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 山莊의 女人"의 산장
류지미 2022. 12. 12. 16:50
‘ 山莊의 女人"의 山莊
국립 마산 결핵 병원(가포동)의 본관 건너편 숲속에 있었던
산장은 일제 때 세워진 카티지(cottage)로 2인용 병사(病舍)였다.
이 숲속에는 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x9560Fmw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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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莊의 女人"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위치한 국립 마산 병원의 산장 병동을 무대로 한 대중가요이다.
마산 출신 반야월이
6·25 전쟁 당시 고향인 마산으로 피난 와서, 마산 방송국 문예부장으로 일하면서 서울의 가요인들을 모아
‘방송국 위문단’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국립 마산 병원[마산 결핵 요양소]으로 위문 공연을 갔는데,
우연히 객석에서 결핵을 앓고 있던 젊은 여인이 계속해서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공연이 끝난 뒤에 그곳 직원에게 그녀의 사연을 물어 보니, 그 여인은 폐결핵을 앓는 중환자로 병원 건너편의 ‘산장 병동’에서 요양중이었다.
반야월은 꺼져 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외롭게 살아가는 미모의 여인에 끌려 「산장의 여인」을 작사했던 것이다. 이후 이 가사는 마산 결핵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작곡가 이재호 [1914~1960]에게 넘겨져 곡으로 완성되었다.
그 뒤 1957년 KBS 중앙 방송국의 전속 가수로 있던 권혜경이 불렀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반야월 (半夜月)
(1916. 8. 1, 경남 마산~ 2012. 3. 26, 서울 ):
대중가요 가수이자 작사가.
본명은 박창오(朴昌吾) ,반야월이라는 필명 외에 대중가요 가수시절에는 진방남(秦芳男)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추미림(秋美林)·박남포(朴南浦)· 허구(許久)등의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38년 각 레코드 회사들이 신인발굴을 위해 경쟁적으로 열었던 콩쿠르 중 경상북도 김천에서 열렸던 태평 레코드 대회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곡으로 입상하여 가수로 데뷔한 그는 해방 전 태평레코드사의 전속으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남대문 악극단을 조직하여 다양한 악극을 제작했으며, 이후로는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4,500여 곡의
가요를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산장의 여인>·<울고넘는 박달재>·<산유화> 등이 있다.
노랫말 따라 ‘산장의 여인’ 되어 산장으로 떠난산장의 여인 권혜경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삶을 노랫말에 내어 주는 것일까.
자신의 노래대로 '산장의 여인'이 되어 살던 가수 권혜경은 2008년05월 25일 오후 1시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향년 77세.
생전에 결혼은 하지 않아 자식은 없다.
가수 권혜경,
본명 권오명(權五明).
(1931년 10월 3일 삼척에서 출생, 2008년 5월 25일 사망)
1931년 10월 3일,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 중 넷째 딸로 삼척에서 출생했다.
이후 의정부로 이사,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 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의정부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동구여상을 졸업한 후 부모의 뜻을 따라 당시 조흥은행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녀. 스물 여섯이 되던 해인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가수모집에 응시,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그러나 부모는 가수활동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심지어 '풍각쟁이 광대'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부모의 뜻을 거역했다는 배신감으로 그녀가 번 돈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부모와는 그 후 쉽사리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점차 부친은 어느 정도 이해해 주기 시작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끝내 용서치 않은 채 갑자기 타계했기 때문에 권혜경 씨 입장에서는 당시 받은 충격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대견하다 싶은 일이라도 생기면 먼저 어머니 무덤부터 찾곤 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권혜경은 KBS 전속가수가 된 지 얼마 후 발표하는 '산장의 여인' 단 한 곡으로 신데렐라로 부상한다. 이어 그는 당대 최고 작곡가들인 손목인, 이재호, 손석우, 박춘석씨 등과 손잡고 노래를 발표했다.
59년,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그리고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를 강수향 씨와 듀엣으로 발표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랑의 길', 김화랑 감독의 '그림자 사랑'을 비롯해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이 모티브가 되어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이 영화 주제가 또한 권혜경 씨가 취입한다.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 역시 음반으로 취입될 때는 현인과 함께 권혜경씨가 컴비를 이뤄 취입했다.
예명 '권혜경'은 본인 스스로 지었다.
특히 '벼슬 경(卿)'자를 이름에 선택했을 만큼 엘리트 의식 또한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 때까지 가요의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창법과는 다른 클래식한 발성으로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산장의 여인'을 시작으로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선 지 얼마 뒤인 59년, 그녀 나이 스물 아홉 살에 심장판막증 판명을 받으면서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음반 취입과 지방 공연 등으로 당시 그의 허리는 '18인치까지 줄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투병 속에 연예 활동을 하던 전성기의 권혜경은 또다시 후두암까지 선고받는 등 무려 네 가지나 되는 불치의 병마에 시달린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곡인 영화 '물새야 울지마라'의 주제가인 '물새 우는 해변'은 작곡가 박춘석씨가 투병 중인 권혜경을 배려해 호흡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원곡의 멜로디 일부를 개작까지 해 건네준 곡이기도 하다.
당시 치료차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불해야 했던 치료비가 '자그마치 2억5천 만 원 정도였다', 고 술회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착의 대가로, 또 당시 매스컴의 보도대로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듯했지 만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등 몇 년간의 가수 활동 내내 사투를 반복했다.
그녀의 노래 '산장의 여인'의 끝 부분, 한 구절처럼 그녀는 홀로 '재생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본래 수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절에서 목숨을 건진 후 불자가 된다.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도선사의 청담(淸潭)스님으로부터 하루 5천배씩 절을 하라는 명을 받고 또 다른 힘든 고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대명화(大明華)'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는 청신녀(淸信女)라 이름 지었다.
한 때 '산장의 여인'을 만들어 부르게 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에게. '하필이면 슬픈 노래를 내게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게 했느냐'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전해 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스스로 남은 인생 모두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권혜경 여사는 그때까지 근 50여 년 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사형수, 무기수, 10대 범죄자 등 재소자들을 격려해오고 있어 수인들 사이에서 지금도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다.
교도소 위문공연, 강연 만도 4백여 차례. 이러한 공로로 권혜경은 제 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 표창을 비롯해 현재까지 표창 만도 5백여 회 수상했다.
한 때 그녀의 빨간 통굽 하이힐은 이제 고무신으로, 그리고 무스와 스프레이로 치장했던 화려한 헤어스타일은 어느덧 백발로 변했지만 아직도 가발을 네 개나 갖고 있는 '멋쟁이'라고 스스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