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7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17,15.22─18,1
복 음 : 요한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등학생 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바로 홍콩 영화입니다. 코믹 쿵푸 영화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많이 인상 남는 영화는
현대식 무협이라고 할 수 있는 느와르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정을 위해 총격전을 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 남기는 말은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영화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도박이었습니다.
도박의 승부를 통해 나쁜 악당을 응징하던 모습은 통쾌함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패를 가졌다면서 회심의 미소를 띠는 악당,
그런데 최후의 승자는 주인공이 더 높은 패를 꺼내면서 승리합니다.
때로는 악당의 속임수를 더 큰 속임수로 이기기도 합니다.
그때 보았던 영화 장면을 떠올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패를 펼쳤는데, 상대의 패와 똑같다면 어떻게 될까요?
카드가 잘못되었다며 무효 처리가 될 것입니다.
카드는 모두 달라야 게임이 공평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모두 달라야 우리 각자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과 같은 패를 받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저 사람처럼 능력이 있었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돈이 많았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몸이 건강했으면 좋고….
‘저 사람처럼….’이라는 말로 같은 패를 같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삶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이 다름으로 인해 부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내 삶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면 나만의 삶을 멋지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말 것, 쓸데없는 판단을 하지 말 것, 나를 특히 나의 삶을 사랑할 것.
이런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만 집중합니다.
성령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변화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이 세상을 남처럼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모두 성령의 진정한 역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 참 진리의 삶인 주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저 남처럼 풍요하고 화려하게 살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마음으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삶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요한복음 대목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 하느님께서 드러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령과 당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시지요.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요한 16,13).
말씀을 공유한다는 건 당신과 성령께서 마음과 뜻으로 일치하신다는 것이지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이 온전히 하나로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 같지 않나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9-50)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이미 비슷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을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전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듯이,
성령 또한 예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은 이렇듯 한 뜻을 지니시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 선교를 다룹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부정하기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사도 17,23) 유일신이신 하느님이라고 소개하는데,
그가 전하는 분이 곧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그는 성부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라고 밝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를 주시고, 살아 움직이도록 숨도 불어넣어 주시고,
또 생명을 지탱하고 관계를 꾸려가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고, 성령의 도움으로 나날이 새롭게 거듭납니다.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27)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육화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현존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곁에 온통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을 벗어나는 곳이란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분명 "영원히"라고 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묶여 사는 우리에게 "영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를 믿는 우리에겐 두려움이나 의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에 가득한 성령을,
그 기운을, 그 사랑을 호흡하며 성삼위 하느님 품에 잠겨 듭시다.
그분께서는 나의 온 세포 구석구석을 채우고 계시고,
누추한 마음에도 충만히 머물러 계시고, 숨 한 모금에도 깃들어 계십니다.
그분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계시고, 또 나를 온통 둘러싸고 계시니
그분이 곧 나이고, 내가 또한 그분입니다.
나는 그분과,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몇 번 왔습니까?”
제가 여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오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감사하게도 제게 기회가 몇 번 더 주어졌습니다.
저는 복음화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함께 했습니다.
복음화학교에서는 매년 졸업생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지도신부로 함께 했기에 다른 분들보다는 성지순례의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맛집이 단골이 되듯이 성지순례를 가신 분들은 기회가 되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복음화학교에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성지순례에 함께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다른 곳은 몰라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기회가 주어지면 함께 하였습니다.
성지순례에서 겉모습만 보는 사람은 매번 같은 성지순례라고 하겠지만
성지순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얻는 사람에게는 매번 새로운 성지순례가 될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목표는 ‘멈춤, 만남, 변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먼저 일상의 삶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순례를 하면서 세상의 것들과 계속 접속하려고 하면 진정한 성지순례가 되기 어렵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멈추어야 합니다.
성지에서는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성지만 본다면 그것은 여행과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지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없으면 표징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했듯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했듯이 성지순례를 통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면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이스라엘 순례 중에 ‘깔멜’산을 다녀왔습니다.
깔멜산은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오신 하느님입니다.
싸움에 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이면서 제단에 제물을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지만, 제단의 제물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는 제단에 물을 부었음에도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왕에게 말하였습니다.
“외교에는 양다리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에는 양다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일에는 양다리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이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양다리가 아니라, 다섯 다리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 하나라도 하면 안 됩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성령 안에 살 때,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참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절)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신다.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하느님 안에 살 때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신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 즉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으로 건너간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방식의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의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의 의견이 통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진행되기가 어려운 것이 또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소수의 의견이 현실적인 정확한 답과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하 아사감방(餓死監房)에서 1941년 8월 14일 운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수용소 소장에게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의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불쌍한 자식들도 있습니다. 제발...”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대신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할 수 있도록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십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에페 6,14-1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때 ‘다빈치 코드’ 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고치려 해도 진리입니다.
거짓 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어 구원을 얻길 바라십니다.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1,17).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17,17).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며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말씀, 예수님, 사랑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진리이신 성령의 의무
박상대 마르코 신부
1차 고별사에 이어 2차 고별사가 행해지는 가운데 고별의 밤은 깊어만 간다.
예수님은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으시다.
그렇게 길지 않은 3년간의 공생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同苦同樂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놀라운 업적을 보이셨다.
이 모든 가르침과 행적을 요약하는 고별의 밤이
지금까지 그 어느 밤보다 길어지면서 제자들의 집중력도 점점 떨어져 간다.
이미 제자 1명은 자리를 떠나가야 할 길을 갔고,
나머지 11명은 이 밤이 스승과 마지막 밤이 될 줄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제자들의 집중력은 떨어졌지만, 그중에 누군가는 고별의 유언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것을 성령의 感導로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학습능력을 감안하여(12절)
또 다시 ‘진리이신 성령’을 계시하신다.
이미 이 밤의 고별사에서 두 번씩이나 ‘진리이신 성령’에 대하여 언급되었다.(14,17; 15,26)
어제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협조자’이신 성령계시를 통하여 실제적 차원을 암시하셨다.
오늘은 예수께서 ‘진리’이신 성령계시를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이는 성령 하느님에 대한 學習的 차원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진리의 성령’께서 자기 고유의 무엇을 제자들에게 敎授하시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진리’에로 이끌어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여기서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바로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당신이시다.(14,6)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주실 자신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인즉, 바로 하느님의 진리이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여러모로 부족하다.
온전한 진리 파악이란, 예수님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를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계시된 내용에 대한 올바른 해석자이시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시간과 역사의 전부를 주관하신다.(13절)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4절)
제자들이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열심히 학습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一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계시 된 진리(성자)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에 대한 자기 계시를 위해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셨으므로, (요한 3, 3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아들의 것”(15절)이며,
“아들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 (요한 17,10)
이로써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의 관계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구조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물론 우리의 깨달음은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우리들 자신을 聖殿으로 삼으신 ‘진리의 성령’ 덕분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아니마 수녀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서부터 '참된 이치'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내가 알고 있는 참된 이치는 이런 것들입니다.
보편적, 불변적으로 알맞은 것.
세상 창조 때부터 지켜진 것.
머리가 시키기 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본연의 것.
그래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
이 모든 것들은 분명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기준이 되며 세상을 사는 동안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붙잡을 잣대가 되어 줍니다.
가슴은 무엇이 옳은지 본능적으로 압니다.
무엇이 마음을 뜨겁게 하는지
무엇이 마음을 식게 하는지
머리로 설명하기 전에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의 판단과 계산이 멈출 때
비로소 가슴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영이 깨어나는 순간이
늘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출처] 요한 16,12-15 부활 제6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