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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리쾌대 작품연구 방법론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6)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신 잡동산이’ 연재의 제54회 「북으로 간 우리 민족의 현대 유화가」에서 이쾌대에 대한 원론적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 수록한 북에서 리쾌대가 그린 작품의 원색 사진 3점 이외에도 독자들에게 소개할 만한 원색 사진이 상당수가 더 있다.
사실 필자는 5년여 전에 중국의 어느 미술대학 L 교수의 중재로 북의 미술학자 C를 중국의 어느 지방 도시에서 만나 그가 보관하고 있는 리쾌대의 재북 시 작품 전체를 검토한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수년 전에 한국의 어느 화상이 반입한 리쾌대가 재북 시에 그린 작품 십여 점도 보았다.
필자는 앞으로 이쾌대의 남측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여러 작품과 리쾌대의 북측 유족이 소장한 여러 작품 가운데 몇 부류의 작품을 선정하여 비교론을 제시하고자 하며, 그에 앞서 서론으로 필자의 리쾌대 작품연구 방법론을 우선 논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 연구는 중국의 대표적인 R미술대학 L 교수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본 글의 서두에 이러한 사실을 먼저 밝히며 그에게 감사를 드린다.
1. 이쾌대는 남에서 해금되고 북에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쾌대(李快大, 1913~1965)는 1965년에 위천공으로 사망한다. 사망 이후 잊혀왔던 이쾌대를 조선의 미술계에서 다시 꺼내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1988년 당시에 남한에서 연구나 전시가 금지되었던 월북작가들을 노태우 정부에서 해금(解禁)함으로써 1991년 10월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남한에 있던 그의 유족들이 감추어 소장해 왔던 작품을 대거 공개하여 ‘월북작가 이쾌대 전’이 열렸다.
그리고 곧이어 한중수교가 이루어져 한국인들의 중국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조선 미술품 구매가 허용됨으로써 김영준, 김주경, 리석호, 리쾌대, 림군홍, 정종여 등등 월북작가들 작품의 수요가 남측에서 생기기 시작하였다. 더군다나 이쾌대는 ‘월북작가 리쾌대 전’을 통하여 그의 뛰어난 작품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중국 조선족 미술상들에게 그들 작품을 매입해 달라는 주문 현상이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북의 리쾌대가 본의 아니게 정치적으로 좌천(左遷)되고 이미 오래전인 1965년 2월 20일에 병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의 지원 없이 그의 유작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조선에서 전설적인 유화가 리쾌대를 북에서 다시 현대미술사의 무대에 끌어낸 인물은 조선미술가동맹 평론분과위원회 위원장 리재현(1942~)이다.
그가 편찬하여 1999년 2월 5일자로 문화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행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재판본)』의 p.289에서 p.292까지 약 두 장 반에 걸쳐 리쾌대를 다룬다. 리재현이 리쾌대를 다룰 수 있었던 배경을 그는 편람의 서문에서 1998년 10월 14일 “김정일 동지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북에서는 이 시기에 이쾌대의 미술가로서의 명예가 회복[주1]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후 조선에서 유화가 리쾌대의 미술을 논하거나 연구하는 것은 용인되었다.
그러나 국토와 민족이 분단된 상태에서 남이나 북이나 그의 작품 일부만 가지고 있을 뿐, 남과 북에서 민족미술사적 관점에서의 종합적인 연구와 전시는 막혀있는 상황이다.
2. 이쾌대·리쾌대의 유작들
이쾌대의 작품은 남에서 그린 작품이 60여 점, 북에서 그린 작품은 40여 점 남짓 확인되고 있다. 대개가 남과 북의 각기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데, 남측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두말할 것도 없는 진작(眞作)이다. 북의 유족이 소장했던 작품들은 이 경로 저 경로를 통하여 해외와 한국에 매물로 돌고 있다.
필자는 리쾌대의 재북 작품에 관한 연구를 하려고 오랜 기간 상당히 노력한 바 있다. 그 결과 조선을 출입하는 중국의 어느 미술대학 교수로부터 수년 전에 리쾌대의 월북 후 작품과 작품 발굴 일화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그 자료 가운데 발췌 정리하니 25점 정도를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북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으로 수년 전에 국내로 유입된 것이 10여 점이 있고, 이 작품들도 최근에 조사할 수 있었다. 이들 작품이 리쾌대의 작품임을 입증하는 보충 자료가 있으나 그 보충 자료는 남과 북 모두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어 공개하지는 않겠다.
다만 조선에서 리쾌대를 다시 현대미술사의 무대에 끌어낸 리재현(1942~) 평론분괴위원장이 편찬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재판본)』의 p.291에 있는 아래의 기록을 소개한다.
“최근 그의 유작들이 가족들에 의하여 새롭게 제기되였다. 1950년대 초에 미제와 남조선ㅇㅇ도당의 만행 후과로 위병에 걸렸고 수습할 수 없었던 위천공으로 갑자기 사망할 때 적지않은 유작이 있었으나 많은 미술가들이 참고품으로 가져갔고, 30여년 세월이 경과하는 과정에 거의 다 유실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 책의 집필을 마감짓던 때에 10여점의 유화가 문득 나타나 리쾌대의 필적을 다시 가까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니 감미로움을 말과 글로 다 이야기할수 없다. 비록 30여년 세월 관심밖에 놔두었던 작품이라 많은 손상이 갔지만 독특한 프린트 방법과 초벌로 바른 누런 색의 바탕색들이 완연한 모습 그대로이고 특히 ‘자화상’과 ‘처와 딸들의 초상’, ‘미술가(리병효)의 초상’ 등은 살아 숨쉬는 것 같다.
리쾌대는 1953년부터 몇 년간 리병효의 집에서 살다가 홀몸으로 들어온 그를 의리적으로 자기 집에 생활거처를 잡아 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건설성미술제작소에서 초기창작생활을 같이 하였던 것과도 관련된다. 그때 리쾌대가 리병효의 딸 초상을 그린 것과 가족의 부탁에 의해 이번에 찾아낸 10여점의 그림도 운봉이 보관하게 되였다.
이번에 찾아낸 작품들과 습작품들은 완성도에서 높은 수준은 못된다 하더라도 1950년대 이후 10년간 그의 창작과정을 더듬어 보는데서 귀중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이 그림들 가운데는 찬색조, 거친 탓치 등 당시 류행되던 유화적 수법의 흔적들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으로하여 개성에서 일련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리재현의 편람에서 인용)
이상과 같이 편람에서 리재현이 보관하고 있다고 언급한 이 10여 점의 유화는 수년 전에 국내로 들어와 있는데, 그 작품들 가운데 필자가 직접 조사한 9점은 아래와 같다.
번호
제 목
크 기
연 도
비 고
1
병사 (습작)
43 × 35.5
1958
조중우의탑 벽화 초안.
2
춤 (수채화)
23 × 19
1958
(종이) 춤을 추는 최승희를 그린 것이라 전한다.
3
자화상
45 × 37
1962
(사진2)
4
백운선 초상
29 × 22
1962
리쾌대의 재북 시 부인.
5
수봉이
27.3 × 21
1962
리쾌대의 딸.
6
리병효 초상
48.5 × 37.9
1963
7
리병효 셋째 아들
22.5 × 20
1963
(하드보드)
8
로동자1 (습작)
45 × 37.9
1963
9
로동자2 (습작)
45.5 × 37.9
1963
3. 북에서 리쾌대 작품이 수습되기까지
남에서 이쾌대의 처 유갑봉(劉甲鳳, 1914~1980) 여사와 아들은 이쾌대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였다. 북에서도 리쾌대의 처 백운선(1924~2010) 부인은 리쾌대의 사후에 그의 작품을 찾아내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했다. 이에 대하여 북의 미술학자 모 씨는 아래와 같이 자신의 일화를 바탕으로 하여 정리한 바 있다.
“(중략) 리쾌대 선생의 작품은 출판물에 일부 소개되었으나 대표적 작품들은 유실되여 원작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조건에서 리쾌대 선생은 이미 1965년 세상을 떠나 하는 수 없이 유가족과 박물관을 찾아 수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조선미술박물관을 찾아 보존일군들을 만나니 박물관에는 현재 보존되여 있는 것이 한점도 없었다. 보존일군들이 ‘강계력사박물관[주2]에 리쾌대 선생이 강계에 내려가 사업할 때 그린 그림이 몇 점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전임으로 하는 사업이 못되다나니 1990년대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시간을 내여 강계에 가서 력사박물관을 찾아 박물관 관장을 만났다. 강계력사박물관 작품목록에 《대대장고지 방어전투》, 《3.1인민봉기》,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농악무》 등 목록에 올라 있었으나 하나의 작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래전의 일이였고 그 사이 박물관 일군들만 하여도 다섯 차례나 바뀌였다. 꼭 찾아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하루밤 더 묵으면서 강계에서 오래전에 력사박물관 학술사로 근무하던 70 고령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력사박물관 전시작품을 대체적으로 사진으로 교체하면서 작품을 내리웠는대 리쾌대의 부인이 와서 한 주일가량 박물관 일군들과 교섭을 하여 모두 찾아 갔다’고 알려 주었다. 학술사를 하던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평양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 한 명이 강계에 왔는데 처음에는 리쾌대 선생을 관심없이 보다가 1960년도 그의 과오가 해명되면서 자강도 문화부 일군들이 리쾌대라는 유명한 화가가 중앙에서 왔다는 통보를 받고 력사박물관에 동원시켜 많은 작품들을 그리게 하였다’고 하면서 ‘원래 원작은 평양에서 유실되고 없어서 리쾌대 선생이 흑색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을 원래 원작의 크기대로 그리도록 조직적으로 조치를 취하여 그렸는데 《농악무》와 《3.1인민봉기》는 작품이 진렬하는데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고 진렬한 것을 내리우고 진렬실 크기에 맞게 다시 그리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은 참으로 유능한 미술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말만 듣고 한 점의 그림도 보지 못하고 뛰여 다니는 그때의 처지는 그야말로 난감하였다. 이제부터 남은 과제는 리쾌대 선생의 가정과 친척들을 찾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리쾌대 선생의 작품을 감상한 것은 두 점이였는데 《조선미술》 잡지에 실린 《송아지》와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이 두 작품밖에 없었다.
리쾌대 선생의 가족을 찾기 위하여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사는 미술작품 애호가 M 선생을 찾아갔다. M 선생은 반가히 나를 맞아주면서 미리 전화를 걸고 집을 찾은지라 다짜고짜로 그림을 많이 소장한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리쾌대 자화상과 부인 자화상을 내놓고 보여 주었고 그 밖의 《꽃》, 《망치》 등 정물들을 보여 주면서 ‘우리나라 력사에서 유명한 리쾌대 선생의 작품이라’고 자랑하였다. 1950년대 작품으로써는 너무도 학구적이고 현재 재능있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릉가한 리쾌대식 작품의 구수한 향기를 느끼게 되였다. M 선생은 ‘리쾌대 선생의 부인이 아들과 함께 신안주에 산다’는 것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품들은 현재 생활이 어려워 팔아 달라고 한 작품들이라’고 하면서 ‘리쾌대 선생님의 가족이 있는 신안주[주3]에 시간을 내여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하고 며칠 후 신안주에서 아들과 함께 백운선 부인을 만나게 되였다. 내가 정중히 인사를 올리자 차를 타고 온 것을 보고 어떤 간부가 료해를 나온 줄 알고 속내심을 감추려고 외교적인 말로 시간을 보내였다. 함께 동행한 M 선생이 리해를 시키면서 팔아 달라고 부탁한 그림을 그대로 내놓자 부인은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부인에게 ‘초면에 미안한데 제가 모두 사서 소장하면 안 되겠는가’고 물어보면서 값을 알려 달라고 하자 그때에야 안심하면서 값은 이미 M 선생에게서 듣고 알고 있을 터이니 부인에게 제가 준비한 돈을 요구하는 값보다 2배를 더 주면서 ‘리쾌대 선생님의 작품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귀중한 재부로 될 것’이라고 말을 하자 ‘좋은 분을 만났다’고 하면서 ‘자주 들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부인과 가족을 차에 태우고 신안주에서 제일 료리를 잘하는 식당을 찾아 모시고 식사를 하였으며 부인은 그때부터 인상이 풀리여 다심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를 대해 주었고 그림에는 자그마한 관심도 없던 아들마저도 그림 특히 아버지 그림에 대한 리해와 관심을 가지면서 자기 ‘집에 가지고 있던 그림과 평양의 큰 이모(백운복) 집에 있는 그림 모두 50여 장(소품)을 팔아 주겠다고 협잡하여 간 것을 찾으면’ 모두 나에게 드리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서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협잡이라는 문제보다 다른 소품이 50여장 남아있는 것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여러 장의 그림을 손에 쥐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 후 두차례 정도 일요일에 시간을 내여 리쾌대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는 부인을 독대하여 만나는 기회이라서 강계력사박물관에 전시한 작품을 부인이 찾아간 사실을 그대로 말씀올리니 부인은 깜짝 놀라하면서 ‘그 작품들은 내놓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통일되는 날까지 건사하겠다’고 ‘남조선에 사는 본 댁(유갑봉)에 있는 작품과 함께 리쾌대 선생의 넋이 담긴 유고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였다. 진정으로 남편을 지키고 작품을 지키고 력사에 남기려는 참으로 좋은 말이였다. 넋을 지키려는 부인의 말에 충격을 받고 더는 구입할 의사마저 버리였다. 미안한 마음을 리해해서인지 부인은 신의주 출장을 가는 길에 들린 나에게 자기가 건사했던 소품, 습작품, 속사 등을 여러 장 내놓으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고르라’고 하였다. 나는 리쾌대의 정신세계에 푹 빠진 터이라 이것저것 고를 생각이 없이 모두 걷어 안았다. 그때 부인은 저에게 ‘이런 소품은 전람회에 내놓지 못하지 않는가’고 묻는 물음에 나는 ‘리쾌대 선생의 작품은 속사나 지어 놓은 글까지도 있으면 다 전시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생각이 난다.
그 후 나는 재외 장기 출장 관계로 2011년 봄에야 아들과 함께 사는 리쾌대 부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2010년 12월 12일 백운선 부인은 84살을 일기로 자기가 그처럼 소원하던 리쾌대 선생의 통일전시회를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리쾌대의 유일한 아들 리한욱은 어머니가 아파서 세상을 뜨기 전에 유언으로 남긴 말을 필자에게 전하였다. 자기가 ‘이때까지 건사해 온 모든 작품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거나 주지도 말며 꼭 (모) 선생이 오면 모두 주면서 꼭 자기의 소원을 성사시켜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의 풍습에는 고인이 갈때 가장집물과 소지품, 애용품 등을 불에 태워 날려 보내는 식이 있다.
아들 리한욱과 며느리 김순녀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살던 웃방에서 깊이 건사하여 놓았던 곰팡이 냄새가 나는 그림 퉁구리들이 큰것이 여러 개 나왔는데 어렸을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그때 그린 것을 본 그림들’이라고 증인하면서, 방안에서 시야가 좁아 마당에 들고 나와 하나하나 펴보게 되였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흥분되여 머리카락이 오싹하면서 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되여 리쾌대의 아들 리한욱을 통하여 가족측에 있는 작품을 모두 접수하면서 그림을 배경으로 하여 아들과 처를 앞에 놓고 또는 그림을 들게 하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또 두 세 차례 리한욱의 집을 찾아 하나하나 빠짐없이 유가족의 측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개념을 안고 사진들을 찍어 놓았다.” (북의 미술학자 모 씨의 원고에서 인용)
참고로, 1953년 북으로 간 리쾌대는 “남쪽에 두고 온 안해와 자식들을 항상 마음속에 묻어두고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홀로 지내기가 어려워 1957년에 당시 북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백운복의 친동생 백운선(1924~2010)과 결혼하였는데, 결혼 당시 미혼모 백운선에게는 6살 난 딸 리수영(1950~)이 있었고, 결혼후에 아들 리한욱(1960~, 자강도 희천에서 출생)과 딸 리수봉(1957~)을 두었다. 맏딸 리수영은 자강도 고풍으로 시집을 갔고, 작은딸 리수봉은 자강도 송원군으로 시집을 갔다. 아들 리한욱은 희천에서 김순녀(1962~)를 만나 결혼하였다.
이를 보면 평양에 살던 리쾌대는 1960년경에 자강도 강계시로 보내졌고, 그해에 희천에서 아들 리한욱이 출생하였다. 강계와 희천은 북과 남으로 붙어 있는데, 강계시는 전쟁시기에 임시 수도를 한 적이 있어 전략적으로는 평양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리쾌대가 사망하고 한참 후에 그의 가족은 평양에서 가까운 신안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가 남에서 얻은 큰 아들은 이한민(1939~), 둘째 아들은 이한식(1942~), 막내 아들은 이한우(1950~), 그리고 딸은 이수생(1944~)이다. 리쾌대가 북에서 얻은 아들은 리한욱(1960~), 딸은 리수봉(1957~)이다. 즉 그는 남에서 얻은 아들 딸과 같은 항렬자(行列字)로 북에서 얻은 자녀의 이름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4. 리쾌대 작품론을 위한 작품 감정에 관하여
필자는 남측에서 리쾌대가 재북 시에 그린 작품에 대한 감정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필자는 약 30여 년전부터 북경에서 조선족 화상들이 가지고 오는 재북작가들의 작품의 진위에 관한 필자의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거의 감정에 가까운 일이었고, 조선족 화상에게 작품을 공급하는 북측 무역상인이나 미술상인들은 필자가 조선족 화상을 통하여 보내준 정확한 지적에 남측에서 조선미술의 감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까지 하였다.
필자가 재북작가들의 작품을 감정하는 원리론(原理論)은 매 작가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리쾌대의 작품인 경우는 아래의 논리에 따라 감정한다.
첫째, 이쾌대의 재남 시 작품과 재북 시 작품에서 보이는 필치의 특성을 구분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리쾌대가 북으로 가기 전에 남에서 그린 그림의 유화 필치를 보면 년대와 시기별로 변화한다. 리쾌대가 북에서 사용한 화법은 그가 남에서 사용한 화법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나, 그가 북으로 들어온 시기에 북에서는 러시아 미술의 영향이 급격하게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필자는 여기서 변월룡((1916~1990)이 1953년 7월부터 1년간 소련 문화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취임하였는데, 당시 그는 북측 미술계를 기초부터 재건하는 과제를 시작했다. 그것은 변월룡은 러시아의 레핀 아카데미로부터 가르치는 다양한 미술 수업을 북에 도입하였고, 당시까지 남아있던 일본 미술계의 잔재를 모두 없애 나갔다. 말 그대로 북한 미술의 토대를 새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 당시 평양의 유화가들은 러시아 화법의 영향을 받아 터치식으로 그려 나가는 것이 추세로 되었고, 리쾌대도 북에서 그러한 화법을 따랐다. 이쾌대가 남에서 그린 그림과 북에서 그린 그림에서 차이점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즉 리쾌대의 작품에는 남측에서의 흔적이 깔려 있지만, 북에서 널리 퍼져나갔던 터치식 화법도 담겨 있다. 북에서의 리쾌대 작품은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남에서 그린 작품에서 보여 주는 구도와 구성 및 해부학적으로 짜임새를 유지하며 높은 소묘력을 보여준다. 따라서 리쾌대 작품은 그려진 수준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리쾌대의 재북 시 작품의 캔버스와 유채(油彩)를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 리쾌대가 북으로 간 시점은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이루어진 판문점 포로송환 때이고. 그는 1965년 2월 20일 자에 사망한다. 그러므로 리쾌대는 1954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1년간 그림을 그린 것이 되지만, 실제로 그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상당히 고생을 하여 1964년부터는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 같다.
북에서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를 ‘전후의 건설 시기’라고 부른다. 그 시기에는 전쟁의 상흔을 복구하고 차츰 사회가 안정화되어 갔다. 당시 전후의 어려운 시기에 북에서 사용된 미술 재료의 특성을 이해한 상태에서야 당시 북의 미술품을 감정할 수 있다.
리쾌대의 작품에서 보이는 캔버스는 씨실과 날실로 짠 특성을 보아 당시 ‘혜산 아마천 생산공장’에서 나온 천으로 규명되어 있다. 천의 노화(老化)와 프린트 방법은 전문가들이 모든 공법(工法)에 따라 생산한 캔버스가 아니라 화가가 자체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채 안료를 쓴 것을 보면 당시 조선에서는 안료공업이 빈약하여 러시아에서 수입했으며. 유화구 기름까지도 러시아에서 들여다 사용하였다. 오직 제일 많이 쓰는 흰색(아연 백색)만을 자체로 아연화를 아마(亞麻) 기름에 유화칼로 이겨쓰는 경향이 있었다. 리쾌대의 작품에서 당시 러시아 유화구와 흰아연백색의 재료 외에, 현대 생산하는 수십 가지 색의 완성된 안료는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이쾌대가 전쟁 전에 사용하였던 북에서 반출되는 재북작가들의 유화 작품은 수리된 것이 거의 없다. 일단 수리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은 섣불리 진품으로 감정해서는 안 된다.
셋째, 리쾌대가 북에서 창작한 작품을 감정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습작과 속사, 수채화를 제외한 몇 점의 대작(大作)은 대체로 처음 그린 원작(原作)이 아니라, 리쾌대가 강계에서 필요에 의하여 다시 그린 후작(後作)이다. 리쾌대는 후작에는 후작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약간의 변화를 넣어 후세인들이 원작과 후작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북의 미술학자 모 씨는 리쾌대의 그러한 사실을 부인 백운선과 강계력사박물관 학술사(학예관)의 진술로 확증한 바 있다.
리쾌대가 강계로 간 것은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가 1960년경에 평양에서 조치한 근무지의 재 배치로 보인다. 리쾌대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하여 재배치하였을 것인데, 곧바로 리쾌대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해명되었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현지에서 강계력사박물관을 위한 작품을 그리게 하였다.
넷째, 이쾌대가 재남 시 그린 작품에는 영문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나 재북 시의 작품에는 조선글(한글)로 ‘리쾌대’라고 서명(署名)을 하였다. 유화는 대체로 글을 쓰는 붓의 크기와 너비, 길이, 기름을 많이 쓴 색채 안료와 기름을 적게 쓴 색채 안료를 쓰는 데 따라 서명이 조금씩 달라 보이는 경우가 있다.
리쾌대의 서명에 나타나는 특성을 살펴보면, 서명은 시기적으로 약간의 변화는 보이지만, 그는 완성된 작품에는 비교적 일관성이 있고 명확하게 서명을 적었다. 그러므로 제3자가 위조한 서명을 넣었을 경우에는 어렵지 않게 판독할 수 있다.
다섯째, 북에서도 미술품의 개인 소유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북에서 나온 작품도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필자가 실물을 검토한 리재현의 편람에 언급된 그림들은, 그 그림을 일괄 입수한 미술상인 J 씨는 수년 전에 인편을 통하여 리재현에게 작품 사진을 보내 그 그림이 편람에서 언급한 그림이라는 확인서를 받은 바 있다.
또한 북의 미술사학자 모 씨는 리쾌대의 작품을 가지고 있는 아들 리한욱과 며느리 김순녀를 그림 앞에 앉혀 놓고 사진을 찍거나, 또는 그림을 들게 하고 사진들을 찍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가 알려주는 작품의 출처는 진위를 가리는데 도움을 주는 부수적 자료로서 매우 유용하다.
5. 이쾌대 연구 방법론의 시작으로, 재남 시 자화상과 재북 시 자화상을 비교 탐색한다
이쾌대가 남에서 그린 작품과 북으로 간 후에 그린 작품은 표현 면에서 일정한 차이가 난다. 해방공간의 이쾌대는 거침없이 활달한 그림을 그렸으나, 1954년부터 북에서의 리쾌대는 사회주의 원리에 근거한 리얼리즘(사실주의)과 벌거벗은 나체를 혐오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특유한 윤리를 기준으로 하여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이다. 더군다나 1953년 7월부터 1년간 평양미술대학 학장 변월룡에 의해 러시아 미술 기법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리쾌대도 일부분 그에 따랐다.
이쾌대가 남에서 그린 세 점의 자화상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48~9년 무렵에 유화로 그린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72×60cm, (사진1))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중절모를 쓰고 정면을 바라보는 자화상이다. 오른손에는 붓을 왼손에는 이젤(물감판)을 들고 있어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국내외(國內外)의 많은 화가의 자화상 중에 이러한 화가로서의 모습과 의지 및 자신감을 담고 있는 자화상은 흔치 않다. 이쾌대의 호기(豪氣)가 보이는 이쾌대다운 높은 수준의 자화상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유화, 1948〜9년. 이쾌대 자화상의 대표작이다. 남측 유족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자화상』 앞면과 뒷면, 리쾌대, 유화, 1962년(49세), 45×37cm. 운봉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서 언급한 작품이다. 북측 유족 구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물론, 리쾌대가 북에서 그린 자화상이라고 전하는 작품도 있다. 직접 리쾌대가 그린 『자화상』(45×37cm, (사진2))도 있지만, 이를 다시 모사한 복제품도 있는 것 같다. 북에서 그렸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리쾌대의 자화상 가운데는 리쾌대 생존 당시에 사용된 물감이 아닌 것으로 그린 것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2의 『자화상』은 서명이나 창작 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창작에 사용된 캔버스와 물감이 리쾌대 생존 당시에 흔히 공급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얼굴은 틀림없는 리쾌대이며, 이 작품은 북의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위원장 리재현이 유족의 부탁을 받아 찾아낸 후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서 언급한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자화상』을 리재현은 편람에서 유족의 부탁을 받고 찾아낸 그림이라고 기술하였지만, 사실은 그의 유족에게서 나온 그림이다. 북에서는 이 작품이 리쾌대의 1962년도 『자화상』이라 한다.
리쾌대의 49세 시의 이 평범한 작품(사진2)에서는 이쾌대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 나타난 15년 전 청년 시절의 호기로움은 간데없고, 그저 당시 자신의 무표정한 모습을 허심(虛心)하게 그린 것으로 보일 뿐이다. 두 작품을 대비하여 보면 작품이 완성도라든가 수준에서 편차가 있다.
그러나 리쾌대가 1940년대에 그린 또 다른 『자화상』 두 점과 대비하여 보면 상통하는 필력을 느낄 수가 있다. 이쾌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과 리쾌대의 재북 시 변화된 필력으로 그린 『자화상』을 동일한 수준을 기준으로 한 선상에서 비교하면 잘못된 결과를 내올 수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쾌대가 재남 시에 그린 세 점의 자화상 모두를 참조하며 대비하여 논하였다.
6. 이쾌대 및 리쾌대의 연구를 시작하며
이쾌대라는 전설적인 천재 화가가 재남 시에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상당수 있다. 그리고 리쾌대라는 이름으로 재북 시에 그린 대표작도 몇 점이 있다. 남측의 현대미술사학계에서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남의 이쾌대, 북의 리쾌대[주4] 작품을 모두 결집하여 연구하여야 한다면서도 섣불리 시작하는 연구가는 없었다. 북의 미술계와 미술품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자. 리쾌대가 북에서 그린 작품이라고 북의 평론가들과 유족이 인정하는 작품들은 우리 남측의 연구자들에게 탐색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금 남과 북, 해외에 있는 이쾌대의 많지 않은 작품들을 찾아서 모두 연구한다고 해도 150여 점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국내외의 미술품 유통 구조를 잘 알고 있다. 이쾌대의 작품을 기껏 찾아야 150점이라면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띄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너무 적은 수량이다. 그러나 남과 북에 있는 그의 작품을 함께 연구하여 그의 작품 세계를 재발견한다면, 최소한 그가 재남 시에 그린 여러 대표작들은 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작품 세계 전모를 보여주는 ‘이쾌대 미술관’이 대구나 그의 고향 칠곡에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누구도 먼저 나서서 시도하기를 꺼리는 재북 시절의 리쾌대를 필자가 나서서 탐색하고 연구하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2024.05.26.)
주
[주1]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재판본(1999년)에 의하면, 리쾌대의 아들 리한욱은 대학을 졸업하고 기사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외조카 리원상은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창작지도 일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렇게 리재현과 미술학자 C가 북애서 찾은 리쾌대의 아들 리한욱이 건재한 것을 보면, 북에서 리쾌대의 말년 입지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숙청당했을 것이라는 남한에서의 추정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북에서 강계시는 전쟁시기에 임시 수도를 한 적이 있어 전략적으로 평양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이므로, 리쾌대가 강계로 보내졌다는 것은 남쪽 출신에 대한 재배치이지 숙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양에서 강계로의 재배치가 북에서 좌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리재현이 편람에 쓴 글을 분석하여 보면 리쾌대는 북의 미술계에서 나름대로 신뢰를 받던 인물이었다.
[주2] 자강도 강계시 북문동에 있는 박물관이다. 조선시대에 세운 강계아사(관청) 건물을 그대로 이용하여 1954년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단층으로 된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박물관은 원시부문, 고대부문, 중세부문, 근세부문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주3] 신안주는 전후에 평안남도 안주시의 개발된 지역을 말하는 것 같다. 안주시는 동쪽은 개천시, 서쪽은 문덕군, 남쪽은 순천시와 숙천군, 북쪽은 평안북도 박천군과 녕변군에 접해 있다. 남부는 낮은 산지, 북서부에는 열두삼천리평야가 펼쳐져 있다.
[주4] 필자가 본 논고에서 남의 이쾌대, 북의 리쾌대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재남 시 작품이냐?, 재북 시 작품이냐?”를 즉시 이해하도록 가독성(可讀成)을 향상시키려 한 의도이다. 필자의 이쾌대의 민족미술사론은 우리 민족의 현대미술사상(現代美術史上)에서 특정 작가를 대상으로하여 시도하는 첫 통일미술사이기도 하다. 필자는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이쾌대의 민족미술사론을 간헐적으로 기고할 것이고, 더 나아가 해방공간에 북으로 간 민족미술가들을 재조명할 예정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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