데 외상없고, 최후 본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 사고 뒤 갑자기 교사로 취직 의문사 위선 "규명 불능" 발표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숨진 뒤 37년 동안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장 선생이 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 전 대통령과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다. 일제 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 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 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 준 일도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선생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된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37년간 이어진 장준하 타살 의혹 장 선생 사망 당시 경찰은 장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산악회원 40여 명과 함께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경기도 포천시(당시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489m)에 올랐다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산행에 합류한 '김용환'이라는 인물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김용환은 장 선생이 출마한 총선 때 자원 봉사자로 활동했으나 산행 이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다.
그 날 일행이 약사봉 샘물터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장 선생과 김용환이 따로 산길을 올랐다가 다시 일행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비탈에서 실족했다는 것이 당시 경찰의 발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 떨어졌는데도 체중 73㎏이던 장 선생의 신체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 때문에 생긴 상처로 보기 어려웠다는 점 때문에 당시부터 의문사 논란이 일었다.
'추락 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4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 선생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했다'(동아일보 75년 8월 19일)는 기사가 장 선생 사망 이틀 뒤에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던진 기사를 쓴 내외신 기자들은 긴급 조치 위반으로 잡혀가 곤욕을 치르거나 한국에서 추방됐다.
장 선생 타살 의혹은 1970~80년대 군사 정부 시절에는 입 소문으로 나돌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뒤 민주당이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를 꾸려 다시 공론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의혹으로 머물러 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진상 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목격자 김용환이 장 선생 사망 뒤 갑자기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실, 그의 일관성 없는 진술, 장 선생 주검에서 추락 흔적이 거의 없는 점 등을 들어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독립·반독재 투사 장준하 장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의 저서 <돌베개>를 보면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 김희숙씨에게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성서 구절을 남겼다.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으면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는 귀띔도 남겼다.
그는 44년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그 해 11월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김구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 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의 항복 뒤인 1945년 11월 23일 임시 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 비서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50년대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며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잡지로 이끌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한-일 수교 협상이나 베트남 국군 파병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선생은 특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 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순회 강연을 하면서 70여 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협상 주도 세력을 비판했다. 베트남 국군 파병과 관련해선 1966년 방한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두고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세무 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장 선생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나라 밖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됐다.
72년 10월 유신 이후엔 74년 긴급 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장 선생이 숨진 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영결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목사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억울한 원혼이 잠들지 못한 것인지, 37년만인 광복절에 장준하 선생이 다시 깨어났습니다.
장호권 목사가 비가 많이 와 허물어진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는 중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장준하 선생의 주검은 마치 그 동안 ‘억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웅변하듯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으로 보이는 상흔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호권 목사는 "절벽에서 떨어졌다는데 주검이 너무도 멀쩡했고, 멍도 없고 오른쪽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다. 양팔 겨드랑이 쪽엔 멍이 있었는데 누군가 잡아끌고 갈 때 난 것처럼 보였다. 시신을 보자마자 ‘각본이구나’ 생각이 들었다."다고 했습니다.
장호권의 당시 나이 27세였습니다. 장호권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풀고 싶었지만 박정희 독재 정권은 오히려 긴급 조치 위반으로 가혹한 탄압을 했습니다. 장준하 선생 죽음 의혹 기사를 쓴 국내외 기자가 고초를 당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지요.
심지어 장호권은 박정희 정권의 정보 기관원에게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뒤 괴한 4명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기도 했습니다. 장호권은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말레이시아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무엇을 숨기려 했던 것일까요?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은 강하게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장호권 목사가 37년만에 밝힌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 배경과 심경은 아래 기사를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재점화 인터뷰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씨
“주검 보자마자 '각본이구다' 생각 들어” “두개골 상처에 성냥개비 넣으니 다 들어 갔다“
광복군으로, 반독재·민주 투사로 우뚝 섰던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63)씨는 두개골이 함몰된 아버지의 유골을 보는 순간 37년 동안 응어리졌던 분노가 솟구쳤다고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계곡 절벽에서 추락사했다던 부친의 주검은 마치 그 동안 ‘억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웅변하듯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으로 보이는 상흔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보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먼저 걱정했고 너무나도 청렴했던 아버지를 그는 남들 앞에선 ‘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공인으로 대했다. 지난 1일 유해를 이장하며 부친의 타살 흔적을 목격한 순간부터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가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장씨는 광복절인 15일 <한겨레> 기자와 만나 부친의 이장 시기가 올해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게 된 것이 “37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 이제 역사를 바로 세울 때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숙명인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님의 사인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행위자를 찾아내야 한다.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기록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37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 이제 역사를 바로 세울 때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처럼 여겨져…돌아가셨을때 의사 3분을 은밀히 문상객처럼 모셔 검시. 의사들 ‘뒷골 함몰된 것 같다’”
그 때는 말도 못 꺼냈다…각본이라 여겼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확신하나?
“절벽에서 떨어졌다는데 주검이 너무도 멀쩡했고, 멍도 없고 오른쪽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다. 양팔 겨드랑이 쪽엔 멍이 있었는데 누군가 잡아끌고 갈 때 난 것처럼 보였다. 시신을 보자마자 ‘각본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세 분을 문상객처럼 모셔와 주검을 살펴 보도록 했다. 귀 뒤 상처에 성냥개비를 집어 넣으니 다 들어 갔다. 의사들이 만져보더니 ‘뒷골이 함몰된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도 ‘약사봉 현장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많았다. 아버지가 추락한 것을 봤다는 증언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결론은 아버지가 추락 현장에 가지 않았고, 다른 데서 변을 당한 뒤 시신을 옮겨 놓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왜 이제야 이야기를 하는가?
“당시엔 사망 의혹 얘기만 해도 ‘긴급 조치 위반’으로 고초를 겪는 시절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자가 고초를 겪었고, 일본 일간 <마이니치 신문> 기자는 시신 사진을 일본에서 현상해 가져왔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고 동분서주하다가 정보 기관원에게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뒤 괴한 4명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달 동안 병원 신세도 졌다.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말레이시아로 도망갔다.
박정희 사망 뒤 귀국했는데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체포돼 고문당하고는 다시 싱가포르로 도망갔다. 그렇게 24년 동안 국외 도피 생활을 한 뒤 2004년에야 돌아왔다. 의심이 들었어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고, 의혹에 대해 함구할 수 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에도 의혹을 규명하지 못했는데
“1993년 민주당이 조사단을 꾸렸지만 한계가 많았다. 과거의 기득권 세력이 정치계, 학계, 언론계, 법조계, 사정 기관에서 활약하는데 그들의 벽이 너무나 두꺼워 손대는 데 한계가 있었던 거다.
김대중 정권 때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할 때도 ‘대통령이 목숨 내놓고 하지 않는 한 희생자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문사 위원회 조사관도 수사권이 없어 국가 기관들에 자료를 주도록 강제할 힘이 없었다. 젊은 검사가 ‘박정희·전두환 식으로 (고문이라도) 하면 다 나올 텐데 함구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
노무현 정권은 기득권 세력과 연결 고리가 없어 기대했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 돼 실망하고 말았다.”
37년 세월 아버지를 ‘장 선생’으로
아버지 장준하 선생은 어떤 이였나?
“많은 항일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정국에서 정치적 역할을 못했지만 장 선생은 이승만 독재에 이어 박정희 유신 독재가 극에 달한 1970년대까지 역할을 했다.
군계일학으로 예지력이 대단하고 청렴해 야권에서도 견제를 받았다. 정치적으로 이용한 뒤엔 배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래도 독재 정권 깨부수는 데 제 구실하겠다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개 정치인이 아니라 민족 지도자였다.”
군사 정권 때 가족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던데
“유신 정권이 조선 시대 마냥 삼족을 없애지는 않았지만 거지 아닌 거지로 만들어 죽음 상태로 몰아 넣었다. 먹고 살려고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지금까지 한 번도 함께 모인 적이 없다.
먹을 것이 떨어져 아버지를 잘 아는 지인이 쌀 1가마니를 몰래 가져다 줬다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 혼쭐이 난 적도 있다. 다른 정치인들은 수난을 당해도 정치적 탄압으로 끝났지 이렇게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낸 유례는 없을 거다.
직장에 취업하려 했지만 그 때마다 정보 기관에서 압력을 넣어 못했다. 아버지를 잘 아는 기업에 찾아가 일 좀 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회장이 봉투를 쥐여 주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27살 한창 나이였는데 돈 돌려주고 나왔다.
가족들이 평생 집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노모(김희숙씨·88)와 함께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보증금 1000만원, 월세 20만원 셋집에서 월 60만원 연금으로 지낸다. 그러나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다시는 우리 가족과 같은 비참한 가족이 나와서는 안 된다.”
“우리 가족 거지 아닌 거지 만들어 죽음 상태로 몰아 넣었다...뿔뿔이 흩어져 지금까지도 함께 모인 적이 없어. 직장에 취업하려 했지만 그 때마다 기관에서 찾아와 압력”
박근혜 사과 이전에 진실부터
박근혜 새누리당 경선 후보와 화해할 생각은 있는가?
“박근혜 후보 만나는 것은 명분 안 서는 일이다. 과거를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날 수는 없다.
2007년 대선 때 박근혜의 사과를 받아준 것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한나라당 중책 맡은 분의 청을 들어 준 것이다. ‘과거를 사과하고 싶다’ 해서 그것만 모친이 받아 들였다.
당시 박근혜는 ‘아버지 시대에 희생당했던 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모친은 ‘요식 행위 아닌 진정성 있게 정치를 해달라’고 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박근혜의 대선 출마에 대한 생각은?
“박근혜와 내가 원수진 것 아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그런 삶을 살아온 거다. 박근혜도 박정희의 딸로 태어난 숙명을 지녔다. 하지만 정치 권력에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 때 했으면 됐지 모자랄 것 없이 다 갖췄는데 이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주면 차라도 한 잔 할 수 있을 거다. 그러지 않으면 평행선 달릴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정치를 하겠다면 아버지가 아닌 박정희의 모든 행적, 또 기득권 세력과 분명한 선을 긋고 독자적으로 해야 한다. 먼저 진실을 밝힌 뒤 화합해야지 범죄를 숨기고서 화합하자는 것은 자신을 숨기는 일이다.
박근혜 자신은 친일이 아니라고 해도 박정희 시대에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 잔재 세력이 박근혜 옆에 들러 붙어 나라를 일본에 다시 넘겨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박정희와 장준하, 두 인물을 평가한다면?
“박정희의 실체를 보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꿨다. 첫 번째 창씨 개명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일본군 장교가 되겠다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 이름을 따라 또 이름을 바꿨다.
박정희가 했다는 근대화 사업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 본부 기획부장을 맡은 부친이 세웠던 계획이었다.
국토 건설 요원으로 일할 대졸 공무원 2000명을 뽑아 임명장을 주려던 때 5·16이 터졌다. 이들은 교육받은 엘리트였고, 근대화 사업의 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독재자에 핍박받은 독립 투사 후손의 삶입니다. 장호권 목사의 삶은 독립군 대장 출신 아버지를 둔 죄(?)로 처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장호권 목사는 “유신 정권이 조선 시대 마냥 삼족을 없애지는 않았지만 거지 아닌 거지로 만들어 죽음 상태로 몰아 넣었다. 먹고 살려고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지금까지 한번도 함께 모인 적이 없다.
먹을 것이 떨어져 아버지를 잘 아는 지인이 쌀 1가마니를 몰래 가져다 줬다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 혼쭐이 난 적도 있다. 다른 정치인들은 수난을 당해도 정치적 탄압으로 끝났지 이렇게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낸 유례는 없을 거다"고 박정희 독재 정권의 야만성을 폭로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직장에 취업하려 했지만 그 때마다 정보 기관에서 압력을 넣어 취직도 불가능했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이어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도 탄압이 이어졌던 터라 장호권은 원치 않는 망명을 27년이나 해야 했습니다.
장호권 목사가 "가족들이 평생 집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노모(김희숙씨·88)와 함께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보증금 1000만원, 월세 20만원 셋집에서 월 60만원 연금으로 지낸다. 그러나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다시는 우리 가족과 같은 비참한 가족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 이야기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친일파 매국노는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군 후손은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분노가 치밀 정도였습니다.
무려 37년만에 무덤에서 깨어난 타살 증거는 독립군 대장 장준하 선생의 한 맺힌 복수일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 2012년 대선 시기에 무덤에서 나왔으니 무서운 일이지요.
이미 2009년에도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과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 사이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친일 인명 사전에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독재자가 들어간 것에 반대하는 박지만의 친일 인명 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 금지 신청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장호권 목사는 박지만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 바 있습니다. 지난 2009년 11월 9일 정운현 전 한국 언론 재단 이사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통해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고 장준하씨의 3남 장호준 목사가 박지만씨에게 보낸 서한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바 있었습니다.
당시 장호권 목사는 미국 커네티컷에서 유학생들과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친일 인명 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운현 이사에게 공개 편지를 전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내용인 전문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박지만씨,
지만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시절 동창들의 입을 통해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만씨의 이름이 들려지면서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그리도 잔인했던 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 생활을 하던 때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지만씨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고, 한동안 듣지 못했었던 지만씨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되었던 것은 싱가폴에서 마약 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 지만씨가 마약 중독으로 치료 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만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최근 지만씨가 ‘친일 인명 사전’에 대한 게재 금지 가처분과 배포 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박지만씨,
지만씨와 나는 너무도 다른 삶의 공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지만씨와는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도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지만씨가 ‘친일 인명 사전’에 대한 게재 금지 가처분과 배포 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서야 지만씨에게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같은 역사 속을 헤치며 살아야만 했었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향해 다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고백 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박지만씨,
나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군이었다거나 지만씨의 아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고, 내 아버지는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였다 또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는 역사가 스스로 평가하도록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있었던 역사를 그대로 남겨 두는 것입니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류 역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 뿐 아니라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던 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친일 인명 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만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지만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박지만씨,
내 아버님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수 개월 전에 지만씨의 아버지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 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 되겠는가’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만씨나 나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 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어 남겨져야 하며 또한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친일 인명 사전’은 역사입니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남겨 두어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지우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다시 당부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수용소 소장으로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몬 게트(Amon Goeth)의 딸은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면서 생존자 중 한 사람을 만나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아버지의 과거를 듣고 용서를 빌게 됩니다.
박지만씨,
이제 우리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삶 속에서 또한 우리는 지나온 역사가 결코 우리의 손에 의해 바뀌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는 지만씨에게 내 아버님께서 평생 가슴에 품었었고 이제는 내 가슴 속에 품겨져 있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전해 드립니다.
자식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친일 인명 사전’에 대한 게재 금지 가처분과 배포 금지 신청을 취소하십시오. 그리 하는 것이 역사와 후손들 앞에서 지만씨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 통일을 위해 지만씨의 삶이 쓰여 지기를 빌어 봅니다.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자랑스런 독립군 후손답게 장호권 목사의 편지 글은 구구절절 역사 의식과 올바른 삶의 인식이 가득했습니다.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게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합니다.
독재자 모택동의 딸은 "아버지는 생전에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독재자 스탈린의 딸도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침묵한 나도 공범이다. 이제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고 했습니다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은 "5.16은 아버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다른 한국 독재자의 딸입니다. 적어도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먼저 반성부터 해야 합니다.
장준하 선생의 인생 이력은?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바로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 육군 군사 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 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 국민 회의 서기 및 민주 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 문학 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 통합을 위한 4자 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운동 중 국가 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 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 수호 국민 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 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 회복을 위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 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 집행 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 정권과 맞섰고, 1975년 초에는 민주 회복을 위한 범민주 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 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장호권 목사는 모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는 그 분(박근혜 후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딸이래도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딸에게 책임을 묻겠나 연좌제도 아니고, 그것은 반대한다. 다만 그 분이 정치를 해서 이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는 경우에는 분명히 정치적 책임을 그 당시와 연결해서 져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박정희 시대 때 정치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는 안 된다. 그런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장호권 목사는 이런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고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진실을 역사에 기록해 놓고 싶은 것이지요.
눈물이 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입니다. 빨리 장준하 선생의 사망 진실이 밝혀져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역사의 교훈이 되었으면 합니다.
출처 http://jsapark.tistory.com/2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