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성
12월 중순 오사카의 날씨는 우리의 부산이나 남해안 정도의 기온이었다.
호텔과 많은 식당 등이 들어서있는 골목은 우리의 먹자골목과 흡사한 분위기였다.
이곳에는 백종원식당도 있어 한국의 여느 식당골목처럼 느껴진다.
한국사람 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 식당에서 나오는 부추김치와 배추김치는 매콤하고 짭짤한 게 우리가 만들어먹는 맛과 똑같았다. 지금은 일본사람의 한국여행객보다 한국 사람의 일본여행객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다. 이곳에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물가는 우리보다 조금 저렴한 것 같았다. 긴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이곳의 식당가는 번창했다. 조금 늦게 가면 마감이다. 게 전문 식당은 줄이 너무 길어 줄서기를 포기했다. 이골목안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을 만났다. 복잡한 골목 안 식당으로 식재료를 실어 나르는 여러 명의 트럭기사들이다. 이들은 절대로 경적을 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조용히 빠져나간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교육을 받은 것 같아보였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관광객은 이곳에서 좋은 인상을 받는다. 서울의 번잡한 식당골목에서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성질 급한 우리의 기사아저씨들은 어떻게 할까 하고 잠깐 비교해보았다.
다음날아침 오사카 성 천수각 으로 향했다.
오사카성의 터는 1496년 정토진종 렌뇨 상인 (上人)이 오사카 성 부근에 방사 (坊舍)를 지어 오사카 본원사 (本願寺 )라는 큰 사원을 만들고 강대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1580년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오다노부나가 에게 항복하고 절은 주위의 시가지와 함께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오다노부나가 가 죽은 후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583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 절터에 거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 보였다.
성의 둘레를 파내어서 인공호수로 만들어서 성을 침공할 수 없는 난공불락( 難攻不落 )의 요새 (要塞)로 만들었다.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토미히데요시를 상징하는 커다란 성곽이 완성되었다. 이 큰 성을 만들 때 인부로 일했던 힘없는 백성들이 많이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바위도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침공했다. 첫 번째가 1592년의 임진왜란이고 두 번째가 정유재란이다. 그의 가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고 그의 외모는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과대망상으로 조선에는 두 차례나 대군 (大軍)을 파견 전란을 일으키고 쌍방에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비극을 초래한 인물이다. 1592년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비키라는 일본군대를 맞이한 부산포의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던 우리군대는 저들의 소총 앞에 화살로 대응 정발 장군 등 필사적인 항전으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게 막았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참호를 파고 일본군의 목을 치며 결사항전 했으나 압도적 숫자의 병력과 조총의 위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적군인 그들도 동래부사 송상현을 아까워했다고 전해졌다.
1차 침공 때 큰 피해를 입었지만 2차 침공 때는 우리의 수군이 이순신장군의 뛰어난 전술로 적은 숫자지만 승리로 이끌었다. 1592년 시작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1,2차침공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1598년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의 전 부대가 철수 7년 전쟁의 막을 내렸다. 이 전쟁은 조선에 무한한 고통을 주었고 2차 침공인 정유재란 때 임금인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 (蒙塵) 했으며 왕의 몽진을 본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의 역사와 우리의 수난의 역사는 겹쳐지고 수많은 백성들과 군대의 희생이 있었고 행주산성의 권율장군의 승리 진주 김시민장군의 승리와 전사 (戰死) 이순신장군의 승리와 희생 이3대 대첩은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내었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에 있었다. 진주대첩패배로 자존심이 크게 상한 토요토미히데요시는 남해안으로 내려가던 일본군에게 총동원령을 내렸고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한풀이로 싸움을 걸어온 것이었다. 일본군 9만 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10일간 진주성을 공격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야사 (野史)에는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날 성안에 있던 모든 병사들과 백성들은 다음날 성이 함락될 것을 미리알고 함께 식사했다. 이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모든 식재료를 한꺼번에 모아서 넣고 비볐다. 마지막식사가 비빔밥이었던 것이다.’ 이 비빔밥을 먹을 때 이들의 비장함이 어떠했을까. 그 유명한 진주비빔밥의 역사는 길고 슬프다. 이시기에 기생 논개는 충절과 애국심으로 일본군 장수와 함께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 힘없는 백성과 군사들만 희생시키고 두 번에 걸친 일본의 조선침략은 소득도 없는 실패로 끝났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은 후 정권은 도꾸가와 가문이 잡게 되었다.
1615년 도꾸가와 이에아스가 영국동인도회사에서 도입한 신형 장거리포로 오사카성을 공격하자 버티지 못하고 오사카성은 무너지고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2대장군 도꾸가와히데타다의 명령으로 1620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오사카성은 전면적으로 재건축되었으나 1665년 벼락을 맞아 소실되었다. 오사카성은 에도시대에 도꾸가와 막부의 서 일본지배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고 막부가 멸망하고 내전이 시작된 1868년 많은 건조물이 불태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폭격으로 피해를 크게 입었다. 근대의 오사카성은 군사시설로 사용되었다. 그 후 오사카시민들의 기부로 현제의 천수각이 새로 지어져 1997년 국가유형문화재로 등제되었다.
일본의 정권은 1,야마토 정권 2,귀족정치 3,무사정권 4, 남북조시대 5,군웅할거시대 6,천하통일 7,에도 바쿠후시대 8,에도 바쿠후의쇠퇴 9,메이지유신 10,일본제국주의와1,2차 세계대전 12,다시일어서는 일본. 우리를 침략해왔던 시기는 그들의 천하통일 시대였다. 오사카성은 그들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수고 다시 짓는 수난을 심하게 겪었으나 지금은 수많은 국내외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국가유형문화재다. 이곳에 보관 전시 되어있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초상화와 갑옷을 보니 수많은 복잡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절대로 가까워 질 수가 없는 4백년전의 그가 오사카 성 천수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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