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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일 오늘의 역사
2022년 경기도 성남시 데이터 샌터 화재로 전국 다음,네이버, 카카오톡의 통신장애 발생
15일 오후3시33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카카오 등의 데이터 관리 시설이 입주한 SK 판교캠퍼스 A동 지하3층 전기실에서 화재 발생하였다 이에 소방당국은 펌프차 등 장비 46대와 소방관 등 인력 114명을 투입해 8시간 만인 오후 11시 46분 진화작업을 완료했다. 이 불로 서버 서비스 전원이 차단되면서 카카오·다음과 네이버의 서비스가 크고 작은 장애를 일으켰다.
특히 카카오의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카카오톡의 '먹통' 사태는 자정을 넘기면서 카카오톡 12년 역사상 가장 긴 시간 이어진 장애로 남게 됐다.
현장에 20여명의 근무자가 있었으나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2021년 세계 최초 여성 4성장군 (재클린 밴 오보스트) 탄생
공군사관학교 시절 “여자는 왜 전투기 조종사가 될 수 없느냐”고 따졌던 여성 생도가 4성장군으로 진급해 미군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를 이끌게 됐다. 미 국방부는 “장벽을 허물고 여성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보여줬다”며 극찬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15일(현지시간) 일리노이주(州) 스콧 공군기지에 있는 미 수송사령부(TRANSCOM)에서 사령관 이·취임식이 열렸다. 수송사령부는 미 국방부 직할 11개의 통합전투사령부 가운데 하나다. 사령관은 모두 대장 보직이며 소속 군종과 상관없이 사령부 예하에 편성된 육해공군 부대를 전부 통솔한다. 미군에서 통합전투사령관이 되는 건 최고 영예로 꼽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여성인 재클린 밴 오보스트 공군기동사령관을 통합전투사령부에 해당하는 수송사령부의 사령관 후보자로 지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얼마 전 상원 인준 절차를 마친 밴 오보스트 공군 대장은 이날 스티븐 라이언스 육군 대장 후임으로 새 수송사령관에 정식 취임했다.
밴 오보스트 사령관은 1988년 미 공사 졸업생으로 오랫동안 수송기를 조종한 사실 정도만 공개돼왔다. 그런데 이날 이·취임식에 참석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밴 오보스트 사령관의 약력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간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꺼내들었다.
2016년 북한 무수단 미사일 시험 발사
2014년 히말라야에서 눈사태가 발생하여 24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실종되었다.
네팔 중부 히말라야 지역에 몰아친 폭설과 눈사태로 등산객 등 2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연락 두절된 상태에 빠졌다
네팔 당국은 해발 8000여m 높이의 안나푸르나봉(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머스탱 지역과 마낭 지역에서 현지인 12명을 비롯, 캐나다인 4명, 폴란드인 3명, 이스라엘인 3명, 베트남인 1명, 인도인 1명 등 모두 24명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현지 경찰에 따르면 히말라야 등반에 나선다고 접수한 등산객 총 168명 중 구조된 인원 60여명과 사망자를 제외한 나머지 수십명은 여전히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이 지역 외에도 네팔 다울라기리 산에서도 눈사태가 발생해 슬로바키아 산악인 2명과 네팔 안내원 3명이 실종된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타잔의 아들 '보이' 조니 셰필드 별세
1930~40년대 영화 '타잔' 시리즈에서 타잔의 아들 '보이' 역할로 출연했던 조니 셰필드(오른쪽)가 2010년 10월 15일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셰필드는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야자수 가지를 쳐내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4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부인 패티가 밝혔다.
그는 1939년 영화 '타잔 아들을 찾다'에서 보이 역으로 데뷔한 후 7편의 타잔 영화에 출연했다. 사진에서 왼쪽은 당시 타잔 역의 조니 와이즈뮬러로, 1945년 찍은 것이다. '타잔' 시리즈는 이후 국내에서도 TV 등을 통해 소개된 바 있어 한국인에게도 친숙하다.
2009년 일본 이야마 유타, 최연소 바둑 명인 등극
2009년 10월 15일 일본 랭킹 2위 기전인 명인(名人)전 제5국에서 일본 현대바둑의 최강자로 꼽히는 장쉬(29) 9단을 누르고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8단이 새 명인에 등극했다.
만 20세 4개월. 린하이펑(林海峰 당시 8단)이 1965년 23세의 나이로 명인위를 차지한지 44년 만이었다. 7대 주요 타이틀로 범위를 넓힌다면, 만 20세 5개월에 본인방(本因坊)에 올랐던 조치훈(趙治勳) 9단의 기록도 경신했다.
중국 출신의 장쉬 9단은 일본 바둑계의 제1인자로 7대 타이틀 가운데 5대 타이틀 보유자이다. 이야마 8단은 장쉬를 상대로 한 이번 우승으로 9단으로 승단했으며, 일본 바둑계는 '신성(新星)'의 탄생으로 들썩이고 있다.
이야마는 어려서부터 '일본 바둑의 미래'라는 소리를 들은 천재다. 만 5세에 할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 최연소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워 왔다. 16세에 공식 기전에서 첫 우승, 17세에 기성전 본선 진출, 18세에 명인전 본선 진출 등이었다. 그의 바둑 스승인 이시이 구니오(石井邦生) 9단은 '우리 바둑 천재 이야마 유타'라는 책까지 썼다.
2005년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의 폭동이 발생하다. 1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2003년 러시아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중국 유인우주선 선저우호(우주인 양리웨이 중령) 발사
2002년 IBMㆍ히타치ㆍ선 등, 스토리지 기술 ‘블루핀’ 표준 자원 결의
2001년 KTF-LGT 품질향상 합의서 체결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
2000년 김주진 아남반도체 회장, 한국인 첫 미 100대 부호에 선정
한국인이 마침내 미국 내 100대 부호에 처음 선정됐다. 아남반도체 회장 겸 암코테크놀로지(ATI)의 회장인 김주진(미국명 제임스 김)씨가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내 400대 부호’ 중 94위에 올랐다. 이 잡지에 따르면 김회장이 보유한 재산은 27억달러(약 3조원)였다.
그는 1998년 10월 아남반도체가 경영난으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자 미국으로 건너가 암코사 경영에 전념했다. 이후 암코사를 통해 약 21억달러의 자금을 아남반도체에 보내 이 회사가 7월 워크아웃을 졸업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암코사의 1999년 연매출은 19억달러이며 순이익은 7600만달러에 이른다.
김씨는 1955년 서울대 법대를 수료한 뒤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 빌라노바대 강단에 선 경험도 있다. 부인인 길정숙씨(미국명 아그네스 김)도 연간 매출 7억7천만달러 규모의 시계 전자계산기 판매업체인 일레트로닉 부티크를 경영하고 있다.
1999년 서울 NGO세계대회 ‘서울선언’ 채택,
1994년 아리스티드 대통령, 망명지 미국에서 아이티로 귀국
1991년 9월 30일 유혈 군사쿠데타로 축출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1천1백11일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1994년 10월 15일 아이티로 귀국했다.
아리스티드의 귀국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이 아이티 군부지도자들과 협상해 10월에 퇴진하겠다는 약속을 그들로부터 얻어내 9월 19일부터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아이티 전역에 배치돼 평화유지활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이티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 1만5천명에 달했다.
아리스티드 지원에 대한 미국 내부의 찬반논란을 뒤로한 채 그는 이날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을 포함한 미국측 사절단과 함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 헬리콥터 편으로 대통령궁에 귀환했다
1994년 일본 법륭사 금당벽화 45년 만에 첫 공개
1993년 청와대, 일제때의 총독관저건물인 舊본관의 철거 시작
1993년 전교조 교육부의 ‘선탈퇴 후복직’ 조건수용 해직교사 복직 결정
1991년 서울지검 이화여대 무용과 입시부정 관련 홍정희 육완순 교수 구속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미국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20일)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65개국 4,361명 참가
1987년 폭풍우가 영국남부 덮쳐 1억5천만 그루의 나무 뿌리째 뽑힘
1985년 서울시, 서울시내 택시요금체계를 거리· 시간병산제로 전환
1982년 농수산부, 초지개발 10개년 계획 발표
1981년 정부조직축소개편, 531개 직위 감축
1979년 도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출간
1976년 덴마크, 북한공관원 전원을 마약 등 밀수혐의로 추방
1973년 당시 동양최대의 소양강댐 준공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1970년), 서울지하철 1호선(1974년)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3대 국책사업 중에 하나였다. 총 사업비 321억 원이 투입된 소양강댐은 1967년 4월 1일 가배수로 터널공사를 시작으로 착공, 6년6개월 만인 1973년 10월 15일 준공됐다. 소양강댐 사업비 321억 원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6600억 원의 수준이다. 1967년 댐 착공 당시 정부 예산은 1643억 원에 불과했다. 건설 당시 소양강댐은 동양 최대, 세계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댐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1965년 섬진강댐, 1970년 남강댐 다음 세번째 다목적댐인 소양강댐(1973년)이 완공됐고 이후 안동댐(1977년), 대청댐(1981년), 충주댐(1986년) 등 박정희 시대에 착공한 댐이 차례로 완공됐다. 당시 동양 최대의 다목적댐이자 사력댐이었던 소양강댐은 박정희 정권과 우리나라 댐의 자부심이었다.
소양강은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해 남으로 흐르다가 춘천시 인근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총길이 166.2km의 강이다. 한강의 고질적인 홍수를 해결하고 부족한 용수와 전력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강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해결책은 다목적댐을 짓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73년 10월 15일, 6년 반 동안의 난공사 끝에 동양최대를 자랑하는 소양강댐이 준공됐다. 높이는 수풍댐보다 높은 123m였고 총 저수량은 화천, 춘천, 청평 등 한강수계 5개댐 저수용량의 거의 2배에 가까운 29억t이었다. 유역면적은 2,703㎢이고, 만수 시 수면적 64.3㎢ 이다. 한국의 총 수력 발전용량 62만KW의 3분의1에 해당하는 20만KW의 발전용량은 준공 후 바로 불어 닥친 오일쇼크 때 큰 도움이 됐다. 공사과정에서 37명이나 숨졌고 1만8000명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원래 설계는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설계됐으나 공사를 맡은 현대 정주영 회장이 현장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과 모래·자갈 등을 활용해 만들자고 제안해 변경됐다. 당시 철근·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 부족과 열악한 도로 사정에 따른 자재운송 문제, 비용 절감 등이 변경 사유였다. 시멘트에 비해 외부 충격에 강하다는 것도 이유였다.
1971년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1971년 10월 15일 `학원의 난동행위를 단연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무장 군인들이 각 대학에 투입됐다.
위수령은 양택식 서울시장의 요청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가 발동했다. 양시장은 날로 극심해지는 학원소요사태를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 군당국에 위수령 발동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3~4월의 교련 교육강화 반대 4~6월의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전후한 부정선거획책 규탄과 선거참관 요구, 사토 일본 수상의 방한 반대 9~10월의 교련 완전폐지와 함께 부정부패일소 등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자 정부가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2차에 걸쳐 대학가에 휴업령을 내리고 데모 주동학생 검거에 나선 정부는 10월 20일 23개 대학, 학생 1백77명을 제적했다.
1969년 태백선(정선~나전) 개통
1966년 효봉 스님 입적
근대 조계종의 거봉인 효봉 스님이 1966년 10월 15일 입적했다. 효봉 스님의 속명은 이찬형으로 1888년 평남 양덕군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는데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는 일본에 유학해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그는 당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고등고시에 합격해 판사가 돼 서울지법에, 함남지법에서 근무하고 30대 중반엔 평양복심법원 판사가 됐다. 법관생활 10년째인 그는 한 재판과정에서 조선인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회의를 느껴 마침내 법복을 벗고 무작정 집을 떠나 엿장수 생활을 했다.
엿모판을 짊어지고 3년째 방랑생활을 하던 그는 1925년 38세의 나이에 금강산 신계사의 조실로 있던 석두 임보택 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이렇게 늦깍이로 출발한 효봉 스님은 처음에 학눌이라는 법명을 얻고 신계사 보운암에서 10년간 수행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효봉은 송광사로 내려와 조계종의 종조인 보조국사 지눌의 법통을 잇게 되는데, 어느날 보조국사의 16세 법손인 고봉 국사를 꿈속에서 만나고는 그때부터 효봉이라고 자호했다.
효봉은 송광사에서 조계종의 학통을 다시 일으키며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추대됐고, 1962년 조계종이 분란 끝에 통합종단으로 심기일전했을 때 초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구산 스님, 법정 스님, 일초 스님(시인 고은)이 제자가 되어 그에게 머리를 깎았다.
1964년 소련 수상 겸 제1서기 흐루시초프 해임. 새 수상에 코시긴, 제1서기 브레즈네프 임명
1963년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
1962년 케네디, 알제리아 벨라 수상과 회담
1960년 독립운동가 문익상 사망
1950년 대동강 철교 폭파
1949년 육군포병학교 창설
1949년 문교부 국기제작법 공고
1949년 한일통상협정 조인
1946년 전범으로 사형선고 받은 나치 거물 헤르만 괴링 옥중자살
1946년 서울대학교 개교
1946년 좌익우파, 사회노동당으로 통합
1946년 덕수궁 박물관 해방 후 처음 일반에 공개
1945년 국립중앙도서관 개관, 2005년 4월 세계 국립도서관 중 15번째로 천만 장서 달성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1942년 인도 벵골에 허리케인 11,000명 사망
1940년 인도 간디, 불복종운동 개시
1934년 중국 공산당 1만km 대장정 실시
1934년 10월 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탈출은, 장개석이 1년 전부터 70만여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강서와 복건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섬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입은 2만명을 포함한 2만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주은래와 주덕, 임표, 팽덕회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연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km.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000명 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립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장개석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도처에 전파했던 것이다.
1926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출생
1925년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집단해고 사건
1925년 서울운동장 개장
1925년 서울역사 운수영업 개시
1925년 10월 15일 서울역사가 운수영업을 개시했다. 서울역사는 1900년 경인철도 당시부터 가건물에서 업무를 수행해 오다가, 1922년 6월 착공에 들어가 1925년 9월에 준공됐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비잔틴풍의 돔을 올린 르네상스 양식으로 표면에 벽돌 모양의 타일을 첨부하고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 슬레이트와 일부 동판이음으로 되어 있다. 경부선·호남선·전라선·장항선 등 철도 주요 간선열차의 시발역인 동시에 종착역이다. 설계자는 동경대학 교수였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였다.
분단이후 지금껏 서울역은 중앙역이자 종착역 역할을 하고 있지만 1925년 지금의 역사가 지어질 당시의 서울역은 만주행 국제철도가 거쳐가는 거점 통과역으로 자리매김했었다. 시공주이자 조선철도를 경영했던 남만주철도회사는 이런 정치·경제적 기능을 과시하는 데 건립의도를 두었다. 이와 별개로 조선민중에게는 근대적 일상의 척도이자 문화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남달랐다. 사람들은 역사의 엄청난 규모와 호사스런 외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마타 하리 총살
1917년 10월15일,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 마타 하리가 파리 교외에서 총살돼 41세로 생을 마감했다. “마타 하리가 훔친 군사기밀은 연합군 5만명의 죽음에 상당하는 것”이라는게 프랑스 군사법정이 밝힌 사형선고 이유였지만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밝히지 않아 지금까지도 사실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군장교였던 남편의 근무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5년간 생활할 때 만해도 마타 하리는 그저 발리섬의 민속춤에 흥미를 가졌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러나 남편과 이혼하고 돈 한푼없이 파리에 정착하면서 그의 인생은 격류에 휩싸인다. 먹고살 일이 막막해지자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꾸고 스트립댄서로 나섰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이국적인 춤과 관능적인 몸짓에 파리 사교계는 몸이 달았고 그는 서서히 고급 콜걸로 변신해갔다.
독일이 그를 포섭, ‘H21’이란 암호명을 부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타 하리는 보다 높은 수입을 위해서라면 이중 스파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정보를 빼내 프랑스에도 넘긴 것이다. 체포경위도 설들이 무성하다.
최근 마타 하리 재단은 “그는 스파이가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서 이용당하다 희생된 불쌍한 무용수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15년 경기 경상 평안 강원 함경지방 홍수 1,092명 사망, 가옥유실·침수 2만2,088호
1910년 인천에 상수도 개설
1909년 최초의 지방지 경남일보 창간.
1907년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1905년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1904년 러일전쟁: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 함대가 러일 전쟁 참전을 위해 에스토니아 탈린을 떠나 청나라의 뤼순으로 출항하다.
189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출생
1878년 미국 에디슨 전기 회사(현재의 제네럴 일렉트릭)가 영업을 시작
1863년 미국 남북전쟁: 최초의 잠수함 CSS 헌리가 시험 도중 침몰
1844년 독일 철학자 니체 출생
181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
1814년 러시아의 바이런이라 불리는 미하일 레르몬토프 출생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그레고리력 사용 시작
1581년 기록상 최초의 발레 공연
1552년 카잔 한국이 이반 그로즈니의 군대를 패배시키다.
1407년 경상도 개령, 지진 발생
533년 비잔티움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반달족의 수도 카르타고로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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