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공상지역별 해설
1. 팔공산 대구권 지역
팔공산 정상(頂上)하면 동봉으로 굳어졌는데 이 봉우리도 사실은 미타봉(彌陀峰)이다. 미타(彌陀)라는 말은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한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준말로, 상봉(上峰) 비로 (毘盧)봉과 서봉(西峰) 삼성(三聖)봉과 같은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누군가에 의해, 비로봉을 중심(中 心)으로 동쪽에 있으니까 동봉, 서쪽에 있으니까 서봉으로 부른 것 같다. 미타봉이라는 말과 삼성봉이라는 말은 지도에서 사라졌으나 옛 이름을 찾기운동이 지금 한창 벌어지 고 있다. 삼성암지(三聖庵址)도 우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삼성봉은 바로 밑 여래지점으로 추측되는데, 학계(學界)에서는 부인사 뒤 1.5km 지점의 마애약사여래(磨崖藥師如來) 입상(立像) 부근(附近)으로 주장(主張)한다. 여기에 대하여 잠시 언급(言及)해 보면 '팔공산 10경'에 삼성암(三聖庵) 낙조(落潮)가 1경(景)으로 포함되어 있다. 만약의 경우 학자(學者)들 주장처럼 부인사(符仁寺) 뒤라면 그 자리에서는 낙조(落潮)를 감상 할 수 없다. 필자(황보규태)가 주장(主張)하는 삼성암지(三聖庵址)는 서봉(西峰) 아래 표고(標高) 1,000m 정도에 있을 뿐 아니라, 맑은 물이 솟는 샘이 있고 청명(淸明)한 날은 멀리 낙동강(洛東江)과 가야산(伽倻山)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전망(展望) 좋은 곳이며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 그 위치가 도면화(圖面化)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신령(新寧)재라는 표석(漂石)이 있는 곳은 부엌에서 쓰는 도마 같이 생긴 곳이라 하여 '도마재' 라 부르는 것과 골프장 뒤 '늪패지'를 '능성재'로 쓴 것은 잘못된 것이다. 능성재(能城嶺)는 이곳에사 상당히 멀리 떨어진 예비군 훈련장에서 와촌(瓦村)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또한 대구교육원 앞산이 지도에는 노족봉(老足峰)인데 사실은 인봉(印峰)이다. 자세히 보면 바위가 도장을 세운 형상이다. 심지어는 폭포골도 다른 이름인데 일대에 상가가 들어서면서 손님을 끌기 위하혀 폭포가 잇는 골인 양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잇고 그 골짜기로 넘어가면 공산폭포로 넘어가는 신령(新寧)재로 갈 수는 있다.
1)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과 대구(大邱)의 이야기.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 헌강왕 3년(877)에 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호족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전과(戰果)를 올려 후 고구려의 영토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그 대가(代價)로 직책(職責)이 시중(侍中)에 이르니 오늘날 국무총리(國務總理) 격(格)이다. 그러나 궁예는 변덕스럽게도 도읍을 강원도 철원으로 옮겼을 뿐 아니라, 나라 이름도 마진으로 바꿨다가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폭정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자신도 분에 넘치는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니 민심이 그를 떠나게 된다. 이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이 일어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고려 태조이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繼承)한다는 의미로 국호(國號)를'고려(高麗)'라 하고, 이듬해(919년)는 도읍지(都邑地)를 자기가 태어난 개성(開城)으로 옮겨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우니 총 34대 475년의 고려 왕조(王朝)를 연다. 드디어 태조 18년(935)에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듬해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키니, 지리 하게 전대되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호족들의 폭정과 민란에 시달린 민심을 수습하고, 그때까지 발호 하던 호족들을 회유하여 고려를 지지하도록 하는 한편, 융화 정책을 펼쳐 내치(內治)에 힘을 쏟고, 고구려(高句麗) 국토(國土)를 회복(回復) 하기 위한 북진책(北進策)과 당시 민간에 널리 퍼진 숭불책(崇佛策)으로 재위를 튼튼히 하고는 제위(帝位) 26년만에 몰(沒)한다. 다만 옥의 티라 할까? 그가 후세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을 유훈(遺訓) '훈요십조'에 차령 이남 사람의 등용을 억제토록 함으로 뿌리 깊은 지역감정을 초래케 한 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은, 왕건은 많은 차령 이남인의 도움으로 고려의 기틀을 다졌다는 사실이다.
㉠ 우리들이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유사이래 많은 왕들이 적든 많든 대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나 유독 태조 왕건에 연유된 지명이 이 지방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대구와 가까울 법한 인물은 왕건이 아니라 오히려 견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후백제의 시조 견훤은 문경(聞慶) 가은 사람이다. 서남해 지방의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이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그가 진성여왕 6년에 반기를 들고 여러성을 공략하더니 드디어 효공왕 4년(900),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당 연합군에 무참히 짓밟힌 백제를 재건(再建)한다는 기치를 들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칭했다. 초창기에 이미 중국과 친교를 맺을 만큼 기민했고, 후교구려의 궁예, 고려의 왕건과도 자주 충돌했지만 그는 항상 우위(優位)를 유지(維持)했고, 용병술에도 뛰어나 고려. 신라가 밀착하기 전에 미리 제압할 의도로 927년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침공, 포석정에서 궁녀들과 연회를 즐기던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왕후와 비빈을 겁탈하였을 뿐 아니라, 경애왕 대신 왕족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
㉡ 한편 태조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경애왕이 견훤에게 무참히 유린당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 사신을 보내 신라를 위로하고 정병 5,000명을 이끌고 견훤 공략에 나섰다. 견훤 군사와 맞닥뜨린 곳은 오늘의 지묘동 일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사기가 충전한 견훤 군사에 오히려 패배. 마침내 증원군(增員軍)으로 당도한 신숭겸, 김락 두 장수와 함께 반격에 나섰으나 먼길을 달려온 지친 고려 군사로서는 당해낼 수 없었고, 오히려 좁혀지는 포위망에 왕건의 목숨이 경각에 이른다. 이때 신숭겸이 꾀를 생각해내 그가 왕선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탈출을 시도하는 양 하니 견훤 군사는 왕건이 달아나는 줄 알고 왕건으로 위장한 신숭겸을 추격하니 병졸로 위장한 왕건이 무사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전투(戰鬪)가 동수회전(桐藪會戰)으로 왕건 생애에 최대의 패전으로 기록되면서 대구 지방는 그로 인해 많은 지명이 생겨났다. * 신숭겸이 꾀를 냈대서 지묘(智妙), * 그가 패했대서 고개 이름이 파군재(罷軍峙), * 머문산이라는 뜻의 왕산(王山), * 달아나면서 앉았다는 바위 독좌암(獨坐岩), * 긴장했던 얼굴을 풀었다는 해안(解顔), * 나무꾼이 왕에게 주먹밥을 주고 돌아와 보니 사람이 없어졌는데 나주엥 그가 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잠시 행방을 잃었다는 실왕(失王 : 지금은 변음되어 시량), * 사지(死地)를 벗어나 안도했다는 안심(安心), * 외롭고 고독한 도망자의 밤길을 비추었다는 반야월(半夜月)과 청천(淸川), * 몸을 은닉하면서 숨은 절 은적사(隱跡寺), * 조금은 마음을 편케 머문 절 안일사(安逸寺), * 그가 거쳐간 왕굴(王窟), * 비로소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는 임휴사(臨休寺), * 그가 군사를 이끌고 지나갈 때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무태(無怠), *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햇다는 연경(硏俓), * 고려 군사와 견훤 군사가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전탄(箭灘) 등이 모두 왕건과 유래된 이름들이다.
이들 지명들을 근거로 필자 나름대로 그 당시 전황을 재구성해 본다면, 견훤 군사와의 조우(遭遇)는 지묘 일대로 추정할 수 있고 결국 오늘날 무태교 남단, 즉 산격동 부근에서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격렬하게 치루어 이부근의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전탄(箭灘)으로 이름지어지고, 파군재까지 대패(大敗)하면서 봉무동(독좌암)∼불로동(해안)∼평광동(시량)까지 도주(逃走), 안심∼반야월을 거쳐, 앞산으로 숨어들어 은적사∼안일사∼왕굴∼임휴사에 머물다가 김천(金泉)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에서 도승(道僧)에게 비법(秘法)을 배워 개경(開京)으로 돌아가서 재정비하여 고려를 개국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 지명 중 다음 몇 곳은 신빙성이 희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불로동의 고명(古名)인 '해안(解顔)'은 한문의 뜻은 '얼굴을 푼다'하여 인근의 파군재에서 도망친 왕건이 독좌암에 잠시 앉았다가 불로동을 지날 때쯤은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 얼굴을 풀었을 법도 하지만, 이 해안(解顔)의 이름은 이미 8세기 신라 경덕왕때 붙여진 이름이고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전탄(箭灘)이라는 지명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나오지 않던 이름이 [대구읍지(大邱邑誌)]에 갑자기 나오므로 당시 왕건으로 유래(由來)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하튼 그후 왕건은 이곳 대구에서 일생(一生) 일대(一代) 지울 수 없는 패전(敗戰)의 쓰라림을 맛보았지만 고려를 반석(盤石) 위로 올려놓았고, 반면(反面) 대승(大勝)을 거둔 견훤은 아들과의 불화(不和)로 오히려 고려(高麗)로 망명(亡命), 도리어 아들 신검이 버티던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一助)를 가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승장(勝長)이었던 견훤에 대하여는 흔적도 없고 패(敗)한 왕건은 무수한 지명을 남겼으니 이것이 역사(歷史)의 아리러니일까? 다만 왕건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은 목숨을 바쳐 그를 구한 두 장수(將帥)가 전라도(全羅道) 사람이고, 그가 태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 용건에게 장차 후삼국을 통일 할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豫言)한 도선(道詵) 국사(國師) 또한 전라도(全羅道) 사람이었음에도 왜 그가 '훈요십조'에서 차려 이남사람의 등용을 배격하였을까 하는 의문이다.(그래서 학계에서는 '훈요십조'는 왕건의 유훈(遺訓)이 아니라 그 이후 사람들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대구와 왕건과의 관계를 밝힌다는 것이 좀 빗나갔지만 이제 한번 그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도운 사람은 물론 많다. 그러나 앞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이 세 분의 공은 특히 크다할 것이며 공교롭게도 모두 전라도 사람이다. 우리 민족의 사상(思想) 근저(根底)ㅏ에 깊이 뿌리 박힌 풍수설(風水說)을 논(論)할 때 그 비조(鼻祖)로 도선(道詵)을 꼽으며 다른 기록들에서는 도선을 신승(神僧)이나 술사(術士)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도선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그는 평범한 스님일 뿐이며, 다만 당시 쇠퇴해가던 화엄학(華嚴學)을 버리고 선종(禪宗)을 열심히 공부한 스님으로 선종계(禪宗系) 중에서도 밀교(密敎)를 깊이 연구한 결과 산천에 절과 탑을 지을 땅을 골라 그 지기(地氣)로 부처님의 뜩을 쉽게 깨우치게하는, 이른바 길지를 선택하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의 주창자(主唱者)로 볼 뿐이다. 스님은 흥덕왕 1년(826)에 전라도(全羅道) 영암땅에서 태어났다. 그가 왕건가와 인연을 맺는 내용을 최유청이 쓴 [선각국사비명]에서 옮겨 보면, "도선이 이미 신라가 쇠퇴하고 장차 천명을 받아 특기(特記)할 자가 있을 것을 알고 당시 개성을 노닐고 있었는데, 때마침 용건(勇健 : 왕건의 父)이 집을 짓고 있었는데 도선이 지나며 보니 왕이 날 터인지라 용건에게 이르기를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장년이 되거든 이 책을 주시오." 하였다. 과연 2년 후에 왕건이 태어나고 후삼국을 통일하니 이가 바로 고려 태조이다. 왕건 스스로 독실한 불교도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후 정을 지을 때는 반드시 도선이 정해준 곳만 선택하도록 하는 등 실로 도선으로부터 사상적(思想的) 감화(感化)를 받은 흔적이 역력히 나타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봉국 정계 5년 6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비밀히 모의, 밤에 왕건을 찾아가 지금의 궁예가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하를 주살(誅殺)하니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 부지(扶支)할 수가 없다. 나쁜 임금을 몰아내고 현명한 왕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도리다. 공(왕건)이 왕이 되기를 바란다." 라고 하는 내용으로, 그로부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드디어 보위(寶位)에 오르는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개국공신 신숭겸은 동수회전(桐藪會戰)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고려 건국에도 왕건을 깊이 도운 장수라는 사실이다. 신숭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시조(始祖)이며, 927년 대구 공산전투에서 전사했으나, 태어난 곳은 전라도(全羅道) 곡성(谷城)이다. 공산전투에서 신숭겸도 함께 전사, 태조가 나중에 이들이 전사한 곳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는 또 한 사람의 김락(金樂)은 출생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전라도(全羅道) 순천(順天)사람이다. 최근 중앙일보사가 펴낸 [성씨의 고향]을 보면, 김락은 당악 김씨(唐岳金氏)의 시조(始祖)로, 아우 철(鐵)은 중화 김씨(中和金氏)의 시조로 나오는데 아우 철에 대하여는 본래 순천 사람인데 중화로 분적(分籍)하였다고 하였으니 김락이 순천사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철(鐵)이 락(樂)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그(김락)가 죽자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제(弟) 철(鐵)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는 기록(記錄)이 뒷받침한다. 평안남도 중화(中和)는 여초(麗初) 인종 14년911360에 붙여진 이름이고, 신라 헌덕왕 때의 이름은 '당악(唐岳)'이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왜 그가 영암인 도선으로부터 왕으로 점지(點指)를 받았고, 전라도 곡성(谷城)과 순천(順天)인 두 장수의 죽음으로 오백년 고려 왕업의 기틀을 닦았건만 '휸요십조'를 만들어 후셍의 왕들이 차령 이남 사람들의 등용을 배격토록 하였을까 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③고려 태조 왕건이 올랐던 왕산(王山).
지금은 단지가 되어있는 왕산. 왕산은 아주 자그마한 산이지만 반만년 역사에 큰 분수령을 이룬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 태조가 견훤의 포위망을 피해 오른 연고로 지어진 이름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때 왕건이 견훤에게 살해당했다면 고려가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인지, 아니면 견훤에 의해 후백제가 삼국을 통일했을 것인지 미지수였을 만큼 격렬했던 전장이 이 산 부근(附近)이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신라는 하대(下代)로 내려오면서 국정이 문란해지고 따라서 민심이 이반(離反)됨에 따라 각처에서 호족이 발호하게 된다. 그 중에서 고구려 유민을 기반으로 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가 왕건(王建)에 의해 붕괴되고 백제를 기반으로 한 견훤이 전주를 거점으로 하여 후백제를 세우니, 기존의 신라와 함께 다시 삼국이 정립 각국이 세력확장을 벌리게 된다. 특히 견훤은 고려와 선린(善隣) 관계에 있는 신라에 대해 적대감(敵對感)이 높았는데, 마침내 경애왕 4년(927)에 신라의 서울인 경주를 침공하게 되니, 포석정에서 비빈들과 연회를 즐기다가 들이닥친 견훤 군사들이에 의해 비빈들은 난행을 당하고 왕으로 하여금 자살케 하고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왕으로 삼으니 이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된다. 뿐만 아니라,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하고 많ㅇㄴ 금은 보화를 약탈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려 태조가 친히 정병 오천을 거느리고 지금의 지묘동 일대에서 맞아 싸우니 이것이 그 유명한 '동수회전(桐藪會戰)'이다. 결과적으로 왕건은 대패하고 장수 신숭겸이 왕건 복장을 하여 견훤군을 유인하는 사이 태조가 간신히 몸을 피해 오른 것이 왕산(王山)이다. 산 아래의 표충사(表忠祠)는 왕건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에는 지묘사라는 절을 지어주었던 곳인데, 세월이 흘러 절이 되락하자 후손들이 다시 세워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충렬(忠烈)의 장소이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는 현재 대구시 기념물 제 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후손들에 의해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④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 1호인 측백(側柏)수림의 향산(鄕山). 향산은 팔공산 다음으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작은 산이다.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 천연 기념물 제 1호인 측백나무가 자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주 최씨의 시조이자 당나라에 있을 때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키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 문명을 날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영정(影幀)(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 25호)과 그 영정을 모신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 : 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 20호), 그리고 비록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못했지만 향리 유생들이 시회(詩會)를 열던 구로정(九老亭)과 고찰(古刹) 관음사(觀音寺)가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측백나무는 석회암 지대에만 붙포하는 지표식물(地表植物)로서 수고 25m 직경 1m 까지 자라는 상록침엽 교목이다. 자생지(自生地)는 거의 모두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분포지역은 충북 단양(제 62호), 경북 영양(제 114호), 안동(제 252호)등이다. 향산(香山)의 측백나무는 이 산의 북사면 해발 1백m 정도의 단애(斷崖)에 고루 식생(植生)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들 자생지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가(四佳) 서거정(조선조 문인이자 학자)은 대구 10경을 노래하면서 이 숲을 <북벽 향림>이란 시제를 붙여,
옛 벽에 푸른 향나무 창같이 늘어섰네 사시로 바람결에 끊이잖는 저 향기를 연달아 심고 가꾸어서 온 고을에 풍기세 라고 노래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에서 사가(四佳)에서 애림(愛林) 사상(思想)과 소박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음은 물론 적어도 사가(四佳) 생존시(1420∼1488), 즉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 전에도 이미 울창한 숲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 오랜 수령의 나무는 없다.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해방과 6.25로 사회가 혼란했을 때 남벌(濫伐)됐다고 한다. 대구시에서는 이 측백나무의 씨를 받아 후게목을 양성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산불이나 또 다른 재해로 훼손될 우려도 염려되지만 그것보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 1호가 대구에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그 후계목(後繼木) 일부를 각급 학교는 물론 전국의 식물원에 보내 대구를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읍지(邑誌)에는 나가산(羅伽山)이라 했고 관음사에서는 낙가산이라 한다. 이는 관세음보살이 상주(常住)하는 산이 중국의 보타 낙가산에서 따온 이름 인 것 같다. 향산(鄕山, 香山)이란 사가의 향림, 즉 향나무가 있는 산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같은 향나무과의 식물인 향나무와 측백나무는 종은 서로 다르다.
⑤ 한폭의 수채화(水彩畵)를 닮은 문암산(文巖山). 파군재에서 오른편 길을 택하면 동화사나 갓바위로 가는 길이 된다. 왼편으로 왕산(王山), 오른편으로는 거대한 공산(公山)댐의 제방(堤防)ㄹ을 보며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넓은 미대(美垈)벌이 전개되며 문암산(文巖山)은 이들을 감싸 안았다. 우리 땅, 우리 나무, 우리 풀 한 포기 어느 한 가지인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마는 땅이름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걸맞다. 미대(美垈)는 말하자면 '아름다운 터'라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서 미대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방방곡곡 어디 한 두 곳 일까마는, 이렇게 좋은 이름을 골라 불러 온 선조(先祖)들의 혜안(慧眼)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미대는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인천(仁川) 채씨(蔡氏)에 의하여 개척(開拓)되었다. 입향조(入鄕組) 응린(應麟 : 호(號) 송담(松潭))은 덕행과 학문이 특출하여 달성10현(達城十賢)의 한 사람으로 오른 분이다. 또한 <영남 인물고(嶺南人物考)>에도 등재(登載)되어 잇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염남인물고>는 조선조 초부터 정조대에 이르는 영남의 각 고을의 학자, 문인, 정치가를 소개한 인물평전인데 대구에는 송담외 24명 뿐이다. 안동이 141명, 상주가 115명임에 비하면 매우 열세(劣勢)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근세 이전까지 대구는 이렇다 할 인물(人物)을 배출하지 못했다. 송담은 지금의 북구 검단동 금호강 강안(江岸) 압로정(押鷺亭)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대표적인 문인(文人)이 주자학이자 임란(壬亂)시 이주, 손처눌, 정사철 등과 함께 대구 지방에서는 최초로 창의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선생이다. 문암은 미대의 안산(案山)이자 송담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한 채문(蔡門)의 종중산이기도 하다. 이름이 시사(示唆)하듯 돌산으오, 나무가 자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동네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자주 죽었다고 한다. 마침내 동화사 스님을 찾아가 그 원인을 물으니 앞산이 헐벗은 결과이니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마니 등에 등에 흙을 담아와 붇고 돌을 깍아 나무를 심으니 이상하리 만큼 잘 자랐고 소년(少年) 참사(參事)의 횡액(橫厄)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 단풍이 유난히 곱다. 산 아래에서는 신고사(지금의 무량사(無量寺)로 개명) 주지 동현 스님의 설명으로 절 뒤에 사당(祠堂)이 모셔져있다. 댐이 만수가 되면 뜨락까지 물이 차 산 그리자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했다고 한다.
⑥ 아름다운 꽃밭소와 학봉(鶴峰).
대구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늙지 않는다는 불로동(不老洞), 동양적인 이상향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뜻하는 도원동(桃源洞) 등 의미(意味)있는 마을 이름들이 많은데 무태(無怠)도 그런 곳이다. 혹자(或者)는 고려 태조가 이곳을 지날 때 주민들이 열심히 일화는 모습을 보고 게으른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說)과, 부하 장수들에게 견훤 군사의 기습으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뜻으로 무태(無怠)라 했다는 설이 있으니, 잘 가꾸어진 농토를 보면 전자(前者)가 오히려 합당(合當)한 말인 것 같다. '은전구리' 마을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왜냐하면 은씨, 전씨, 구씨, 이씨들이 대종을 이루며 살아온 마을이었가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터가 있어 특장의 성씨들과는 인연이 닿지 않은 곳도 있다고 하는 바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서변동에는 인천 이씨(仁川李氏)가 동변동에는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무태교를 건너면 오염된 신천을 걸러내는 시립 신천하수처리소가 나온다. 조금지나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왕버들 노거수가 나란히 서 있어 이미 이 마을이 범상한 곳이 아님을 짐작토록 한다. 동(東)으로는 학봉(鶴捧)이, 북(北)으로는 도덕산(道德山)이, 서(西)로는 망실산이 삼태기 같은 형국(形局)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동변마을 좁은 안길을 따라가면 끝지점이 금호강에 닿는다. 10여년전만 해도 산격과 검단으로 가는 나룻배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여기서부터는 초행길이다. 우측으로 전개되는 강은 여느 지점과는 달리 물길이 넓고 깊은 것 같다. 강가로는 수양버들이 길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한결 운치가 좋다. 매운탕집이 가끔 보이고 학봉의 정상이 나타나는 지점이 화담마을이다. 화담은 오히려 인근 주민들에게는 '꽃밭소'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즉 학봉에 진달래가 피면 타오르듯 붉게 물든 산 그림자가 금호강 맑은 물에 투영(投影)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소(沼)가 꽃받처럼 붉어 지어진 이름이다. 얼마나 낭만적인 이름인가? 학봉은 지도에만 표기가 그럴 뿐 학(鶴)을 닮은 것도 학(鶴)이 사는 곳도 아니고 주민(住民)들에게는 가남봉(柯南峯) 또는 칡이 많은 산이라는 뜻에서 갈봉산(葛峯山),또는 황수덤으로 알려진 산이다. 정상에는 그 옛날 김덕령(광주 출신으로 임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충장공은 아닌 듯 함) 장군(將軍)이 말채찍을 거꾸로 꽂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 내가 살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 하며 꽂아 두었던 거대한 말채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해 산불로 그루터기만 남았다는 이야기와 명주실 한 꾸러미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는 샘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칡이 많아 갈봉산(葛峯山)으라 햇다는 산이나 그 흔한 칡도, 금호강을 붉게 물들었다는 진달래도 눈에 띄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 수년 전(前) 발생한 산불로 생태계에 변화가 있었으리라. 서변에는 인천 이씨와 능성 구씨를 대표하는 어른을 모신 사당이 있다. 881번지에 있는 환성정(喚惺亭)은 임란 때 서사원 등과 함께 공산성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태암(苔巖) 이주(李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등이 세운 정자이고, 1111번지에 있는 송계당(松溪堂)은 고려 말 충신이었던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분인 송은(松隱) 구홍(具鴻) 선생과 역시 임란 때 대구 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한 계암(溪岩) 구회신(具懷愼)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재실(齋室)이다 인천 이씨들은 인천에서, 능성 구씨들은 전라도 능성에서 각각 이곳에 들어와 정착(定着)했다. 두 문중(門中)은 때론 격려(激勵)하고 때론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며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숭상(崇尙)하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대구를 더욱 빛나게 했다. 도시화로 전통적인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택지개발계획이 수립되고 있는바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모를 무태도 그런 곳이다. 다만 조상의 얼이 깃든 마을 초입의 노거수(老巨樹)만이라도 보전(保全)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⑦ 달성(達城)의 남편(男便) 격인 팔공산 끝자락 성산(城山).
많은 사람들이 '화원 동산(花園 東山)'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산을 깎아 유희(遊戱) 시설을 적당히 배치하여 개발 한 것으로 본디 이름은 성산(城山)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령지방을 통치기반을 하던 대가야가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과정에 달성,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이주래 이들이 오늘날 댁를 개척했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성산(城山)의 형상이 뾰족한 것이 달성(達城)의 오목한 것과는 정반대라 철달성(凸達城) 또는 웅달성(雄達城)이라 하고 대구의 달성(達城)을 요달성(凹達城) 또는 자달성(雌達城)이라 해서 성산(城山)을 남자(男子), 달성(達城)을 그 상대(相對)로 여자(女子)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진작 대구에 편입되었어야 했다는 주장은 이러한 이유, 즉 양과 음의 조화가 빨리 이루어졌어야 좋았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성산은 아주 작고 나직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상화대(賞花坮)도 성산(城山)의 별칭 중의 하나이다. 많은 신라왕들이 가야산(伽倻山)을 방문(訪問)하는 길에 이곳에 머물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는 것이다. 다만 낙동강 물이 흐리고 주변 여건이 다소 산만해지긴 했지만 오늘날에도 풍경이 수려함은 변함없다. 산마루에 오르면 멀리 낙동과 금호가 펼쳐지고 넓은 백사장이 어루러져 만폭(滿幅)의 산수화(山水畵)를 연출한다. 아랫마을 구라(九羅)는 아홉 차례나 신라왕이 방문(訪問)했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성산에는 봉화대(烽火臺)가 있다. 재체로 대구에는 두 갈래의 봉수(烽燧)가 지나갔는데, 청도 팔조령에서 법이산과 고산을 통하여 영천 성황당 봉화대로 연결되는 망이 그 하나요, 현풍에서 성주를 거쳐 이곳 성산에서 하빈의 마천산을 통해 서울 남산에 이르는 망이 그 두 번째 통로였다. 일찍이 토성을 쌓아 적을 방어했고, 봉화대가 있어 국방상 역할을 더했으니 산은 작아도 역할은 다양했다. 상류 지방에 댐이 들어서고 산업용수로 수위가 낮아졌지만 사문진(沙門津)나루는 한때 무역선이 드나들었던 국제무역항이었다. 6세기에 이미 왜(倭)가 이곳을 거점으로 신라를 공격할 만큼 일대는 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18세기에 드디어 오늘날 무역센타와 같은 왜물고(倭物庫)가 설치되었다. 세조 말년에 이르러 왜인과 우리 나라 상인(商人)간에 잦은 마찰이 있을 뿐 아니라 왜인들이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는 들 부작용이 컸다. 마침내 대일(對日) 사(私) 무역(貿易)이 전면 금지되고 정부가 필요한 물품을 사 두었다가다시 상인들에게 되팔게 되는데 그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교통 편리한 화원(花園)에 두게 된다. 따라서, 사문진 나루는 우리 무역사에 길이 남을 대일 공무역의 창구였다. 택지나 공장용지 부족으로 도시 발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대구로서 달성군 편입은 달성 군민은 물론 대구 시민들에게도 여간 큰 경사가 아니다. 양지역은 이제 더붕어 발전해야 할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함께 번영 할 것인가에 대하여 시정부, 지역연구소, 언론사 등이 나름대로 연구 검토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연초 KBS 대구방송총국이 시장(市長)을 비롯한 지역(地域) 유지(有志)를 모시고 TV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여러 방안들이 제기(提起)되었지만 우방(友邦)의 이순목회장이 제시한 부산∼대구간 운하(運河) 건설론(建設論)이 매우 인상깊었다. 대구가 내륙 도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잇다. 시는 이미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건설을 공사중(팔공산 도동에서 출발 와촌을 경유하여 영천 청통을 통과하여 팔공산을 종주)에 있지만 이렇게 낙동강을 이용해 바다로 진출할 필요성에 대하여는 그 동안 어느 누구도 제기한 바 없었다. 21세기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 개인이든 기업이든 정부기관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데 대구·달성이 더불어 발전하려면 운하건설도 그 접근방법중의 하나가 충분히 될 수 있다. 성산의 또 다른 모습니 술잔과 갘아 배성(盃城)이라고도 하며 태고정에 올라서 보는 주위 풍경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어 옛부터 배성 10경(盃城十景)이 전해온다. 가야낙조금호어적(伽倻落照金湖漁笛) 삼포추색우암낙응(三浦秋色牛岩落鷹) 노강월계낙수귀범(老江月桂落水歸帆) 다산취연비슬숙운(茶山炊煙琵瑟宿雲) 화대모춘대평경음(花臺暮春大坪耕飮) 해저문 가여산은 노을에 곱게 물들어 있고, 금호강 달밤은 어부들의 은은한 피리소리에 잠들어 있네. 삼포의 가을 풍경은 황금색으로 단장하였고, 우암으로 날아드는 메때는 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는구나. 역사 깊은 낙동강의 달밤에는 그림처럼 역력한 계수나무 떠 있고, 깊고 푸른 강물 위에는 돛단배들이 백조처럼 오가고 있네. 고령이라 다산 땅에는 저녁밥 짓는 연기 안개같이 퍼져가고, 높이 솟은 비슬산에는 조는 듯한 구름으로 덮혀있네. 절경에 쌓인 상화대는 늦은 봄을 맞이했고, 넓게 펼처진 대평들의 농부들은 태평세월을 노래하네.
⑧ 성(城) 처럼 대구를 감싼 환성산.
이름으로 보아서는 성이 산을 고리처럼 싸안고 있을 법하지만 그런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왜 환성산인가? 아마 대구 분지를 흥덕왕 10년(835년) 심지왕사가 창건(創建)했다는 환성사의 사찰이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본 다. 남록에는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허비가 있다. 신숭겸 장군의 유허비가 있는 평광에서는 두 번을 놀란다. 첫 번째는 가는 길이 긴 협곡(峽谷)으로, '대구에도 이런 오지(奧地)가 있을까'하는 의아심(疑訝心)이요, 두 번째는 긴 협곡을 지나서 전개되는 광활(廣闊)한 공간(空間)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들이 넓은 동이다. 초입(初入)에 있는 큰 왕버들 나무가 벌써 동네가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려준다. 단양 우씨, 경주 최씨,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나, 임란을 피해 자리 잡은 단양 우씨가 단연 압도적이다. 오지로 8개의 자연부락에 200여 세대 천여 명이 살고 있으며 사과, 자두, 복숭아 등 과수를 주작물로 생업(生業)을 영위(營爲)한다. 환성산 일대에서 나는 질 좋은 송이 버섯이 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 있기도 하다. 본디 사람들이 부지런 하고, 대구시 근교로서의 지리적 이점이 있어, 도시 어느 동 못지 않게 소득이 높다고 한다. 동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면적(面積)이 12.25㎢로 일개(一個) 동(洞)이 7.05㎢인 중구(中區)보다 넓은 반면 인구(人口)는 행정동(行政洞) 중에서 가장 적은 것으로 알려져 이 분야의 기록을 두 개나 보유한 셈이다. 유허비(遺墟碑) 2기. 정려각(旌閭閣) 1채. 당(堂) 1채. 정(亭) 2채. 재(齋)가 5채. 묘(墓) 1개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충(忠)과 효(孝)를 숭상하는 마을임을 단번(單番)에 알 수 있다. 초가집이 기와 집으로 바뀌고, 마을 앞까지 시내버스가 들어와, 더 개명(?)되어 순수하던 인심도 세태를 반영하듯 각박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나무랄 데 없는 전통적인 농촌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거대 도시 속의 섬같은 작은 마을이다. 평광동과 시량리의 전설과 당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 효자(孝子) 강순항.
평광은 많은 선비와 우국지사를 재출했디만, 대표할 만한 인물은 역시 효자 강순항이다. 자는 태겸이요, 호는 가은이다. 영조 21년(1945)에 이곳에 태어나, 순조 30년(1830)에 돌아가셨다. 그의 부친이 때 아닌 참외를 먹고 싶가고 했다. 그러자 순항은 참으로 난감했다. 추운 겨울 어딜 가서 참외를 구한단 말인가. 할 수 없이 당시 참외밭이 많았던 방촌동을 한번 가보기로 했다. 아무리 참외를 많이 재배하던 곳이었기로서니 겨울에 참외를 재배할 리는 만무였다. 수소문을 모두 했으나 허사였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때마침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하여 참외넝쿨을 쌓아둔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 넝쿨더미를 뒤지니 참으로 신기하게도 참외를 발견, 병상의 아버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했다. 순항은 마을 앞 개울로 가 얼음을 깨고 낚시 채비를 하는데, 튼 잉어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올라 아버님께 대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평광을 방문했던 날도 겨울이었다. 순항이 낚시를 놓고자 했던 지점이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울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밀려온 토사 때문인지 수심(水深)이 얕았다. 하루는 부친이 쇠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때는 모내기철이라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바빴으나 순항은 싫어하는 기색 없이, 장작을 한짐지고 해안(解顔 : 지금의 불로동)으로 향했다. 그냥 걸어도 숨이 막히는 산길을 무거운 나묵짐을 지고 단숨에 내달려 고기를 사서, 돌아오다가 도동 향산 밑에서 쇠고기 뭉치를 바위 위에 두고 얼굴을 씻는데 난데없이 독수리 한 마리가 그만 그 쇠고기를 낚아채 가는 것이 아닌가. 망연자실한 순항이 더위를 참지 못한 경솔한 자신을 탓하며 힘업이 집으로 돌아노니, 맛있는 고깃국 냄새가 나 이상하다 하여 아내에게 물으니, 고기를 사러 간 순항을 기다리다 마당을 나서니, 독수리가 고기를 떨어뜨리고 가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일련의 일. 즉, 겨울에 발견된 참외, 잉어, 독수리의 쇠고기 전달은 지극한 효성에서 오는 기적(奇蹟)일 것이다. 순항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끝내 운명을 하고 말았다. 순항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하였음은 물론이다. 그후 순항이 죽자 조정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숭정대부행동중추부를 중직하였다. 지금 동네 입구에 있는 정려각은 헌종 1년(1835년)에 세운 것이다. 불과 150여 년이 흘렀건만 정려각은 기울어져 퇴락하고, 그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은 색이 바래져 볼품이 없다. 효를 효행의 으뜸으로 삼았던 과거게 비하여 그 가치가 뚝 떨어진 오늘을 반영하는 일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든다.
㉡ 도이장가의 무대(舞臺).
도이장가는 고려 16대 왕 예종이 지은 노래로 정과정곡과 함께 이두식표기로된 향가 형식의 노래가 고려 중엽까지 남아 있었다는 국문학사의 매우 귀중한 자료다. 예종 15년(1120년),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김락과 신숭겸의 가족이 참석한 것을 보고 왕이 그들의 공을 추도하여
"님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음이시여, 오오! 돌아보건데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 라고 읊은 노래이다. 그런데 문제는 평산 신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의 돌아가시 장소이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미리사전, 즉 미리사 앞이라고 했을 뿐 미리사가 어디 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뒤편 [미리사지]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만약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환성산은 도이장가의 무대가 되는 셈이다.
⑨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어린 초례산(醮禮山). 임을 온전하게 아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넋은 가고 삼으 온 벼슬일랑 받으시구려 바람을 알리라 그 때 두 공신이여 오래도록 곧은 자취 나타내오시라.
초례산의 초례(醮禮)는 무엇인가?
㉠ 옛적 우리들의 조상들이 혼례(婚禮)를 치를 적에 초례쳉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 때의 초례와 같은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여기 초(醮)란 '하늘에 별을 보고 점칠 초'라고 하거니와 동서남북 중아의 별자리에 각각 제례를 올린다, 가운데 가장 큰 별은 다름 아닌 북극성(北極星)이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옛날 우리 선인들께서는 중요한 일이 있거나 간청할 일이 있을때에는 반드시 별에 제사를 들였던 것이다. 초례산에 정성을 드리던 우리들 선인들의 하늘 섬기는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네 인생길에 어두운 시련이 닥친다고 하여도 두려워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밤에도 우리들의 별신이 우리들의 양심을 내려보고 계신다. 산불이 일어난 지가 10년이 지났음에도 검게 그을린 바위와 고사목등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초례산. 지난 1989년 산불이 일어났던 당시 어느 분의 실화로 추정되는 산불이 났고 이 불은 때마침 불어온 강한 돌풍을 만나 연 3일간 무려 30만평을 잿더미로 만든 기억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다. 지난 1991년 어린이날 연경동의 산불도 그랬지만, 산불은 그 자체가 인재(人災)이고, 또한 재산적 피해는 차치하고라도 진화를 위해 많은 공무원이 동원되는 관계로 행정적 손실 또한 크다. 봄철 입산객이 많고 건조하고 센 바람이 불기 때문에 산불 발생의 위험이 높다. 그런 반면 많은 교통량이 진화를 위해 출동하는 차량의 투입을 지연케하고. 숲이 우거져 진입도 어렵고, 나무가 탈 때 내뿜는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사람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국토의 66%, 대구의 행정구역의 52%가 산이기 때문에 이 널은 면적에 철조망을 두를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시행정의 책임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애석한 점이 있다면 가해자(加害者)도 시민이요, 피해자(被害者)도 시민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바람직한 예방책은 산을 찾는 시민들의 각별한 협조뿐이다. 요즈음 산불예방을 위한 표어(標語) 가운데 가꾸는데 10년(年) 없애는데 10분(分)이라는 문구(文句)는 섬뜩한 느낌마저 있다. 건강(健康)을 위하여 산을 오른다면 건강에 해(害)로운 담배는 가져오지 않는 것이 현명(賢明)한 건강(健康) 유지(維持) 방법인 것이다. 산명(山名) 초례(醮禮)는 옛날 어(魚)씨란 나무꾼이 이 산에서 선녀(仙女)를 만나 혼례, 즉 초례를 치렀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맞아 싸울 때 이 산에 올라 필승(必勝)을 기원하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올렸다고 해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이한 사실은 봉우리가 명당인지라 여기에 묘를 쓰면 거부(巨富)가 된다는 속설(俗說)이 있어 누구나 묘 쓰기를 원하나 만약 묘를 쓰게 되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날이 가물면 인근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쓴 암매장 무덤이 없나 하여 흔적을 찾는다고 한다.
2) 공산지역의 옛 마을 이름과 지명 전설 유래(由來).
① 지경(地境) : 경산군과 달성군의 경계를 이룬다는 뜻과 갓바위에 석조물을 창건할 당시 임금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능성(能聲)이라 하였고 그 지점을 지경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② 월송정(月松亭) : 유인(孺人)이 밤길을 가던 중 마을 뒷산 좌우에 노송이 울창하여 야경의 소나무 겨치가 더욱 멋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③ 도장골(道藏谷) : 약 1,500년전 신라시대에 스님이 몸을 숨긴 지역이라 하여 도장(道藏)이라 명하고 건립한 사찰을 도장사라 하였으나, 사찰은 없어지고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이 이름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④ 학부마을(鶴浮마을) : 팔공산 학수암에 큰 학(鶴)이 많이 서식(棲息)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
지묘동에 가면 태조 왕건이 있다
내 고장에 스며든 태조 왕건의 숨결, 지명으로 살펴본 그 시대 역사의 현장
왕건 유적지
고려시대는 대장경 등 목판인쇄물의 판각과 함께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 인쇄역사상 간과 할 수 없는 창조적 기술발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를 연 고려 태조 왕건의 발자취가 내 고장 대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고려의 왕위에 추대되어 후백제의 견훤과 삼국의 패권을 다투던 중,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고 약탈하자 친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대구 공산에서 일전을 벌이니 이를 동수회전(桐藪會戰)이라 한다. 병산대전, 운주대전과 함께 고려 통일전쟁의 3대전투로 유명한 이 동수회전은 공산 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역사적인 전투이다. 이 전쟁에서 왕건의 대병은 견훤에게 패전하게 되는데, 대패한 왕건은 신숭겸의 지략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백제군의 추격을 피해 반야월, 안심을 거쳐 대구 앞산 안일사 까지 달아났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 때 대장이었던 신숭겸 장군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형세가 막다른 지경까지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 장군이 몸으로써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옷을 입고 김낙(金樂) 장군과 더불어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장군을 태조 왕건으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하던 군사가 풀리어 태조 왕건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후에 태조 왕건이 장군의 시신을 찾으니 목이 없어 분간할 수 없자 장군의 발 아래의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로 인하여 시신을 찾고 장군의 공을 기려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고 금두상이 도굴될 것을 두려워하며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하였다. 지금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는 봉분이 세개인 장군의 묘소가 있는데, 어느 것이 공의 봉분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태조 왕건은 그의 충절(忠節)을 기리어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功臣)으로 추봉(追封)하고 시장절(諡壯節)이라 하였다. 조선시대까지 충신의 표상으로 받들어진 신숭겸(申崇謙)(?∼고려 태조 10년, 서기 927년)의 원래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시호는 장절공이다. 그의 본명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지금의 춘천) 사람이다. 어느날 장군이 태조 왕건을 따라 평산을 거쳐 갈적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고 있었다고 한다. 태조가 여러 장군들에게 기러기를 활로 쏘라고 명하자 장군은 어느 기러기를 쏘아야 할 것인가? 라고 묻고 태조가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히라고 하자 화살 한 대로써 날개를 맞히니 태조가 감탄하여 기이히 여기고 기러기가 있던 땅을 장군에게 주니 이로써 장군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대구에 위치한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1981년 7월1일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후일 대구에는 동수회전과 관련하여 수많은 지명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1. 팔공산(八公山) 동수회전의 배경이 된 공산에서 왕건의 신숭겸, 김낙 등 8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하였기에 후일 팔공산이라 이름하였다. 2. 왕산(王山) 표충사의 뒷산인데 적병에 포위되었던 왕건이 이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세 번만에 뛰어 피신한 곳이다. 그래서 왕건이 죽을 것을 이 산 때문에 살았다 하여 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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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일인석 (一人石) 태조 왕건이 왕산을 거쳐 피신한 곳이 동화사 뒤의 염불암이다. 여기 일인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왕건이 거기 숨어 앉아 있으니, 수도하던 도승이 첫눈에 왕건인 줄 알고, 그에게 “이 자리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 내려오라"고 했더니, “내가 바로 왕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은 절을 하고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 후 염불암 옆의 그 바위를 왕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 하여 일인석이라 부른다고 한다. 4. 독좌암(獨坐巖) “독지바우"라고도 하느데 지금의 봉무동 노인회관 북쪽 5m지점의 개천가에 있다. 이는 태조 왕건이 지묘에서 참패하여, 충신 명장을 잃고 왕산으로 달아나서, 팔공산의 염불암 옆 일인석에 앉아 있다가, 다시 파군재를 넘어 봉무동에 있는 독좌암이란 바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5. 파군재(破軍)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재를 가르키는데, 신숭겸 장군의 군사가 1차로 견훤군에 패해서 흩어진 곳으로 알려진 파계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랫파군재라 하고, 2차로 패한 동화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윗 파군재라한다. 6. 해안(解顔) 불로동 마을 앞을 해안이라 하는데, 동촌면이라 하기 이전에 해안면이라 했다. 태조가 패잔병을 이끌고 들판을 지나면서 몹시 걱정했는데, 마침내 무사히 통과하여 수심이 가시고 얼굴을 펼 수 있었다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7. 반야월(半夜月)과 안심(安心) 왕건이 견훤에 쫓겨 해안땅을 거쳐 지금의 반야월에 이르니, 밤은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곳에 와서야 겨우 안심했다고 하여 안심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8. 실왕리(失王里)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왕건이 나무꾼으로부터 주먹밥을 얻어먹고 허기를 면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간데 없고, 그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왕을 잃었다고 붙인 이름인데, 조선말에 와서 수치스러운 이름이라 하여 시량(是良)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하며, 변음 되어 -시랭이-라 불리기도 한다. 9. 미리사(美理寺) 이 곳의 전투에서 신숭겸, 김낙 두 장수가 장렬히 전사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 곳에 절을 세워 연등을 하고 두 장수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10. 살내천(戰灘) 고려와 백제의 군대가 개울 양쪽에서 서로 대치하여 격전을 치를 때 쏘는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11. 무태(無怠), 연경(硏經), 나발고개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시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지묘3동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서변동 일대를 지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지금도 이 지방은 무태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연경동 부근에 이르렀을 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와, 감탄한 마을이라 하여 연경이라 불려 진다고 한다. 진군을 계속하면서 지금의 지묘3동에서 지묘1동으로 가는 고개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고 하여 나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의 군사가 왕건의 군사를 둘러싸고, 쳐들어가며 나팔을 불었다 해서 나발고개라고도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군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12. 탑들 지금의 지묘1동 앞들을 탑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동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장군의 원찰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 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13. 지묘동(智妙洞) 왕건을 위기에서 구한 신숭겸의 지혜가 오묘하다해서 붙여졌다는 지묘동 등의 지명이 1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고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
그 밖에 왕건이 도망치다 이 곳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아이들만 남아 있어 붙여진 불로(不老)동, 겨우 위험을 피해 한숨을 돌리고 찌푸린 얼굴을 활짝 편 곳이라 해서 해안(解顔)동 등등.
달이 반야이고 중천에 떠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 이 지역에 도달해 마음을 놓았다는 안심(安心),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해서 유래된 무태(無怠) 등 일반에 꽤 알려진 전설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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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이렇게 많은 '왕건'이 있을 줄이야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11)
정만진(daeg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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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를 몰아낸 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팔공산 앞에서 벌어진 동수대전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참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다. '桐藪(동수)대전'의 '수(藪)'가 '桐華寺(동화사)'의 '사(寺)'에 해당되니 동수대전이라는 말은 곧 왕건과 견훤이 동화사 앞에서 크게 싸웠다는 뜻이다. (사진은 문경새재의 드라마 <왕건> 촬영장 인근의 용추계곡에 세워져 있는 관광안내판을 찍은 것이다.) |
ⓒ 정만진 |
| | 대구에는 고려가 남긴 '보물'이 별로 없다.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과 동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부도 두 점(각각 보물 258호, 601호)이 눈에 띌 지경으로 빈약하다. 하지만 부도 정도로는 관광객의 발길을 끌지 못한다. 경북대 박물관에 있는 보물 271호 수능엄경 권 제10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외에 팔공산 북지장사의 3층석탑, 동화사 염불암의 청석탑 및 사찰 뒤 큰 바위 양면에 각각 새겨진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신무동의 마애불좌상 등의 고려 유물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문화재 등급상 보물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유형문화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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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남은 고려 태조 왕건의 흔적들(빨간점, 연녹색바탕에 녹색글씨) 왕건은 파군재 일대에서 견훤에 참패해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대구에는 연경, 무태, 살내, 왕산, 일인석, 시량리, 불로, 해안, 안심, 반야월, 반월당, 안일암, 왕굴, 은적사, 임휴사, 초례봉 등의 많은 지명과 신숭겸장군유적지(순절지지비 등)를 남겼다. 위의 지도는, 대구에 얼마나 많은 '왕건'이 남아 있는지를 독자들이 실감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자가 그림으로 그려본 것이다. 물론 실측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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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구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고려의 흔적이 있다. 왕건의 발자취가 바로 그것이다. 왕건군(軍)이 견훤군에게 부서진[破] 고개인 파군재[破軍峙]가 있고, 도주하던 왕건이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巖]인 독좌암(獨坐巖)도 있다.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강물[灘]처럼 흘러다닌 시내인 살내[箭灘]가 있고, 왕(王)이 도주할 때 넘은 산인 왕산(王山)이 있으며, 왕이 숨어있던 동굴인 왕굴도 있다. 또, 왕건이 직접 이름을 지어 붙였거나 그와 연관하여 동명이 생겨난 곳도 여럿 있다. 불로(不老)동은 노(老)련한 청장년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不] 동네라고, 연경(硏經)동은 선비들이 공부하느라[硏] 책[經]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고 왕건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고 훈시한 무태(無怠)동, 왕(王)이 없어진[失] 동네라 하여 실왕(失王)리, 어느 정도 멀리 도망을 쳐서 걱정이 줄어들자 굳었던 왕건의 얼굴[顔]이 그제야 풀렸다[解]는 해안(解顔), 마음[心]이 놓였다[安]는 안심(安心), 지나갈 때 반(半)달[月]이 밤(夜)길을 비추었다는 반야월(半夜月), 당(當)도했을 때 반(半)달[月]이 떠 있었다는 반월당(半月當) 등은 왕건의 발걸음에서 이름이 연유한 곳들이다. 그런가 하면, 사찰과 서원 몇 곳의 이름에도 왕건과 관련한 옛일의 내력이 스며들어 있다. 그가 숨어[隱] 지낸 흔적(跡)이 남은 은적(隱跡)사, 잠시 머물며[臨] 쉰[休] 임휴(臨休)사,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지낸 안일(安逸)암, 혼자[獨] 앉아있었던 바위[巖]에서 이름을 따온 독암(獨巖)서원이 바로 그들이다. 국가 고려는 비록 대구에 많은 보물을 남기지 않았지만, 태조 왕건 본인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수많은 발자취를 팔공산에서 앞산 일대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남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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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동(왼쪽)과 동화천 하류인 '살내' 대구에는 왕건과 관련이 있는 곳이 너무 많다. 위의 두 곳 역시 그렇다. |
ⓒ 정만진 |
| |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팔공산 동화사 아래에서 견훤과 대회전을 치른다. 이 한판 승부가 바로 동수(桐藪)대전이다. 동수(桐藪)의 '수(藪)'와 동화사의 '(寺)'는 같은 뜻이므로(동수는 동화사의 다른 이름) 동수대전은 곧 동화사대전이다. 싸움터는 은해사 입구 태조지(太祖旨)에서부터 동화천이 금호강과 만나는 살내[箭灘]까지 매우 넓었지만, 승부를 판가름한 일전은 동화사 들머리인 파군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전투의 이름이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일대에 '화살[箭]이 내[灘]를 이루었다'는 뜻의 살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왕건군과 견훤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무수한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동화천 양옆으로 떨어졌는데, 화살이 동화천을 뒤덮어 새로운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는 뜻인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 그 살내의 동화천은 대구 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자연 하천이니, 이 또한 화살을 모두 걷어내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은 우리네 선조들의 덕분인가. 대구에서 금호강 무태교를 건너 파군재 삼거리로 향하다가 왼쪽 산골짜기로 접어들면 연경마을로 가게 된다. 동수대전의 한 귀퉁이었던 연경 마을은 본디 글 읽는 소리로 가득찬 학문의 요람이었다. 마을 이름이 경(經)전을 공부한다(硏)는 의미인 것만 보아도 그런 추측은 가능하다. 언젠가 왕건이 이곳을 지나갔는데,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나무나 낭랑하여 그가 지명을 그렇게 붙였다고 전한다. 금호강과 동화천의 접점인 살내[箭灘]에서 파군(破軍)재로 가는 무태(無怠) 지역 중간쯤에서 다시 도덕산(道德山) 아래로 굽어 들어가야 나오는 이 마을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적요한 골짜기이니, 그 당시에야 얼마나 고요한 산촌이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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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산(연경마을 뒷산)의 도덕암 전경 마을 뒷산에 '도덕산'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내력을 증언해주는 유교 건축물(연경서원)은 없어졌지만 불교사찰은 '도덕암'이라는 이름 아래 여전히 건재해 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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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 맞은 편에서 무태 지역으로 이어지는 산에 붙은 도덕산이라는 이름도 연경마을에서 유래한다. 글 읽는 선비들이 많아 도덕에 관한 한 연경마을을 따라올 곳이 없다는 뜻에서 동네 뒷산에 '도덕산'이라는 고상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대구 최초의 서원인 유교의 요람 연경서원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지금, 도덕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모과나무(수령 800년)를 자랑하는 불교 사찰 도덕암만 의연히 남아 있고, 연경마을 자체도 도시 재개발 국면을 맞아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폐가만 여기저기 어수선하여 보는이의 마음을 자못 쓸쓸하게 한다. 무태는 연경마을 옆을 휘돌아 흐르는 동화천(동화사에서 연유된 이름) 좌우의 들판 지역이다. 나태(怠)가 없다[無]는 뜻인 무태마을의 이름도 왕건이 붙인 것이라 한다. 동화천 주변에 주둔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견훤군과 전쟁 중이니 절대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할 것이라고 훈시했다는 데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을 보고 그렇게 작명을 해주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무태라는 지명은 왕건이 이곳을 직접 밟은 역사의 흔적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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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지 신숭겸 유적지 입구(사진 위, 왼쪽), 신숭겸 순절을 기리는 비석이 들어 있는 비각(위, 오른쪽), 제사를 지내는 표충사(아래, 왼쪽)과 재실인 표충재(아래, 오른쪽). 네 사진 모두 뒤로 왕산이 보인다. 왕산은 왕건이 견훤군에 대패하여 팔공산 염불암 방향으로 도주할 때 부랴부랴 넘은 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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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군재 삼거리의 신숭겸 동상(왼쪽)과 유적지 내의 신숭겸을 기리는 비석 신숭겸은 견훤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게 되자 왕건의 옷을 대신 입고 적을 속이다가(그 새 왕건은 도망쳐서 살게 된다) 전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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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내 전투 이후 신숭겸의 지원군이 도착하지만 끝내 왕건의 군(軍)사는 파군(破軍)재에서 견훤군에게 철저하게 부서지고[破] 만다. 지금 그 자리에는 신숭겸장군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유적지 내에는 신숭겸 장군이 그곳에서 죽었음을 기리는 순절지지비(殉節之地碑)비, 영정을 모신 표충사, 부속건물인 숭절당과 표충재 등 많은 볼거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수대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황급히 파군재 일대를 떠나 봉무동을 거쳐 평광동 시량리로 갔다가 시내를 타고 불로동까지 내려온다. 봉무동 앞을 휘감아 흐르는 동화천 개울가의 독좌암(바위[巖], 혼자[獨], 앉을[坐])에 혼자 앉아 잠깐 넋을 수습한 뒤, 몸을 은신하기 위해 마을 뒷산을 넘어 평광리 끝자락인 시량리로 피했을 듯하다. 물론 시량리라는 마을이름의 내력도 왕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하는 바로는,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웬 낯선 사람이 숲속에 있는 것을 본 주민이 주먹밥을 준 후 잠시 뒤에 와 보니 그가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왕이었다. 그래서 '왕(王)을 잃은[失] 마을[里]'이라는 뜻의 "실왕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발음하기 쉽게 바뀌어 '시량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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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암서원(왼쪽)과 독좌암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한 파군재 아래의 봉무동에 있다. 왕건이 망연자실하게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巖]라 하여 독좌암, 독암서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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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숭겸 유허비 평광동 맨 끝인 시량리, 그 중에서도 사과밭 맨 구석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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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량리는 평광동 중에서도 가장 산골 쪽에 숨어있는 끝마을이다. 그러므로 시량리에서 줄곧 걸으면 평광동으로 나온다. 평광리에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 이번에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을 지나 불로동에 닿는다. 시량리를 벗어난 왕건도 (대구시 동구청이 '왕건길'이라 부르며 관광자원화하고 있는) 그 길을 하염없이 걸었을 것이다. 측백나무숲 아래를 흐르는 맑은 물은 한 모금 손으로 떠 마시며 권토중래를 다짐했거나, 혹은 처량하게 된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측백숲에서 잠깐이면 닿은 불로동에 도착한 왕건은 전쟁통에 끌려갔거나 피난을 가버린 바람에 마을 안에 노(老)련한 중장년 사내들이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不] 것을 보고 한탄을 했고, 그 이후 그 마을에는 불로(不老)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그래도 불로동은 파군재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서 안심을 할 수는 없다. 왕건은 정신없이 계속 걷고 뛰었을 것이다. 반(半)달[月]이 흐릿하게 밤[夜]길을 비춰주는 곳까지 왔을 때 그제야 왕건은 마음[心]이 놓였다[安]. 지금 고모령에서 금호강 건너편을 바라볼 때 그 일대를 반야월 또는 안심이라 부르는 연유가 바로 왕건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제 왕건은, <대구시사>의 표현을 따르면, '금호강을 건너 지금의 경산 압량 지역이나 대구의 수성구 고모동 방면을 지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로 천변을 이용하거나, 또는 적대 세력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산기슭의 외곽을 이용'하여 대구의 앞산 지역으로 향한다. 왕건이 앞산까지 가는 길의 중간쯤에 당(當)도하였을 때 달[月]이 반(半)쯤 기울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대구 시내 중심부의 큰 네거리 일대에 반월당(半月當)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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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로고분군, 반야월역 왕건이 도망을 치다가 어느 마을 지났는데 아이들과 아녀자만 있고 노(老)련한 사람들(청장년)은 모두 전쟁에 나갔거나 도망치고 없[不]다고 해서 그 마을을 불로동이라 불렀다. 한참 더 도망을 쳐 밤[夜]이 되었는데 하늘을 보니 반(半)달[月]이 떠 있어 그곳을 반야월이라 부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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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산을 향해 도주 중인 왕건 왕건이 이제 마음을 좀 놓았다는 뜻의 안심(왼쪽 사진에 금호강 건너 아파트가 보이는 곳이다. 멀리 보이는 산 옆 고갯길이 유행가의 소재인 고모령이다.)과, 앞산을 향해가다 보니 반(半)달[月]이 보이는 장소[당]였다고 해서 반월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대구 중심가 풍경. 도로 멀리 보이는 산이 앞산이다. |
ⓒ 정만진 |
| | 앞산에는 안일(安逸)암이 있다. 왕건이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하게 머문 절이라는 뜻이다. 안일암 뒤로 앞산 거의 정상까지 올라가면 왕건이 숨어 지냈다는 왕굴이 나온다. 안일암에서 고산골 쪽으로 더 나아가다가 낙동강승전기념관 옆으로 난 산길을 10여분 오르면 나오는 은적(隱跡)사는 왕건이 숨어[隱]지낸 자취[跡]가 깃든 절이다. 은적사 바로옆에도 왕굴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안일암과 은적사의 반대편 앞산비탈에도 왕건은 이름을 남긴다. 임휴(臨休)사, 왕건이 잠시 머물면서[臨] 쉰[休] 절이라는 뜻이다. 앞산에 머물던 왕건은 견훤군의 수색으로부터 안전해지자 이윽고 '성서 지역을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 고려의 통제를 받고 있던 성주 지역으로(<대구시사>의 표현)' 옮겨간다. <대구시사>는 견훤이 공산전투 대승 이후 벽진군(성주)을 크게 공격했다는 기록을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로 원용한다. 왕건이 벽진군을 거쳐 완전히 개성으로 탈출한 것이 확인되자 견훤은 그 분풀이로 성주를 무참하게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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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산의 왕건 관련 사찰들 왕건이 잠시 머물러 쉬었다는 뜻의 절 이름이 붙은 임휴사(위, 왼쪽), 왕굴에서 바라본 안일사(위, 오른쪽), 숨어서 조용히 있었다는 의미의 절 이름이 붙은 은적사(아래, 왼쪽), 은적사의 또 다른 왕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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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굴 왕건은 아마 컴컴한 동굴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가 뭔가를 비는 종교적 장소가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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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왕건'이 많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에도 이만큼 그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경쟁 상대인 견훤에게 철저하게 참패한 후 고독하게 패주하는 길을 따라 남긴 흔적이니, 그 길과 유래를 둔 지명들은 보고 듣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준다. 대구에 남은 왕건의 흔적이 역사적이고 교육적이라는 말이다. '20011 대구 방문의 해'를 맞아 특별히 대구시가 키워야 할 문화유산은 어디일까. '왕건'이 그 중 하나이다. 대구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는, 대구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른 곳의 것은 왜소한, 차별성이 뚜렷한 것들을 부각시켜야 한다. 팔공산의 관봉석조여래좌상도 그 중 하나이고, '왕건' 또한 그렇다. 대구에 고려 시대 보물이 별로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왕건'이 유난히 많이 있다는 데 주목을 하자.
왕건의 흔적으로 해석되는 해안, 일인석, 태조지에 대하여 |
염불암 일인석 관련 :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한 지금의 신숭겸장군유적지 바로 뒤에 있는, 뒷날 왕이 넘은 산이라 하여 왕산(王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작은 산을 넘어 팔공산 쪽으로 도주한다. 왕건은 팔공산 동봉 거의 턱밑까지 내달아 큰 바위 위에 홀로 앉아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그때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그 바위[石]는 한[一] 사람[人]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그대는 뉘시기에 거기 앉으신 게요?"하며 은근히 당신이 임금이 아니냐고 물었다. 왕건이 "내가 바로 왕이오"하고 대답하자 스님은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그 바위를 일인석(一人石)이라 부른다. 그 이듬해(928년)에 일인석 옆에 염불암이라는 절이 신축된다. 시기적으로 미루어볼 때 왕건측의 지원을 받아 사찰이 건축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런 추측은 당시 동화사 승병들이 왕건 아닌 견훤을 지원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대구시사>도 <승증동국여지승람>의 '桐藪望旗而潰散'과 '自隨以歸'라는 표현을 '왕건(군)이 공산에 (처음) 왔을 때 동수(동화사)의 병력이 고려군의 기를 보고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왕건의 구원병이 경주 지역까지 짓쳐들어가지 못하고 팔공산 권역에서 멈추게 된 것은, 견훤의 후백제군이 곧 대응하여 병력을 이끌고 온 탓도 있겠지만 이 시기의 대구 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면서 동화사 승병과 일대 주민들이 견훤을 지원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처참한 대참패 이후 팔공산 동봉 아래 깊은 골짜기까지 쫓겨온 왕건의 입장에서는 이듬해 염불암이 지어지는 외진 산속에서 승려로부터 받은 존경어린 대우가 크게 감격스러운 추억이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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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불암 왕건은 도피 중 팔공산 염불암까지 가서(당시에는 염불암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고 그냥 빈터였다) 큰 바위[一人石]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왼쪽 사진은 케이블카와 동봉 정상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염불암의 원경이고, 오른쪽 사진은 염불암 바로뒤에 불상이 두 면에 각각 하나씩 그려져 있는 큰 바위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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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건이 혼자서 팔공산 염불암까지 도망을 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미심쩍은 대목이다. 염불암으로 가는 산자락은 말이 달릴 수 있을 만큼 평탄하기는커녕 포장이 되어 있는 지금도 숨을 헐떡이며 걸어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염불암도 없었으니 나무와 덤불투성이가 아니었다 해도 간신히 비집고 다닐 만한 좁디 좁은 산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공산전 대패 바로 그 이듬해에 왕건측이 아직 적세가 강하던 팔공산 지역에 신축되는 사찰 사업을 지원했다는 해석도 무리한 견강부회로 보인다. <대구시사>가 '930년 정월에 들어서면서 고려는 경상도 지역에서의 세를 만회하고 역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고 기술하는 것을 보면 그 두어 해 전인 928년(공산대전 참패 바로 이듬해)에 어떻게 팔공산에 왕건의 지원을 받은 사찰이 지어질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싸움터의 이동 과정도 왕건의 염불암 일인석 설화와는 별로 일치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왕건과 견훤이 처음으로 맞붙은 곳은 은해사 앞 태조지(太祖旨)였다. 경주에서 돌아오던 견훤군과 그리로 가던 왕건군이 거기서 맞닥뜨린 것이다. 하지만 정벌에서 대승을 거둔 견훤군의 기세를 먼 길을 와 피로까지 겹친 왕건군은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왕건군은 살내까지 밀렸다. 그때 신숭겸의 지원군이 왔고, 이에 세가 불어난 왕건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하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용포를 대신 입고 견훤군을 속임으로써 죽음으로 시간을 벌어준 신숭겸 장군 등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게 된다.
왕건은 어느 쪽으로 도망을 갈 것인가. 왕건군은 금호강 방향, 견훤군은 팔공산 방향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왕건이 갈 곳은 염불암이 있는 팔공산 쪽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있는 금호강 쪽이다. 파군재에서 뒤로 물러나 봉무동 독좌암, 평광동 시량리, 불로동, 안심과 반야월, 거기서 금호강을 따라 반월당 일대를 거쳐 앞산(안일암, 은적사, 임휴사)으로, 다시 성주 방향으로 도망을 갔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요약하면, 팔공산 염불암 일인석(一人石)은 왕건이 도망가다가 앉았던 바위라고 보기 어렵다.
해안 관련 : 해안(解顔)도 왕건과는 무관한 지명인데, 뒷날 동수대전 이후 민간에서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파군재에서 제법 멀리 도망쳐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자 줄곧 굳었던 왕건의 얼굴[顔]이 풀렸다[解]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해안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만, <삼국사기>는 지명과 인명을 중국식으로 많이 바꾼 신라 경덕왕 때 '雉省火縣'의 이름이 '解顔縣'으로 변경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안의 지명이 왕건의 옛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의 한 가지 예로 보면 되겠다.
태조지 관련 : 왕건군은 신라로 가던 중 은해사 앞 태조지(太祖旨)에서 왕건군과 처음으로 격돌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은해사 앞에서 태조지란 이름의 지명을 찾을 수는 없다. <대구시사>는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태조지는) 고을(영천)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조그만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는 대목을 지적하면서 '태조지는 은해 입구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는 그러한 지명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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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에서 이름이 유래된 초례봉 정상 대구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최씨종가가 있는 마을) 뒤에 초례봉이 있다. 초례(제사醮, 예의禮)는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왕건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이래로 이 산봉우리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초례봉으로 알려졌다. 오른쪽 사진의 정상 표지석 뒤로 멀리 하얗게 보이는 산줄기가 팔공산의 (왼쪽부터) 서봉, 비로봉, 동봉이다. | | | | | |
개발제한구역에 ‘누리길’ 조성
이르면 내년 3월부터 전국의 개발제한구역에 친환경 산책탐방로인 ‘누리길’이 조성된다. 국토해양부는 대구시 팔공산 누리길 등 전국 10곳의 산책탐방로를 정부 사업지원 대상으로 확정했다고 5일 밝혔다. 총연장 155㎞의 새 탐방로들은 개발제한구역을 활용, 국민들의 여가 증진을 도울 것으로 예상된다.
국토부는 앞서 지난 5월부터 전국 광역 시·도가 추천한 33곳(585㎞)의 누리길 후보지에 대한 수요조사를 실시해 왔다.
누리길 선정위원회는 입지(50%), 지방자치단체의 사업계획(35%), 사후관리 방침(15%)을 바탕으로 최종 후보지를 선정했다. 모두 57억원의 예산이 지원된다.
새 탐방로 가운데는 송강 정철의 가사 전승지인 전남 담양의 가사문학 누리길(6.2㎞), 고려 태조 왕건의 공산 전투지로 알려진 대구 팔공산 누리길(32㎞) 등이 포함됐다. 팔공산 누리길은 걸어서 11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또 소래습지와 장수천을 끼고 걷는 인천 문화생태 누리길(8㎞), 호숫길이 인상적인 경기 청계산·백운호·왕성호 누리길(5㎞), 대전 둘레산 누리길(19.5㎞) 등도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밖에 서삼릉 유적지가 포함된 경기 고양 누리길(33.6㎞)은 최장 코스로 기록됐다.
이들 탐방로는 내년 3월부터 7월까지 순차적으로 개장한다. 국토부 녹색도시과 관계자는 “탐방로 운영 성과를 모니터링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사업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라며 “누리길이 전면 개장되면 도보여행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구=뉴시스】최일영 기자 = 대구 팔공산에 누리길이 조성된다.
대구올레 팔공산 코스 (9개코스)
코 스 명 |
시작점 버스 |
정류장명 |
경 로 |
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
급행1,
팔공1(동화사 행) |
도학2동
(방짜유기박물관) |
도학2동정류장-시인의길-돌집마당-방짜유기박물관-북지장사
(2009.06.개장/ 왕복코스/ 약 3km/소요시간 1시간 30분 내외) |
2코스
한실골 가는 길 |
101,101-1 |
101:지묘동
101-1:파계교 |
신숭겸장군유적지-한실골가는임도-쉼터-만디(언덕)쉼터-용진마을가는길-낙엽있는거리(팔공산순환도로)-파계사
(2009.07.개장/ 7~8km/ 소요시간 3시간 내외) |
3코스
부인사 도보길 |
급행1,
팔공1(동화사 행) |
공산초등학교 |
공산초등학교-미곡마을올레-용수동당산-수태골-낙엽있는거리(팔공산순환도로)-부인사(대중교통이용시동화사시설지구로 이동)
(2009.08.개장/ 6~7km/ 소요시간 2시간 30분 내외) |
4코스
평광동 왕건길 |
팔공1
(평광동 행) |
평광동 입구 |
평광동입구(효자강순항나무)–평광초등학교–평광지–모영재(신숭겸장군유허비)왕복-재바우농원(우리나라최고령 홍옥나무)-첨백당(광복소나무-평광종점정류장
(2009.09.개장/ 6~7km/ 소요시간 2시간 30분 내외) |
5코스
거북마을 가는 길 |
401,
팔공1(동화사 행) |
내동 건너 |
내동버스정류장-굴다리통과-내동보호수-추원재-성재서당-미대동 들녘-구암마을 한바퀴
(2009.10.개장/ 7~8km/ 소요시간 3시간 내외) |
6코스
단산지 가는 길 |
101, 101-1,
401, 급행1,
팔공1(평광동 행 제외) |
불로천주교회 |
불로동고분군공영주차장-고분군한바퀴-경부고속도로 굴다리-영신초중고 입구-단산지 -만보산책로-봉무동 마을길-강동새마을회관
(2010.04.개장/ 6~7km 소요시간 2시간 30분내외) |
7코스
폭포골 가는 길 |
급행1,
팔공1
(동화사방면) |
동화사
(동화사입구) |
탑골등산로-깔딱고개-상상골-동화사경내-폭포골왕복-동화사 봉황문
(2010.07.개장/ 7~8km/ 소요시간 3시간 내외) |
8코스
수태지 계곡길 |
급행1,
팔공1
(동화사방면 |
동화사 종점
(동화사집단시설지구) |
동화사 종점 정류장-수태골입구-수태골계곡너럭바위-부인사등산로-부인사-수태골입구-동화사종점정류장
(2010. 08 개장 / 7~8km / 소요시간 3시간 내외) |
9코스
야산 넘어 수태골 가는 길 |
급행1,
팔공1
(동화사방면) |
공산초등학교 |
팔공문화원-공산초등학교-야산둘레길1-마을길삼거리-야산둘레길2-자동차극장씨네80-수태골가는길-수태골 등산로-릉봉산계-급행 1번 종점
(2010.09.개장/ 9~10km/ 소요시간 4시간 내외) |
많이 활용하시고 건강한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 |
팔공산 올레길은 차후 시간나는데로 더욱 상세히 올리기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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