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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4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州)의 한 주택가에서 15세 소년 총기난사 5명 사망
2022년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 10월 달 들어 7회 미사일 도발
2021년 이완구 전 국무총리 별세
2021년 타이완 13층 주상복합건물 화재 46명 사망 41명 부상
2020년 조국 법무부 장관 사임
조국 법무부 장관이 10월14일 검찰개혁안 발표 직후인 오후 2시 전격 사임했다. 지난 8월9일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지 66일 만이며 9월9일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지 35일 만이다.
조 장관은 이날 오후 '검찰개혁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내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조국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수사에서 아내 정경심교수의 표창장위조 등 사건과 아들 딸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수사를 계속하자 이날 사임한 것이다
2020년 40대 여성 기독교신자 경기 남양주 수진사 방화
2019년 여성혐오형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 설리(25세) 세상 떠남
2015년 베트남전(戰) ‘짜빈동 전투’ 영웅 정경진 중령 별세
베트남전(戰) ‘짜빈동 전투’의 영웅인 정경진(79) 해병대 예비역 중령이 14일 별세했다.
그는 1960년 소위(해사 14기)로 임관해 해병대 청룡부대 11중대장(대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1중대는 1967년 2월 꽝응아이성 짜빈동에서 벌어진 북베트남군과의 전투에서 2개 연대와 1개 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243명을 사살하고 각종 무기를 노획한 공로로 한·미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고, 중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당시 UPI 통신은 이 전투를 ‘신화 같은 이야기(Mythological Story)’라고 보도했다.
1981년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태극무공훈장과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013년 김광진 의원(더불어민주당) 국감질의 통해 국군사이버사령부의 18대 대선개입 드러남
2006년 반기문 외통부장관 한국인 최초로 유엔사무총장에 뽑힘.
2006년 유엔안보리 핵실험한 북한에 대한 제재결의 1718호 채택
2005년 김종빈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 반발해 사퇴
6.25전쟁에 대해 '통일전쟁'이라는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정구 동국대 교수 사건이었다. 당시에 수사팀과 검찰 지휘부 사이에는 이견이 없었다. 사건을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박청수)는 강 교수를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김 전 총장도 수사팀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천정배 장관은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있을 때만 구속을 할 수 있다"며 불구속 수사 지휘를 내렸다.
천 장관의 수사지휘를 당시 검찰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김종빈 총장은 장관의 수사지휘를 수용하면서도 "검찰 수사에 개입하려 한다"며 항의성 사표를 던졌다. 강 교수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폐막, 한국2연속 종합2위
2002년 10월 14일 한국 마라톤의 간판스타 이봉주가 마라톤 2연패를 달성, 부산 아시안게임의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부산아시안게임이 폐막했다. 이번 대회에선 중국이 금메달 150개, 은메달 84개, 동메달 74개로 1위를 차지했고 한국이 금 96개, 은 80개, 동 84개로 2회 연속 2위를 고수했다. 아시안게임 폐회식이 열린 아시아드 주경기장은 5만여 관중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오후 8시 대회 폐회가 선언되고 대회기가 서서히 내려졌다. 정순택 대회 조직위원장은 “이번 대회는 북한을 비롯,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전 회원국이 처음으로 모두 참가한 최대·최고 수준의 대회였다”며 “이 성공을 일궈낸 자랑스런 400만 부산시민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대회 기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북한 응원단 270여명은 폐막식이 시작되기 15분 전 분홍·하늘·오렌지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남측 1층 스탠드로 입장,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01년 `시안(西安)사변` 주역 장쉐량 하와이서 별세
1936년 12월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를 체포, 일본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토록 요구해 관철시킨 `시안(西安)사건`의 주인공 장쉐량(張學良)이 2001년 10월 14일 향년 101세의 나이로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중국 동북부 봉계 군벌이었던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 태어나 동북군을 이끌었던 장옹은 지난 1936년 국민당의 장제스가 대일 항전보다 공산군 토벌에 주력하자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과 함께 1936년 12월 12일 산시(陝西)성 시안에서 공산당 토벌을 지휘 중이던 장제스를 체포해 내전을 중지시키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안(西安)사건으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궤멸될 위기를 벗어났다.
장쉐량은 이후 중국공산당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시안사변이 잠잠해지자 장쉐량을 재판에 회부하고 장기간 연금했으며 1949년 대만으로 퇴각했을 때도 그를 데려가 감금했다.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977년 5월에야 연금을 해제했으며 1993년 12월 미국에 갈 수 있게 허용했다.
1998년 노벨경제학상에 인도 아마르티아 센 선정
1994년 PLO 아라파트 의장-이스라엘 라빈 수상, 노벨평화상 수상
1993년 영화 ‘서편제’로 임권택-오정해, 상하이국제영화제서 감독상-여우주연상 수상
소리꾼의 삶을 그린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1993년 10월 14일 폐막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오정해)등 2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세계 31개국에서 1백60편의 영화가 출품, 19편이 본선에 오른 이 영화제에서 대상인 작품상은 대만이 출품한 왕통감독의 '침묵의 산'이 차지했다.
상해 중심가 대광명극장에서 치러진 이날 시상식에서 임권택 감독은 중국의 장이모우 감독으로부터 감독상 트로피를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임감독은 '씨받이' '아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베니스 몬트리올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잇달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임감독 자신이 국제무대에서 직접 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예능보유자 김재원씨 별세
1991년 한국-리투아니아, 국교 수립
1991년 아웅산 수치 여사, 노벨평화상 수상
1991년 10월 14일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46)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수치 여사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1979년 테레사 수녀, 1982년 스웨덴 평화운동가 알바뮈르달에 이어 여성 수상자로서는 세번째이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미얀마(구 버마)의 재야지도자다. 수치 여사가 지난 1988년 1백만 양곤 시민들 앞에서 부르짖던 ‘민주주의’는 당시의 민주화 투쟁이 군부의 유혈진압으로 좌절되고 총선에서의 야권승리마저 군부의 막무가내식 권력욕으로 무위로 돌아간 이후에도 미얀마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교훈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독립운동 및 건국의 영웅으로 국민적 추앙을 받았던 고 우 아웅산 장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유학,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영국인 교수와 결혼, 두 자녀를 두는 등 정치와는 별 관계가 없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으나 지난 1988년 4월 노모의 간병을 위해 귀국, 그해 여름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면서 미얀마의 희망으로 부상했다.
1990년 레너드 번스타인 사망
1990년 10월 14일 세계적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해 전세계 음악계를 강타했다. 향년 72세. 20세기의 거장으로 불린 번스타인은 미국의 자존심으로 통해왔다.
미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순수한 미국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의 전통에 비해 역사가 짧은 미국음악계의 상대적인 위축감을 해소시킨 인물이었다. 번스타인은 무엇보다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악단의 위치로 끌어올린 지휘자로 유명하다.
생전에 동성애, 마약 등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음악이 최고였다. 자유롭게 그리고 통속적으로 살다간 번스타인은 미국음악의 전통을 세운 미국음악의 상징이다.
브루노 발터 대신 리허설도 없이 악보만 훑어본 뒤 뉴욕 필을 지휘해 화제 모으며 등장
1979년 한국 첫 방문 때 쇼스타코비치가 볼셰비키혁명 20주년 기념해 만든 교향곡 제5번을 연주해 공산권음악이 금지됐던 당시 국내음악계에 파란 일으킴
유태계인 그는 유태인인 말러의 교향곡 제9번을 분신처럼 아낌, 베를린장벽 붕괴를 기념해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환희’라는 말을 ‘자유’로 바꾸어 노래하게 함
1986년 유성환 의원 국시 발언 파동
제12대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격 구속, 국회의원이 회기 중 원내발언으로 처음으로 구속됨, 체포동의안 처리 때 최영철 국회부의장의 경호권 발동으로 경찰 국회 진입
1985년 세계최초의 금속활자인쇄소 청주 흥덕사 터 발견
1985년 41세의 배우 미셸 콜뤼시 `사랑의 식당(Restos du coeur)` 출범
1981년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취임 2011.2.11 민주혁명으로 29년 4개월 만에 물러남
1979년 경기도 전곡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
1976년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공사 1단계 준공
1975년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수도권과 태백권을 1일 생활권으로 묶는 영동-동해고속도로가 1976년 10월 14일 개통됐다. 새말-강원간 97km를 잇는 영동고속도로와 강원-묵호간 32km를 잇는 동해고속도로는 모두 2백9억3천2백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착공된지 1년6개월 만에 완공됐다.
고속도로는 노폭 10.7m의 2차선포장도로로 돼있다. 영동-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지금까지 8시간30분이나 걸리던 서울-강원간 주행거리가 3시간30분으로 단축됐으며, 서울-묵호간 거리는 종전의 10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어들게 됐다. 해발5백m이상의 험준한 태백산맥을 통과하는 영동-동해고속도로 구간에는 밤재터널을 비롯한 4개터널, 36개의 교량, 13개의 버스정류장이 신설ㆍ설치됐고, 평창ㆍ황성ㆍ명주ㆍ삼척 등 4개군과 강릉시를 관통한다.
1973년 태국, 반정부 학생데모로 4백명 사상. 타놈내각 총사직
1973년 10월 14일 방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쿠데타 용의자 13명의 학생들의 석방요구를 계기로 시작돼, 급기야 타놈 키티카초른 내각의 사퇴까지 몰고 갔다. 태국은 이름뿐인 민정으로 1972년 12월 제정된 잠정헌법을 갖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타놈수상의 `신군부체제`에 의해 통치됐다. 타놈은 1962년 12월 사리트의 사망으로 정권을 잡은 뒤 지금까지 10년간 태국을 다스려왔다. 그는 1968년 신헌법을 공포, 1969년 2월에 첫 총선을 실시해 군정 9년 만에 태국을 민정으로 복귀시키기도 했으나 국방예산을 둘러싼 의회의 분규, 농촌정책의 실패와 무단정치에 염증을 느낀 태국국민들의 반발, 국경지대에서의 공산게릴라의 준동(蠢動) 등 일련의 사태로 국내치안이 혼란해지자 1971년 11월 쿠데타를 단행,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후 국가집행위원회는 1972년 12월 민정으로 이관하고 잠정헌법을 공포, 타놈수상을 수반으로하는 내각과 국민회가 부활, 태국은 13개월 만에 다시 민정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일뿐, 사실은 타놈수상의 신군부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미국-소련, 해운(海運)협정 조인
1970년 수학여행 버스-열차 충돌로 46명 학생 사망
1970년 10월 14일 오후 4시20분경 충남 아산군 백방면 모산역 북쪽 약1km지점에 있는 건널목에서 현충사에 소풍갔다 귀경하던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 76명을 태운 서울 연흥관광 소속 관광버스가 서울발 장항행 제5열차에 왼쪽을 들이 받혀 휘발유탱크가 터지면서 불길에 휩싸여 80m나 튕겨나갔다. 이 사고로 학생 45명과 운전사가 숨지고 30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는 버스운전사가 ‘일단정지’수칙을 지키지 않았고 이 건널목에는 날마다 각종 차량이 5천여대나 오가는데도 간수와 차단기도 없이 자동경보기만 설치한데다 담임교사가 감독을 소홀히 해 일어났다. 또 3일 후 원주 터미널에서 열차와 열차가 충돌, 수학여핵길의 서울 인창고교 학생들과 교사 15명이 사망했다.
1969년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사건
1968년 대입입시 예비고사 실시 발표
1967년 삼일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기공
1966년 세계 最古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
1966년 10월14일 경북 견주 불국사 석가탑 복원 공사시 제2층 탑신의 윗면 중앙부의 사리함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최고(最古)의 인쇄물 목판인쇄된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통화(統和)25년 정미세기(丁未歲記;서기1007년)’라고 권두에 간기(刊記)가 밝혀져 있어 한국의 목판 인쇄 사상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 전에는 770년 경에 인쇄된 일본의 백만탑 다리니경이 세계 최고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50년 경에 인쇄되었기 때문에, 이 날 발견된 다라니경문은 목판인쇄로 지금까지 세계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 되었다.
이날 석탑 내부에서 총 28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모두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다라니경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 되었다.
이 다라니경문은 폭 6.5~6.7㎝, 전체 길이 약 62㎝의 목판으로 찍은 두루마리이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64년 노벨평화상, 미국 흑인운동지도자 마틴 루터킹 목사로 결정
1963년 모로코-알제리, 국경분쟁으로 교전
1962년 조훈현 세계 최연소(9살 7개월) 바둑 입단
조훈현 9단 보유 세계기록=단일기전 최다연속우승(패왕전 16연패) 최다승(1938승) 최다우승(세계대회 11회 포함 160회) 한국기원 최초 9단(1982년, 29세) 전관왕 3회(1980년 9관왕·1982년 10관왕·1986년 11관왕)
1962년 미국의 U2 정찰기, 쿠바에 건설중인 소련 핵미사일 기지 촬영
구서독 연방정보국(BND)으로부터 미국 CIA에 한 첩보가 날아들었다. 몇 주일 전부터 대서양을 횡단, 쿠바의 하바나항에 화물을 부리고 있는 일군의 소련 선박이 의심스럽다는 첩보였다. 첩보를 접한 미국은 이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당시의 정세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강경파를 상대로 힘을 과시할 필요성이 있었고, 소련의 크레믈린은 당의 최고 권력자가 냉전의 용사들로부터 끈질긴 승리의 체험을 요구받고 있었다. `평화냐 전쟁이냐`의 이 게임은 1962년 10월 14일에 시작됐다.
CIA는 `쿠바에 핵무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U2 정찰기가 적격이었다. 카메라를 사용해 고도 1만 8천미터에서 촬영하면 비록 신문 제목 크기라도 전문가라면 어려움없이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정찰기는 쿠바 상공을 고도 2만 2천미터에서 6분동안 비행하며 완벽한 사진을 촬영했다. 조종사인 리처드 헤이저는 맥코이 공군기지에 착륙하자마자 필름을 특별기를 통해 워싱턴으로 운반했다. 작업은 24시간동안 계속됐다. 필름길이만 16킬로미터에 달했다.
이튿날인 15일, 사진분석가 디노 브루지오니에 의해 사진분석이 완료됐다. 소련 미사일 기지가 쿠바에 4군데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정찰기는 이후에도 사진촬영을 계속해 쿠바 전 영토에 28대의 미사일 발사대가 야자나무와 덤불로 위장되어있음을 밝혀냈다.
1961년 유엔군 카탕카군(콩고), 휴전협정 조인
1948년 지방행정조직법 국회 통과
1947년 미국 벨X1호, 세계최초 초음속비행 성공
10월 14일 미국의 공군장교 찰스 E. 이거(별칭은 척 이거)가 최초로 음속 돌파 비행에 성공했다.
이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64회나 출격한 노련한 조종사였다.
그는 음속 비행중 조종사의 능력과 고정익(固定翼) 항공기에 작용하는 공기역학적 응력을 시험하기 위해 벨항공기회사에서 제작한 연구용 비행기 벨X-1의 시험 조종사로 선발되었다.
1947년 10월 14일 이거는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로저드라이 호수 7,600m 상공에서 모선인 B-29에 부착된 X-1기에 탑승했다.
X-1기는 1만 2,000m 상공에서 로켓으로 분리되어 쏘아 올려졌고, 이때 그는 이 고도에서 최초로 약 1,066㎞/h인 음속장벽을 돌파했다.
이 비행은 1948년 6월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시험 비행을 계속한 그는 1953년 X-1A 로켓 비행기로 2,660㎞/h라는 당시 세계 최고속도 기록을 세웠다.
1945년 김일성 귀국 환영 군중대회 평양서 개최
1943년 일제점령하 필리핀, 공화국 독립선언
1933년 독일, 제네바군축회의 국제연맹 탈퇴 성명
1933년 일본군 독일령 남해군도 점령
1930년 하마구치 일본수상 피격
1914년 일본, 독일령 남양제도(諸島) 점령
1913년 영국 미들글람주 탄광 불 사망 439명
1907년 뉴욕, 금융공황 발생
1905년 러일전쟁 종결
1900년 시인 주요한 출생
1890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출생
1885년 한-러시아 수호통상조약 비준교환
1873년 올림픽에서 휠체어 타고 금메달 10개 딴 미국육상선수 레이 유리 태어남
1872년 일본 최초의 철도인 요코하마-시나가와 구간 개통
1841년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출생
1589(조선 선조 22) 모반혐의로 정여립 처형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10월14일 잉글랜드를 침략한 노르망디공(公) 윌리엄(정복자 윌리엄)의 군대와 잉글랜드왕 해럴드의 군대가 잉글랜드 남동부 헤이스팅스에서 영국사를 뒤바꾼 전투를 벌였다.
일몰 경에 해럴드가 전사하면서 잉글랜드군은 와해됐고,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윌리엄1세라는 이름으로 노르만 왕조를 열어 영국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영국 지배계급은 색슨계(系)에서 프랑스 노르망디 반도 출신의 노르만계로 바뀌었다.
1066년의 이 사변을 영국 사학자들은 노르만 정복이라고 부른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영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영어의 역사도 크게 바꾸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정복자들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는 영국 상류층의 언어가 되어, 영국에는 그 뒤 수백년간 지배계급의 언어(프랑스어)와 피지배계급의 언어(영어)가 분리되는 기묘한 이중 언어 상태가 지속되었다.
프랑스어는 또 단지 지배계급의 언어 자리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하층민의 언어인 영어에까지 급속도로 침투해 영어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그래서 영어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노르만 정복을 경계로 삼아 그 이전의 영어를 고대 영어라고 부르고, 노르만 정복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영어를 중세 영어라고 부른다.
1204년에 영국이 노르망디의 영토를 잃어버림으로써 영국 왕실과 프랑스어권과의 영토적 관련이 끊기고,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지속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으로 영국인들의 애국심이 크게 고양되면서 14세기 중엽 이후 영어는 공용어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영어 어휘의 반쯤이 프랑스어로 채워진 뒤였다.
게다가 보수적인 영국 법정이 프랑스어를 포기하고 영어를 사용한 것은 1731년에 들어서였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영국 땅에서 7백년 가까이 동거한 셈이다(고종석,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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