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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소설 / 사랑은 귀찮아
조미경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길가는 아이를 보면, 품에 안고 싶고 볼을 비비며 입 맞추고 싶었다. 젊은 시절 목숨처럼 사랑하는 이와 결별 후 모진 마음으로 모든 남자를 돌부처를 바라보듯 살아온 세월이 어언 십 년이다. 남들은 아까운 청춘을 연애도 안 하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비아냥댔지만, 희영은 오로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로지 돈을 악착같이 모으며 열심히 살았다. 마치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한 사람처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미친 듯이 일했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을 잊고 일에 매진하다 보니, 허름하고 작은 술집을 운영하다, 규모가 큰 술집을 여러 곳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사업이 승승장구하면서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은행에 가면 지점장이 나와, 영접할 정도로 돈이 쌓이자, 이번에는 강남에 꼬마 빌딩을 대출금 한 푼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가지지 못하고 쥐지 못한 무엇이 자꾸 가슴을 헛헛하게 했다. 세월은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상처는 이제 어느 유명 작가의 소설 속 한 장면이 되었다. 상처는 더 큰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고, 욕망은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했고 미진한 것들이 괴롭혔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실연의 상처가 곪아 터져 피고름이 흥건할 때는, 쌍욕을 해가면서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욕설을 내뱉던 그녀였다. 그랬던 시간을 오롯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것은, 징그럽고 끔찍한 돈이었다. 부와 젊음을 유지하는데, 돈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명절 연휴를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갈 때 희영은 성형으로 붕대를 칭칭 감은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두문불출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럴 때 고향에 부모들은 속없이 왜 고향에 내려오지 않느냐 닦달했다. 약 한 달 전에도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기 위해 강남에서 성형을 강행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아픔을 견디어야 하는 전제가 붙었다. 그러나 붕대를 풀고 자신 얼굴을 전신에 거울에 비춰 본 희영은 쾌재를 불렀다. 푹 꺼진 볼에는 엉덩이에서 추출한 지방을 재배치하고, 턱선이 갸름하고 처진 피부를 되살리기 위해 리프팅을 했다. 한 이주 만에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장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강 매니저가 깜짝 놀랐다. “사장님? 얼굴 정말 달라지셨네요.”평상시에도 성형외과를 이웃집 드나들 듯이 다니는, 강 매니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희영은 자신감이 생겼다. 여자에게 있어 젊음이 그 어떤 비싼 전투복보다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출근 전 값비싼 명품 옷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매를 이리저리 살피다 ‘아직은’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굵직한 고객들과 한 달에 한 번 라운딩하는데, 상대방 골퍼가 동행하는 프로에게 미모나 젊음에 있어 결코 뒤지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다. 희영이 운영하는 bar는 고풍스럽게 꾸며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아 단골들이 많이 찾아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넥타이를 맨 중년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매출을 올려 주었고, 간간이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시든 동백꽃처럼 핀 이제 막 고교 교복을 벗어 던진 솜털 보송한 새내기 대학생들이 엉덩이만 살짝 가린 새침한 여학생들을 데리고 호기롭게 들어와 주절거리다 나갈 때는, 머리를 긁적이며 쩔쩔매는 일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면 웃음이 터지는 희영이였다.
중년의 남자들은 늘 그렇듯, 일찍이나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닌 시간에 문을 나서서,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넥타이 부대와 대학생이 떠나면, 그 자리는 근처에서 2차를 나갔던 여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문 닫는 새벽까지 담배 연기를 피웠다.
오래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다. 스산한 비 때문인지 굵직한 손님들은 오지 않고 싸구려 소주만 시키는 직장인들이 몰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미처 팔리지 않은 과일 안주를 서비스로 후하게 인심을 써도 팁도 없이 희영의 다리와 엉덩이를 흘끔거리던 남자가 그들 일행 중에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하루를 치열하게 전투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고, 얇은 지갑에는 한 달 쓸 용돈이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풍경이 그려졌다. 그때 희영은 룸카페에서 손님들에게 술과 안주를 나르며, 손님들의 요청에 노래 부르며 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미 술에 취해서 혀가 꼬여 제대로 발음을 못 하는 남자가 있었다. 첫눈에 보아도 여자에게 수작을 걸지도 못하는 숫보기로 보였다. 묘하게 그 남자에게 끌렸다. 사장은 손님들과의 가게 외에서 만남을 허용하지 않았고, 단골 이상의 그 어떤 관계로 엮이는 것을, 경계하라 일렀다. 희영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손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앞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생겨도 헤치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손님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같이 노래를 부르다 그만 남자에게 묘한 이끌림에 자신도 모르게 그만 친절을 베풀고 말았다. “오빠? 이거 숙취 해소젠데, 원래 손님들 안 주는 것인데……” 희영이 건네준 음료를 받아든 남자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함께 온 동료들은 술에 취해 두 사람의 대화를 못 알아듣고 있었다. 새벽 영업이 끝난 후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묘한 이끌림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연애 감정을 없을 것이라 장담했는데, 이번에도 자신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희영의 연애는 길게 가지 못했고, 대부분 육 개월 만에 파국을 맞았다. 사랑의 상처는 깊은 못 자국을 남겼고, 그때마다 심한 좌절감에 체중은 불어났고, 그때마다 자학하며 자신을 학대했다. 지금도 그때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가슴 한쪽에 시퍼런 피멍이 들었다. 그날 이후 희영은 자신에게 힐끔거리는 시선을 던지며, 무엇인가 할 말이 남은 듯했던 남자의 잔상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귀신에 홀린 듯 그 남자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라목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짧은 외사랑을 하고 나서, 다시는 한눈을 팔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사랑에 굶주린 희영은 습관처럼 사랑에 빠져 지냈다.
“요즘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자꾸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다.” 사장은 주문받으러 손님 테이블을 돌고 있는 희영을 주방으로 불러 잔소리했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웃음을 팔며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 그녀는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원래 알코올 분해력이 좋지 않아 술을 자제하라는 의사의 말에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몇 번씩 직업을 바꾸려 했다. 평범하게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저녁 6시 퇴근하는 꿈을 꾼 적도 많지만, 배운 게 없는 희영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건설 현장 사무실에서 복사하고 심부름을 하다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휴학, 일용직으로 공사판을 전전했다. 굳은살이 박힌 손은 딱딱했고, 무거운 벽돌을 나르느라 저녁이면 어깨통증으로 잠을 못 잤다. 아침이면 믹스커피를 타주면 아주 달게 마시던 청년은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희영에게 기대기만 했고,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희영은 또다시 번민에 휩싸였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30이 넘어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겼다. 청년은 형편이 나아지자 다시 학교로 향했고 두 사람은 더 이상의 인연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가 싶더니, 담장에는 노란 개나리가 낭창하게 피어나, 길가는 연인들을 유혹하는 4월이었다. 봄은 시나브로 꽃들이 피어나 향기를 피우니, 무정한 남성의 가슴에도 꽃향기와 함께 홀로 길을 걷기보다는, 봄바람처럼 가벼운 누군가와 나란히 길을 걸을 때의 낭만이 되살아 나는 것이었다. 인수와 함께 꽃길을 걸으니, 마치 자신이 꽃을 피운 듯, 꽃 속에 빠지고 향기에 파묻히는 시간이 되었다. 하얀 벚꽃에는 꿀벌들이 윙윙거리며 꿀을 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희영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우연히 만난 인수가 남다르게 보였다. “인수씨? 우리 저쪽으로 가서 사진 한번 찍을까요?” 희영의 말에 인수는 수줍게 싱긋 웃으며 희영 옆으로 다가왔다. 인수는 예쁘고 세련된 희영을 바라보며 흥분되어 머릿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함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희영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인수는 소녀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타지에서 늘 외로움에 밤하늘을 바라보던 희영에게도 인수는 든든한 사람이었다.
인수는 희영이 목돈을 모아 놓은 것을 알자, 처음과 달리 자꾸 돈을 불리기 위해 이것저것 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수는 은행에 예금을 예치하는 것 보다는 고금리로 돈을 벌 수 있는 투자 상품에 대해 희영을 설득했다. 처음 희영은 인수를 놓치기 싫어 목돈을 주었지만 한달 만에 빈털터리가 되어 희영을 찾았다. 인수는 그때 이미 근검절약 보다는, 허황한 꿈에 부풀어 있어 희영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생활력이 남달리 강했던 희영은 인수의 처지가 안타까워 자신이 그동안 푼푼이 모아둔 돈을 계속 지원했지만, 인수는 바람처럼 사라졌고 또 혼자가 되었다.
1965년생인 희영의 고향은 농사를 대대로 짓는 농촌이었고 지리산 줄기를 따라, 대대로 산과 밭을 일구고 사는 곳으로, 전통적으로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산골이었다. 억척스러운 엄마 덕택에 고교까지 졸업한 뒤, 고향을 뒤로하고, 작은 소도시인 비교적 방값이 저렴한 수원에서 친구와 자취하면서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로 출퇴근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취직한 곳은 공장이 딸린 작은 사무실로 신도림동의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파이프를 가공 납품하는 공장으로, 희영은 거래처에서 납품이 들어오면 그것을 공장장에게 보고해서 영업사원이 배달하는, 총직원이 1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회사였다. 매일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어느 땐 전화를 받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쇠를 가공하는 공장에서는 매일 날카로운 기계음이 들렸고, 그곳에서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서 온종일 기계와 씨름하는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쇠 파이프를 선반에 옮기면서 저녁이면 파스를 붙이면서 육체노동의 고달픔을 이겨냈다. 그들의 고된 노동의 가치는 한 달에 한 번 받는 월급이 전부였지만,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돈이었다. 약 일 년을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면서 일한 돈을 고향에 부모에게 송금했지만 늘 부모들은 희영에게 손을 벌렸다.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퇴근 후 호프집에서 서빙을 하면서, 술과 담배를 배우고 돈맛에 길들인 희영 앞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거리에는 캐럴송이 울려 퍼지고 시청 앞에는 구세군 냄비가 종을 치고 있었다. 출근을 위해 운전하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아나운서의 멘트 끝에 캐롤송이 울려 퍼졌다. 희영에게 캐럴송은 잊고 싶었던 지난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크리스마스는 10대 중학생부터 30대 직장인들까지 거리에 뛰쳐나와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보거나, 시끄러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었다. 객지에 나와 친한 친구 한 명 없이 보내는 성탄절은 외롭기만 했다. 남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즐기지만, 희영은 손님들을 위해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서 춤을 추어야 했다. 통장에 어느 정도의 잔액이 쌓이면 청산하려 했던, 일은 마치 마약처럼 끊을 수가 없었다. 동생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지만, 여전히 가족들은 그녀의 경제적인 지원에 목을 매고 있었다. 부모님이 손을 내밀 때마다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부모의 지갑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자연스레 나이가 들었다. 지금에 와서야 후회하고 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운전에 집중했다.
운명이랄까 인연이랄까 뭐든 붙이면, 스토리가 되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었다.
혼자 먹는 밥이 싫어 라면도 같이 먹는 희영에게 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감상에 젖어 카페에 앉아 있었다. 며칠 있으면 불혹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삼십 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괜히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마음을 나눌 가족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음악은 유일하게 그녀를 위로해 주는 도구가 되었다. 한산한 카페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흰 눈이 내리고 있었고, 흰 눈을 피해 머리에 묻은 흰 눈을 털고 들어오는 한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남자도 희영의 강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희영이 앉아 있는 좌석으로 다가왔다. “좀 앉아도 될까요?” 남자는 언뜻 보기에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로 보였고, 손을 보니 사무실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전형적인 직장인처럼 보였다. 청년은 마치 예전처럼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게 희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남자의 중저음에 희영은 싱긋 웃으며 “마침 저도 혼자 흰 눈을 감상하기가 그랬어요.”
두 사람은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첫눈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산을 받고 나란히 걸었다. 거리에는 연인들의 발걸음에 어리는, 달콤한 캔디 향이 풍기는 듯했다. 거리는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옷을 얇게 입은 희영이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남자가 벗어준 코트 속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발밑에서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린 시절처럼 크리스마스에 누군가와 흰 눈을 밟으며 걷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후후하고 웃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겼나 봐요?‟남자가 월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남자의 얼굴은 추위로 살짝 발갛게 되었지만, 왠지 낯설지 않고 친근했다. “우리 날씨도 추운데 따스한 곳에 들어가 쉬는 게 어때요?” 남자의 말에 희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발걸음 아래에는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흰 눈을 밟고 있던 희영과 남자는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전문을 통과 했다. 와인을 룸서비스로 시킨 희영은 와인을 마시며 감상에 빠져 있었다. 방안 무드 등에서는 묘한 향기가 풍겼고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켜 놓은 스테레오에서는 감미로운 음악이 계속 재생되었다. 음악에 취하고 와인에 취한 두 남녀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희영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 남자에게 어디에 사는지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와인 잔의 투명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마치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한 것처럼 그들은 편안한 연인이 되었다.
새해를 맞이한 후, 한국 나이로 40살이 된 희영의 몸에 살이 오르더니, 낮에는 졸음이 쏟아져서 깨어 있는 시간 보다는 잠자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희영은 피우던 담배도 딱 끊고 오로지 태교를 위한 음악을 들으며 새롭게 태어나려 노력했다. 점점 부풀어 오른 배를 감싸며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잠자기 전, 침대맡에 베토벤의 음악이 흐르고 음악이 자장가처럼 들려 간헐적으로 코를 골면서 잠에 빠졌다. 좀처럼 외출하지 않는 어느 주말, 춘곤증이 몰려오고 담장에는 예쁜 노란 개나리가 낭창하게 아름다움 뽐낼 때, 곱게 단장하고 집 근처 어린이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알록달록한 고운 한복 차림의 사람들이 모여서 한바탕 춤을 추면서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희영도 묘한 끌림에 이끌리어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꽃 박람회를 전시 중인 것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자신도 사람들 틈에서 천상에서나 맡을 수 있는 꽃 한 다발을 사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순간 자신에게 어린 소녀가 장미꽃을 한 송이 내밀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살면서 많은 꽃을 선물 받았지만, 귀여운 소녀에게 꽃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고 그대로 잠이 깨었다. 희영은 생각했다. 묘한 일이다. 자신은 꿈을 꾸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아마도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새 생명은 분명 딸일 것이라는 묘한 예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정기 검진받으러 갈 때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처럼 행복감이 밀려왔다. 희영의 임신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유산시킬 것을 종용했지만, 자신에게 소중하게 다가온 아이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엄마의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욕구에 그동안 하던 일을 청산하고 새로운 일을 찾았다. 그리고 열 달 후 딸을 낳았다. 아기를 낳기에 늦은 나이인 불혹에 선물처럼 그녀의 품속으로 찾아온 아기는 살결이 뽀얗고 두 눈은 초롱초롱했으며 종일 안고 있어도 힘들지 않고 행복하기만 했다. 아기가 배가 고파 울면 가슴이 아파서 자신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며 아기를 어르고 달랬다. 희영은 아기의 이름을 지구에서 유일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성을 따서 유하나로 지었다.
하나가 네 살이 되자 희영은 매일 아침 유아원으로 하나를 데리고 갔다. 일상을 바꿔 버린 아이의 탄생은, 그동안 몰랐던 것들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단장시키고 옷을 입히는 일이 언제나 행복했다. 유아원 앞마당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자모들이 모여있었다. 그녀들은 아이가 선생님과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손을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희영도 매일 하나의 손을 잡고 유아원으로 향했다. 유아원에 하나를 데리고 갈 때면 다른 자모들처럼 젊어 보이기 위해, 머리 손질하고 젊은 취향의 옷을 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영은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었다. 그날은 유아원에서 열리는 성탄절 행사가 있었고. 하나의 크리마스 선물을 미리 유아원에 보낸 상태였다. 희영이 하나의 재롱잔치를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영상을 찍는 희영을 향해 “할머닌지, 아주머니인지? 다른 사람 생각 좀 하셔야지요.” 나에게 할머니라고,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자신 외에는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순간 버럭 화가 났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비키라 마라 하는 것이지’ 하지만 늦은 나이에 애를 낳고 흉보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가슴에서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고 말았다. 다른 장소 같으면 참지 않고 화를 냈지만, 하나를 위해서 고상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희영은 하나가 평범하고 소박한 아이로 자라 자신만의 가정을 꾸며 여자의 평범한 길을 걷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이런 엄마의 소망과는 달리 쾌활한 하나는 공부보다는 예체능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 꿈을 펼쳐 나갔다.
그날 하나는 앙증맞은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쓰고 꽃신을 신고 공연하는 내내 희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빠 없이 혼자 키우느라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키우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빠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날 재롱잔치에는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까지 찾아와 한바탕 북새통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외로움이 밀려왔다.
7살이 된 하나는 한글을 읽고 쓰게 되자 영어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원어민 선생들에게 배운 영어 단어를, 작은 입술 쫑긋거리며 하나가 말할 때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행복해했다. 그때마다 희영 품에서 버둥대는 모습이 귀여워, 아기 때부터 기저귀 갈아 채우며 길러 준 도우미인 할머니 입가에는 웃음꽃이 번졌다.
“어쩜 우리 얘기는 영어도 잘해요?” 할머니의 말에 하나가
“할머니는 영어 몰라, 나는 배워서 아는데……”
이때 희영은 그 모습이 귀여워 배를 쥐고 웃었다.
아침이면 등교하는 하나의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희영의 손길에는 사랑이 가득 묻어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원어민 교사에게 현지 언어를 습득하면서 시작한 영어는 번역본이 아닌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 대사관 아이들이 초등학교, 교제로 쓰는 책을 읽고 쓰게 되면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기도 했다.
희영은 그때마다 자신을 닮지 않은 딸이 대견했다. 비록 혼자 낳아 기르고 있지만, 다른 어떤 아이보다 더 잘 기를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하나가 볼이 잔뜩 부어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이렇게 부어있어?” 희영이 물었다.
“엄마? 운동회 때 가족들과 손잡고 달리기 있는데……” 명랑하게 재달 대던 하나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다.
“무슨 일인데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 잔뜩 화가 났지?”
“엄마는 다른 친구 엄마들보다 늙었잖아.”
“엄마가, 늙어 보여?” 희영이 하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잘 뛸 수도 없고, 오래 달리는 것은 힘들잖아.”
“아…아 정말 짜증 나.” 하나의 말에 희영은 자신이 부쩍 늙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내 친구 보라 엄마는 엄마보다 훨씬 젊고 예쁘단 말 야, 친구들이 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라고 놀리잖아.”
“그래서 그 애가 부러웠니?” 희영이 물었다
“왜 엄마는 나를 늦게 낳고, 동생도 만들지도 못하고 속상해.”
하나의 말을 마치고 자신의 방문을 꽝 소리 나게 닫고 문을 잠근다.
희영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한숨이 나왔다. 아직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는데, 부쩍 어른스러워진 딸을 볼 때마다 희영은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답답했다. 하나의 말을 곱씹어 보아도 엄마로서 더 이상 잘해 줄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있으면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하나에게는 아빠가 필요한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복잡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하나는 친구들과 생일 파티에 다녀오면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라곤 엄마인 희영뿐이었다. 희영은 딸의 생일이 다가오자 자신이 정성껏 만든 생일초대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엄마들 단톡방에 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일 파티는 다른 어떤 엄마도 따라올 수 없는 정말 멋지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집에서 가까운 패밀리 레스토랑을 예약한 월매는 생일 파티에 참석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포장해서 자동차에 실었다. 이번 생일 파티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나고 자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낸 생일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어른들은 먹고사는 게 바빠 아이들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었다. 어쩌다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은 고작 떡시루 하나 만들어서, 집안 식구들끼리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었다
희영은 아이들이 먹을 메뉴와 엄마들에게 대접할 메뉴를 정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는지 빙글거리며 장난을 쳤다. 편부모 가정의 아이로 자라 혹여 하나에게 친구가 없을까 하여 고육지책으로 친구들 만들어 주기 위해 희영은 늘 신경을 썼다.
희영은 하나를 위해 개인 과외 교사를 붙여 학업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는 공부보다는 아이돌 스타에 광적으로 관심을 두었다. 용돈으로 BTS 앨범을 무더기로 사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돈을 흥청망청 써댔다.
중학생이 되자 공부보다는 연예인이 되겠다고 떼를 썼다. 공부해서 성공하기보다는 가수가 되어 성공해서 셀럽이 되면, 엄마도 더 이상 일할 필요 없이 집에서 취미 생활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나는 말했다. 연예인이 되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외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딸을 무조건 응원할 수는 없었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하나는 온종일 거울 앞에 앉아 외모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면 거실에 켜놓은 텔레비전 화면 속 아이돌 스타의 몸동작을 따라 하는 딸을 볼 때마다 희영은, 자신처럼 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다. 하나는 주니어 모델 선발 대회에 나가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옷을 고르고 있었다. 희영은 그런 하나가 걱정되었다. ‘국내에서 착실하게 원하는 공부 하면서, 좋은 집안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하나는 가수가 되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기 위해 연습실을 다녔다. 하나의 꿈을 꺾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희영은 결국 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데리고 다녔다. 하나는 같은 반 아이들이 학원에서 공부할 시간 노래 연습실을 찾아 맹 연습했다. 학교에서 희영이 교실 복도를 지나는 모습만 봐도 남학생들은 열광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 모습에 열광한 하나 학교 여학생들은 유행처럼 하나를 따라 하기에 바빴다.
나이 사십에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를 놀라게 하고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하나를 보면서, 점점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기 때부터 귀여운 입술로 ‘엄마’하고 부를 때면 세상 시름을 잊었다.
교복을 입은 체, 하나가 교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승용차에 올라 어딘가로 향했다. 자동차는 청담동 유명 미용실에 멈췄다. 이날도 어렵게 오디션 자격을 얻게 된 하나가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들른 것이었다. 사업에 바쁜 희영 자신 대신 하나를 케어 할 직원을 붙여 주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하나의 오디션을 지켜보기 위해 일찍 퇴근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는 ‘엄마도 이제 연애 좀 해, 맨날 나만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나는 우리 딸만 있으면 되는데. 희영은 하나의 말에 가볍게 대꾸했지만, 갱년기가 찾아오니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밤에는 깊은 잠을 못 자고 깼다. 어느 날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러 겨울에도 선풍기를 켜 놓을 때가 많았다.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았다.
경기도 지역 축제 중 하나인, 예술제가 끝난 후, 하나는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갔다.
모처럼 야외로 나오니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놀이공원은 맑은 공기를 마시러 온 시민들이, 데리고 온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온 젊은 부모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하나에게 놀이공원은 늘 썰렁한 기분이다. 어린 시절 남들은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찾는데, 하나는 늘 엄마와 함께 놀이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아무리 신나는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았다. 하나는 함께 놀러 나온 친구 민이와 함께 인기 놀이기구인, 신밧드의 모험을 약 한 시간 기다려서 탔다. 놀이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아 보였다. 아무 걱정도 없이 하루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애, 우리도 저거 타자.”하나는 많은 놀이기구 중에서 사람들이 공중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것은 무섭지 않을까?” 민이는 자신도 타고 싶었지만 높은 공중에 매달려, 울부짖는 것인지 즐거워서 함성을 지르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신이 나는 듯 보였다. 하나와 민이의 차례가 되었다. 음악과 함께 놀이기구는 천천히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정신이 멍하게 되고 공중에 거꾸로 매달리는 기분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놀이공원은 오색풍선이 바닥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 보였다. 목청껏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말랐다. “아 힘들어, 너는 어땠어? 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민이는 얼굴이 하얗게 상기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이공원은 유아 차를 끄는 아빠들과 한 손에 장난감을 쥐고 걸으며 힘들다 징징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들은 아이가 떼를 쓰고 울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 사람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돌아다녔다. 놀이기구 앞에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이 꽝꽝 내지르는 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와…아, 이게 뭐야 우리 저거 타자.” 재미있을 것 같아. 하나는 민이의 손을 잡고 매표소로 달려갔다. 하나는 커다란 둥근 원형에 사람들이 앉아서 함성을 지르다 서로 부딪치는 장면을 보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DJ 박스에 앉은 남자는, 반짝이는 의상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컬러 텔레비젼이 막 보급되던 때, 쇼쇼가 열릴 때 노래하던, 어느 무명 가수처럼 반짝이는 자켓을 입고 앉아 신나는 입담을 펼치고 있었다. DJ는 계속해서 흘러간 올드 팝송을 따라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놀이기구를 타고 있던 관중들도, DJ 목소리에 함께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좋아했는데, 그 모습은 멀리에서도 눈길을 끌고, 좌중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러 시선을 모은 다음, 관객들을 향해 소리치면 관객들은 자지러지듯이 함께 따라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나와 민이도 덩달아 신이 났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차례를 기다려 탄 디스코 팡팡은 빙글빙글 돌다, 음악이 멈추면 반대편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구조였다. 서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기구에서 순간 방심하면 반대편에 주르르 미끄러져 엎어져 있었다.
이날 희철은 그동안 중간고사를 치르느라 지친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지친 영혼을 쉬고자 놀이공원을 찾았다. 희철의 친구들은 놀이기구 타는 곳에 멈춰 섰다. 이성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재잘대며 걷는 소녀들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 저기 한번 가 볼까? 어디를 말하는 거냐?” 시험이 끝나 마음이 풀어진 희철에게 해맑은 표정의 여학생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때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발걸음이 디스코 팡팡 앞에 멈췄다. 쉬는 시간 잠깐씩 하는 게임보다, 더 신나 보이는 놀이기구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리고 놀이기구 도우미들의 안내에 자리를 잡았다. 음악은 귀가 떨어질 듯이 컸다. 음악에 따라 둥근 원형은 이리저리 사람들의 몸을 쏠리게 하더니 어느 순간 잠시 천천히 돌더니 일제히 한곳으로 쏠리게 했다. 음악이 잠깐 잦아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반대편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소리친 것을 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음악이 빠르게 흐르면서 사람들은 손잡이를 붙잡고 앉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희철은 자신 자리에서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반대편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어느 여학생 다리에 자신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런 썅’하는 여학생의 쌍욕 하는 소리가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섞여 들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미쳐 사과할 틀이 없었다. 이번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가 천천히 돌 때 희철은 자신을 향해 욕을 하던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여학생은 언제 욕을 내뱉었나 싶게 천진하게 자리로 돌아가 신이 나는지 웃고 있었다. 희철은 하얀 이를 반짝이며 웃고 있는 여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 누구를 보고 있어? 완전 정신이 나갔구나.” 함께 놀이공원을 찾은 친구 중 한 명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참 동안 시끄러운 음악에 취해 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우리 시원한 것 마시자.” 각자 소지품을 챙겨서 걷다 아이스크림 가판대 앞으로 줄을 섰다. 그때 하나와 민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가판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조금 전 어떤 남학생과 머리를 부딪쳐 지금도 얼얼했다. 놀이기구를 탈 때는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머리끝이 아픈 것 같고 띵한 것 같아 속이 매슥거렸다. “민아 나, 여기 좀? 하나가 민이의 손을 가져다 자신 머리에 올렸다. “왜 그래, 머리에 혹 생긴 것 같아서 그래?” 응 하나가 멈칫하더니, 어디론가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쏜살같이 향하는 곳은 희철이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들고 먹으면서 걷고 있는 곳으로, 돌진하듯이 뛰었다. 민이는 영문도 모른 체, 하나를 따라 뛰었다.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하나가 다짜고짜 희철을 향해 소리치자 희철은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너 말이야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하나가 식식거리며 희철을 향해 화를 냈다. “내 머리에 혹 생기게 부딪치고 나서 왜 사과도 안 하는데……”하나가 따지고 들자 희철과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서 어안이 벙벙한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다. “혹시 나에게 하는 말이야?” 희철이 겨우 한마디 했다.
“당연히 너지, 네가 아까 놀이기구 타다 넘어지면서 내 머리를 아프게 했잖아. 그런데 사과 한마디 없이 도망가기야?”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희철은 하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사과를 안 하는 거야?” 하나가 성질을 부리자 희철이 겨우 한마디 했다.
“미안해,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네가 아픈 줄도 모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면 바로 했어야지 남자가 매너가 꽝이야…” 하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희철 앞에 주먹을 불끈 쥐면서 흥분해 있었다.
“미안하면 맛있는 간식 네가 사는 거야.” 하나의 거침없는 일침에 희철은 얼이 빠진 듯했다. 민이와 하나는 희철이 사과의 의미로 산 터키산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놀이공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 이후 희철은 책상 앞에 앉으면 당돌하고 귀여운 하나의 얼굴이 어른거려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나는 가수가 되기 위해 연습하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이름을 알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희영의 친화력으로 유튜브 방송에 출연, 서서히 주가를 올리는 중이었다. 친구들이 학교 방과 후 입시 학원에서 공부할 때, 하나는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했고, 안무 수업이 끝나면, 스튜디오로 이동 노래를 배웠다.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녹초가 된 하나가 집에 돌아와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우면, 희영은 안쓰러운 딸을 위해 고단백 음식으로 체력을 보강해 주었다.
하나가 지방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지역 축제가 열린 정선 오일장 야외 공연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공연은 지역 고교생들의 화려한 스포츠 댄스 무대가 펼쳐지는 가운데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하나는 이번 무대에서 노래 두 곡을 소화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아주 짧은 일정이었다. 무대 한 편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손질하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하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 공연은 지역 방송과 연계하여 지역 특산물을 알리는 지역 출신의 유튜버가, 직접 실시간 생방송으로 진행할 예정이라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심호흡하며 긴장감을 해소하는 하나는 열린 커튼 사이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지방 공연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하나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었다.
스탭의 스탠바이 사인이 나고 사회자의 요란한 소개와 함께, 하나의 발랄한 모습으로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자 객석에서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내고 무대 뒤로 돌아왔다. 무대 뒤로 돌아온 뒤에도 앵콜의 함성에 준비된 노래 한 곡을 더 불렀다. 기진맥진한 하나의 눈앞에 꽃다발을 든 남학생이 갑자기 나타났다. 매니저 겸 운전기사인 민호가 말릴 틈도 없이 하나에게 꽃다발을 내민 희철은 어리둥절 서 있는 하나에게 “축하해, 정말 멋진 공연이었어.”희철이 악수를 청하자 하나는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나가 정선 오일장 공연장에 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찾아와 꽃다발을 건넬 것을 몰랐던 하나는 기뻤다. 꽃다발을 받아든 하나는 숨을 고르면서 상대방 얼굴을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여긴 웬일이야? 내가 여기서 공연하는 것을 모를 텐데……”
희철이 “부모님과 함께 왔어.” “뭐! 정말?… 네 부모님이랑 여기에 같이 왔다고… 하나가 놀랍다는 표정이 되어 눈이 등잔만 해졌다.
“혹시 이곳에서 공연을 우연히 본 거니?”
“아니 사실, 아빠가 이 지역 국회의원이야.”
“너희 아빠 대단하구나? 난 아빠가 없는데……”
그때 희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미안 나, 가 봐야 돼.” 희철이 손을 흔들고 떠나자, 민호가 하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우리도 이젠 서울로 가자.” “알았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 하나의 머릿속은 꽃다발을 주던, 희철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희영은 사업 확장으로 매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지천명을 훌쩍 지나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하나 관련 소식을 읽기 위해 자동차에 앉아서 검색했다. 며칠 전부터 책상에 앉아, 인강을 듣는 듯, 제법 기특한 생각을 하기에 물었더니 하나의 답이 가관이었다.
“가수가 노래 잘하는 것은 당연한데, 무식하단 소리는 싫어.”
언제 스케줄이 잡힐지 모르는 연예계 생활에, 강사를 붙여 성적을 향상, 시키고 싶지만 두 마리 토끼 잡는 일은 어려웠다.
고교에 입학 후 공부는 아예 멀리하고 가수 활동만 전념하겠다는 하나의 바람을 꺾을 수 없는 희영은 한 가지를 포기했었다. 하나는 자신과 달리 평범한 여성으로 성장,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며 사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다.
연습을 마친 하나가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은 저녁 10시가 넘었다. 늦은 저녁
간식을 가지고 하나의 방 앞에 선 희영은 방안에서 들리는 전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나의 한껏 달뜬 음성이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직 미성년인 하나는 데뷔와 입시라는 두 마리 토끼 중, 어느 한 가지도 포기 못하는 지경인데 연애질이라니
순간 희영이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애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대학에 가겠다는 얘가 다른 애들처럼 입시 학원 가는 것도 아니면서, 시간이 몇 신데 연애질이야? 희영은 순간 폭발해서 욱하고 말았다.
“엄마는 구식이야! 뭘 알지도 못하면서……”
“누가 그래, 연애하면 공부 못한다 그랬어.”
하나가 희영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엄마도 그렇잖아, 젊을 때 연애에 성공했으면, 늙어서 외롭지 않고 나만 보고 살지는 않을 거 아니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중에도 온 정성을 다 쏟아 키워 놨더니, 오히려 엄마를 가르치려 든다. 그날 저녁 울적해진 희영은 냉장고 속에서 잠들고 있던 맥주 한 캔을 꺼내어 마셨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잊고 있던 무엇이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와, 눈앞에 가져다준다. 속으론 기껏 키워 놨더니 이제는 엄마인 자신을 가르치려 하는 바람에 속이 상했다.
‘아이고 내 신세야, 내가 늘그막에 이게 무슨 꼴이야.”
희영은 자책하면서 잠이 들었다.
해가 바뀌어 가로수길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그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들은 꽃들의 아름다움에 차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여린 꽃잎을 손끝으로 느끼려 했다. 주말과 휴일이 더 바쁜 춘향에게 도시락을 준비해서 공원에 사진 찍으러 가는 호사를 누리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게 일과 연관 짓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도 하나는 공연을 핑계로 희영의 눈을 피해 에버랜드에 왔다. 장미꽃들이 주는 화사한 미소에 잠시 쉬어가고 싶은 차에 희철의 전화는 꽉 막힌 하수도를 뚫는 듯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것이었다. 장미정원은 모양도 색도 다른 꽃들 앞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장미꽃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하나는 희철과 만나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 스티커 샵에서 사진을 찍고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회전목마를 타면서 마음껏 웃었다. 하나는 자신의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느라 연신 해서 휴대폰을 눌렀다. 두 사람은 오늘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즐기면서 하루를 보냈다.
하나는 성탄절이 다가오자 부쩍 스케줄이 늘었다. 학교생활은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친구들과 급식실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우정을 쌓고 싶은 하나였지만, 그것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공연을 위해 연습과 행사장에 참석하는 등 하루를 분주하게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하나는 수능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찰싹 붙으라는 의미의 달콤한 엿과 쫀득한 찹쌀떡을 선물로 받은 하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걷고 싶었다.
수능이 끝난 후 희철은 아버지 방에 불려 갔다. 평상시에도 공부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성적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밀과외를 했지만, 모의 채점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성적이 아니었다. 방을 나온 후 희철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희철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외국에 나가 몇 년만 지내면 영어는 어느 정도 구사가 되면, 그곳에서 학위를 따게 되어 한국으로 나오면 그때부터는 자신이 어느 정도
뒷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투로 설득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활약상을 봐온 희철은 아버지의 결정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을 부모로 둔 이상, 자신은 자식이 아닌 마치 장식품처럼 취급되어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희철은 허탈함에 빠졌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고모에게 자신을 케어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본인만 몰랐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이번에 미국으로 출국하면 언제 한국에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200 X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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